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학,성경,신앙 강좌

유충희 신부님 -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 연구

작성자사랑 감사 기쁨|작성시간11.08.04|조회수390 목록 댓글 0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 연구

 

유충희 신부님(원주교구)

 

차례

 

Ⅰ. 서론

1-1. 연구 목적 및 연구방법

1-1-1. 연구 목적

1-1-2. 연구 방법

1-2. 연구사

1-2-1. 최후만찬의 의미

1-2-2. 초대교회의 성만찬

1-2-3. 단절인가 연속인가

1-3. 네 개의 성만찬기

1-4. 유대교의 회식과 과월절만찬

 

Ⅱ.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의 성만찬기

2-1. 서론

2-2. 빵에 관한 설명어(22절)

2-3. 잔에 관한 설명어(23․24절)

2-4. 신국잔치 선언(25절)

 

Ⅲ.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의 성만찬기

3-1. 서론 : 잘못된 고린토 교회의 만찬례 관행(1고린 11,17-22)

3-2.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의 성만찬기

3-2-1. 도입문(23a절)

3-2-2. 빵에 관한 설명어(23b절․24a절)

3-2-3. 잔에 관한 설명어(25a절)

3-2-4. 반복실행 명령(24b․25b절)

3-2-5. 바울로의 성만찬 이해(26절)

 

Ⅳ. 요한 복음서와 2세기 교부들의 성만찬기

4-1. 요한 복음서(6,51-59)

4-1-1. 요한 복음서 6장 개관

4-1-2. 빵 설교(6,26-59)

4-2.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9․10․14장의 애찬과 성만찬

4-2-1. 디다케 9-10장 주석

4-2-2. 디다케 14장 주석

4-3. 이냐시오스의 성만찬관

4-3-1. 에페소서 5장 2절

4-3-2. 에페소서 20장 2절

4-3-3. 필라델피아서 4장

4-3-4. 스미르나서 7장 1절

4-3-5. 스미르나서 8장 1-2절

4-4. 유스티누스 「호교론 전서」 65-67장

4-4-1. 65장 풀이

4-4-2. 66장 풀이

4-4-3. 67장 풀이

 

Ⅴ. 예수의 최후만찬

5-1. 최후만찬 날짜

5-2. 최후만찬 장소

5-3. 최후만찬 참석자

5-4. 최후만찬 절차

5-5. 최후만찬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

 

Ⅵ. 초대교회의 성만찬

6-1. 명칭

6-2. 성만찬 일시

6-3. 성만찬 장소

6-4. 성만찬 주례

6-5. 성만찬 절차

 

Ⅶ. 결론

7-1. 계약사상과 대속죄 사상

7-2. 그리스도론적 의미

7-3. 교회론적 의미

7-4. 사목적인 반성

Ⅰ. 서론

 

1-1. 연구 목적 및 연구방법

 

1-1-1. 연구 목적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세계적으로 똑같은 성만찬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이 성만찬 예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거행하신 최후만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예수의 최후만찬에서 출발하여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현재의 성만찬 전례가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성만찬의 발전과정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그 의미도 세월따라 교파따라 많이 변천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교는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는 이 성만찬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왔고,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양한 교의와 학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유언형식으로 남겨 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만찬례가 발전되어 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는 성만찬 예식이 예수의 최후만찬 예식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식 때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믿고 있는 데 반해 개신교회는 이것이 하나의 기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는 성만찬례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해 개신교회는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로 말씀의 전례 위주로 예배를 바친다. 이는 그리스도교 안에 예배의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 간단히 지나쳐 버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예수께서 유언처럼 귀하게 남겨주신 이 예식의 본 뜻과 이 예식에 담겨 있는 그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아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서기 30년 4월 6일 예루살렘 시내 어느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은 어떤 식사였을까? 이 최후만찬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최후만찬을 하신 동기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최후만찬의 본질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이 최후만찬에 참여했던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던 최후만찬의 의미, 또 그 제자들이 자기들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어서 내려온 성만찬례를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였는가?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전례 때마다 거행하는 성만찬례는 그 형식과 성격에 있어서 예수의 최후만찬과 일치하는가? 성만찬례를 행할 때마다 누구에게나 이런 물음들은 쉬임없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성만찬이라는 주제는 성서학 분야에서보다는 주로 교의신학에서 다루어져 왔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교의신학적 고찰로서보다는 이 교의 신학적 고찰의 전제가 되는 성서학적 고찰을 통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신 최후만찬의 성격과 이를 바탕으로 교회 안에서 이미 성사로 자리잡고 있었던 성만찬례를 살펴봄으로써 예수의 최후만찬 성격과 초대교회의 성만찬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거행되는 성만찬례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데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다.

 

 

1-1-2. 연구방법

 

예수의 최후만찬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은 사도 바울로가 55년경 에페소에서 전도할 때 쓴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과 70년경에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 그리고 80년대에 기록된 마태오 복음서 26장 26-29절과 루가 복음서 22장 15-20절등 네 가지 성만찬기이다. 신약성서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10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씌어진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9-10장과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냐시오스가 110년경 로마로 압송되면서 쓴 편지들 그리고 155년경 유스티누스 교부가 집필한 「호교론 전서」65-67장도 성만찬 전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문헌들이다. 특히 유스티누스의 「호교론」은 현존하는 문헌들 중에서 성만찬례에 관한 첫 번째 전거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예수의 최후만찬이 기록되어 있는 신약성서와 신약성서외의 다른 중요한 문헌들을 전승과 편집과정을 통하여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성만찬례의 통사를 엮고자 한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는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과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에 들어 있는 성만찬기를 상세하게 다루고 요한 복음서 6장 26-59절에 들어있는 “빵 설교”와 신약성서외의 다른 문헌들은 부록 형식으로 간략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도 어렵지만 흘러간 역사를 재구성하기란 더욱 어렵다. 사료가 빈약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서기 30-200년 사이의 성만찬 변천사를 상세하게 밝힌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성만찬기와 그외의 문헌들을 면밀히 살핀다면 성만찬의 변천과정을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성만찬기들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전례로 자리잡고 있었다(1고린 11,23). 따라서 각각의 공동체가 처해있던 특수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고, 또한 이런 상황들을 벗겨냄으로써 그 원형의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공동체의 상황들을 벗겨내어 그 원형을 재구성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최후만찬의 의미와 형식을 밝히는 데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이 사용될 것이다. 출전비평은 통설에 따라 이출전설(二出典說)을 따랐다. 이출전설은 마태오와 루가가 제각기 두가지 구별되는 사료를 사용했을 것으로 가정하는 이론으로, 두가지 사료란 비록 오늘날 문서로 남아있지는 않으나 50․6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어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말씀 70여편을 모아 편찬한 ‘예수어록’(Q: 이는 독일어 Quelle, 곧 원천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의 약어이다)과 마르코 복음서를 말한다. 편집사적 연구는 복음서 작가가 즐겨 쓰는 낱말․문체․구조 그리고 편집의도․상황등을 분석하여 복음서 작가의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전승사적 연구는 신약성서의 본문이 문서화되기 이전의 전승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신약성서의 본문이 문서화되기 이전 가장 오래된 구전의 형태는 어떠했는지, 그 전승의 말씀들이 예수께로 소급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방법론이다. 복음서작가들이 채록한 예수 전승들을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작업을 통해 예수의 말씀과 행적의 참된 뜻을 밝힐 수 있겠다.

본 논문에서 주로 사용될 방법론은 편집사적인 연구와 전승사적인 고찰이다. 이 방법론을 통하여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 교회의 성만찬의 형태와 의미를 밝힌 후에 최종적으로 이를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성만찬례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시키는 해석학적 반성(Hermeneu-

tics)을 시도해 보겠다.

 

1-2. 연구사

 

성만찬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 교회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노력은 쉼없이 이어져 왔다. 특히,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에게는 이 질문이 시대를 초월하여 ‘숙제’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19세기 이후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이 성서학에 도입되면 그 질문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성만찬례의 시작을 알리는 최후만찬의 역사적인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이 성만찬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만찬례’로 성사화시켰을까? 최후만찬이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예수의 최후만찬과 관련하여 오늘날에 진행되는 연구들은 모두 지난 세월동안 이 주제에 대해 제기된 갖가지 ‘질문들과 대답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대략 세 가지로 그 ‘질문들과 대답들’의 테두리를 정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2-1. 최후만찬의 의미

이 절의 제목은 비록 ‘최후만찬의 의미’라고 했지만 실은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예수가 베푼 최후만찬의 역사적인 원래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 역사적인 모습에 따르면 최후만찬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가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보였던 인물 중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스트라우스(D. F. Strauß)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성서에 나오는 최후만찬에 대한 보도들이 사실 보도에 가깝다는 데 근거하여 예수의 의도를 정리했다. 예수는 자신의 공생활 내내 메시아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메시아적인 행보의 마지막 도달점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는 ‘메시아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에 투사했다. 따라서 최후만찬에 쓰였던 소도구들, 즉 빵과 포도주는 예사의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감정이입이 되어 자신의 희생을 담아내는 사물로 간주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스트라우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제시할 수 있으나. 예수의 입장에서 최후만찬을 보았다는 점, 다시말해서 심리적인 접근을 하였다는 점에서 최후만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트라우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이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홀쯔만(O. Holtzmann)은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보도 중에 ‘단식 논쟁’을 다룬 마르 2,18-22와 마르 3,6에 나오는 ‘예수 살해 모의’(“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에 이미 예수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 ‘가치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은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가 한 말씀 중에 “많은 이들을 위해서”로 구체화된다. 즉, 예수는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만민들을 위한) 자신의 죽음이 가지는 ‘죄사함’의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최후만찬이 갖는 이런 의미는 궁극적으로 제자들의 공동체에게 자부심을 부여했다고 결론내린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예수의 최후만찬을 비단 예수가 지상에서 드셨던 ‘마지막 식사’라는 차원을 넘어 예수의 전 존재가 집약적으로 투사된 사건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예수는 이미 세례를 받을 때부터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장차 겪게 될 수난에 이르기까지 내다 보았다. 그러므로 공생활 기간 동안의 예수 언행 하나 하나는 그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들이 되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가 베푼 빵의 기적들(마르 6,30-44; 8,1-10)은 최후만찬을 예견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최후만찬 연구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저서를 남겼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최후만찬이 유대인의 과월절 만찬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따라서 예수가 최후만찬을 거행했을 때는 자신이 마치 과월절 양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죽는다는 투철한 자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빵과 포도주의 설명어에 등장하는 ‘몸과 피’(ד󰙴󰗏-ם󰕏, σώμα-αἵμα)는 예수가 과월절 양처럼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만찬이었다는 예레미아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반대에 부딪치기는 하지만, 적어도 최후만찬의 역사적인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본격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쉬어만(H. Schürmann)은 예수의 최후만찬이 가지는 성격을 종말론적으로 풀어나갔다. 그는 최후만찬이 예수가 제자들과 지상에서 나누는 마지막 식사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별의 만찬’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빵’과 ‘잔’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것들로 대변되는 예수의 죽음은 종말론적인 구원에 실효를 거두는 수단(Wirkmittel)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의미는 오순절 이후의 그리스도 교회로 전달되어 최후만찬이 성만찬례로 정착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쉬어만의 공헌은 최후만찬과 그것을 잇는 성만찬례가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찾아낸 데 있다.

최후만찬이 과월절 만찬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만찬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그닐카(J. Gnilka), 바레트(C. K. Barrett)등이 있는데,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최후만찬은 제자들과의 이별 만찬이라는 데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 견해는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의 성만찬기 주석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예수의 최후만찬이 가지는 역사적인 모습, 특히 최후만찬의 주례로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눈 예수의 의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설왕설래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가 미구에 들이닥칠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를 밝혀내는 데 있다.

 

1-2-2. 초대교회의 성만찬

 

초대교회는 예수의 최후만찬을 이어받아 이를 자신들의 중요한 종교행위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점들이 있는데 바로 주변의 종교․문화․환경에서 받은 영향들이다.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유대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바울로 등의 사도가 헬레니즘 세계에서 의욕적인 전도 활동을 벌여 많은 교회를 세웠으니 갖가지 헬라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절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최후만찬에 대한 보도들에 뒤섞여 있는 주변 요소들을 가려내는 연구 작업들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K. G. Kuhn)은 마르 14,22-24에 나오 있는 최후만찬 보도와 에세느파의 쿰란 공동체에서 진행되었던 공동 식사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남성 구성원들만으로 이루어진 제한적인 집단에서 공동 식사를 했고, 주례는 식사의 순서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축복의 말을 했다고 한다(1QS VI, 1-6; Jos Bell Ⅱ, 129ff). 따라서 신약성서 시대의 성만찬례는 쿰란 공동체의 공동 식사와 동질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성만찬례가 팔레스타인-유대적인 요소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실을 하는 설명이다. 킬파트릭(G. D. Kilpatrik)은 성만찬례와 유사한 식사 전통을 주전 100 - 주후 100년경의 이집트의 디아스포라가 남긴 문헌에서 찾아냈다. “요셉과 아세네트”(Joseph und Aseneth)라고 이름 붙여진 헬라 - 유대적인 사랑 이야기에서는 “생명의 빵”, “영생의 잔”, “축복의 잔”등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이방 여인인 아세네트가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그녀의 실존이 바뀌었음을 대변하는 표현들로, 빵, 잔, 영생 등의 상징성이 성만찬례와 유사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출애급 시대에서 유래된 ‘하늘의 만나’를 염두에 둔 것들이므로 초대교회의 만찬례와 차이가 나기는 한다.

쿤과 킬파트릭의 견해를 충실히 수용한다면 성만찬례의 모델들을 유대적인 종교 식사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성만찬례의 원형을 찾아가는 데 있어 분명히 고무적인 여건을 제공하는 연구들이라 하겠다.

