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마태오 복음서는 수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 책이 신약성서의 맨 첫 번째 자리에 놓인 책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점차 조직화되어가는 교회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참된 제자상은 어떤 것이며 참된 형제애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올바로 처리하는 방향과 함께, 교회 존속의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의 존재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1. 저자
교회는 전통적으로 열두 사도 중의 하나인 마태오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마태오 복음서를 썼고, 이것을 후대의 누군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연구결과 마태오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와 저자 자신이 수집한 고유자료 등을 이용하여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씌어진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마태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독자
이 복음서의 저자는 유다교 풍습이나 분위기에 익숙한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복음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래서 유다교의 풍습이나 절기, 율법 등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할 때에도 독자들이 이런 것들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써내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이방인을 상대로 씌어진 다른 복음서들은 유다인들의 관습이나 용어에 생소한 독자들의 편리를 위해서 설명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독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습니다.
3. 집필장소
집필 장소로는 이스라엘과 인접한 지역인 시리아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로는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시리아 지역에서 100년경에 씌어진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마태오 복음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주교로 2세기 초에 순교한 이냐시오 역시 마태오 복음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이 책은 시리아 지방에서 집필된 것으로 봅니다.
4. 집필 연대
집필 연대는 위의 집필 장소에서 지적한 내용들을 참고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복음서가 70년경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상한 연대는 70년 이후로 잡습니다. 하한 연대는 마태오 복음서를 사용한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 100년경에 씌어졌고 이냐시오 성인이 2세기 초에 순교 했으므로 대략 100년경이 됩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가 80-90년경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5. 구조
전사(前史 1장1절-2장23절)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먼 과거를 전해주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님의 수태와 탄생, 동방 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신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활동 준비기(3장1절-4장11절)
공생활 서막에 해당되는 이야기로서 요한 세례자의 활약,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이야기 등이 포함됩니다.
갈릴래아 활동기(4장12절-18장35절)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에 있는 갈릴래아 호숫가 가파르나움에서 주로 행하신 공적 활동에 관한 보도입니다.
여기에는 5-7장의 산상설교, 7장 12절의 황금률, 8-9장의 기적 이야기들, 10장의 파견설교, 13장의 비유설교, 18장의 공동체 설교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상경기(19장1절-20장34절)
예수님이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까지의 일들을 엮은 내용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활동기(21장1절-28장20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부터 부활하셔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21-25장의 수난 전까지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부분과 26-28장의 수난부터 부활, 제자들의 사명부분입니다. 이 중 예수님의 수난 이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으로는 21-22장의 성전에서의 예수님, 23장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책망하는 유다교 단죄 설교, 24-25장의 종말 심판 설교 등이 있습니다.
6. 주요 집성문들
예수님께서 하신 비슷한 말씀이나 주제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집성문’이라고 합니다.
이 집성문은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집성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구분 |
집 성 문 |
단락 |
주 제 |
종결인용구
|
|
1 |
산상 설교 |
5-7장 |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늘 나라의 정의 |
7장28절 |
|
2 |
파견 설교 |
10장 |
“나는 너희를....보낸다” -제자 파견 |
11장1절 |
|
3 |
비유 설교 |
13장 |
“하늘 나라는 ...과 같다” -하늘 나라의 비유 |
13장53절 |
|
4 |
공동체 설교 |
18장 |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참된 형제애 |
19장1절 |
|
5 |
종말 심판 설교 |
24-25장 |
“깨어 있어라” -종말에 대한 설교 |
26장1절 |
|
6 |
기적 이야기들 |
8-9장 |
열 가지 기적 이야기
|
|
|
7 |
위선자에 대한 책망 |
23장 |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행실 비판 |
|
위의 집성문 가운데 1-5의 설교에는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 마치고 나서....하시게 되었다”는 결어, 즉 종결 인용구가 후렴처럼 붙어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종결인용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관성 있게 표현하는 한편, 이 다섯 가지 설교에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복음서 전체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다섯 가지 설교를 통해 옛 오경을 능가하는 새로운 토라, 즉 새 율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7.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론)
ㄱ. 예언의 성취자
신약성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말씀들을 성취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성취인용문을 10여 차례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유다교 예언의 성취를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예언과 성취 도식을 사용해서 우선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나아가서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옹호하고자 합니다.
ㄴ. 율법의 참해석자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5장17-18절 등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은 율법의 절대적 준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심화하기도 하셨지만 폐기하기도 하셨습니다.
여섯 가지 율법을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세칙 하나하나를 고수하도록 강조하시기보다는 율법의 원 뜻을 되살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율법 조문의 형식적인 고수가 아니라 율법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하느님의 뜻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은 제사나 십일조를 바치는 것보다 자비를 바라신다(9,13; 12,7; 23.23).
둘째. 율법은 황금률로 환원된다(7,12).
셋째. 율법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된다(22,37-40; 19,16-22참조).
ㄷ.그리스도(메시아), 다윗의 아들, 임금
그리스도(메시아)
복음서 저자가 유다계 그리스도교 율사이고 그가 속한 시리아 교회 신도들이 대부분 유다인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메시아)존칭에 당연히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란 말이 17번 나오는데 전사에 5번, 수난사에 4번 집중되어 있습니다.
1장1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일컬으며, 2장 4-6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므로 베틀레헴에서 탄생하십니다.
11장2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그리스도의 일들이며, 22장42-5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며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기에 이 예수님은 현상적으로 볼 때 실패한 메시아가 됩니다.
다윗의 아들(다윗의 주님)
이스라엘에는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존칭이 10여 번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인 요셉이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존칭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그분을 다윗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22장 45절에서 “다윗의 주님”이라고 합니다.
임금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과 상통하는 개념이 “임금”(왕)입니다. 이 존칭은 모두 8번 나오는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동방의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은 조롱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최고의회 의원들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며 놀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승에서는 놀림감이 됩니다.
그러나 종말 심판 때에는 25장 34절과 40절, 45절에서처럼 임금으로 오시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유일하게 마태오 복음서만 종말 심판관이신 사람의 아들(인자)을 임금이라고 합니다.
ㄹ. 아들, 하느님의 아들
이러한 표현은 21번 나옵니다. 1장21절, 23절, 25절에 나오듯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3장 17절의 세례와 17장 5절의 변모 때 하느님 친히 예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 소개의 말씀처럼 4장 3-10절, 26장39절과 42절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11장 27절과 18절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물려받으셨습니다. 14장 33절에서는 ‘제자들’이, 16장16절에서는 ‘베드로’가, 27장54절에서는 ‘백부장과 병사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 심문 때 26장63-64절에서 예수님은 ‘당신 친히’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가까운 존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임금, 의인 등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가까운 분이므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실 정도로 특별히 하느님과 가까운 아들이십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 역시 예수님은 하느님의 친아들이심을 말해줍니다. 이 친아들은 1장 23절의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28장19-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세 분이 같은 위치에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계셨듯이 아들인 예수님도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8.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교회 공동체
ㄱ. 교회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의 복음서’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교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들 중 유일하게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16장18절과 18장17절에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자렛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참 메시아시고,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마태오 복음서는 참된 제자 상, 참된 형제애, 교직자, 교회의 일 처리 방향 등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과 더불어 교회의 내적 본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해석하고 보호할 교회, 28장19-20절의 말씀대로 전 세계로 나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교회를 더욱 굳건히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강조하듯 교회는 어떤 규정이나 베드로에게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항상 현존하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오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역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1,23; 18,20; 28,20참조).
ㄴ. 교직자
저자가 소속된 시리아 교회는 베드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율사와 예언자들이 활동했습니다.
