그라시안 신부 -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협조자 - (3)

작성자깃털|작성시간10.07.25|조회수314 목록 댓글 8

 

 천주의 모친의 그라시안 신부 (3)

그라시안 신부의 불명예

  

 

 그라시안은 ‘총장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행정력이 무능하다, 사생활이 부도덕적이다’ 라는 이유로 마드리드에 억류되었고 계속되는 심문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마침내는 가르멜 수녀와의 경솔한 관계를 시인하는 고백서에 날인하고 말았다. 1592년 2월 17일, 도리아는 참사회를 소집하여 그라시안을 공식적으로 맨발 가르멜에서 퇴출시키고, 성의를 벗기고 다른 수도회나 교구로 옮길 때까지 강론과 성사 집행도 금지시켰다. 그라시안은 어거스틴 수도회로 가라는 결정을 듣고 교황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로마로 가다가 터키의 해적에게 잡혀 튜니스에서 2년간 포로로 억류되었다.

 

(사진설명 : 18세기에 콜린이 그린 초상화로 감옥에 있던 모습을 상징함)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탄생

 

도리아는 개혁을 위하여 필립2세 교황과 카팔도 총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재정에 밝은 그는 재정을 튼튼히 하여 모든 수도원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그리고 그는 맨발 가르멜이 가르멜 수도회로 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가지도록 이끌어냈다. 1593년 크레모나 총회에서 맨발 가르멜은 가르멜 수도회로부터 완전 분리하게 되었고, 1593년 12월 20일 교황 크레멘트 8세 교황은 크레모나 총회의 결과와 ‘맨발 가르멜 수도회’라는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인준하였다. 그리고 다음 총회가 열리기까지 총장서리로 도리아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열리기 전 1594년 5월 9일 도리아는 서약식 주례차 알칼라로 가는 도중 갑작스레 병을 얻어 파스트라나 수도원에서 55세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파스트라나 수도원은 그라시안 신부가 청원자일 때 엄격한 안헬 원장으로부터 고통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도리아의 선종으로 맨발 가르멜 내의 분쟁은 모두 끝나게 되었다. 광포한 열대 태풍이 분 후에 갑자기 고요가 오듯이 거의 1/4세기 동안의 극심한 싸움 후에 가르멜의 개혁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도리아의 사망 2주 후에 마드리드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성 마르틴의 엘리야가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 당시 정황으로 보아 도리아 신부가 살아 있었으면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초대 총장이 되는 것은 거의 자명한 일이었다. 새 총장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온한 성격이며 그라시안과 함께 수련하고, 파스트라나와 톨레도의 수도원장과 카스틸리아 관구장을 지낸 관대하고 사려 깊게 직책을 수행한 수도자였다.

 

그라시안 신부의 구출

 

그라시안 신부는 터키의 해적에게 잡혀있는 동안 함께 있던 죄수들을 도우며 지내다가 전에는 사이가 나빴던 완화파 가르멜의 도움으로 1595년 구출되었다. 구출된 후 맨발 가르멜로 돌아가기 위하여 로마로 가서 클레멘트 8세 교황을 알현하였다. 이때 그라시안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도리아 신부를 비난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리아 신부는 신심이 깊은 거룩한 영혼이었다고 말하며, 맨발 가르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신의 열망을 말하였다. 그라시안의 모든 얘기를 들은 교황은 “이 사람은 성인이다”라고 말하고 가르멜 수도회로 부터의 퇴회 명령을 철회토록 하였다. 도리아는 이미 선종하였으나 스페인의 맨발 가르멜은 또 다시 분쟁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라시안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라시안은 바야돌리드에서 병석에 있던 어머니를 돌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벨기에의 브루셀 완화 수도원으로 갔다. 1596년 교황의 허락으로 완화 가르멜 수도원에서 살되 맨발 가르멜의 규칙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1600년부터 5년간 교황의 명으로 아프리카의 대희년을 선포하는 소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 후 그라시안은 아프리카 선교에 관심을 갖고 해외 선교를 담당할 특별 기구를 설치할 것을 교황에게 건의하였는데, 이에 1622년 교황청 포교성성이 생겼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스페인 관구는 엄률을 지키며 조용히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인 반면, 이탈리아 관구는 유럽 전역에 가르멜을 포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포교에 큰 역할을 하는 그라시안 신부를 보고 이탈리아 맨발 가르멜 수도회는 창립자 데레사의 협력자이던 그라시안을 영입하려 하였다. 이때는 스페인 왕 필립2세의 영향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공동체가 분리되어 서로 간에 전출입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그라시안은 이탈리아 공동체로 가면 다시는 스페인 공동체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라시안으로 부터 수준 높은 영성의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그의 글이 호평을 받자 장상들이 권유하여 그라시안은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606년 그라시안은 브루셀에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와 예수의 안나와 함께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저서 출판을 준비하였다. 성녀에게 ‘영혼의 성’을 집필하도록 하였고, 예수회 지도신부의 명으로 20장까지 썼던 ‘창립사’를 계속해서 쓰도록 하였던 그라시안 신부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들어서서는 성녀의 저서를 모아 출판토록 함으로써 성녀가 체험한 영성의 자산을 지금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고 있다.