헬라 세계로 넘어오면 그리스도교의 성만찬례에 영향을 끼쳤을 법한 요소들이 다양하게 발견되며, 이에 대한 연구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아이히로른(A. Eichhorn)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되어가는 과정 중에 다양한 종교 환경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성만찬례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풍부하게 찾아낼 수 있는데, 주로 구원론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성서(聖事)로서 그 의미가 돋보이게 되었다. 아이히호른은 예수가 고별을 선언한 마르 14,25(“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를 제외한 마르 14,22-24는 후대의 첨가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먹고 마심’이 가지는 성서적인 의미는 구약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영지 사상에서 그 관련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아이히호른에 비해 하이트뮬러(W. Heitmüller)는 보다 수긍할 만한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예수가 빵과 잔을 돌리며 “이는 내 몸입니다”와 “이는 내 피입니다”라고 한 말씀은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시킬 수 있으나, 예수가 이 말씀을 성사적인 의미에서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바울로 시대에 들어서 성사화되었는데, 결코 유대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교 외적인 종교 환경에서 비슷한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헬라 종교에서는 종종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를 먹어치우는 관습이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디오니소스 제의가 있었다. 여기서 제물은 신성을 획득했다고 간주되며 그의 몸을 나눔으로써 참여자들은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즉, 초자연적 - 신비적인 차원에서 제물의 피와 살 안에 숨은 거룩함을 맛보게 되는 셈이다. 바울로 시대에는 비록 이런 관습이 미개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 상징성만은 여전히 퇴색하지 않았고, 성만찬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히호른과 하이트뮬러의 연구에 힘입어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만찬례에 대한 종교 현상학적인 접근이 활기를 띠게 된다. 로이시(A. Loisy)는 바울로 시대에 성만찬례를 성사로 정착시키는데 디오니소스 제의뿐 아니라 ‘미트라 밀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불트만(R. Bultmann)은 아티스(미트라의 애인) - 미트라 밀교에서 이루어지는 ‘성스런 식사’를 통하여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상징성을 성만찬례와 연결시켰다. 마치 아티스 - 미트라 밀교가 세례에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바울로 이전의 헬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성만찬례에 등장하는 주님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밀교의 설명 체계를 빌려 왔을 것이라는 뜻이다.

클라우크(H. -J. Klauck)는 먼저 바울로가 고린토 전서를 쓰게 된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린토 교회는 헬라 세계의 밀교적인 영향을 받아 성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열광주의 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로는 이런 열광주의에 반대하여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참뜻을 올바르게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곧 성만찬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바울로는 성만찬례의 의미를 헬라 세계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죽은 이의 기념축제’(Totengedächtnisfeier)와 비슷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헬라 세계로 처음 진출한 그리스도교의 유랑 전도사들은 헬라 사람들의 사고와 주변 환경에 걸맞는 설명 체계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가 발을 붙이는 데 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구석구석에서 이런 현상들은 수시로 발견되며, 성만찬례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2-3. 단절인가 연속인가

 

앞의 두절에서 우리는 예수가 몸소 행했던 최후만찬의 역사적인 모습과 그 의미(1-2-1),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주변 세계에서 성만찬례에 끼쳤던 영향들에 대한 연구(1-2-2)를 살펴 보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기 그리스도교 성만찬례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성만찬례의 성격은 물론 그리스도교 2천년의 역사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대단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리츠만(H. Lietzmann)은 예루살렘 모교회의 성만찬례 관행과 헬라 그리스교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던 성만찬례는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순절 이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는 공동체가 매일 모여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글자 그대로의 공동 식사를 나누었다고 하며(사도 2,46), 이는 살아생전 예수가 제자들과 나누던 일상의 식사를 본뜬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최후만찬때부터 이미 자신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분의 죽음을 기념한다던가, 희생제물, 밀교, 열광주의 등에서 받은 영향들이 눈에 띈다고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던 성만찬례가 예수 최후만찬의 역사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할 때, 헬라 그리스도교에서 이루어지던 성만찬례 관행은 예수의 최후만찬과 상당한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리츠만은 바울로가 전하는 예수의 최후만찬 보도가 역사적인 신빙성을 가진다고 했는데, 최후만찬 보도는 원래 ‘수난사화’의 일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리츠만의 주장이 예루살렘 공동체와 헬라 그리스도교에서 이루어지던 성만찬례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이라면, 쿨만(O. Cullmann)과 로마이어(E. Lohmeyer)는 예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례 사이의 불연속성을 지적한다. 쿨만에 따르면, 예루살렘 모교회의 성만찬례는 예수의 부활 발현 경험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실 예수가 제자들과 나눈 최후만찬과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과 나눈 첫 만찬은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모교회의 성만찬례에는 부활한 예수의 현존과 그 증거들이 녹아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쿨만이 예수의 부활 체험이 전제된 초대 교회의 성만찬례와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역사적인 최후만찬을 구별한 데 반해, 로마이어는 초대교회의 성만찬례는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 뿌리는 물론 역사적인 최후만찬이고 예루살렘 모교회의 성만찬례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뿌리는 갈릴래아 해변에서 이루어진 빵의 기적을 통한 공동 식사이다(마르 6,30-44). 로마이어에 따르면 갈릴래아의 공동 식사는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현재화시킨 식사였다고 하며 이는 성만찬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즉, 갈릴래아의 공동 식사가 성만찬례에 종말론적인 성격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만찬례는 두 가지 뿌리, 즉 예수의 최후만찬과 갈릴래아 공동체 식사가 한 가지로 섞여진 형태가 된다.

마르코 복음의 편집사 연구에 있어 전기를 마련했던 맑센(W. Marxen)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최후만찬 보도들이 어떤 경로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최후만찬 전승이 바울로 이전의 상태(1고린 11,23-25)에서 바울로 식의 실행(1고린 11,17-22․27-34)을 거쳐 마르코의 최후만찬(마르 14,22-25)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런 분석 과정에서 후대에 최후만찬 보도에 추가된 개념들이 밝혀졌는데, ‘몸’이란 분명히 교회론적인 배경에서 첨가된 말이며, ‘새로운 계약’은 예수의 피에 후차적으로 주어진 의미 부여라고 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최후만찬의 보도들이 전승 과정에서 다양하게 변모된 결과이며, 이런 과정을 치밀하게 역추적하는 작업은 오늘날 ‘최후만찬’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맑센 외에도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를 역사적인 최후만찬과 연결시킨 슈바이쩌(E. Schweizer)나 최후만찬에 나오는 말씀들 중에서 ‘빵과 포도주에 관한 설명어’와 ‘이별의 말씀’을 구분한 레옹 뒤푸르(X. Léon-Dufour), 그리고 “많은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 25c)를 예수가 직접 한 말씀으로 보아 최후만찬의 원형을 찾아나간 파취(H. Patsch)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최후만찬의 전승 과정과 원형 복구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1-3. 네 개의 성만찬기

 

예수의 최후만찬기는 신약성서에 모두 네 차례 나온다(마르 14,22-25; 마태 26,26-29; 루가 22,15-20; 1고린 11,23-26). 이 가운데 바울로의 성만찬기는 고린토 교회가 성만찬례를 거행할 때 저질렀던 불미스러운 일을 언급하는 본문(1고린 11,17-34)에 나온다. 나머지 공관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모두 복음서의 수난사화에 들어 있다. 이들 성만찬기는 그 기록연대, 언어, 구조, 내용 등으로 보아 역사적인 예수의 최후만찬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1세기 후반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던 성만찬 전례문이다. 그런데다가 이 성만찬기에는 복음서 작가들과 바울로의 견해까지 담겨져 있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로 보낸 편지 11장 17-34절을 보면 성만찬례의 그릇된 관행에 대한 꾸짖음이 나온다.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먼저 공동체 식사(애찬)를 하고 난 다음에 성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우들은 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일찌감치 모여서는 자기네끼리 다 먹어버리곤 하였다. 그러니 가난한 교우들, 특히 노예 신분의 교우들이 거의 빈손으로 늦게 와 보면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바울로는 이런 비행을 심하게 꾸짖는다(20-22절․33-34절).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로는 자신에게 전해진 최후만찬기를 인용한다(11,23-26). 이 성만찬기를 인용하면서 이 성만찬기가 전해진 것이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23절). 따라서 사도 바울로가 전한 성만찬기는 자신이 소속한 교회, 곧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성만찬기를 전해 받아 고린토 교회에 전해 준 것이라 하겠다.

70년경에 씌어진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사도 바울로의 그것과는 상이한 양식으로 전해진 성만찬기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수난사화와 관련하여 나타나 있다. 문헌적으로 약 15년 늦게 씌어진 이 성만찬기 역시 역사적 사실을 곧이 곧대로 전하기보다는 복음서작가가 소속한 교회의 성만찬기를 옮겨 쓴 것이라 하겠다. 마르코는 70년경 아마도 이스라엘 밖에 있는 어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던 성만찬기를 옮겨 썼을 것이다.

 

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가 22,15-20

요한 6,51-58

참조 29절

 

 

26Ἐσθιόντων δὲ αὐτών λαβὼν ὁ Ἰησούς ἄρτον καὶ εὐλογ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δοὺς τοίς μαθηταίς εἶπεν. Λάβετε φάγετε,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σώμά μου. 27καὶ λαβὼν ποτήριον 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δωκεν αὐτοίς λέγων, Πίετε ἐξ αὐτού πάντες. 28τούτο γάρ ἐστιν τὸ αἷμά μου τής διαθήκης τὸ περὶ πολλών ἐκχυννόμενον 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ών. 29λέγω δὲ ὑμίν, οὐ μὴπίω ἀπ’ ἄρτι ἐκ τούτου τού γενήματος τής ἀμπέλου ἕως τή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ὅταν αὐτὸ πίνω μεθ’ ὑμών καινὸν ἐ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ύ πατρός μου.

 

 

 

 

 

 

 

 

 

 

 

참조 25절

 

 

22Καὶ ἐσθιόντων αὐτών λαβὼν ἄρτον εὐλογ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ἔδωκεν αὐτοίς καὶ εἶπεν, Λάβετε,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σώμά μου.

23καὶ λαβὼν ποτήριον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δωκεν αὐτοίς, καὶ ἔπιον ἐξ αὐτού πάντες․ 24καὶ εἶπεν αὐτοίς,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αἷμά μου τής διαθήκης τὸ ἐκχυννόμενον ὑπὲρ πολλών. 25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ὅτι οὐκέτι οὐ μὴ πίω ἐκ τού γενήματος τής ἀμπέλου ἕως τή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ὅταν αὐτὸ πίνω καινὸν ἐ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ύ θεού.

 

 

 

 

 

 

 

 

 

 

 

 

 

15καὶ εἶπεν πρὸς αὐτούς, 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 τούτο τὸ πάσχα φαγείν μεθ’ ὑμών πρὸ τού με παθείν. 16λέγω γὰρ ὑμίν ὅτι οὐ μὴ φάγω αὐτὸ ἕως ὅτου πληρωθῇ ἐ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ύ θεού. 17καὶ δεξάμενος ποτήριον εὐχαριστήσας εἶπεν, Λάβετε τούτο καὶ διαμερίσατε εἰς ἑαυτούς. 18λέγω γὰρ ὑμίν,〔ὅτι〕οὐ μὴ πίω ἀπὸ τού νύν ἀπὸ τού γενήματος τής ἀμπέλου ἕως οὗ ή 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ἔλθῃ. 19καὶ λαβὼν ἄρτον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ἔδωκεν αὐτοίς λέγων,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σώμά μου τὸ ὑπὲρ ὑμών διδόμενον τούτο ποιεί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0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ὡσαύτως μετὰ τὸ δειπνήσαι, λέλων,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ν τῷ αἵματί μου τὸ ὑπὲρ ὑμών ἐκχυννόμενον.

 

참조 18절

 

 

 

 

51ἐγώ είμι ὁ ἄρτος ὁ ζών ὁ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καταβάς. ἐάν τις φάγῃ ἐκ τούτου τού ἄρτου ζήσει εἰς τὸν αἰώνα, καὶ ό ἄρτος δὲ ὅν ἐγὼ δώσω ή σάρξμού έστιν ὑπὲρ τής τού κόσμου ζωής. 52Ἐμάχοντο οὖ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οί Ἰουδαίοι λέγοντες, ΙΙώς δύναται οὗτος ἡμίν δούναι τὴν σάρκα〔αὺτού〕φαγείν: 53εἶπεν οὖν αὐτοίς ό Ἰησού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έὰν μὴ φάγητε τὴν σάρκα τού υἱού ὰνθρώπου καὶ πίητε αύτούτὸ αἷμα, οὐκ ἔχετε ζωὴν ἐν έαυτοίς. 54ὁ τρώγων μου τὴν σάρκα

 

1고린 11,23-25

 

23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ὰπὸ τού κυρίου, ὅ καὶ παρέδωκα ὑμίν, ὅτι ό κύριος Ἰησούς ἐν τῇ νυκτὶ ᾗπαρεδίδετο ἕλαβεν ἄρτον 24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εἶπεν, Τού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ώμα τὸ ὑπὲρ ὑμών. τούτο ποιεί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5ώο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ήσαι λέγων,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ή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ὲ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τούτο ποιείτε, ὁσάκις ἐὰ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έμὴν ὰνάμνησιν.

 

καὶ πίνων μου τὸ αἷμα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κἀγὼ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55ἡ γὰρ σάρξ μου ὰληθής ἐστιν βρώσις, καὶ τὸ αἷμά μου ἀληθής ἐστιν πόσις. 56ό τρώγων μου τὴν σάρκα καὶ πίνων μου τὸ αἷμα ἐν ἐμοὶ μένει κἀγὼ έν αὐτῷ. 57καθὼς ἀπέστειλέν με ὁ ζών πατὴρ κἀγὼ ζώ διὰ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ὁ τρώγων με κἀγὼν με κἀκείνος ζήσει δι’ ἐμέ. 58οὖτός ἐστιν ὁ ἄρτος ὁ ἐξ ούρανού καταβάς, ού καθὼς ἔφαγον οἱ πατέρες καὶ ἀπέθανον. ὁ τρώγων τούτον τὸν ἄρτον ζήσει εἰς τὸν αἰώνα.