베드로:
16장 17-19절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매고 푸는 권한을 받습니다. 이 권한은 윤리적 결정권과 교회 규범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권한은 교회 공동체의 의사를 수렴하는 방식으로 행사됩니다. 베드로는 교회 일치와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율사:
베드로 다음으로 13장52절, 23장34절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교계 율사들이 있습니다. 마태오 교회에서는 13장52절과 5장21-48절의 말씀대로 전통적인 유다교 율법과 예수님께서 새롭게 풀이하신 율법 해석을 다 익힌 사람, 그리고 구약의 메시아 예언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예언이 실현된 사실을 익힌 사람에게만 그리스도교계 율사의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도 그리스도교계 율사였을 것으로 봅니다. 이들 율사들이 그리스도교 예언자들과 함께 유다인들에게 박해받았다는 이야기가 23장34절에 나옵니다.
유다교에서는 율사들을 ‘선생, 사부,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교 율사들도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23장8-10절에서 이런 관행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23장11-12절과 20장25-28절 등에서 이런 직책은 봉사직이니 만큼 겸손하게 직무를 수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
1세기 시리아 지방의 교회에 유랑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록과 마태오 복음서, 100년경에 씌어진 <열두 사도의 가르침>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이들은 10장47절에서도 비추듯 가족, 재산,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면서, 7장22절에서처럼 예언, 구마, 치유 활동을 하다가, 5장11-12절, 23장34절과 37절에서처럼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7장15-23절과 24장11절을 보면 이들 중에는 참예언자도 있었고 거짓 예언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ㄷ. 교회의 사명
28,16-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재림 이전의 때를 예상하시고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최후 명령을 내리십니다. 계시는 주어졌으며 제자들은 여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교회를 조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사명으로 받은 이 지상명령이 마태오 복음서의 절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배워왔던 새로운 계시를 가르치고 해석하도록 위임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회의 능력과 권위는 교회 가운데 부활하여 계시는 주님의 현존에 근거합니다.
전사(前史 1-2장)
활동 준비기(3-4장11절)
마태오1장1 - 4장11절은 크게 예수님의 전사와 활동 준비기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전사와 유년기를 다루는 마태1-2장에는 예수님의 족보, 수태와 탄생, 동방 박사들의 예방, 이집트로의 피신, 나자렛 정착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
저자는 마르코 복음서를 자료로 이용했는데 1-2장의 유년기 이야기는 눈에 띄게 마르코 복음서를 벗어나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을 완성하고 성취시키는 분이심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1-2장에는 성취인용문이 1장22-23절과 2장 5-6절, 15절, 17-18절, 23절 등 무려 5개나 집중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활 서막에 해당되는 3-4장11절에서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 즉 시련의 내용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사(前史 1-2장)
1. 1장=예수님의 전사
2. 2장=예수님의 유년기
활동 준비기(3-4장11절)
1. 3장=예수님의 세례
2. 4,1-11=광야에서 유혹 받으심
전사(前史1-2장)
1. 예수님의 전사(1장)
ㄱ. 예수님의 족보(1,1-17)
1장1절의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기원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이 복음서의 전체 제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구약을 통해서 유다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족보를 유다 민족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또 메시아는 다윗 가문에서 탄생하리라는 예언(2사무7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족보는 다윗 가문 중심으로 짜여집니다.
이 족보를 통해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의도적으로 14대씩 나누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역사를 면밀히 계획하셨고, 때가 되어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조상들은 성실한 임금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은 불충실한 임금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유다 민족의 무질서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며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선조들의 경우처럼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그냥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서 탄생 되셨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족보에는 마리아 외에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은 윤리적으로 출중한 편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남편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여인들을 내세워서 윤리적인 비판이 아닌 오히려 단절 되려던 가계가 하느님의 섭리로 인해 극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1절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창세17,4)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ㄴ. 예수님의 탄생(1,18-25)
저자는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대로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메시아이심을 밝혔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다윗 가문에 속하게 되는지를 좀더 자세히 풀어가고 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인 요셉은 자신과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았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를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합법적으로 다윗 가문에 속하게 됩니다. 다윗 가문에 속하신 예수님이시지만 그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면서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실 위대한 분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 즉 구세주로 오시는 분입니다.
이어 또 마리아의 동정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인간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2. 예수님의 유년기(2장)
ㄱ. 동방 박사의 방문(2,1-12)
예수님은 다윗의 고을인 베틀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방인인 동방 점성가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헤로데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 시민들은 이 탄생 소식에 당황을 금치 못합니다. 사실 13-18절에서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마태요 복음서 저자는 이방인과 유다인의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주의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인 대다수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고 부활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기에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 넘어갈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ㄴ. 이집트로의 피신과 귀향(2,13-15;19-23)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구약의 출애굽 주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옮겨 살게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이집트에서 나자렛으로 옮겨 살게 하셨습니다.
ㄷ.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함(2,16-18)
헤로데 왕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베틀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라헬은 야곱의 아내로 베틀레헴에 묻혔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조가 멸망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유배갈 때 베냐민 부족도 끌려갔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의 어머니였으므로 이 때문에 라헬이 무덤에서 통곡한다는 말을 합니다.
저자는 헤로데 왕이 베틀레헴에 사는 아기들을 학살하자 이 라헬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베틀레헴(라마)에 묻힌 라헬이 통곡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활동준비기(3-4장11절)
1. 예수님의 세례(3장)
ㄱ. 요한 세례자의 출현(3,1-12)
저자는 요한 세례자를 예수님의 직접적인 선구자로 봅니다 요한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3,2; 4,17).
즉 하느님이 통치하실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지금까지 하느님과 등지고 살던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2ㄴ-3절에서 요한의 이 일도 역시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낙타 털옷, 가죽 띠 등의 요한의 옷차림은 구약 시대의 아합 왕 때 활약했던 엘리야의
옷차림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미리 와서 준비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말라3,23-24; 집회48,10-11).
저자는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그 엘리야가 요한 세례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이를 거부하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더 강하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신발을 들 자격조차 없다며 예수님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발을 들고 다니는 것은 종이 주인을 섬기기 위해 하는 천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의 알곡과 쭉정이 이야기는 25장 31-46절의 최후 심판 때 악한 자로부터 선한 자를 분리시키는 양과 염소 이야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ㄴ. 세례 받으심(3,13-17)
요한 세례자는 27년경 요르단 강에서 세례 운동을 폈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래아 나자렛
동네를 떠나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을 듬뿍 받아 나자렛 생활을 마감하시고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 세례 베푸는 것을 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11절의 말처럼 예수님은 자신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고 또한 무죄하시므로 6절에서처럼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명하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함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늘과 땅이 상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로 맺어지고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 오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모든 일을 하며 사시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예수님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15절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실 분임을 천명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유혹 이야기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시고 그분만을 섬기실 분입니다. 또한 야훼의 종과 같은 삶, 즉 묵묵히 고난당하시고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메시아의 삶을 사실 분입니다.
2. 광야에서 유혹받으심(4장1-11절)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을 상속받기 전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련을 받으며 하느님의 시험을 거친 것처럼,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련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올곧게 나아가셔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십니다. 세례받으실 때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임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며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의지를 다지십니다. 그리고 유혹하는 자는 악마, 사탄으로 세상의 지배자입니다.
악마는 세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을 시험하나 실패하고 물러갑니다. 이제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이는 음식 시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시장하셨을 때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드는 기적을 하시지 않은 대신에 천사들이 주는 음식, 즉 하느님이 주시는 음식으로 허기를 면하십니다.
갈릴래아 활동기
(4장12절-9장)
들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공생활을 전개하시는 갈릴래아 활동기는 4장12절-18장까지입니다.