 

 

바르톨로메오의 안나는 데레사 성녀가 팔의 부상을 입은 후부터 비서로 곁을 지켰으며 수녀원 창립에

항상 수행했던 분이다. 예수의 데레사는 그녀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데레사 서거 후 프랑스, 네델란드와 벨기에로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전파하다가 벨기에의 안트웝에서 1626년 6월 7일 선종 하였다. 1917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복녀품에 올랐으며 현재 성인 심사 중에 있다.  (오른편의 바르톨로메오의 안나의 상본 : 네델란드의 안토왑 해전때 복녀의 도움으로 무사함. 그 도시의 수호자를 상징함)

 

예수의 안나는 예수의 데레사가 베아스의 창립때 동행하여 그곳의 초대 원장이 되었고, 그라나다 창립을 위해 파견되기도 하였던 분이다. 오해로 예수의 데레사에게서 질책을 받기도 하였으나 성녀가 선종한 후 십자가의 성 요한의 도움으로 1586년 마드리드에 수녀원을 창립하였다. 그라나다 수녀원장일 때 십자가의 요한에게 ‘영혼의 노래’를 해설해 주기를 청하기도 했고, 데레사 성녀의 규칙을 수호하는 교황 교서를 받아낸 분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가르멜을 전하고 벨기에 브루셀 원장을 지냈으며 1621년 3월 4일 선종하였다. 선종 후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17세기 초에 시복 심사가 시작되어 1878년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예로니모 그라시안은 결국 스페인의 맨발 가르멜 수도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시복식이 있었던 해인 1614년 9월 21일 69세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1622년 예수의 데레사는 성녀로 시성되었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그라시안은 브루셀 가르멜 수도원에 묻혔었는데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격동기를 지나며 그의 유해는 여러 차례 옮겨졌고 이제는 어디에 모셔졌는지 알 길이 없다.

 

완화 가르멜의 투렌 개혁

 

그 후 17세기에 이르러 완화 가르멜 수도회 내에서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 삼손의 요한 수사가 앞장 선 투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 개혁은 데레사적 개혁과 같은 이상을 품은 엄률을 향한 개혁으로 완화 가르멜 수도회 정신에 스며들어 오늘에 이른다.

 

그라시안 신부의 시복절차 시작

 

맨발 가르멜의 초기 역사는 데레사 성녀의 개혁 가르멜을 독립 수도회로 이끈 인물로 도리아 신부를 평가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데레사 성녀의 휴머니즘과 공동체 정신을 도리아 신부의 율법주의로 부터 옹호한 인물로 그라시안 신부가 재조명 되고 있다.

 

1999년 12월 15일 총회 참사회는 명확하지 못했던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데레사 정신의 재정립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의 정의 실현을 공표하고, 그라시안 신부의 맨발 가르멜로의 복귀를 공표하였다. 이듬해에 로마의 추기경회는 천주의 모친의 그라시안 신부의 시복 절차를 밟을 것을 결정했고, 2005년 7월 1일 바티칸의 시복위원회는 시복을 위한 절차를 로마에서 시작할 것을 인준하였다. 거의 4세기라는 긴 세월이 걸렸지만 천주의 모친의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는 이제 본인이 원하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참고문헌 :

The Carmelites : A History of the Brothers of Our Lady of Mount Carmel, Joachim Smet, O.Carm

Journey to Carith, The Struggle for Existence, Peter‐Thomas Rohrbach, O.C.D.

Jerome Gratian ‐ Treatise on Melancholy, Michael Dodd, O.C.D.

Teresian Carmel, Pages of History, Ildefonso Moriones, O.C.D.

창립사, 성녀예수의 데레사 저

Traveling Companions on the Paths of the Carmel, Thomas Alvar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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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포도송이 | 작성시간 10.07.26 깃털님, 그 당시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는듯....잼 있게 잘 공부 했고요....감사 합니다.
  • 작성자작은꽃 | 작성시간 10.07.26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가르멜의 스승님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많은 생각이 오가네요. 모든 것은 다 제 자리를 찾는다 할까요.
    그렇게 원하시던 집으로 돌아오신 그라시안 신부님께서 이젠 성인들의 대열에 드실것을 기도 드리며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안에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로 오늘을 마감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작성자분향 | 작성시간 10.07.26 계속되는 심문에 마침내는 고백서에 날인하고 말았다.. 도리아의 선종으로 맨발 가르멜 내의 분쟁은 모두 끝나게 되었다..
    그라시안 신부는 터키의 해적에게 잡혀있는 동안 함께 있던 죄수들을 도우며 지내다가 완화파 가르멜의 도움으로 1595년 구출되었다..
    1606년 그라시안은 바르톨로메오의 안나와 예수의 안나와 함께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저서 출판을 준비하였다..
    맨발 가르멜의 초기 역사는 개혁 가르멜을 독립 수도회로 이끈 인물로 도리아 신부를 평가하기도 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데레사 성녀의 휴머니즘과 공동체 정신을 도리아 신부의 율법주의로 부터 옹호한 그라시안 신부가 재조명 되고있다.. 감사드립니다.. 깃털님..
  • 작성자아베마리아 | 작성시간 10.07.27 감사합니다. 갓털님 덕분에 그라시안 신부님를 조금 알았습니다. 돌아가셔도 원하시던 집에 다시 돌아오셔서 기뻐하시겠지요? 저도 함께 시복이 되시도록 기도중에 기억 하겠습니다.천상에서 어떤모습으로 사실까 궁금해 집니다. 지금에 와서 시복절차가 천상에서는 중요하지 않겠지만요.
  • 작성자해바라기 | 작성시간 10.07.28 잘 일었습니다..하지만 마음 한구석 뭐라 그래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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