마태오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와 대동소이하다. ‘빵을 나눔’에 대한

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가 22,15-20

요한 6,51-59

참조 29절

 

 

26그런데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27또한 잔을 드시고

사례하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그것을

(돌려) 마시시오.

28사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29또한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내 아버지 나라에서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이 포도나무 열매

(로 빚은 것)을

이제부터는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

 

 

 

 

 

 

 

 

 

 

 

 

참조 25절

 

 

22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23또한

잔을 드시고

사례하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자

모두 그것을

(돌려) 마셨다. 2

4그러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25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

 

 

 

 

 

 

 

 

 

 

 

 

 

15그러자 그분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이 해방절(음식)을 먹는 것을 갈구하고 또 갈구했습니다.

16사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해방절이)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그 (음식)을 결코 먹지 않겠습니다.”

17또한 잔을 받으시고 사례하신 다음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 서로 나누시오. 18사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지금부터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

19그리고 빵을 드시고 사례하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 내 몸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20또한 만찬을 드신 후에 그같이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참조 18절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누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곧 내 살로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52그러자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면서 말했다. “이 자가 어떻게(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 53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만일 여러분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여러분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55사실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 (머뭅니다).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또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그런 이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58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빵입니다. 조상들이 먹고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59그분은 가파르나움에서 가르치시면서 회당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1고린 11,23-25

 

23실상 나는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즉, “주 예수께서는 넘겨지시던 날 밤에 빵을 드시고 24사례하신 다음 떼어 말씀하셨다.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25같은 모양으로 또한 만찬을 드신 후에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여러분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26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보도는 마태오가 마르코를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것 같고(마르 14,22 = 마태 26,26), ‘잔을 돌림’ 순서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황묘사에 있던 부분에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말씀 안에 들어가 있다(“모두 그것을 (돌려) 마셨다” : 마르 14,23 = “모두 그것을 (돌려) 마시시오” : 마태 14,27). 마태오는 마르코의 성만찬기를 거의 그대로 베끼면서 자신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반영하여 나름대로 약간의 손질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도입문(“και ἐσθιόνтων αὐтων :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서 마태오는 마르코가 사용한 ‘그리고’(καὶ) 대신에 ‘그런데’(δὲ)를 사용한다(마르 14,22a: 마태 26,26a).

∙ 마르코는 만찬 주례자를 일컬어 대명사를 사용해 단지 ‘그는’이라고 했는 데 반해, 마태오는 구체적으로 만찬 주례자를 ‘예수’라고 거명한다(마르 14,22b: 마태 26,26b).

∙마태오는 만찬 주례자를 예수로 나타냈듯이, 만찬의 수혜자 역시 ‘제자들로’ 묘사한다. 마르코는 수혜자를 단지 ‘그들’이라고 한다(마르 14,22b: 마태 26,26b).

∙ ‘주다’ 동사가 마르코에서는 ‘δἰδωμι’의 제1단순과거형인 ‘ἔδωκεν’인 데 반해 마태오에서는 제2단순과거 분사형인 ‘δούς’이다.

∙ 마태오는 마르코가 사용한 ‘받으시오’(λάβεтε)라는 동사 대신에 ‘받아 먹으시오’(λάβεтε φáγεтε)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 잔에 관한 말씀에서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이 잔을 돌려 마신 후에 잔에 관한 설명어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오의 만찬기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면서 설명어를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신국잔치 선언에 사용된 부정어가 마르코에서는 “οὐκἐтι οὐ μὴ"로 사용된 반면에 마태오는 “οὐ μἠ”를 사용하였다. “여러분과 함께”(μεθ’ ὑμών)가 마태오에는 있으나 마르코에는 없다.

∙ 잔에 관한 설명어에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마르 14,24 : 마태 26,28) 앞에 “죄를 용서해 주려고”가 마르코에는 없고 마태오에만 있다(26,28). 이는 대속죄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려고 마태오가 삽입한 구절이다. 곧, 마태오의 신학적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는 전승으로 내려 온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를 거의 그대로 자신의 복음서에 옮겨 실으면서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약간 손질을 했을 뿐이다.

 

루가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띤다. 빵의 예식과 잔의 예식의 순서가 짝을 지어 두 번씩 나온다(루가 22,15-18․19-20). 앞의 것은 마르코의 성만찬기, 그리고 뒤의 것은 바울로의 성만찬기와 흡사하다. 루가는 마르코의 종말론적인 말씀을 두 번에 걸쳐 언급하면서 그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마르 14,25; 루가 22,16․18).

∙ 루가의 빵 설명어(“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주는 내 몸입니다”)가 마르코의 설명어(“이는 내 몸입니다”)보다 길다. 이 긴 설명어는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 나오는 빵 설명어(“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와 거의 비슷하다.

∙ 루가의 성만찬기에는 마르코와 마태오에 나타나 있는 도입문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 (καὶ ἐσθιόνтων αὐтών)가 없다.

∙ ‘사례하다’ 동사가 마르코에서 사용된 “εὐλογἐω”와는 달리 고린토 전서에서처럼 “εὐχαρισтἐω”이다.

∙ 루가의 성만찬기에서는 “이는 내 몸입니다”라는 설명어에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тὸ ὐпέρ ὑμών διδόμενο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 또한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와 비슷하다.

∙ 마르코와 마태오에는 없는 반복령(“여러분은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이 루가와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는 들어 있다.

∙ 잔에 관한 말씀을 시작할 때 “또한 만찬을 드신 후에 그같이(ὡσαὐтως) 잔을 (드시고)”라는 표현이 마르코․마태오에는 없고 루가와 고린토 전서에는 들어 있다.

마르코는 오직 잔에 관한 설명어에서만 그리고 바울로는 빵에 관한 설명어, 잔에 관한 설명어에서만 사용한 전치사 ‘ύπέρ(위하여)를 루가는 빵에 관한 설명어, 잔에 관한 설명어 양쪽 모두에서 사용한다(마르 14,24; 1고린 11,24; 루가 22,19․20). 따라서 루가의 성만찬기는 바울로와 마르코의 성만찬기를 토대로 이루어진 합성 성만찬기일 가능성이 짙다. 루가는 한편으로 마르코의 최후만찬기를 수용하고 또 한편으로 고린토 전서에 채록된 성만찬 전승을 합쳐서 혼합형 성만찬기를 엮었을 것이다.

결국 최후만찬기 원형에 대한 접근은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과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에 나오는 성만찬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14,22-25)와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11,23-26)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1-4. 유대교의 회식과 과월절만찬

 

예수의 최후만찬을 이해하려면 유대교의 회식 절차와 과월절만찬 순서를 먼저 살펴야 한다. 예수의 최후만찬이 유대교 회식의 일종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과월절만찬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1) 유대교의 회식 순서

 

- 주례자 : 가장 또는 주빈

(1) 전식 : 전식이 나오면 손님 각자가 찬양기도를 바친다. 전식으로 흔히 포도주가 나왔

으니 전작이라 해도 좋다. 전식이 끝나면 손님들은 모두 손을 씻는다.

(2) 본식 : 가장이나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손님들에게 나누어 준다. 찬양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

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 새로운 음식이

올 때마다 각자 “우리 하느님이시오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포도 열매를 만드시는

주님, 찬양 받으소서”라고 기도한다. 본식이 끝나면 손님들은 모두 손을 씻는다.

(3) 후식 : 가장이나 주빈이 큰 잔(찬양의 잔 : 1고린 10,16)을 들고 긴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손수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손님들이 돌려가며 마신다. 다같이 시편을 노래

하고 친목잔치는 끝난다.

 

2) 과월절만찬 순서

 

- 주례자 : 가장 또는 주빈

(1) 첫잔 :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의 잔에 포도주를 따른 후 주빈이 찬양기도를 드린다. 찬양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하느님이시오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포도넝쿨에서 열매를 일구어내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 기도가 끝나면 다같이 잔을 비운다.

(2) 전식 : 야채와 과일을 먹는다.

(3) 과월절 기념 :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한다(과월절 하가다). 과월절이라고 이름이 붙여

진 유래와 누룩없는 빵과 쓴 야채를 먹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나서 할렐시편 전반부를 노래한다(시편 113․114편).

(4) 두 번째 잔

(5) 중식 : 가장이나 주빈이 누룩없는 빵을 집어들고 찬양기도를 드린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준다. 찬양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하느님이시오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 다같이 빵과 과월절 양을 먹는다(한조각씩 먹는데 조각의 크기는 대략 올리브 열매만하다).

(6) 세 번째 잔 겸 후식 : 중식 후에 감사하며 마시는 잔이다. 이 때 할렐시편 후반부를

바친다(시편 115-118편).

(7) 네 번째 잔

 

 

Ⅱ.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의 성만찬기

 

2-1. 서론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는 수난사화(마르 14,1-16,8) 안에 실려있다. 무교절 첫 날, 곧 과월절 양을 잡는 날 제자들은 예루살렘 시내에다 과월절만찬을 준비한다(14,12-16). 저녁 때가 되어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자리잡고 최후만찬을 시작할 때 예수께서는 어느 한 제자에게 배반당할 것을 예고하신다(14,17-21). 그리고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면서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 본 듯한 말씀과 행동을 하신다(14,22-25). 이러한 일련의 사건 전개를 통하여 복음서작가 마르코는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이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과연 마르코의 보도대로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는가? 아니면 유대교 회식의 일종으로서 단순히 제자들과의 이별만찬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제각기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우선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공관 복음서(마르 14,13; 마태 26,18; 루가 22,10)와 요한 복음서(18,1)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만찬은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두 번에 걸쳐 성 밖으로 나가신 적이 있다(마르 11,11․19). 그런데 과월절만찬은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의 관습(출애 23,14-17)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마르코 복음서 14장 12절(무교절 첫 날, 곧 과월절(양)을 잡는 날,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이 과월절 (음식)을 드시도록 저희가 가서 준비하려는데 어디가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은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음을 분명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예수께서 미리 마련하신 장소에다 제자들이 음식 준비를 하였는데 그 날은 바로 무교절 첫 날, 곧 과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다.

셋째, 예수의 최후만찬은 저녁 늦게 거행되었다(마르 14,17 : 저녁 때가 되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거기로) 가셨다).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의 식사시간은 아침과 오후였다. 특별한 경우에만 해가 진 후 저녁 늦게까지 식사가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월절 기념만찬은 저녁 늦게 먹도록 되어 있었다.

넷째, 예수의 최후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비스듬이 누워서 식사를 하였다(마르 14,18 : ἀνάκειμαι; 루가 22,14 : ἀναπίπтω). 비스듬이 누워서 식사를 하는 것은 과월절만찬 때에만 가지는 습관적인 자세였다.

다섯째, 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은 예수와 그 제자들이 식사가 시작 될 때가 아니라 식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빵을 먹은 것으로 보도한다. 이는 통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과월절 만찬 예식의 순서와 일치한다.

여섯째, 최후만찬 때 포도주를 마신 것은 이 식사가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과월절 만찬이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과월절만찬 때에는 하나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일곱째,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풀이해 주신 것(빵에 관한 설명어, 잔에 관한 설명어)은 과월절 만찬의 통상적인 관습을 따랐기 때문이다.

여덟째, 예수께서는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를 하곤 하셨다(마르 2,15; 마태 11,19). 하지만 최후만찬에 참석한 이들은 제자들뿐이었다(마르 14,20․22). 이는 이 식사가 과월절만찬이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과월절만찬에는 대략 10명 정도가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기 때문이다.

아홉째, 마르코는 이 식사가 노래를 부르면서 끝나는 것으로 보도한다(14,26 : 그리고 그들은 찬송가를 부른 다음 올리브산으로 떠나갔다). 유대인들은 과월절만찬 끝에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시편 115-118편을 노래했다. 따라서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논거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겠는가? 이제 마르코 복음서 14장 22-25절의 성만찬기를 한 절씩 살펴보면서 예수의 최후만찬은 어떤 식사였는가를 밝혀 보기로 하자.

 

2-2. 빵에 관한 설명어(22절)

 

원문 : Καὶ ἐσθιόνтων αὐтών λαβὼν ἄρтον εὐλοήσας ἔκλασεν καὶ ἔδωκεν αὐтοίς καὶ εἶπεν, Λάβεтε, тούтό ἐσтιν тὸ σώμά μου.