그 중에 먼저 4장12절-9장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4,12-25절에는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전개하시며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5-7장의 산상설교에는 황금률, 여섯 가지 율법의 심화 및 폐기, 참된 자선, 기도, 단식, 산상 설교의 실천과 경고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9장에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한데 모아놓은 기적사화 집성문이 이어집니다.
갈릴래아 활동기(4,12-9장)
1. 4,12-25:하늘나라 선포 시작. 활동 요약
2. 5-7장:산상 설교
3. 8-9장: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는 열 가지 기적사화
1. 하늘나라 선포 시작, 활동 요약(4,12-25)
ㄱ. 갈릴래아 전도 시작(4,12-17)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가셔서 첫 설교를 하셨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은 같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활동이 중지되자 예수님께서 활동을 개시하십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요한이 선포했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이 체포되었듯이 예수님도 체포되실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북부 이스라엘을 장악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고 그곳에 이방인들을 이주 시켰기 때문에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렸습니다.
큰 빛이신 예수님은 이방인의 갈릴래아 지역, 즉 어둠 속에 사는 백성,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은 이방인에게 베푸실 구원 혜택을 예고해 줍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설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저자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33번,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을 4번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데 비해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뜻은 같으나 복음서 저자는 주 독자층인 유다인들이 경외심에서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합니다.
하늘나라는 역사의 종말에 하느님 친히 임금으로서 다스리심을 뜻합니다(하늘나라=하느님 나라=하느님의 다스리심).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뿐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께로 되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를 가르치셨고, 기적으로 하늘나라의 구원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ㄴ.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4,18-22)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시자 그들이 만사를 제쳐두고 즉각 따라나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소명과 추종의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삶을 터득하고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마침내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10,38)고 하시며, 또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16,24). 라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19절의 “나를 따라 오너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의 선포자로 삼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ㄷ. 첫 전도 여행(4,23-25)
23절의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은 예수님의 활약상을 집약하는 말씀입니다.
가르침과 선포가 함께 말씀 선포로서 5-7장에서 다루어지며, 치유의 구체적인 사례는 8-9장에 전개됩니다. 저자는 같은 요약을 9장35절에서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분을 따릅니다.
2. 산상 설교(5-7장)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산 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이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았던 것처럼(출애19-24장) 예수님도 산 위에서 참 행복을 선언하신 다음 율법의 참뜻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산 위에서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하여 산상 설교라고 합니다.
이 산상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산상 설교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해당되는 내용은 산상설교의 첫 부분인 5장3-12절의 “참된 행복”, 중간 부분인 6장9-13절의 “주님의 기도”, 그리고 끝 부분인 7장21-27절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율법의 참 뜻에 해당되는 내용들입니다.
ㄱ. 행복 선언(5,3-12)
마태오 복음서에서 선언한 행복은 실제로는 아홉 가지입니다(11절이 포함).
“행복하다”함은 하느님께 복을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참 행복은 현실 자체는 비참해도 미래의 희망, 즉 종말 축복 때문에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께 최상의 가치를 두기에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이와는 달리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했고, 사두가이들은 제의를 준수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참뜻,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5,20)고 하심으로써 율법 세칙이나 따지는 바리사이들보다 높은 수준의 의(義)를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전능 안에서 언젠가 실현될 일이 이미 오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종교 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경건주의적인 복종이나 특수한 계층이 찬양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난 그 자체만도 신성시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약속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약속 안에서 하느님을 필요로 하며,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약속 안에서 행복합니다.
ㄴ. 소금과 빛의 상징(5,13-16)
소금과 빛의 상징은 제자들의 특별한 위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에 어두움을 비추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산상 설교의 가르침대로 살 때 가능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늘나라의 가치로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5-16절의 등불의 상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예수님 자신의 신상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등불의 상징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라도 달아나거나 숨을 생각이 전혀 없으며 계속 드러나게 활동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ㄷ. 율법의 완성(5,17-20)
예수님은 율법을 존중하시며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이 풀이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풀이하신 율법이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보다 넘치는 의로움이란 예수님이 풀이하시면서 밝혀 주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산상 설교 전체이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5장21-48절에서 여섯 가지 율법을 제시하시면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원래 목적과 의도에 못 미치는 율법의 경우는 보충 심화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경우는 폐기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신성불가침적인 율법을 이렇게 비판하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전권의식(全權意識)을 볼 수 있습니다.
ㄹ. 여섯 가지 율법의 완성(5,21-48)
예수님은 여섯 가지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살인과 간음에 관한 옛 율법을 더욱 심화하셨으며, 이혼장을 통한 이혼, 맹세, 보복, 원수를 미워하라는 옛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옛 계시와 새로운 계시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
단락 |
율법완성 |
내 용 |
|
21-26절 |
성내지 말라 |
<심화> 살인은 말할 거소 없고,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 욕설하는 것조차 금함 |
|
27-30절 |
간음하지 말라 |
<심화>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조차 금함. |
|
31-32절 |
이혼하지 말라 |
<폐기> 이혼과 소박을 아예 폐기하심 |
|
33-37절 |
맹세하지 말라 |
<폐기> 맹세 자체를 폐기하심 |
|
38-42절 |
보복하지 말라 |
<폐기> 동태복수법을 폐기하심. 악한 자와 맞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의 요구도 들어줌으로써 악을 선으로 갚게 하심 |
|
43-48절 |
원수를 사랑하라 |
<폐기>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폐기하심. ‘원수’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종교적 차 원의 원수들도 포함됨.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기까지 사랑하라 하심. |
ㅁ. 참된 자선. 기도. 단식. 주님의 기도(6,1-18)
산상 설교의 가운데 위치한 이 부분에는 자선과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의 교훈이 실려 있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유다교 신앙을 나타내는 표지이자 중요한 신심행위였습니다.
1절은 세 가지 신심 전부를 포괄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자선. 기도. 단식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들은 특히 이 세 가지 신심을 강조 했습니다.
세 가지 신심에 관한 가르침은 각기 주제만 다를 뿐 분량과 형식과 내용이 같습니다. 형식 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세 주제에서 모두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라고 천명하십니다. 내용은 위선자처럼 하지 말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면 공은 없어지므로 선행을 숨길 것, 그리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하는 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23장에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탄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에 “주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보면 이방인들이 하듯이 많은 말을 되풀이하며 하느님을 귀찮게 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기도로서 일곱 가지 청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청원으로는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이렇게 세 가지가 나오며, 이어 나오는 네 가지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창원으로서 우리의 빵, 우리의 잘못에 대한 용서, 우리의 유혹, 우리의 악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의 순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가르쳐줍니다. 먼저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면서 이미 오신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우리가 처한 나날의 삶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꾸려가길 원하는 자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도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ㅂ. 하느님과 재물(6,19-34)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 즉 의로운 사람은 재물을 지상에 쌓아 두지 않습니다. 재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25,31-46참조).
그리고 우리의 몸에서 눈이 등불 역할을 하듯이 마음의 빛, 즉 심안이 밝아야 하느님의 계시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밝게 살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재물은 현실적으로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인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그 다음에 일상사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시고 배려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재물에 사로잡힐까봐 재물을 온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셨고, 일반 청중에게는 기꺼이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ㅅ. 의로움에 대한 다양한 격언들.
산상 설교의 실천과 경고(7,1-29)
7장은 12절을 기점으로 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곧 1-12절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다양한 격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13절부터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인 산상 설교의 실천과 경고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1-5절에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판단은 단죄를 뜻합니다.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으므로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들보, 즉 큰 허물에 대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6절에서는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진주처럼 귀하고 거룩한 복음을 무례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11절에는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청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의 기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는 황금률이 나옵니다. 말씀이 황금처럼 귀하다 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킬 때 자주 ‘율법서와 예언서’로 지칭합니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황금률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구약성서 전체를 포괄하는 내용으로는 22장34-40절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전체는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에 따라서 세부적인 지침들이 풀이될 수 있습니다.