역문 :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습니다.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22절부터 성만찬례가 시작된다. 만일 이 성만찬례가 복음서작가 마르코가 주장하는 대로(14,12․16)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면 “그들이 먹고 있을 때”란 전식이 끝나고 본식이 시작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예수께서 식사 도중에 찬양기도를 바치신 것 역시 이 성만찬례가 과월절 기념만찬이라는 표시가 된다. 따라서 성만찬례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은 당연히 누룩없는 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22절의 도입문인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Καὶ ἐσθιόνтων αὐтών)는 절대소유격(Genitivus absolutus)으로 사용되어 마치 앞 뒤 문맥을 연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는 마르코의 편집요소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도입문은 14장 18절에서 최후만찬이 시작될 때의 도입문 “그리고 그들이 자리잡고 먹고 있을 때”(καὶ άνακειμἐνων αὐтών

και ἐσθιόνтων)의 표현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동일한 내용의 반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후만찬의 도입문이 두 번 있는 셈이다. 그리고 14장 22-25절은 앞선 사건, 곧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는 단락(14,17-21)과는 독립적으로 구성된 전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가 ‘제자의 배반 예고’(17-21절)를 최후만찬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먹고 있을 때”를 삽입하여 최후만찬 전승이라는 큰 틀 안에서 앞뒤에 놓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14장 22-25절의 단화에는 본디 예수의 이름과 그 제자들이 분명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만찬을 수난사화라는 연속적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는 과정에서 이런 언급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의 성만찬기는 마르코 복음서에 전해지는 연속적인 수난사화보다는 더 오래된 전승인데, 이것이 수난사화 전승이라는 틀 안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과월절 기념만찬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작업은 마르코가 했다기보다는 마르코 이전의 편집자가 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마르코는 수난사화 전체를 전승에서 한 묶음으로 물려받았으며 또한 절대소유격을 사용하는 문장 구성은 마르코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식사 도중에 찬양기도를 드리신 것으로 이 식사를 과월절 기념만찬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런 식사 규정은 유대교의 회식하고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유대교 회식 순서에 따르면 전식 때 손님 각자가 찬양 기도를 바친 다음 본식 때 비로소 식사 공동체가 형성된다. 마르코의 성만찬기에는 유대교 회식 중 전식 부분이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이는 실제로 전식이 있었겠지만 전승 과정 중에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빵’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르토스’ (ἄρтος)는 마르코 복음서에 22번 나오는데 모두 누룩을 넣은 일반적인 빵을 뜻한다. 그런데 구약성서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LXX)에서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번역할 때 ‘아르토스’(ἄρтος)가 아닌 ‘아쥐모스’(ἄζυμος)를 사용했다. 이 낱말은 신약성서에도 9번 나오는데, 모두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마르코의 성만찬기에는 과월절 기념만찬 때 반드시 먹게 마련인 어린 양 고기와 쓴 야채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 아닌 유대교의 회식인 일반적인 만찬으로 보면 어려움은 훨씬 줄어 들게 된다. 유대인들의 회식은 전식․본식․후식 순으로 진행된다. 손님 각자가 손을 씻고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전식, 가장이나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빵을 나누어 모든 참석자들이 다른 음식과 함께 먹는 본식, 마지막으로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 포도주를 마시는 후식, 이렇게 세 부분으로 진행된다. 바로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회식 순서에 따라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드신 것이다. 다만 마르코의 성만찬기에는 유대교의 회식 순서 중 전식 부분이 생략 되었을 뿐이다. 이 성만찬기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본식 때 가장이나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에 손님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작을 그대로 답습하셨다. 예수께서 빵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동, 곧 ‘들고’, ‘찬양하고’, ‘(빵을) 떼는’ 동사들은 유대인들의 식사에서 가장이나 주빈이 빵을 나누어 주는 과정을 암시하는 데 쓰이는 전형적인 낱말들로서 당시의 유대 문화권에서는 이미 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일반적인 만찬 순서에 따라 최후만찬을 드신 셈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빵을 나누는 그 행동 자체에는 전혀 특별할 게 없다 하겠다. 다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덧붙인 설명어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라고 하셨다. 원래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당시의 모국어인 아람어에는 “…입니다” 라는 서술법이 없이 그저 낱말들을 나열해서 동격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는 내 몸입니다”(тούтό ἐσтιν тὸ σώμά μου)를 아람어로 재번역하면 단순히 “이는 내 몸”이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수사법에는 어떤 사물의 한 부분으로 그 사물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제유법(提喩法)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 몸”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예수의 신체 중 일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빵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표현하면, “받으시오, 이는 나의 전부”가 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는 행동의 뜻은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곧,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당신 자신을 그들을 위해서 내어 준다는 생각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빵을 쪼개는 행위는 곧 닥칠 비극적 죽음을 예고하는 상징 행위라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실제로 그와같이 생각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성만찬례를 반복하던 초대교회에서는 빵을 떼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의 몸도 그처럼 찢어졌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2-3. 잔에 관한 설명어(23․24절)

 

원문 : 23절 : καὶ λαβὼν ποтήριον εὐχαρισтήσας ἔδωκεν αὐтοίς, καὶ ἔπιον ἐξ αὐтού πάνтες.

24절 : και εἶπεν αὐтοίς, Τούтό ἐσтιν τὸ αἷμá μου тής διαθήκης τὸ ἐκχυνόμενον ὑπ ὲρ πολλών.

역문 : 23절 : 또한 잔을 드시고 사례하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자 모두 그것을 (돌려)마셨다.

24절 : 그러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 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빵을 나눈 예수께서는 후식에 즈음하여 유대인들의 회식절차에 따라 찬양의 잔을 들고 사례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면서 돌려 가면서 마시라고 하셨다(23절). 22절에서는 제자들의 행동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데 비해, 23절에서는 ‘(돌려)마신다’라는 동사를 통해 제자들의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다. 또, 22절에서는 ‘찬양한다’(εὐλογἐω)라는 동사가 사용된 반면 23절에서는 ‘사례한다’(εὐχαρισтέω)라는 동사가 나온다. 이 두 낱말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이 두 낱말은 모두 식사 중 찬양기도를 바칠 때 사용된다. 그리고 찬양기도와 감사기도는 그 양식과 내용이 비슷하다. 다만 ‘사례한다’(εὐχαρισтέω) 동사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성만찬례’가 마르코 공동체 내에서는 이미 성사(聖事)라는 틀 안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3절에서도 예수의 최후만찬이 마르코의 보도대로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면, ‘잔’(οтήριον)은 중식 바로 다음의 세 번째 잔이 될 것이다. 과월절 기념만찬 시에는 빵을 나누어 먹은 후 세 번째 잔을 마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잔은 과월절만찬 때 각자 사용하는 개인용 작은 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만찬 때 사용한 잔은 그 표현 방법으로 미루어 볼 때 10여명 이상이 마실 수 있는 큰 잔이었다. 즉, 최후만찬에 참석한 이들은 각자 개인의 잔으로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잔을 돌려 마신 것이다. 23b절이 그 전거가 된다. 23b절의 “모두 그것을 (돌려)마셨다”로 번역한 “ἔπιον ἐξ αὐтού πάνтες”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모두들 그것(單數)으로부터 마셨다”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잔이 과월절만찬의 세 번째 잔이었다면 아직 마지막 잔인 네 번째 잔이 남아 있는 셈인데, 23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최후만찬은 잔을 돌림으로써 사실상 끝이 나게 된다. 따라서 ‘잔을 돌림’에 대한 보도 역시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24절은 최후만찬시 예수께서 제자들과 잔을 돌리면서 포도주 잔의 의미를 밝히신 잔에 관한 설명어이다. “이는 내 피입니다”는 예수께서 22절 빵에 관한 설명어에서 하신 말씀과 마찬가지로 서술법이 없는 아람어로 재번역하면 “이는 내 피”일 뿐이다. 또한 제유법(提喩法)에 따라 “내 피”는 내 몸 속에 흐르는 혈액만이 아니고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는 내 피입니다”는 “이는 나의 전부”라는 뜻이 된다.

잔에 관한 설명어에는 “피”(тò αἷμά)를 꾸미는 수식어가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계약의”(тής διαθήκης)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тò ἐκχυννόμενον ὑπὲρ πολλών)이다. 이 수식어에서 우리는 계약사상과 대속죄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계약사상과 대속죄사상을 밝힌 후, “피”를 꾸미는 수식어가 과연 예수께로 소급되는지, 또한 마르코 14장 24절의 “피”가 과월절 양의 피를 뜻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약사상은 탈출기 24장 4-8절에 들어있는데, 임승필 역본에 따라 그 말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놓고, 나머지 절반을 제단에 뿌렸다. 그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시나이산에서 모세는 숫송아지들을 잡고 피를 받아서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라고 외쳤다. 그 피가 바로 “계약의 피”이다. 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이것이 곧 계약사상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지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멀리하였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새로운 계약”(예레 31,31-34; 32,37-41)을 예고하셨다.

24절에 들어있는 첫 번째 수식어인 “계약의 피”(тὸ αἷμá тής διαθήκης)라는 말은 계약사상이 담겨 있는 탈출기 24장 8절(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와 이 모든 말씀대로 맺으시는 계약의 피다. … )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최후만찬 후 예수께서 곧 흘리시게 될 피가 바로 계약의 피라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수식어인 “계약의 피”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대속죄사상은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13-53,12)에 나오는데 중요한 구절들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 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도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제 자신을 내던지고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중재하였기 때문이다.”(53,11-22)

 

이 노래에는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나오는데, 이 야훼의 종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하기 위해 모진 고난을 겪고 죄인 취급을 받아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53,11), “많은 이들의 죄를 메는”(53,12) 대속죄의 죽음이었다. 이것이 곧 대속죄사상이다.

24절에 들어있는 두 번째 수식어인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피”는 이사야 53장 12절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수식어의 뜻인즉 야훼의 종처럼 예수께서도 최후만찬 후에 곧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게 될 터인데, 그 죽음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대속죄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드시면서 하신 마르코 복음서 14장 24절의 말씀에는 이러한 계약사상과 대속죄사상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주장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과연 24절 전체가 예수 자신이 직접하신 말씀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제각기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정설을 세우기란 매우 어렵다. 어쩌면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의 원형을 복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14장 24절 전체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데 있어서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할 이다.

첫째로,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의 빵에 관한 설명어(“이는 내 몸입니다”)에서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식 표현에 따라 “이는 내 몸”이 빵에 관한 설명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빵에 관한 설명어와 짝을 맞추어 잔에 관한 설명어도 본디 “이는 내 피”(마르 14,24)였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물의 한 부분으로 그 사물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유대인들의 수사법인 제유법(提喩法)에 따라 “내 피”는 내 몸 속에 흐르는 혈액만이 아니고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짐작컨대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붉은 피를 쏟으며 죽임을 당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포도주 잔의 설명어를 발설하셨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피를 수식하는 “계약의”와 “많은 사람을 위해서 쏟는”은 모세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준 계약(탈출 24,8)과 제2이사야에 실린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13-53,12)를 원용하여 예수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를 밝힌 신학리(神學理, theologumenon)라 하겠다. 예수의 피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요,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죄적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의(тής διαθήκης)와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тὸ ἐκχυννὸμενον ὑπὲρ πολλών)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여기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이 투영된 후대의 편집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대속죄사상은 구약성서의 후기 문헌에서는 오직 한 곳, 이사야 53장 12절에서만 나타난다. 더욱이 계약사상이 한 사람의 대속죄적 죽음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리고 피를 마시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스라엘인들의 피혐오사상으로 미루어 “이는 내 피”라는 잔에 관한 말씀은 해석이 없이는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내 피”라는 말씀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식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로, 14장 24b절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는 헬라어 본문을 보면 소유격 두 개가 겹친 이중 소유격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구절 특히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Τούтό ἐσтιν тὸ αἷμά μου тής διαθήκης… )를 본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이는 나의, 계약의 피로서 …”(Τούтό тὸ αἷμά μου тής διαθήκης… )가 된다. 이렇게 소유격 두 개가 겹치는 표현법은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심지어 그리스어법과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또한 “계약”이라는 낱말은 예수 전승 어느 곳에도 들어있지 않으며 바울로 이전의 전승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 낱말은 바울로 서간과 히브리서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계약의”(тής διαθήκης)라는 수식어는 전승과정 중에 불어난 첨언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로, 두 번째 수식어(“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중에서 “많은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이 본문에서는 ‘많은 이들’이 누구인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은 쿰란문헌에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쿰란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야훼의 종의 노래와 관련해서 본다면 “많은 이들”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넓은 의미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야훼의 종’이 ‘모든 민족을 위한 빛’으로 묘사되는 것과 같다(이사 42,6; 49,7․8). 따라서 “많은 이들”을 “모든 민족”으로 본다면 이 수식어에 담겨 있는 사상은 초대교회가 탄생한 후에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많은 이들”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시기는 최초의 교회가 탄생된 시기로 간주되는 성령강림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이 늘어나던 초대교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로, 바울로가 전하는 성만찬기(1고린 11,23-25)에도 잔에 관한 설명어(25절 : “이는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가 들어있는데, 이는 마르코 복음서 14장 24절과는 매우 다르다. 만일 14장 24절이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었다면, 마르코 복음서와 고린토 전서에 들어있는 두 가지 형태의 잔에 관한 설명어는 서로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발설하신 잔에 관한 말씀에다 제각기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났을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24절은 예수께서 최후만찬 자리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잔을 나누면서 “이는 내 피”라는 말씀만 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포도주 잔의 설명어에 들어있는 신학리(神學理)들은 원래의 설명어들 안에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의미를 이스라엘 사고 범주에 따라 분명히 밝힌 구원론적 의미들이라 하겠다.

 

마르코 복음서 14장 24절에도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적 기념만찬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전거가 된다. 만일 예수의 최후만찬이 복음서작가 마르코의 주장대로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면 24절의 ‘피’(тὸ αἷμα)는 과월절 양의 피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죽음의 천사를 피하기 위해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와 ‘계약의 피’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계약의 피’라는 수식어는 출애급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예수 자신을 통해 굳게 다진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로써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 아니었음이 또 다시 입증되는 셈이다.

 

2-4. 신국잔치 선언(25절)

 

원문 :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ὅτι οὐκέτι οὐ μὴ πἰω ἐκ тού γενήμαтος τής ἀμπέλου ἕως тής ἡμέρας ἐκεἰνης ὅтαν αὐтὸ πἰνω καινὸν ἐν тῇ βασιλεἰᾳ тού θεού.

역문 :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

25절의 내용은 이승에서의 단주(斷酒)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축배희망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승에서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주선언과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라는 신국잔치로 구분된다. 여기서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포도주를 뜻하며 “그 날”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25절에는 미래의 희망으로 부활의 확신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장차 ‘그 날’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잔치를 벌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에 주로 나타나 있다(이사 25,6; 63,13; 에디오피아․에녹 62,14; 시리아 바룩서 29,8). 신국잔치 사상은 신약성서에도 더러 들어 있다(마태 8,11; 22,1-14; 루가 14,16-24).