13-14절에는 생명의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요구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길은 험하고 문은 좁아서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편하고 넓은 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15-27에서보면 초대교회에서는 떠돌아다니며 전교하던 예언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행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니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튼튼히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 큰물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유다교에서는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공부, 율법 실천을 강조했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들, 즉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3.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는
열 가지 기적사화(8-9장)
5-7장에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셨고, 이제부터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제 8-9장에서 열 가지 기적 이야기를 모아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제자직에 관한 말씀이 섞여 있습니다. 열 가지 기적 이야기 중 아홉 가지가 치유 기적입니다.
ㄱ. 나병환자를 고치심(8,2-4)
이스라엘에서는 온갖 피부병을 나병으로 간주 했습니다.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전염의 우려와 종교의 부정 때문에 사람들과 격리되어 생활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제관에게 인정받은 다음 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레위13-14장 참조).
ㄴ.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심(8,5-13)
율법은 유다인이 이방의 집에 가는 것을 금했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저 예수님의 한 마디로도 치유가 가능하다는 강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믿음이 없는 유다인들을 단죄하시고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ㄷ. 베드로의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심(8,14-17)
이어서 베드로의 장모와 더불어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치유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서 53장 4절에 예고된 대로 ‘야훼의 종’이 할 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ㄹ.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8,18-22)
율법학자들은 자기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떠돌아다니면서 사시고 가르치셨는데 제자들에게도 당신과 같은 삶, 즉 인간적인 안일을 일체 버리는 철저한 추종을 요구하십니다.
또 장례이야기가 나오는데, 장례는 유다인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요구를 모르는 자를 죽은 자로 보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당신을 따르는 것이 장례를 치루는 일보다 시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ㅁ. 풍랑을 가라앉히심(8,23-27)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시키는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극한 상황에 처하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주님은 묵묵히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제하시는 분입니다.
ㅂ. 가다라의 미친 사람을 고치심(8,28-34)
가다라 지방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있던 사나운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피해 다녀야 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발붙일 곳조차 찾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사탄(악)의 세력이 물러감을 의미합니다.
34절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위력에 크게 두려워합니다.
ㅅ. 중풍병자를 고치심(9,1-8)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 속에 율법학자들과의 사죄권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5-6절에서도 볼 수 있듯 중풍병자를 낫게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일에 비하면 지극히 하찮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 기록된 군중의 반응처럼 죄를 사하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한을 지니신 분입니다.
ㅇ. 마태오를 부르심(9,9-13)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오를 부르신 이야기에서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죄인에게 애정을 쏟으시는 13절의 말씀이 돋보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이기 때문에 유다교를 올바르게 믿으려면 세관원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동시에 죄인들과 가까이 하면 그 자신도 종교적으로 부정해 진다고 믿은 유다인들은 죄인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십니다. 고대 근동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신뢰와 형제애(평등성)를 나누는 것으로, 죄인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룸은 그들에게 커다란 존경과 예우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깨끗하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극히 못마땅해 했습니다.
ㅈ. 단식논쟁(9,14-17)
단식에 대한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은 강하고 혁신적이어서 율사들의 나약하고 구태의연한 율법 해석과 어울릴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ㅊ. 다른 기적들(9,18-34)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기적,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기적, 소경을 고치신 기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강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한 말씀 하시면서 손을 잡으시자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소경의 눈을 만지시자 눈이 열립니다.
이런 기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위력, 즉 하느님의 힘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벙어리를 고치신 이야기에서 바리사이들은 사탄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 것이라고 악의적인 해석을 합니다. 같은 기적을 보고도 군중과 바리사이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ㅋ.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9,35-38)
이 대목은 8-9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저자는 35절에서 예수님의 활약상을 다시 한번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36-38절에서는 10장에 나올 파견 설교를 예고합니다.
여기서 “추수할 일꾼”이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할 일꾼을 말합니다.
갈릴래아 활동기(10-13장)
저자는 10장에 제자 파견에 관한 말씀들을 모아서 파견 설교 집성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1-12장에서는 새 계시자로서 하느님의 친밀함과 편안함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이자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그리스도론)와 함께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간의 논쟁이 엮어집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성격을 밝히는 것들로서 저마다 하느님 나라의 한 측면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10장=파견설교
2. 11-12장=예수님의 정체와 논쟁
3. 13장=비유 설교
1. 파견 설교(10장)
ㄱ. 열두 제자 파견(10,1-5)
열두 제자의 명단이 제시되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마와 치유의 권능을 부여해주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를 모으셨다고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새 백성을 모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둘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5-6절의 말씀에는 매우 독특한 저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상대로 전도하셨다고 합니다. 간혹 백부장의 종처럼 이방인들을 고치시기도 했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28,19절에서처럼 부활하신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이방인 전도를 명하십니다.
이 5-6절에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도 이방인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8절에 보면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거져 받았으므로 거져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여장은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합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마련해주실 것이라 믿고, 전도에만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ㄴ.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17-20절과 23절 등에 초대교회의 전도사들이 유다인들의 회당과 의회에서 또 총독이나 로마제국이 임명한 지방 임금 앞에서 겪은 박해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박해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신다는 위로의 말씀도 나옵니다. 또한 24-25절의 격언은 전도사, 즉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마땅히 박해와 죽임을 당하기 마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ㄷ. “두려워하지 말고 증언하라”(10,26-33)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익힌 말씀을 공공연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승의 생명만 죽이는 세력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이승의 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까지도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을 종말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서 보증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ㄹ. “칼을 주러 왔다”(10,34-39)
예수님을 따르다보니 제자들도 가정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셈입니다.
이것은 21절의 박해상황을 전제로 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애나 가족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추종은 십자가 추종이며 마침내는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추종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이승에서 목숨을 잃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 계속됩니다.
ㅁ. “맞아들이는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10,40-42)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가치기준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작은이들 이지만 예수님의 대리자이기에 하느님의 대리자가 됩니다. 이 작은 이들을 영접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아끼시는 귀한 존재들이자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2. 예수님의 정체와 논쟁(11-12장)
ㄱ. 요한 세례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1,2-6)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로 답변하시며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십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믿으면 행복하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ㄴ. 요한 세례자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11,7-19)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극찬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오기로 예언된 엘리야라 말씀하십니다.
16-17절의 장터에서 노는 어린이들의 비유는 이 세대가 고행자인 요한도 배척하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도 배척함을 말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도 움직여볼 수 없는 완고한 세대를 통탄하십니다.
ㄷ. 세 도시에 내려진 심판(11,20-24)
예수님은 갈릴래아, 코라진 ,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에서 힘써 전도하셨지만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은총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선언됩니다.
ㄹ. 아버지께 드린 아들의 감사기도(11,25-27)
여기서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은 율법을 알고 지키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입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그들과는 반대로 율법을 알지 못하므로 당연히 지키지도 못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치부되며 비난받고 저주받은 사람들, 철부지 어린이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처럼 작고 어리석은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그 선포자는 같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버지의 덕분이라 하시며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ㅁ. 초대의 말씀(11,28-30)
무거운 짐은 유다교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자는 옛 계시의 무거운 짐과 새 계시의 편안함을 대조시키며 우리를 새 계시에로 초대합니다.
이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제시됩니다.