 

예수께서는 25절에 언급된 신국잔치에서 자신이 차지하게 될 어떤 특별한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예수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26장 29절(“또한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내 아버지 나라에서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이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이제부터는 다시는 마시지 않겠습니다.”)말씀처럼 제자들과 또 다시 공동 식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식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 언급한 뿐이다. 따라서 25절을 예수께서 최후만찬 자리에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몇몇 학자들은 25절을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주장하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예수께서 최후만찬시 친히 하셨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 날’, 곧 ‘예수께서 셍상에 다시 오시게 될 날’이란 이미 예수께서 부활 승천한 후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대교회의 희망이 담겨있는 표현이고, 병행문인 바울로의 성만찬기(1고린 11,25․26)에는 이런 구절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씀(14,25)은 원래 성만찬례문과는 독립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전승인데, 예수의 부활 승천을 경험한 후에 그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리던 초대교회에서 한 전승으로 섞어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의 본문 분석을 통해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최후만찬이 과월절만찬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았다. 본문 분석을 통한 논거가 아니더라도 이스라엘 최대 명절인 과월절에 체포․최고의회 심문․빌라도의 재판․처형 등 일련의 예수 사건들을 치루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요한 복음서의 증언(18,28; 19,14․31)과 일치한다.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의 예수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예수를 매달았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부려 이스라엘을 오도하고 배신토록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시오.〉그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 때 그를 매달았다.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예수를 매달았다는 바빌론 탈무드의 기록은 과월절 전날 오후에 예수를 처형했다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예수께서는 니산 14일, 곧 과월절 전날 오후에 처형되셨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처형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던 최후만찬 역시 과월절만찬이 아니라 단순한 유대교의 회식인 이별만찬이었을 것이다.

 

 

Ⅲ.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의 성만찬기

 

3-1. 서론 : 잘못된 고린토 교회의 만찬례 관행(1고린 11,17-22)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활발히 전도하고 있을 때 고린토 교회에는 여러 가지 불상사가 있었다. 바울로는 두 갈래 경로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의 소식을 들었다. 우선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고린토로부터 에페소에 와서, 고린토 교우들이 바울로파, 아폴로파, 게파파, 그리스도파들 네 파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전했다(1고린 1,11-17). 클로에가 누구인지 그 신원을 밝힐 수는 없으나, 고린토 교회의 유력한 여교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고린토 교우들이 몇 가지 문제들에 관하여 질문서를 작성하고 심부름꾼들을 시켜 바울로에게 보냈다(1고린 7,1․28; 8,1; 12,1; 16,1․12). 이 질문서를 바울로에게 전하고 그에 대한 답서로 고린토 전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간 이들이 고린토 교우들의 심부름꾼들인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였다(1고린 16,17). 이처럼 바울로는 인편과 서면으로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접하고 고린토 교우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고린토 전서 11장에서 우리가 다루게 될 성만찬기(23-26절)는 바울로가 서면보다는 인편으로 고린토 교회의 잘못된 성만찬례 관행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작성한 것이다. 성만찬 전승에 관한 기록들이 신약성서 여러 곳에 나타나 있으나 그 가운데서 고린토 전서 11장에 들어 있는 성만찬 전승이 가장 구체적이다. 특히 11장 23-26절의 성만찬기를 살펴보면 고린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에는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고스란히 본따서 성만찬례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잇다. 그런데 11장 17-22․31-34절을 보면 고린토 교우들은 먼저 애찬(공동체 회식)을 먹고 이어서 성만찬을 거행했다. 그런데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우들은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일찌감치 모여서는 자기네끼리 미리 먹고 마셨다. 그러니 가난한 교우들, 특히 주인들에게 얽매인 노예 교우들이 왔을 때는 음식이 남아 있지 않아 굶주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업신여김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11,20-22). 이에 바울로는 성만찬례를 어떻게 지내야 옳은지를 교우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본딴 성만찬기를 제시한다(11,23-26). 따라서 이 단락에서는 고린토 전서에 나타난 성만찬기를 다루기에 앞서 성만찬례를 거행할 때 저지른 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11장 17-22절을 간략하게 살피고자 한다.

원 문

역 문

17 Τούτο δὲ παραγγέλλων οὐκ ἐπαινώ ὅτι οὐκ εἰς τὸ κρείσσον ἀλλἀ εἰς τὸ ἧσσον συνἐρΧεσθε.

 

17 그런데 나는 이것을 지시하면서, 여러분이 더 좋은 것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나쁜 것을 위하여 함께 모이고 있는 것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18 πρώτον μὲν γὰρ συνερΧομένων ὑμών ἐν ἐκκλησίᾳ ἀκούω σΧίσματα ἐν ὑμίν ὑπάρΧειν καὶ μέρος τι ποτεύω.

18 우선 여러분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들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얼마만큼은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δεί γὰρ κὰὶ αἱρέσεις ἐν ὑμίν εἶναι, ἵνα [καὶ] οἱ δόκιμοι φανεροὶ γένωνται ἐν ὑμίν.

 

19 하긴 여러분 가운데에는 파당들이 있어야 입증된 이들이 여러분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0 ΣυνερΧομένων οὖν ὑμών ἐπὶ τὸ αὐτὸ

οὐκ ἔστιν κυριακὸν δείπνον φαγείν.

 

20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일 때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21 ἕκαστος γὰρ τὸ ἴδιον δείπνον προλαμβάνει ἐν τῷ φαγείν, καὶ ὃς μὲν πεινᾷ ς δὲ μεθύει.

 

21. 식사 때에 제각기 자기 만찬을 미리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굶주리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22 μὴ yὰρ οἰκίας οὐκ ἔΧετε εἰς τὸ ἐσθἰειν καὶ πίνειν; ἢ τής ἐκκλησίας τού θεού καταφρονείτε καὶ καταισΧύνετε τοὺς μὴ ἔΧοντας; τἰ εἴπω ὑμίν;

ἐπαινέσω ὑμάς; ἐν τούτῳ οὐκ ἐπαινώ.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며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 이점에 있어서는 나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17절

 

원문 : Τούτο δὲ παραγγέλλων οὐκ ἐπαινώ ὅτι οὐκ εἰς τὸ κρείσσον ἀλλἀ εἰς τὸ ἧσσον

συνέρΧεσθε.

역문 : 그런데 나는 이것을 지시하면서, 여러분이 더 좋은 것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결과적 으로) 더 나쁜 것을 위하여 함께 모이고 있는 것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11장 2절에서 고린토 교우들이 자신이 전해준 전승들을 잘 간직하고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고린토 교회를 칭찬한 바 있다. 그러나 바울로는 교우들이 모여서 성만찬례를 거행할 때 생기는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그 공동체를 나무라고 있다. 그것은 교우들이 더 좋은 것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더 나쁜 것을 위하여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συνέρΧεσμαι(함께 모이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이 모임은 단순히 친목모임이 아니라 공동체의 전례모임임이 분명하다. 이 낱말은 바울로 친서에 7번 나오는데 모두 고린토 전서에만 나오고 있으며, 17절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낱말은 공동체의 모임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고린토 교우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했기에 바울로가 교우들을 나무라는지는 이 구절로 보아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18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18절

원문 : πρώτον μὲν γὰρ συνερΧομένων ὑμών ἐν ἐκκλησίᾳ ἀκούω σΧίσματα ἐν ὑμίν ὑπάρΧειν

καὶ μέρος τι ποτεύω.

역문 : 우선 여러분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들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얼마만큼은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바울로는 18절에서 비로소 고린토 교우들이 나쁜 것을 위하여 모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고린토 교우들 사이에 분열들(σΧἰσματα)이 있다는 것이다.바울로는 그와 같은 소식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로가 얼마만큼은(μέρος τι) 사실이라고 말한 것은 그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내에 분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로가 이 구절에서 언급한 분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밝히기란 쉽지 않다. 고린토 전서 1장 10-14절에서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들을 언급하면서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σΧἰσματα”라는 낱말을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몇몇 학자들은 18절의 분열들이 1장 10-14절에 나오는 분열들, 곧 파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1-4장에서 고린토 교회의 내부 문제를 다루었는데, 첫머리에서 교우들이 여러 갈래로 갈린 사실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 “여러분은 저마다 말합니다. ‘나는 바울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게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1고린 1,12). 이 말씀에 의하면 고린토 교회에는 여러 파당이 생겨 교우들끼리 서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11장 18절에서 바울로가 언급한 내용들은 파당이 생겨 교우들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는 의미보다는 11장 20-22절의 의미로 보아 부유한 교우들과 가난한 교우들 사이에 생겨나는 분열, 곧 사회․경제적인 차별에서 오는 분열들이라 할 수 있다.

둘째, 1장 12절에서 바울로는 구체적으로 네 당파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당파들 사이에 서로 싸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바울로를 반대하는 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11장 17-22절에는 오직 두 가지 계층, 곧 부유한 교우들과 가난한 교우들만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바울로파와 바울로를 반대하는 파의 싸움을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셋째, 18절의 “얼마만큼은 (사실이라고) 믿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분열의 상황이 1장 10-14절보다는 11장 17-22절과 더 잘 어울린다. 그것은 18절에서 말하는 분열들이 1장 10-14절의 파당들을 가리킨다면 “얼마만큼은”(μέρος τι)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로는 18절에서 다른 분열들, 곧 교우들 간의 사회적 차별들을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고린토 교회에 교우들이 모일 때 생겨나는 문제들은 교우들 사이의 사회적 차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 문제를 좀더 깊이 연구한 이가 G. Theißen으로 그는 특별히 네 가지 사항을 상세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주장이 매우 흥미롭다.

첫째, G. Theißen은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차별에 대하여 동의한다. 그들은 교회내에서 두 집단을 이루었으며 이는 교회내의 ‘분열’에 대한 바울로의 비난을 설명해 준다. 바울로가 21절에서 제각기 ‘자기 만찬’을 먹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G. Theißen은 이 만찬이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주님의 만찬’과 대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부유한 이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지 않고 자신들만이 먹었던 것이다.

둘째, 대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G. Theißen은 고린토 교회에서 빵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은 두 가지 분리된 동작인데 하나는 식사 전에 다른 하나는 식사 후에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단 빵에 관한 설명어로써 공동식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유한 교우들이 식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셋째, G. Theißen은 21절을 ‘식사 중에 제각기 자기가 가져온 음식만을 먹는다’는 뜻으로 풀이하여 공동식사를 하는 동안 부유한 이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를 내놓았으나 일부는 자신들을 위해서 남겨 두었다고 주장한다. 즉, 교우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별은 먹을 음식의 분량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G. Theißen은 음식의 양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고 주장한다. 부유한 이들은 고기 생선 또는 그 밖의 맛있는 것들을 가지고 왔는데, 주님의 성만찬 규정이 빵과 포도주만을 먹고 마시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부유한 이들은 다른 음식까지 나누어 먹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린토 교회의 부유한 교우들은 가난한 교우들에게 행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G. Theißen은 주장한다.

G. Theißen의 이러한 주장은 고린토 교회에서 주님의 성만찬 때 교우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매우 흥미롭지만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긴 식사에 의해서 분리되었다는 주장은 성만찬례 규정이나 유대교의 회식 순서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부유한 교우들이 빵과 포도주만을 먹고 마셨다는 주장 역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기에 앞서 ‘애찬'을 뜻하는 공동체 회식을 미리 먹은 점으로 미루어 옳지 않다.

18절과 21절이 뜻하는 바는 교우들이 주님의 성만찬을 거행하기 위해서 함께 모였을 때 미리 온 교우들, 특히 부유한 교우들은 늦게 오는 가난한 교우들을 생각해서 가져 온 음식을 미리 먹어서는 안 되고 기다렸다가 다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함께 공동체 식사를 하고 나서 곧바로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8절에서 표현상 문제가 되는 것은 “πρώτον μὲν(첫째로)의 용법이다. “πρώτον μὲν(첫째로)이 나오면 으레 뒤에는 “δεύτερον δὲ(둘째로)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 구절뿐만 아니라 11장 전체에 “δεύτερον δὲ”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δεύτερον δὲ”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20절의 “οὐυ(그러니), 34절의 “τὰ λοιπὰ(나머지 일) 그리고 12-14장의 영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다룬 내용 안에 그 의미가 간접적으로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πρώτον μὲν”과 “δεύτερον δὲ”의 문법상의 일치를 주장하기 위하여 내세운 설에 불과하다. “πρώτον μὲν”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해서 반드시 “δεύτερον δὲ”라는 표현이 생각된 것은 단순히 문법적인 어색함만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πρώτον μὲν”을 ‘첫째로’ 보다는 단순히 ‘우선’으로 번역하면 무난한 것이다.

 

19절

원문 : δεί γὰρ καὶ αἱρέσεις ἐν ὑμίν εἶναι, ἵνα [καὶ] οἱ δόκιμοι φανεροὶ γένωνται ἐν

ὑμίν.

역문: 하긴 여러분 가운데에는 파당들이 있어야 입증된 이들이 여러분 가운데서 밝히 드러 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로는 19절에서 교우들 사이에 파당들이 있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즉, 파당들이 있어야 입증된 이들(δόκιμοι)이 공동체 내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입증된 이들이 밝히 드러난다는 말씀을 원시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적 사조에 근거하여 종말론적인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즉, 공동체 내에 파당들이 있어야 누가 참된 교우인지가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당들은 참된 교우들과 거짓 교우들을 구분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11장 30절에서 바울로가 고린토 교우들 가운데 병자들과 허약한 이들이 많다고 말한 것은 파당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을 종말이 오면 하느님께서 밀과 가라지를 가르듯이 참 교우들과 거짓 교우들을 가른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파당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의미보다는 바울로가 공동체 내에 파당들이 있음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겨 한 말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입증된 이들(δόκιμοι)이란 파당행위를 하지 않고 일치를 이루는 일에 힘쓰는 교우들로 보아야 한다. 곧, 이들은 분열들에 개입하지 않고 공동체의 형제적 일치를 위하여 애쓰는 교우들이다.

 

19절에서는 18절에서 사용된 ‘분열들’(σΧἰσματα)이라는 낱말과는 달리 ‘파당들’(αἱρέσεις)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이 두 낱말의 의미가 서로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두 낱말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나, 문맥으로 보아 낱말이 서로 달리 사용되었다고 하여 의미까지 변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굳이 구별한다면 파당들(αἱρέσεις)은 분열들(σΧἰσματ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절의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우들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 거기에는 결코 분열들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고린토 교회에는 안타깝게도 분열들로 말미암아 파당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이 파당들에 휩쓸리지 않고 형제적 사랑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애쓰는 입증된 교우들, 곧 참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20절

원문 : ΣυνερΧομένων οὖν ὑμών ἐπὶ τὸ αὐτὸ οὐκ ἔστιν κυριακὸν δείπνον φαγείν.

역문 :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일 때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 닙니다.

 

고린토 교우들은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인 교우들 사이에 분열들로 말미암아 파당들이 생겨났다. 그러니 교우들이 먹는 것은 더 이상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고 바울로는 말한다. 여기서 ‘한 자리에’(ἐπὶ τὸ αὐτὸ)라는 표현은 18절에 나오는 ‘교회에’(ἐν ἐκκλησίᾳ)와 같은 의미이다. 이 장소는 대체로 부유한 교우들의 집이었을 것이다. 고린토 교우들은 예배 시 어느 한 교우의 집에서만 모인 것이 아니라 여러 교우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모임을 가졌었다. 이런 다양한 가정 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공동체내에 분열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럼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언제 모였었는가? 이에 대해서 바울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20-22절을 보면 고린토 공동체가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모인 때는 저녁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잡수신 마지막 식사는 만찬이었으며, 노예들이나 가난한 교우들이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때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6-2(성만찬 일시)에서 다시 논하겠다 그럼 어느날 저녁이었을까? 그 날은 토요일 저녁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서는 ‘만찬’이라는 낱말 앞에 ‘주님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독특하다. ‘주님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이 식사는 보통 식사가 아니라 주 예수와 관련이 있는 식사라는 뜻이다. 예수의 최후만찬과 수난을 되새기고 부활하여 빵과 포도주로 현존하는 주님을 기리며 장차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다함께 나누는 만찬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먹는 ‘주님의 만찬’은 초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최후만찬을 이어받아 거행한 거룩한 만찬 예식, 곧 성만찬례를 가리킨다 하겠다.

 

21절

원문 : ἕκαστος γὰρ τὸ ἴδιον δείπνον προλαμβάνει ἐν τῷ φαyείν, καὶ ὃς μὲν πεινᾷ ὃς δὲ μεθύει.

역문 : 식사 때에 제각기 자기 만찬을 미리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굶주리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21절에 비로소 고린토 교회 교우들의 잘못된 관행이 언급되고 있다. 고린토 교회는 ‘주님의 만찬’을 먹기 전에 교우들이 가져온 음식 중에 일부를 먹는 공동체 식사를 하고 이어서 ‘주님의 만찬’을 거행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우들은 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일찌감치 모여서는 자기네끼리 다 먹어버리곤 하였다. 그러니 가난한 교우들, 특히 노예신분의 교우들이 거의 빈손으로 늦게 와 보면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바울로가 교우들을 나무라는 것을 보면 가져온 음식은 늦게 온 교우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오면 함께 먹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온 교우들은 가난한 교우들이 오기 전에 미리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셨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미리 취하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굶주리게 되었다. 먼저 온 부유한 교우들이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몫으로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어버린다면 늦게 온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줄 몫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결국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찬’을 먹는 것이다.

 

21절에 나타나 있는 “ἕκαστος(제각기)와 “ἴδιον(자기의) 그리고 “προλαμβάνω(미리 들다)를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서 예배 때 고린토 교회 교우들의 잘못된 관행을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있다. 즉, 고린토 교회 교우들을 바울로가 나무라는 이유가 부유한 교우들이 늦게 오는 교우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어서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가난한 교우들과 나누지 않고 자신들의 좋은 음식만을 먹어서인지 하는 문제이다.

 

21절에서 “ἕκαστος(제각기)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부유한 교우들임에 틀림없다. 22절에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식을 가져올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임 때 미리 온 사람들인 것으로 보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은 22절의 “없는 사람들”(μη ἔΧοντες)과 구별되는 계층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만찬”(τὸ ἴδιον δείπνον)은 20절에 나오는 “주님의 만찬”(κυριακὸν δείπνον)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자기 만찬”은 분명히 모임 때 교우들이 가지고 온 음식이다.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기 전에 자신들이 가져 온 음식 중에 일부를 먹는 “보통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 “보통식사” 역시 늦게 온 교우들과 함께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리 온 부유한 교우들은 이 규정을 어기고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가져 온 음식만을 먹어서가 아니라 가져온 음식을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미리 먹었기 때문이다. 이는 “προλαμβάνω(미리들다) 동사의 의미로 보아 분명하다.

 

προλαμβάνω” 동사는 신약성서에 모두 세 번 나온다. 하지만 이 낱말은 세 곳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낱말을 어느 한 가지 고정된 의미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προλαμβάνω” 동사는 “προ”라는 전치사와 “λαμβάνω”라는 동사가 합쳐진 낱말이다. “προ는 “앞”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시간적인 앞’ 일 수도 있고 ‘장소적인 앞’ 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을 보아 ‘시간적인 앞’으로 보아야 한다. 또 “λαμβάνω” 동사는 ‘먹다’․‘취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προλαμβάνω” 동사는 “앞서서 먹다”, “미리 먹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11장 33절의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33절에서 바울로는 교우들에게 모여서 먹을 때는 “서로 기다리라”(ἀλλήλους ἐκδέΧεσθε)고 권면한다. 즉, 교우들이 교회에 모여서 식사를 할 때 먼저 온 교우들은 늦게 오는 교우들을 생각해서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온 교우들이 미리 먹게 되면 늦게 오는 교우들은 자연 굶주리게 된다.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 교우들을 나무라는 것은 먼저 온 교우들이 늦게 오는 교우들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리 온 교우들이 자신들의 음식만을 먹었기 때문에 고린토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22절

원문 : μὴ γὰρ οἰκίας οὐκ ἔΧετε εἰς τὸ ἐσθἰειν καὶ πίνειν; ἢ τής ἐκκλησίας τού θεού

καταφρονείτε καὶ καταισΧύνετε τοὺς μὴ ἔΧοντας; τἰ εἴπω ὑμίν; ἐπαινέσω ὑμάς; ἐν

τούτῳ οὐκ ἐπαινώ.

역문 :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며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 이점에 있어서는 나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교회에 함께 모여서 주님의 만찬, 곧 성만찬례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에 분열로 말미암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바울로는 11장 17절에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 공동체를 칭찬할 수 없다고 하였다. 11장 22절에서 바울로는 또 다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을 칭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로는 부유한 교우들이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는 행위를 개탄하였다. 바울로는 11장 33․34절에서 누가 배가 고프면 집에서 미리 먹도록 하고 공동체에 모여서는 미리 먹는 일이 없이 서로 기다려야 한다고 권면했다.

공동체가 모였을 때 다른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먹는 행위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려고 모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술취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고린토 교회에서 이러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22절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하여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형제적 사랑이 깨지는 것을 바울로가 개탄한 점으로 미루어 이들은 공동체 정신과 형제적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가난한 교우들은 일 때문에 어느 가정집에서 거행된 “주님의 만찬”에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갈 음식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부유한 교우들은 이러한 없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미리 서둘러 먹곤 하였다. 바울로는 공동체에서 중요한 덕목인 “사귐과 나눔과 섬김”을 깨뜨리는 부유한 교우들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랐던 것이다.

 

바울로는 22절에서 교우들에게 소위 “애찬”이라고 하는 공동체 회식과 그 뒤에 거행되는 “성만찬”이라는 성사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성만찬례가 고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성사적 축제임에는 틀림없느나 이 성만찬례 이전에 먹는 공동체 회식을 중요하게 생각함이 없이 오직 성사의 실행에만 강조점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이렇게 “일상적인 삶”과 “성사”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공동체의 식사는 함께 음식을 나눔으로써 친교와 연대감을 증진하여 교우들 상호간에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공동체 회식이 단순히 개인의 배를 채우는 일로 그쳐 버린다면 그것은 개인식사와 다를 바가 없다. 단순히 개인의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공동의 만찬에 와서 먹을 필요가 없고 차라리 자기 집에서 혼자 먹는 것이 낫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라는 22절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공동체 회식을 원래의 취지대로 행하지 않고 개인식사의 자리로 전락시키는 것은 질책을 받아야 할 행위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회식을 개인식사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서는 성만찬례를 본래적 의미대로 거행할 수 없다. 따라서 애찬을 올바로 행하느냐 못하느냐가 성만찬을 올바로 행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전제조건이 된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성만찬례가 잘못 행해지고 있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고린토 교회 교우들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성만찬례를 올바르게 거행하기 위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성만찬례 거행과 관련하여 바울로가 교우들에게 내린 책망과 권고를 근거로하여 고린토 교회에서 성만찬례가 어떻게 오용되었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린토 교회에서는 교우들이 애찬을 먼저하고 난 다음에(11,21-22) 성만찬례를 거행했다.

둘째, 애찬 때 먹는 음식은 교우들 각자가 마련하여 가져왔으며 성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각기 자기 음식을 제멋대로 먼저 먹었다. 그 결과로 성만찬례가 거행되기 전에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기도 하였다(11,22).

셋째, 이로 말미암아 공동체 안에서 가진 사람과 못가진 사람, 곧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기고 공동체가 분열되었다(11,18).

넷째, 그러므로 교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음식을 먹지만 그것은 주님의 만찬, 곧 성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로는 비판하였다(11,20).

다섯째,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이런 식으로 모여서 이런 식으로 애찬을 먹고 성만찬을 먹는 것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 보다는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바울로는 평가했다(11,17).

여섯째,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의 잘못된 성만찬례 관행을 서술하고 나서 이런 현상을 야기시킨 사람들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11,22a).

∙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며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11,22b).

∙ "내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11,22c).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바울로는 11장 17-22절에서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주님의 만찬”을 거행할 때 저지른 비리에 대하여 개탄하였다. 바울로는 특히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하여 교회에 모인 교우들 사이에 분열들로 말미암아 파당들이 형성된 데 대하여 교우들을 나무라고 있다. 이에 바울로는 “성만찬례”를 어떻게 지내야 옳은지를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전해받은 성만찬기를 그 모범으로 제시한다(11,23-26). 이 성만찬기는 예수님의 최후만찬의 핵심부분을 집약한 최후만찬기인 만큼 바울로는 이를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한다(11,23). 이제 바울로가 전해받아 고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전해 준 “성만찬기”(11,23-26)를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3-2. 고린토 전서 11장 23-26절의 성만찬기

원 문

역 문

 

23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ύ κυρίου, ὃ καί παρέδωκα ὑμίν, ὅτι ὁ κύριος Ἰη-σούς ἐν τῇ νυκτὶ ᾗ παρεδίδετο ἔλαβεν ἄρτον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들은 사실 내가 주님께로부터 전해 받은 것들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는 당신이 넘겨지시던 밤에 빵을 드시고,

24 καί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καί εἶπεν, Τού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ώμα τὸ ὑπὲρ ὑμών̇

τούτο ποιεί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4 사례하신 다음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기억을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25 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ήσαι λέγων,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ο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τούτο ποιείτε, ὁσάκις ἐὰ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5 같은 모양으로 만찬 후에 또한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여러분은 마실때마다 나의 기억을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26 ὁσάκις γὰρ ἐὰν ἐσθίητε τὸν ἄρτον

τούτον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πίνητε, τὸν

θάνατον τού κυρίου καταγγέλλετε ἄΧρις οὗ ἔλθῃ̇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11장 17-22절에서 고린토 교회의 잘못된 만찬례 관행을 개탄하였다. 만찬례에 참석한 교우들, 특히 부유한 교우들이 만찬례에 늦게 올 수밖에 없는 가난한 교우들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서둘러 먹는 바람에 한편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잘 먹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생기게 되어 만찬례가 그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로는 올바른 만찬례 거행을 위하여 자신이 전해 받은 성만찬 전승(11,23-26)을 교우들에게 지시한다. 바울로는 이 성만찬기를 주님께로부터 전해받았다고 한다. 이제 마르코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성만찬기(14,22-25)와 비교해 가면서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를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3-2-1. 도입문(23a절)

 

원문 : Ἐγὼ γὰρ παρέλαβον ἀπὸ τού κυρίου, ὃ καί παρέδωκα ὑμίν,

역문 :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들은 사실 내가 주님께로부터 전해 받은 것들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의 잘못된 만찬례 관행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공동체에 예수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성만찬 전승(11, 23-26)을 제시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23a절에서 바울로가 만찬례 전승을 “주님께로부터”(ἀπὸ τού κυρίου) “전해 받아”(παρέλαβον) 교우들에게 “전해 준”(παρέδωκα) 것이라고 표현한 데서 잘 드러난다. 곧 자신이 전한 만찬례 전승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이 구절에서 ‘전해 주다’(παραδίδωμι)와 ‘전해 받다’(παραλαμβάνω)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동사들은 유대교에서 랍비들이 ‘전승 문장’들을 전수하는 데 사용했던 전문용어들(termini technici)로서 히브리어 ן󰗬 ל󰗒󰙎과 󰗡 ד󰘎󰗫의 헬라어식 표현이다. 또한 이 동사들은 헬라 세계에서도 사용되던 전문용어들로서 유대교 어법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오래 전부터 이 동사들은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이와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전통학파의 계승이나 밀의 종교에서 입회자에게 계시되는 비밀을 가리킬 때도 이 전문용어들이 사용되었다. παραλαμβάνω(전해 받다) 동사는 신약성서에 모두 49번 나오는데 고린토 전서에는 3번(11,23; 15,1a․3a) 나온다. 그리고 παραδίδωμι(전해 주다) 동사는 신약성서에 모두 120번 나오는데 고린토 전서에 7번(5,5; 12,2․23․23; 13,3; 15,3․24), 고린토 후서에는 1번(4,11) 나온다.