ㅂ. 안식일 논쟁(12,1-14)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의 안식일 논쟁이 두 번에 걸쳐 벌어집니다. 첫 번째 논쟁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을 계기로 그것을 노동으로 여겨 벌어지고, 두 번째 논쟁은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당장 숨이 넘어가는 것도 아닌데 안식일에 고쳐 주셨다 하여 일어납니다.
5-8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으신 분이며 안식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또한 안식일법보다 사람을 아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ㅅ.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님(12,15-21)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예수님, 곧 야훼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성취인용문을 통해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훼의 종은 조용하고 온유하며 자비로운 이방인의 구원자로 부각됩니다.
ㅇ. 베엘제불과 성령(12,22-32)
구마 이적을 놓고 군중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반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힘을 빌어 치유한다고 비난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영, 즉 하느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추방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활약으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됨과 동시에 사탄의 통치가 끝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종말 통치가 힘차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귀신이 씌었다고 모함하는 것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ㅈ. 말과 마음(12,33-37)
33절의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귀신이 씌어서 행하는 것이라 혹평하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나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탄핵하십니다.
ㅊ.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 악령 재침 경고(12,38-45)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권능을 입증할만한 기적을 요구하자 거절하시며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요나나 솔로몬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어 되돌아온 악령에 관한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유다교의 처지가 더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ㅋ.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12,46-5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 즉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새로운 가정, 즉 하느님의 가정을 형성합니다.
3. 비유 설교(13장)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 일곱 가지 중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일반 군중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며,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ㄱ.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13,1-9. 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농부가 유실되는 씨앗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백, 60배, 30배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농사를 짓듯이, 예수님도 당신을 떠나는 제자들이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엄청난 희망을 걸면서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비유의 설명”은 초대교회에서 내린 우의적 해석입니다. “씨”는 복음을, “땅”은 복음을 듣는 청중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말씀하신 의도와는 많이 달라진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3,10-17)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대한 의문을 이사야 예언서 6장9-10절을 인용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 특히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어 복되다고 합니다.
ㄷ. 가라지의 비유(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는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는 교회의 실상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선인과 악인을 가리는 일은 악인을 가려내다가 선인이 다칠 수 있으므로 하느님의 종말 심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라지 비유 설명”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우의적으로 풀이한 내용입니다.
ㄹ.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13,31-33)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의미가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이미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새들이 앉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고,
적은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온톤 부풀려 엄청난 인원이 먹을 빵을 만들 듯 하느님 나라도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종말에는 커다란 위력을 드러내리라는 말씀입니다.
ㅁ. 군중에게 비유로 설명하심(13,34-35)
저자는 군중을 상대로 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 설교를 마감하면서 성취인용문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ㅂ.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13,44-51)
“보물과 진주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의 처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매료된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나라의 선포와 구원에만 힘쓰게 됩니다.
“그물의 비유”는 종말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적 비유입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올려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먹지 못하는 고기를 가려내듯이 인자도 최후 심판 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려내어 선한 사람에게는 영생을 악한 사람에게는 영벌을 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ㅅ. 그리스도교계 율사들에 관한 말씀(13,52)
이는 그리스도교계 율법학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비유의 결론이자 절정입니다.
그리스도교계 율사들은 옛것인 구약성서와 율법 그리고 새 것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다 익힌 자로서 예수님의 언행에 비추어 구약성서와 율법을 풀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ㅇ.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심(13,53-58)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배척당하신 이야기입니다. 동향인들은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도 그분을 목수의 아들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은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활동기(14-18장)
갈릴래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14장-17장에서는 기적 이야기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이야기, 두 차례의 수난 예고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8장은 참된 형제애와 공동체에 관한 설교를 모아놓은 집성문입니다.
1. 14-17장=요한 세례자의 죽음 후
갈릴래아에서의 활동들
2. 18장=공동체 설교
1. 요한 세례자의 죽음 후
갈릴래아에서의 활동들(14-17장)
ㄱ. 요한 세례자의 죽음(14,1-12)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는 공주의 춤 값으로 참수되었다고 전해줍니다.
이는 요한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시로 제시합니다.
ㄴ. 오천 명을 먹이심(14,13-21)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전해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마르6,30-44; 루가 9,10-17), 15장32-39절에 나오는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마르8,1-10), 그리고 요한 복음 6장 1-5절에 나오는 이야기 등이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위대한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과 적은 양일지라도 나누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줍니다. 또한 수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미사의 풍요로움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권능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ㄷ. 물 위를 걸으심.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심(14,22-36)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나다”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실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출애3,14).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다’ 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는 동안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의심을 품자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결같은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33절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16,16절에서 베드로, 27장54절에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백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신 행적이 짧게 제시됩니다.
ㄹ, 유다인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15,1-20)
예수님께서 정결법, 코르반법 등은 유다인들의 전통과 인간의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11절과 17-20절에서 몸을 씻고 음식을 가리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고, 4절에서 구약의 인용을 통해 인간의 계명인 코르반 법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의 법인 효도를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3-6절에서 예수님은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를 악덕으로 보십니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9절에서 이사야의 예언(29,13)을 인용해서 하느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계명을 가르치는 비행을 꾸짖으십니다.
또한 14절에서 바리사이들을 율법의 세칙은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율법의 참뜻은 저버리는 눈먼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ㅁ. 이방 여인의 믿음과 치유 기적 이야기들(15,21-31)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평소에 예수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활동하시고, 28장 191-20절 말씀처럼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이방인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소신 때문에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이방인 여인의 요구를 거절하십니다. 26절의 “자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빵”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강아지”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비와 구원을 간청하는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시며 자비를 베푸십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외국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돌아오신 여정을 짧게 기록한 후 갖가지 병들을 치유해주셨다는 집약문을 제시합니다.
ㅂ. 유다인들의 표징 요구와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계(16,1-12)
예수님은 불신으로 기적을 요구하면 단호히 물리치시고, 믿음으로 구마 또는 치유를 청하면 들어주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로는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특별한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활약이야말로 하느님의 종말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임에도 3절에서처럼 이를 간파하지 못하는 그들을 나무라시며 그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은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하도록 경고하시는데 이는 당신(하느님의 뜻)의 가르침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ㅅ. 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
14절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세 가지 견해와 16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엮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이고백은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17장54절의 백부장과 병사들의 고백과 내용이 같습니다.
17-19절의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17절의 행복선언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믿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교회 창립의 약속,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과 메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네 복음서를 통틀어 “교회”라는 낱말이 꼭 두 번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여기에서 처음 나오고, 18장17절에서 한 번 더 나오고 있습니다.
ㅇ. 첫 번째 수난 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16,21-28)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고 부활하시리라고 이 부분과 17장22-23절; 20장17-19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이라 하시며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당하고 부활하심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핵심적으로 선포된 우리 신앙의 핵심주제입니다.
이어 ‘제자들’은 열두 사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를 지칭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추종하려면 자아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하십니다.
부활보다 십자가 추종이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부요하다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지금의 삶도 영생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엘리야 재림 논쟁(17,1-13)
‘엿새,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명의 동반자, 산, 구름 속에서 들리는 하느님 말씀’등은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저자는 이런 복선을 깔고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분임을 암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하신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표현들은 묵시문학의 종말론적 소재로서 예수님이 종말을 앞당겨서 사신 종말론적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다는 민간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는 천상적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야훼의 종과 같은 인물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이룩하실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 엘리야 예언자는 승천한 분으로서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미리 와서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말라3,1. 23).
그런데 유다교인들은 11장14절에서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엘리야인 요한 세례자는 일찍 참수되었으므로 엘리야일 수 없으며, 따라서 엘리야 이후에 올 메시아도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고난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ㅊ. 간질병자 소년을 고치심.
두 번째 수난예고, 세금을 바치심(17,14-27)
이 대목에서는 믿음의 위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약함을 꾸짖으시며 믿음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수난예고는 16장 21-23절의 첫 번째 예고보다 간략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살리십니다.
세금이야기는, 20세가 넘은 유다인 남자들은 누구나 1년에 한 번 은전 반 세겔씩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물고기 입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몫으로 은전 1스타테르가 발견되는 기적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비유로 이를 설명합니다. 곧 왕이 왕자에게 세금을 거둬들이지 않듯이, 더 더욱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인 예수님과 아들의 제자들에게 성전세를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양심에 꺼릴 것이 없지만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세금을 내십니다.
2. 공동체 설교(18장)
18장은 교회 공동체에 관한 설교만을 모은 집성문으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참모습,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 찬된 형제애 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런 내용들 때문에 18장은 교회의 규범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ㄱ.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18,1-5)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고,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며 겸손을 촉구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5장20절, 7장21절, 11장25절,19장23-24절을 참조하면 도움이 됩니다. 5절에서는 소외된 이들을 아끼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린이, 불쌍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이 말씀은 굶주리고 헐벗고 소외된 사람에게 베푼 선행이 곧 당신께 한 선행이라 하신 25장35-40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ㄴ. “작은 이들을 넘어지게 하지 말라”(18,6-9)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말하는 똑똑하고 잘난 이들이 아니라 한마디로 작은이들로서 예수님을 따르던 못난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이들 중 하나라도 그리스도 신앙을 잃고 멸망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8-9절에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ㄷ.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8,101-4)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고 염려하시므로 교회 공동체는 이들을 겉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이들 같지만 하느님께서 돌보고 계시기 때문에 귀한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작은이들, 미천한 교우들 중 한 사람이라도 길을 잃고 있으면, 즉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으면 그가 멸망하지 않도록 모든 교우들, 지도자들이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강한 구원 의지를 역설하십니다.
ㄹ. “형제가 죄지으면 고쳐주라”(18,15-18)
이 부분은 저자가 속했던 시리아 지역 교회의 규범으로서 교회와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우가 잘못을 저지르면 형제적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18절의 이 말씀은 16장19절의 말씀을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ㅁ. “둘이 함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18,19-20)
하느님께서 개인의 청원기도보다 공동의 청원기도를 더 기뻐하시는 이유는 기도하시 위해 함께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현존하시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야훼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까지 항상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시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러 모여 있을 때 현존하십니다.
ㅂ.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라”(18,21-22)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간의 화해를 위한 법규입니다.
ㅅ.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3-35)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베푸십니다. 33절 말씀처럼 하느님의 이 무한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의 작은 허물을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이 비유에서는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간의 비정함이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당시 노동자가 20여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액입니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는 계산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35절의 말씀은 남을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6장 12절의 주님의 기도를 참조하면 좋습니다.
저자는 21-22절에서 이미 언급한 공동체의 화해 법규를 강화하기 위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상경기(19장-20장)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 행하셨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르코 복음서의 자료를 거의 원용하면서 제자직에 대한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19장10-12절의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20장1-16절의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특수사료입니다.
19장-20장: 제자직에 대한 교훈
1. 제자직에 대한 교훈 1(19장)
ㄱ. 이혼 논쟁,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19,3-12)
19장 3절부터는 예수님의 결혼관이 드러납니다. 유다교의 율법에 의하면 아내한테서 수치스런 일이 발견되면 이혼장을 써주고 소박할 수 있었습니다(신명24,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의 원초적인 뜻에 따라(창세1,27; 2,24)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죽음이 갈라놓은 경우가 아니면 재혼도 안 됩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서는 왜 이혼장을 써주고 소박하라고 했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음행한 까닭”이라는 예의 규정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저자가 소속된 교회의 소박법이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10-12절은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나라 때문에, 즉 하느님께 매료되어 자유로운 결단으로 독신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ㄴ. 어린이를 사랑하심(19,13-15)
하늘나라는 어린이들이 차지합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못나고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작은 이들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하늘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시는 선정(善政)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행복 선언 중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벌어먹지 못하고 의지하며 받아서 먹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공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운 자비를 어린이와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고 회개함으로써 얻어집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공덕, 즉 선행보다 앞선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ㄷ. 재물에 관한 가르침(19,16-30)
이 대목에서는 재물에 관련된 주제가 다루어집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 즉 하늘나라에 대해 질문합니다.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젊은이에게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했는지 확인하십니다. 특별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관점이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기특하게도 부자 청년은 십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이를 갸륵하게 여기신 예수님은 유다교의 율법을 넘어서는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즉, 재산을 포기하고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 당신을 추종하도록 명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청년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26절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자력이 아니라 타력, 즉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따르는 사람들은 종말에 하느님으로부터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격언을 인용하여 종말에는 부자들과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의 팔자가 뒤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제자직에 대한 교훈2(20장)
ㄱ.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20,1-16)
성서에는 제목이 “포도원 일꾼과 품삯”으로 되어 있는데, 그 보다는 오히려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비유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은 너그럽고 자비롭습니다. 하느님은 공덕에 비례해서 보상하시기도 하지만 공덕에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지키는 사람이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지킬 수도 없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관점으로는 이들의 구원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들과 어울리며 함께 하시므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은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와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15,11-32)를 들어 당신의 입장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죄인들을 끌어안는 것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공덕에 비례한 보상만 생각지 말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천민들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래서 현재의 서열이 종말에는 뒤바뀐다는 유행어가 16절에 다시 나옵니다.
ㄴ. 세 번째 수난 예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20,17-28)
17-19절에 세 번째 수난 예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형 선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짐, 조롱, 채찍질,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출세욕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의 “주님의 나라”는 본래 종말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다스리실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이를 정치적 차원의 왕국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그 나라에서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24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도토리 키 재기).
이처럼 한심한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봉사자와 종의 모습인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는 자신의 죽음, 즉 대속죄행위(代贖罪行爲)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봉사받기보다는 겸손으로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산 삶, 궁극적으로는 남을 위해 죽는 삶이었습니다.
ㄷ. 예리고의 소경을 고치심(20,29-34)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이시다’라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그리스도론이 펼쳐집니다.
예리고의 두 소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깊이 동정하며 치유해주시자 그들은 그분을 따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 활동기1(21-22장)
1. 예루살렘 입성과 그 직후(21,1-22)
ㄱ. 예루살렘 입성(21,1-11)
이 대목에서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분은 마치 미리 보시고 준비하신 것처럼 나귀를 징발하십니다.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27장 17-19절에서 최후 만찬을 준비할 때 다시 보여 집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성취인용문이 나옵니다(이사62,11; 즈가9,9).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대로 나귀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메시아이시므로 나귀를 타고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가오십니다.
ㄴ. 성전 정화와 병 치유(21,12-17)
저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즉시 성전을 정화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아끼시는 열정에 불타서 시장바닥처럼 속화된 성전 마당을 정화하셨습니다.
이어서 14절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으로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저자는 불같이 역정을 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 바로 다음에 이 치유 집약문을 연결함으로써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극적으로 부각시킵니다.
15-17절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자 “다윗의 자손”(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자손’이 아니라 ‘아들’임)이라고 응답합니다. 이 외침을 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크게 분노합니다.
ㄷ.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21,18-22)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저주하시자 그 나무가 곧 말라죽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의 위력을 보여주시는 실례가 됩니다.