바울로는 계속해서 이 전승을 “주님께로부터”(ἀπό τού κυρίου) 전해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로는 여러 공동체에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좋은 예가 갈라디아서 1장 12절이다. 바울로는 갈라 1,12에서 “실상 나는 이 (복음)을 사람에게서(παρὰ ἀνθρώπου)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라고 단언한다. 23a절의 “주님께로부터”에서 “… 로부터”에 해당하는 전치사는 ‘아포’(ἀπό)이다. 그런데 갈라 1장 12절에서 사람에게서 받지 않았다고 할 때는 ‘아포’ 대신에 ‘파라’(παρά)라는 전치사를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파라’(παρά)라는 전치사는 인간적인 권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내고(갈라 1,12; 1디모 2,13; 2디모 3,6; 4,1), ‘아포’(ἀπό)라는 전치사는 주님의 계시가 말로 드러날 때 사용된다(갈라 1,1).

 

23a절의 말씀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바울로가 갈라 1,12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 성만찬 전승을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목격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과 행적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고 이를 전해 받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이 성만찬 전승이 원래 그대로 바울로에게 전해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즉, 바울로가 이 성만찬 전승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전달과정을 통하여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바울로가 성만찬 전승을 주님께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직접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가하면 바울로가 이 만찬례 전승을 예수의 최후만찬을 목격한 증인을 통해서 직접 받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만찬례 전승은 최후만찬 시에 예수께서 행하신 바를 목격한 증인이 전한 기사가 아니라 단지 초대교회의 전례적 전승을 수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표현은, 이 성만찬 전승이 전승자들의 입과 입을 통해 바울로에게 전해내려 왔는데 비록 그 성만찬기가 예수님의 최후만찬 형태와 똑같은 형태로 전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내용과 의미만큼은 최후만찬에서 유래했음이 틀림없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바울로가 전한 성만찬기는 초대교회의 전승이다. 바울로가 이 전승을 어디에서 전해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다마스커스나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교회들은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온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성만찬 전승은 궁극적으로 예루살렘 공동체로부터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성만찬 전승이 계시에 의해서 직접 바울로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있는 성만찬기와 유사하다는 점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바울로가 이 성만찬 전승을 환상이나 계시를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

 

3-2-2. 빵에 관한 설명어(23b절․24a절)

 

원문 : 23b절 : ὅτι ὁ κύριος Ἰησούς ἐν τῇ νυκτὶ ᾗ παρεδίδετο ἔλαβεν ἄρτον

24a절 : καί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καί εἶπεν, Τού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ώμα τὸ ὑπὲρ ὑμών̇

역문 : 23b절 : 곧, 주 예수께서는 당신이 넘겨지시던 밤에 빵을 드시고,

24a절 : 사례하신 다음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

 

23b절․24a절은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빵을 손에 드시고 사례하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신 후 하신 말씀, 곧 빵에 관한 설명어이다. 바울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는 주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밤이라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넘겨 지다”(παρεδίδετο)동사는 23a절의 “전해주다”(παραδίδωμι)동사의 수동형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내어 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다른 이들에게 넘겨졌다는 뜻이 된다. “넘겨 지다” 동사는 공관 복음에선 수난예고, 유다의 배반등 수난사화 전승과 연결되어있다. 마르코 수난사화를 보면 유다 이스가리옷이 예수를 대제관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약속(14,10․44)과 최고의회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씀(15,1)에 이 “넘겨 주다”(παραδίδωμι) 동사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 이 낱말이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이 만찬례 전승이 예수께서 처형되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로 역시 예수께서 하느님에 의해 죽음으로 넘겨지셨다는 표현을 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수난사화에 나오는 고정된 모티브를 지닌 낱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사가 유다 이스가리옷이 예수를 대제관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약속에 사용되었다해서 23b절의 ‘넘겨지다’ 동사를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과 연결시키는 이들이 있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넘겨지다’ 동사가 사용된 이유는 이 만찬례 전승이 예수의 수난사화 전승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 결코 유다의 배반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단지 적수들에게 넘겨지셔서 수난을 당하셨다는 말이며,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넘겨지셨는지는 이 구절엔 언급이 없다. 바울로가 이 동사를 사용한 용례를 통해서 보면 하느님에 의해 예수가 죽음으로 넘겨졌다는 뜻으로 보면 무난하다. 따라서 23b절의 ‘넘겨지다’ 동사를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이제 빵에 관한 설명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는 마르코 복음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유대교 회식 중 전식(前食) 부분이 없다. 실제로 전식이 있었겠지만 전승과정 중에 생략되었다. 본식(本食)으로 들어가서 가장이나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에 떼어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는 동작을 예수께서는 그대로 답습하셨다. 여기서 “떼다” 동사는 마르코의 성만찬기에서 처럼 단순과거(ἔκλασεν : 마르 14,22)로 되어 있다. 이는 빵을 떼는 동작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빵을 떼는 동작이 끝난 다음에 무슨 동작이 이어졌는가? 두 만찬기를 비교하면 “떼다”동사 다음에 나오는 동작이 서로 다르다. 고린토 전서엔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이고, 마르코 복음서엔 “그리고 그들에게 주셨다”이다. “빵을 떼다”라는 표현에는 경우에 따라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고 나누어 먹는 것까지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 “떼다” 동사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동사가 잇따르는 것을 보면 고린토 전서에 나오는 “떼다” 동사 속에 나누어 주는 뜻이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동작은 유대교 회식 때의 동작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겠다. 다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독특하다. 고린토 전서에서 빵을 떼어 주신 후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 라고 하셨고, 마르코 복음에선 단지 “이는 내 몸입니다”(14,22)라고만 하셨다. “이는”(Τούτό)은 물론 빵을 가리킨다.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에서 풀이한 대로 “이는 내 몸입니다”는 “… 입니다”라는 서술법이 없는 아람어식으로 표현하면 “이는 내 몸”이 된다. 또한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의미하는 제유법(提喩法)에 따라 풀이하면 “이는 내 전부”가 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주신 행동의 뜻인즉,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것이다. 당신은 위타사(爲他死)를 결행하시겠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 분석 참조).

 

“이는 내 몸입니다”를 꾸미는 수식어가 바울로의 성만찬기에선 “여러분을 위하는”(τὸ ὑπὲρ ὑμών)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에는 이러한 수식어가 없다.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와 고린토 전서에 채록된 성만찬 전승을 혼합한 루가의 성만찬기에선 빵 설명어가 예수님의 헌신적 삶을 더욱 분명히 해서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 내 몸입니다”(루가 22,19b)이다. 세 만찬기에 실린 빵 설명어의 수식어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코복음서 (14,22)

루가복음서 (22,19b)

고린토전서 (1고린 11,24a)

 

τὸ ὑπὲρ ὑμών διδόμενον

: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

τὸ ὑπὲρ ὑμών

: 여러분을 위하는

루가 복음서와 고린토 전서에 나오는 수식어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죄적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수식어를 통해서 예수 십자가 사건의 대속죄적 의미를 밝힌 문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교회의 성만찬을 반영하는 것으로, 아무래도 전승 또는 편집 과정 중에 덧붙인 가필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만찬례 때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을 반복할 때면, 과거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죄적 죽음이었음을 상기했다. 또한 빵이라는 상징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빵을 배령할 때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신다고 믿었고(1고린 10,16), 아울러 대속죄적 죽음의 은혜를 입는다고 확신했다.

고린토 전서의 “여러분을 위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마르코 복음서의 빵 설명어에는 없고 그대신 잔 설명어에 다른 형태, 곧 “많은 이들을 위해서”(ὑπὲρ πολλών : 마르 14,24)로 나타난다. 마르 14장 24절에서 살펴본 대로 “많은 이들”은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 하지만 고린토 전서의 수식어에 나오는 “여러분”은 좁은 의미로는 최후만찬에 참석했던 제자들일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이 편지의 수신인인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일 것이다. 고린토 전서의 빵 설명어와 마르코 복음서의 잔 설명어에 나오는 수식어 중 어느 쪽이 더 오래된 전승인가를 밝히기란 매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여러분을 위하는”이 더 오래된 권위있는 전승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는 표현에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초대교회의 신학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많은 이들을 위해서”가 더 오래된 전승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원래 아람어식 표현에 의하면 “ὑπὲρ πολλών(많은 이들을 위해서)이 더 오래된 전승인데 바울로가 예수의 대속죄적 죽음을 통한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ὑπὲρ ὑμών(여러분을 위하는)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단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겠다고만 말씀하셨는데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예수의 죽음이 대속죄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를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후자의 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위하는” 은 바울로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특히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1고린 1,13; 로마 14,15). 즉, “여러분을 위하는”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진 첨가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위해서”는 셈족어권에서 흔히 “모든 민족을 위해서”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도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마르코 복음서의 “많은 이들을 위해서”가 고린토 전서의 “여러분을 위하는”보다 더 오래된 전승이라 할지라도 이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마르 14장 24절 풀이에서 밝혔듯이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던 초대교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첨가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3-2-3. 잔에 관한 설명어(25a절)

원문 : 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ήσαι λέγων,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ο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역문 : 같은 모양으로 만찬 후에 또한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후식(後食)에 즈음하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식 절차에 따라 찬양의 잔(1고린 10,16)을 들고 긴 찬양기도를 바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잔을 돌린다. 여기서 “만찬 후에”라는 표현은 방금 나누어 받은 빵을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저녁 음식을 먹었음을 뜻한다. 이를 근거로해서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 성만찬례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즉, 성만찬은 공동체 회식이라고 하는 애찬과 함께 베풀어졌는데 빵을 나누는 행위와 잔을 나누는 행위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 두 행위 사이에 만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린토 전서 11잔 24a절과 마르코 복음서 14장 22절에 나타나 있는 빵에 관한 말씀에는 큰 차이가 없다. 1고린 11,24a절에도 “이는 내 몸입니다” (Τού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ώμα)이고 마르 14장 22절에도 “이는 내 몸입니다.”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σώμα μού)이다. 차이가 있다면 소유대명사 “μού”가 고린토 전서에서 Τούτόἐστιν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정도이다. 이는 마르코의 빵 말씀은 셈어적인 용법을, 고린토 전서의 빵 말씀은 그리스적인 어법을 따랐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뿐이다. 빵에 관한 말씀과는 달리 잔에 관한 말씀에는 두 보도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마르코와 고린토 전서의 잔에 관한 말씀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마르 14,24

1고린 11,25a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ίς, Τούτό ἐοτιν τὸ αἷμά

μου τής διαθήκης τὸ ἐκΧυννὸμενονὑπὲρ

πολλών.

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ήσαι λέγων, Τού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그러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같은 모양으로 만찬 후에 또 한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포도주 잔의 설명어는 위의 도표처럼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이 두 가지 형태 중 어느 것이 과연 예수님의 발설인지 밝혀내기란 매우 어렵다. 원형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두 가지 형태에 드러나 있는 차이점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르 14장 24절에 ‘피’가 서술부에 위치해 있는 데 반해서 1고린 11장 25절엔 그 자리에 ‘잔’이 들어가 있다.

둘째, 빵 설명어와 잔 설명어를 비교하면, 마르코의 성만찬기엔 ‘몸’과 ‘피’(14,22․24)가 대칭을 이루는 데 반해서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엔 ‘몸’과 ‘계약’(11, 24․25)이 대칭을 이룬다.

셋째, 마르 14장 24절엔 단순히 ‘계약’(διαθήκη) 으로만 나오는데 반해서 1고린 11장 25절엔 ‘계약’앞에 ‘새로운’(καινός)이라는 형용사가 나온다.

 

이 세 가지 차이점들에 대해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마르 14장 22절 주석에서 아람어로 “이는 내 몸”이 빵 설명어 원형에 가깝다고 풀이했다. 그리고 1고린 11장 24a절에선 빵 설명어인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는 설명어 원형에 함축된 의미를 밝혀 예수의 죽음을 대속죄사라고 풀이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풀이는 전승 과정 중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빵 설명어는 “이는 내 몸”이 원형에 가깝다고 하겠다. 빵 설명어와 짝을 맞추어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포도주 잔의 설명어도 원래는 “이는 내 피”(마르 14,24)였을 것이다. 이를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표시하면 “덴 이드미”(י󰗬דאּ ן󰕒)가 된다. 그리고 “내 피”를 꾸미는 수식어인 “계약의”(της διαθήκης)와 “많은 이을 위해서 쏟는”(τὸ ἐκΧυννόμενον ὑπὲρ πολλών)은 모세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준 계약(탈출 24,8)과 제2이사야에 실린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13-53,12)를 원용하여 예수의 구원론적 의미를 밝힌 신학리(神學理, theologumenon)라는 점을 이미 살펴 보았다(마르 14장 24절 주석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1고린 11장 25절에 나오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역시 또 다른 신학리로서, 여기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예레 31장)가 이스라엘이 멸망한 때 희망의 지표로 예고한 새로운 계약이란 표상을 빌려 온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탈출 24,8), 이제 하느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것이라는 희망을 전한다. 예레 31장 31․33․34절을 정태현 역본에 따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야곱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이것은 그 시절이 지난 다음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게 될 계약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 가슴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써 넣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때에는 더 이상 제 이웃이나 동기간에 서로 ‘주님을 알아 모셔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 모두가 다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나를 알아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예언자 예레미야는 장차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기억하실 것이며’(예레 31,20), 당신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을텐데 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하여지고 백성들은 새로운 계약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장차 이스라엘과 맺을 새로운 계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바울로는 1고린 11장 25절의 포도주 잔 설명어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계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계약을 세우기 위해서 죽으신 분이시며 따라서 만찬례를 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곧 종말적인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시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라는 말씀을 반복할 때마다 과거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화해를 이룩한 사건이었음을 상기했으며(2고린 5,18-21), 나아가서 포도주를 배령할 때면 포도주라는 상징 안에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신다고 믿었다(1고린 10,16).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에 본래부터 담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초대교회에서 부활의 의미를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급시켜 투사시킨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약”이란 초대 교회의 신학적 반성 내지는 바울로의 해석으로서 첨가어일 것이다.