21절 말씀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믿음의 위력과 함께 믿고 청하는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2. 구원의 새 상속자들(21,23-22,14)
ㄱ. 예수님의 권한 논쟁(21,23-27)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두고 유다교 지도자들이 권한 논쟁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할 권한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져 이 지도자들이 요한 세례자도 불신하고 당신도 불신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권능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교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ㄴ. 두 아들의 비유(21,28-32)
“두 아들의 비유”는 회개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세리와 창녀들,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종교적 상식, 기존의 가치관을 뒤엎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조건이 따릅니다. 여기서는 회개와 믿음, 실천이 제시됩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은 예수님을 그분의 계시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ㄷ.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6)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43절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겨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모질게 박해했고 급기야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까지도 예루살렘 성밖에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인용된 시편(118,22-23)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 죽였으나 그분은 부활하셔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습니다.
ㄹ. 혼인잔치의 비유(22,1-14)
하느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구원을 알라셨습니다. 그런데 2-6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 결과 성전과 예루살렘이 불탔고 구원의 유산을 상실했으며 이제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이어 11-14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신 교회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성속(聖俗)의 복합체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혼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결혼예복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산상 설교, 사랑의 이중계명, 황금률, 자비 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멸망이 선언됩니다.
3. 유다교 지도자들과 마지막 논쟁들(22,15-46)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몇 가지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ㄱ. 세금 논쟁(22,15-22)
첫 번째는 세금 논쟁입니다. 17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요량으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간악한 속셈을 간파하시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대답하심으로써 이들의 올가미를 피하심과 동시에 훌륭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즉, 황제에게는 세금만 바치면 되지만 하느님께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십니다.
ㄴ. 부활 논쟁(22,23-33)
두 번째는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 신앙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수혼 법을 예로 들어 질문합니다. 이는 그들이 부활을 이승의 연계선상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로 대답하십니다. 우선 부활은 이승의 삶을 회복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성서를 근거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 답하십니다.
ㄷ.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대담(22,34-40)
세 번째 논쟁에는 다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전체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심으로써 그들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또한 39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신명6,5) 못지않게 이웃 사랑(레위19,18)도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 두 가지가 부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ㄹ. 다윗의 아들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담(22,41-46)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논쟁에서는 바리사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먼저 질문을 했는데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질문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에 관한 논쟁인데 여기서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속했던 교회의 그리스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46절에서 “그 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로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모든 논쟁을 마감합니다.
예루살렘 활동기2(23-25장)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수난 직전까지 예루살렘에서 전개된 예수님의 활동을 21-25장에 담고 있습니다.
그 중 21-22장에서는 유다교 지도자들과의 마지막 논쟁이 다루어졌고, 22장의 마지막 절인 46절에서는 모든 논쟁을 마감 짓습니다.
이제 모든 논쟁의 마감에 이어 23장에서는 유다교 단죄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책망만을 모아놓은 집성문 입니다.
그리고 24-25장은 마태오 복음서의 다섯 가지 주요 설교 중 마지막 설교로서 종말 설교입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은 24장1-2절의 성전 파괴 예고로 시작해서 24장 44절의 그 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종말 위기에 대비해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종말 비유로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최후 심판”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 23장=유다교 단죄 설교
2. 24-25장=종말 설교
1. 유다교 단죄 설교(23장)
ㄱ.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심.
교회 지도자들에게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심(23,1-12)
유다교 단죄 설교의 청중은 군중과 제자들로서 그리스도인 모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5장1절의 산상 설교의 청중과도 같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산상 설교와 더불어 유다교 단죄 설교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7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시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어8-12절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십니다. 특히 11-12절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으뜸가는 사람은 섬기는 봉사자, 종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12절은 종말에는 현재의 처지가 역전된다는 말씀입니다.
ㄴ. 율사와 바리사이들에게
일곱 차례 불행을 선언하심(23,13-33)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일곱 차례나 불행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낙인찍습니다. 율법의 세칙에만 골몰하고 본래의 정신은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ㄷ. 유다인들의 멸망 예고,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23,34-39)
이 부분은 34-36절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과 37-39절의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탄식은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2. 종말 설교(24-25장)
ㄱ. 성전 파괴, 세상의 종말(24,1-44)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종말론들은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유다교 묵시문학을 그리스도론에 따라 번안한 것입니다.
3절에서 제자들은 종말과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 나타날 징조, 즉 표징에 관해 질문합니다.
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짜 메시아가 출현하고 전쟁, 기근, 지진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들은 본격적인 고통이 아니고 고통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9-14절에서는 또 자른 표징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범세계적인 박해와 온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를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온 세상 모든 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종말이 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는 종말을 임박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저자는 묵시문학적 사관의 영향을 받아서, 4-14절에서 세상이 날이 갈수록 타락해지며, 15-28절에서 역사가 막을 내릴 즈음에는 그 타락상이 극에 달하고, 29절에서 마침내 우주적 파국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인자가 내림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것이라고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인 80년경에 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참변인 성전 파괴는 과거의 일이었습니다(22,7; 23,38).
저자는 종말이 지연된다고 보고(24,48; 25,5)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을 충실히 하도록 권고합니다(24,45-25,46절의 종말 비유 네 편).
30절의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항상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종말이 되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어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31절의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님께로 집결된다는 말입니다.
32-35절에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들조차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대비해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람이 아들이 오시면 단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구원과 멸망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실은 각자가 구원과 멸망을 자초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각자 행실대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16,27; 22,11-13; 25,31-46).
ㄴ. 종말 비유 네 가지(24,45-25,46)
종말 위기에 대비해서 늘 깨어 준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네 가지가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1)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이 비유의 뜻은 종말이 지연된다고 해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동료들을 마구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로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비유입니다.
2)열 처녀의 비유(25,1-13)
1절의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그리스도인들이며, 반대로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신랑인 그리스도는 재림을 늦추시지만 반드시 오십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마중해야 하는 데, 슬기로운 처녀 다섯,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 그리스도인들만 혼인잔치에 참석해서 종말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달란트의 비유(25,14-30)
이 비유 역시 현재와 종말 사이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종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19절의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는 종말이 지연됨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종들은 주인께 대한 믿음, 신의를 가지고 주인이 맡기신 일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29절은 일종의 유행어로서 지금 영적으로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 심판 때 더욱 부요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종말 때 더욱 비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4)최후 심판(25,31-46)
저자는 24장 30-31절에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서술했습니다.
이에 대한 속편으로 이제 “최후 심판”을 엮습니다.
최후 심판은 심판관이신 사람의 아들의 착석, 모든 민족들의 소환, 선인과 악인의 분리, 심문과 언도, 처벌과 포상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32절의 “모든 민족들”은 이방 민족과 유다 민족,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가릴 것 없이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 때 심판 받는 사람은 온 인류이며, 심판의 기준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자비를 베푼 행위입니다.
자비와 사랑은 그리스도 신앙의 가치 서열에서 최상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한 자비와 사랑은 보편적 진리로서 모든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습니다.
여기에 열거되어 있는 불쌍한 사람들은 불쌍한 전도사들이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불쌍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가난하고 한 맺힌 사람들,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어울리셨듯이 최후 심판 때에도 저들과의 연대를 선포하십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활동기3(26-28장)
26-27장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28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사명, 곧 지상명령이 서술됩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수난 사건들이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27,9-10절에서는 유다의 자살이 즈가리야서 11장12-13절, 예레미야서 18장2-3절과 32장8-9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했기에 26장 28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계약이 맺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가 탄생됩니다.
28장19절에 보면 이 교회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까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십니다.
1. 26-27장=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2. 28장=예수님의 부활, 제자들의 사명
1.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26-27장)
ㄱ. 한 여인이 향유를 부어드림(26,6-13)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것, 다시 말해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예식을 앞당겨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27장57-60절에서 보겠지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를 때 시신에 기름 바르는 절차를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시며 복음, 즉 당신의 죽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사건도 알려지게 될 것이라 악속하십니다.
ㄴ. 유다가 배반을 약속함(26,14-16)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은전 서른 닢을 받아냅니다. 저자는 이것을 구약의 즈가리야서 11장12절에 예언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ㄷ. 최후 만찬(26,17-30)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 예루살렘의 어느 가정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드셨습니다. 이 식사를 과월절 음식(해방절 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해방절 준비일은 무교절 첫날입니다. 무교절 축제는 이 날부터 8일 동안 계속됩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고난 받으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밝히십니다. 21-2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 날 만찬 식사 중에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은 이제 죽음을 예감하시고 26절에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시며 그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비치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27-28절에서 포도주를 드시기 전에 감사기도를 올리시고 빵을 나누실 때와 마찬가지로 “받아 마셔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계약, 즉 신약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에 충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새로운 계약을 예고하시면서(예레31,31-34)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 즉 온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죄악을 속죄하는 대속죄행위(代贖罪行爲)입니다.
ㄹ.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심(26,31-35)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장담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약속을 합니다.
ㅁ.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심. 체포되심(26,36-56)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귀감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깨어 기도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며 고난의 길로 나아가십니다.
이어 47-56절에서는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카로 대항하며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라버리자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금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에 따라, 즉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체포되어 고난과 죽임을 당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모두 다 도망가고 예수님 홀로 고난과 죽음을 겪으시게 됩니다.
ㅂ. 최고의회에서 심문받으심(26,57-68)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현직 대제관이었던 가야파의 집에 끌려가 긴급 소집된 최고의회에서 목요일 밤 내내 심문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심문했으나 증인들의 증언이 엇갈리자 63절에서 대제관이 직접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때 대제관이 예수님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라고 한 말은 진실한 답변을 하도록 명하는 것입니다.
64절의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고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지만 장차 역사의 종말에 심판할 사람의 아들(인자)로서의 메시아이시라는 답변입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아관 이었습니다. 유다인에게 이런 말은 독성죄에 해당됩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자는 저주받은 자이지 지존하신 메시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65절에서 이 말을 들은 대제관은 치가 떨린다는 의미로 옷을 찢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야훼의 종에게 예고된 온갖 수모를 당하십니다.
ㅅ.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함(26,69-75)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저자는 베드로의 배반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라고 잡아떼기만 하다가 두 번째에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할 때에는 결국 천벌까지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맹세하기에 이릅니다.
ㅇ. 빌라도에게 압송되심. 유다의 죽음(27,1-10)
최고의회는 밤새도록 예수님을 심문하고 이튿날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
당시에는 사형 언도권과 사형 집행권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으로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의 사형 언도와 집행 명령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이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비참한 최후가 서술됩니다. 사도행전은 유다의 죽음을 더 비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1,18-20).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성취인용문이 9-10절에 나옵니다.
ㅈ. 빌라도에게 심문과 사형언도 받으심(27,11-26)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대제관 가야파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함축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당신은 메시아이시지만 총독이 생각하는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9절과 24-25절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는 예수님의 무죄하심과 유다인들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꿈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1,20; 2,12. 13. 19) 꿈은 하느님 말씀, 즉 계시 수단으로 쓰입니다.
24-25절에서는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라는 군중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다인들의 죄를 분명히 합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몸짓으로 사형 언도의 책임을 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작된 민의에 굴복하여 무죄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자는 분명히 빌라도입니다.
ㅊ. 가시관 쓰심(27,27-31)
26장 67-68절의 최고의회 심문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사형 언도가 내려진 후 병사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조롱합니다. 그리고나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가십니다. 사형은 도시나 마을 밖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ㅋ. 십자가에 달리심(27,32-44)
보통 십자가 형틀의 수직대는 형장에 박혀 있었으므로 사형수는 수평대만 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채찍질을 삼하게 당해서 지고 가실 수 없었기에 시몬이 징발되어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놀리려고 말실 수 없는 술인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리고 그분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옷을 벗긴 채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적음 명패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 붙여집니다.
39절의 “머리를 흔들며”와 43절의 말씀은 시편 22편 7-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적수들의 입을 통해 40절과 43절에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ㅌ. 돌아가심(27,45-56)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2편 1절의 “엘리엘리 레마 사박타니”라는 기도문을 당신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비치셨습니다. 저자는 아람어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리스어 번역을 달아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러나 47절에서 사람들은 “엘리”를 잘못 알아듣고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는 줄로 착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6절과 50절에서 두 번에 걸쳐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분은 운명하실 때까지 시편 22편을 계속 바치신 것 같습니다.
이어 51-53절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으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에제37,1-14)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성도들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54절에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로마 백부장과 병사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광경을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전하며 그 중 세 여인을 밝힙니다. 27장 61절에서처럼 이들은 앞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볼 것이며 28장 1-10절과 같이 첫 번째로 부활 소식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ㅍ. 무덤에 묻히심(27,57-61)
사형수의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해서는 관청의 허락이 필요했기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되기 전에 급히 장례를 치러야 했으므로 장례 절차가 일부 생략됩니다.
ㅎ. 경비대가 무덤을 지킴(27,62-66)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무덤을 경비병들이 지켰다는 이야기, 28장 2-4절의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굴려내는 광경을 본 경비병들이 겁에 질려 까무라쳤다는 이야기, 28장11-15절의 이 소식을 들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는 이야기 등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유다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서가 집필될 당시에 유다교 전도사들은 제자들에 의한 시신 도난설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62절의 “명절을 준비하는 날”은 금요일이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 곧 토요일입니다.
2.예수님의 부활, 제자들의 사명(28장)
ㄱ. 빈무덤 사화, 첫 발현 사화(28,1-10)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할 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이 있는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요일 새벽, 예수님을 참배할 목적으로 무덤에 갔다가 뜻밖에 천사를 대면하고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됩니다. 이어서 6절에 빈 무덤 이야기가 제시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믿습니다.
부활 이야기의 핵심은 6절의 예수님 부활 선포와 빈 무덤 확인 내용입니다. 네 복음서 어디에서도 부활하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는 수난 예고 때 하신 말씀들을(16,21; 17,23; 20,19)가리킵니다.
부활 소식을 접한 여인들은 기쁨에 넘쳐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전갈을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16절과 연결됩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당일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5장 40절의 최후 심판 이야기에서도 미천한 이들을 당신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d수님이 이제 또 당신이 체포되실 때 도망쳤던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형제로 맞이하십니다.
ㄴ. 제자들의 사명(28,16-20)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시는 지상명령은 마태오 복음서의 절정이며 저자가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인데 부활하신 후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만민을 상대로 전도할 것을 명하십니다. 4장15절에서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지역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신 것은 이방인 전도를 의도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장1절, 17잘1절에서 보았듯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산은 계시가 내리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이에게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제자가 되도록 전도할 것과 공생활 때 배웠던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을 명하시며, 언제나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을 악속하십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런 일들을 충실히 행해야 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을 다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가르쳐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다섯 가지 설교인 5-7장의 산상 설교, 10장의 파견 설교, 13장의 하늘나라의 비유설교, 18장의 공동체 설교, 24-25장의 종말 설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데 순명의 정도는 5장20절, 13장52절의 말씀처럼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을 능가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면서 돕겠다고 하신 주님의 현존 약속입니다.
즉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선민을 도우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8장25-26절의 이야기에서처럼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와 늘 함께 계시면서 교회를 돌보시겠다고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교회와 함께 계십니다.
교회는 이 말씀에 따라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안심하고 종말 때까지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는 16장18절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어떤 어둠의 세력도 교회를 누를 수 없습니다.
교회의 특징과 능력과 권위는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에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이 결합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