또한 마르 14장 24절의 포도주 잔에 관한 설명어에선 참석자들이 ‘피’를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1고린 11장 25절에선 ‘잔’을 받아 마신다. 이는 ‘피를 마시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생각을(레위 17,10-16) 고려해서 ‘피’ 대신 ‘잔’이라고 고쳐 썼다.

 

이런 풀이를 토대로 바울로가 채록한 포도주 잔 설명어가 마르코의 설명어보다 더 오래된 전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르코의 잔 설명어인 14장 24절이 바울로의 설명어보다 더 오래된 전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아직은 통설이 없는 형편이다. 마르코와 바울로는 예수의 최후만찬에서 비롯된 만찬례 전승을 자신의 성만찬기에 옮겨 실었다. 마르코는 예수의 최후만찬을 수난사화와 함께 보도하였고, 바울로는 안티오키아 혹은 다마스커스 공동체의 만찬례 전승을 전해 준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코와 바울로 모두 예수의 최후만찬을 곧이 곧대로 자신들의 성만찬기에 옮겨 실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소속한 교회 공동체의 전례 전승을 전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전승이 더 오래된 전승이고 예수님의 최후만찬 보도와 유사한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이 두 전승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욱이 설혹 어느 전승이 더 오래된 것이라고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또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입니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의미는 이 말씀의 원래적 모습이 확정된다 하여서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이른바 설명어(해석의 말씀)로서 여기에는 구약성서의 계약 사상과 대속죄 사상을 원용하여 예수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를 밝힌 신학리(神學理)가 담겨 있다 하겠다.

 

마르코와 바울로가 전하는 성만찬기에서 계약사상과 대속죄사상을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초대교회의 해석으로 본다면,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에 임박하여 이 잔에 담겨 있는 포도주처럼 붉은 피를 쏟으며 죽으리라 예상하셨고, 마지막까지 당신 자신을 이 빵처럼 내어주셨다. 다시말해,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주는 몸’과 ‘쏟는 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께서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셨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루가 22,18에서도 추적된다. “사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빛은 것)를 지금부터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한편으로 이 식사는 예수께서 임박한 죽음에 앞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지상 친교식사임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새롭게 할 친교의 전망을 제공한다. 이 구절을 교회 전례의 맥락에서 생성된 부활 이후의 첨가라고 보면, 역사성의 뿌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잔을 건넸다는 사실에 있다. 죽음에 직면하여 제자들과 친교의 잔을 나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최후만찬 전승에 각인되어 있다.

 

3-2-4. 반복실행 명령(24b․25b절)

 

원문 : 24b : τούτο ποιεί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25b절 : τούτο ποιείτε, ὁσάκις ἐὰ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역문 : 24b :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25b절 : 여러분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반복실행 명령은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의 성만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루가 복음서의 성만찬기엔 오직 빵에 관한 말씀 다음에 한차례만 나온다(22,19). 반면에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엔 빵과 잔에 관한 말씀이 각각 실려있다(11, 24b․25b).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성만찬례로 만들어 매주 토요일 석식 때, 나중엔 일요일에 재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성만찬을 지낸 까닭은 예수께서 금요일에 처형되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유스티누스 「호교론 전서」 67,7). 이 반복실행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네 성만찬례 재현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역사적 예수의 명령이라기보다는 본디 초대교회의 성만찬례 규정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전례 규정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뀌어 설명어에 덧붙여졌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매 일요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그리스도 교회의 지침(1고린 16,2;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14,1)으로서 요즘 미사 통상문 안에 들어 있는 전례 지침서(rubrica) 같은 것이다.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 이 반복실행 명령이 들어있는 것은, 그것이 바울로 이전의 전승이든 혹은 바울로의 편집이든, 고린토 교회에서 성만찬례를 반복하여 시행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르코 복음서에 이 반복실행 명령이 없는 것은, 그 사건이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식사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즉,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는 만찬례의 성사성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에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에는 만찬례의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그리고 이 반복실행 명령이 빵에 관한 말씀과는 달리 잔에 관한 말씀에는 “마실 때마다”(ὁσάκις ἐὰν πίνητε)라는 조건과 함께 나온다. 이는 곧 언제든지 마실 때마다 성만찬례를 행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마시다’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으로 보아 마시는 내용물은 포도주일 것이다.

 

이 반복실행 명령에 나오는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에 대해서는 이 말이 유대교 문화권에서 나왔다는 주장과 헬라 문화권에서 나왔다는 주장으로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나의 기억을 위하여”가 유대교 문화권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용법이 구약성서의 과월절 규정(탈출 12,2-28; 13,9; 시편 111,4)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탈출 12장 14절을 임승필 역본을 따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 날을 주님을 위한 축제일로 지내도록 하여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일로 지내야 한다.”

 

즉, 이는 야훼께서 이집트에 열번 째 재앙을 내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에 있는 맏물들을 모두 없앴을 때 문설주에 피가 뿌려진 이스라엘인들의 집만은 지나쳐 버린 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지키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에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가 나온 것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돌보셨듯이 또한 예수를 기억해 주신 것을 기념하여 만찬례를 행하라는 뜻이 되겠다. 이러한 주장에는 예수의 최후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가 헬라 문화권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용법이 그리스의 전통적인 ‘기념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헬라 세계에서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여 기념 식사를 하고 했다. 따라서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자신들의 생활에 익숙해 있던 ‘기념축제’를 연상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했을 것이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모일 때마다 성만찬례를 되풀이했을 것이며, 이 성만찬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들 가운데 살아계신 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기억해 주신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기억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ἀνάμνησις(기억)는 신약성서엔 별로 나오지 않는 명사로서 루가 복음서에 1번, 고린토 전서에 2번 그리고 히브리서에 1번(10,3) 나온다. 루가 복음서(22,19)와 고린토 전서(11,24․25)에서는 오직 성만찬기에만 나온다. 구약성서의 헬라어역인 칠십인역에서도 이 낱말은 4번 나온다(레위 24,7; 민수 10,10; 시편 38,1; 70,1). 이 낱말이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반복실행 명령이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로 이전의 전승이거나 바울로의 편집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셈이다.

 

3-2-5. 바울로의 성만찬 이해(26절)

 

원문 : ὁσάκις γὰρ ἐὰν ἐσθίητε τὸν ἄρτον τούτον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πίνητε, τὸν θάνατον

τού κυρίου καταγγέλλετε ἄΧρις οὗ ἔλθῃ̇

역문 :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 심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바울로가 전해 받아 전해 준 성만찬 전승은 사실상 25절에서 끝난다. 따라서 26절은 전승 부분이 아니라 바울로가 자신이 전해 준 성만찬 전승이해를 표명한 말씀이라 하겠다. 이 말씀에는 25절까지와는 달리 “주님”이 3인칭으로 나타난다. 곧, 23a절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울로가 전해 받은 전승에 포함되었다기보다는 23b-25절의 성만찬 전승에 대한 바울로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로는 성만찬례가 선교와 관련하여 거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행해야 할 것은 빵과 포도주의 나눔이요, 기억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알려야 할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빵과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를 배령할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회상하고 그 죽음을 그분이 재림하실 때까지 알려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 알리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한 “καταγγέλλετε” 동사는 문법적으로 직설법도 되고 명령법도 된다. 직설법으로 번역하면 “여러분이 …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다”가 될 것이고, 명령법으로 번역하면 “여러분이 …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시오”가 될 것이다. 그런데 26절 서두에 나오는 ‘사실’(γὰρ)이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이므로 이 낱말은 2인칭 복수 직설법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 ‘알리다’(καταγγέλλειν)라는 낱말은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과 바울로 서간에만 나오는 동사로서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한 전문적인 선교용어 중의 하나이다(필립 1,17․18; 1고린 2,1; 9,14; 11,26; 로마 8,1). 사도행전에선 이 동사가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4,2; 13,5․38; 15,36; 16,17․21; 17,3․13․23; 26,23).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또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의어라 하겠다. 그러기에 우리는 1고린 11,26의 바울로의 말씀을 주님의 성만찬을 거행할 때마다 “여러분은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Χρις οὗ ἔλθῃ)는 종말론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이것이 마르 14장 25절에서처럼 ‘메시아 잔치’를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초대교회 교우들의 소망이 담겨있는 표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예수께서 하루 빨리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면서 ‘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소서 : 1고린 16,22;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10,6)라는 환호성을 외쳤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마라나타’와 내용적으로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

 

26절에는 과거․현재․미래 삼차원적 그리스도론이 들어 있다.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빵과 잔이라는 상징 안에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다. 아울러 지난날 우리 모두의 죄를 속죄코자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빵과 잔의 상징에 현존하신다지만 현상적으로 부재하시는 “주님께서 오실 때”를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만찬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과거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부활하여 빵과 잔의 상징 안에 현존하시는 현재의 그리스도를 기리고, 장차 재림하실 미래의 주님을 기다리는 예수잔치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로로부터 성만찬 전승을 전해 받았던 고린토 교회 교우들 역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본따 성만찬례를 거행하면서 저 삼차원의 그리스도를 기억(ἀνάμνησις)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성만찬례를 그분의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다. 이를 통하여 교우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언제나 새롭게 깨달았으며 주님의 죽으심을 전했던 것이다.

 

 

Ⅳ. 요한 복음서와 2세기 교부들의 성만찬기

 

4-1. 요한 복음서(6,26-59)

 

4-1-1. 요한 복음 6장 개관

 

요한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의 여러 전승 내용들을 기본 자료로 하여 한 권으로 엮어진 교회의 책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은 오랜 기간의 생성 및 발전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초대교회의 다양한 전승 내용들과 당시 교회가 직면한 신학 사상적인 문제 내지는 과제들이 동시에 반영 수록되어 있다. 공관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이런 특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 문

역 문

26 ἀπεκρίθη αὐτοίς ὁ Ἰησούς καὶ εἶπε,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ζητείτέ με οὐΧ ὅτι εἴετε σημεία, ἀλλ’ ὅτι ἐάγετε ἐκ τών ἄρτων καὶ ἐΧορτάσθητε. 27 ἐργάζεσθε μὴ τὴν βρώσιν τὴν ἀπολλυμένην ἀλλὰ τὴν βρώσιν τὴν μένουσαν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ἣν ὁ υἱὸς τού ἀνθρώπου ὑμίν δώσει. τούτον γὰρ ὁ πατὴρ ἐσφράγισεν ὁ θεός․ 28 εἶπον οὖν πρὸς αὐτόν, Τί ποιώμεν ἵνα ἐργαζώμεθα τὰ ἔργα τού θεού; 29 ἀπεκρίθη〔ὁ〕Ἰησού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ίς, Τούτό ἐστιν τὸ ἔργον τού θεού, ἵνα πιστεύητε εἰς ὃν ἀπέστειλεν ἐκείνος․ 30 εἶπον οὖν αὐτῷ, Τί οὖν ποιείς σὺ σημείον, ἵνα ἴδωμεν καὶ πιστεύσωμέν σοι; τί ἐργάζῃ; 31 οἱ πατέρες ἡμών τὸ μάννα ἔφαγον ἐν τῇ ἐρήμῳ, καθώς ἐστιν γεγραμμένον, Ἀρτον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ἔδωκεν αὐτοίς φαγείν. 32 εἶπεν οὖν αὐτοίς ὁ Ἰησού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οὐ Μωϋσής δέδωκεν ὑμίν τὸν ἄρτον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ἀλλ’ ὁ πατήρ μου δίδωσιν ὑμίν τόν ἄρτον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τὸν ἀληθινόν˙ 33 ὁ γὰρ ἄρτος τού θεού ἐστιν ὁ καταβαίνων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καὶ ζωὴν διδοὺς τῷ κόσμῳ. 34 Εἶπον οὖν πρός αὐτόν, Κύριε, πάντοτε δὸς ἡμίν τὸν ἄρτον τούτον. 35 εἶπεν αὐτοίς ὁ Ἰησούς,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ής ζωής. ὁ ἐρΧόμενος πρός ἐμὲ οὐ μὴ πεινάσῃ, καὶ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οὐ μὴ διψήσει πώποτε. 36 ἀλλ’ εἶπον ὑμίν ὅτι καὶ ἑωράκατέ〔με〕καὶ οὐ πιστεύετε. 37 Πάν ὃ δίδωσίν μοι ὁ πατὴρ πρὸς ἐμὲ ἥζει, καὶ τὸν ἐρΧόμενον πρὸς ἐμὲ οὐ μὴ ἐκβάλω ἔζω,

 

2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27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시오.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당신들에게 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28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당신들이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 30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표징을 행하여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하시겠습니까? 무슨 이을 하시겠습니까? 31 (성경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빵을 그들에게 내려주시어 먹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모세가 당신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참된 빵을 당신들에게 내려주십니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기 때문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로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36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나를〕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당신들에게 말했습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올 것입니다. 또 내게로 오는 이를 나는 결코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원 문

역 문

38 ὅτι καταβέβηκα ἀπὸ τού οὐρανού οὐΧ ἵνα ποιώ τὸ θέλημα τὸ ἐμὸν ἀλλὰ τὸ δέλημα τού πέμψαντός με. 39 τούτο δέ ἐστιν τὸ δέλημα τού πέμψαντός με, ἵνα πάν ὃ δέδωκέν μοι μὴ ἀπολέσω ἐζ αὐτού, ἀλλὰ ἀναστήσω αὐτὸ〔ἐν〕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40 τούτο γάρ ἐστιν τὸ δέλημα τού πατρός μου, ἵνα πάς ὁ δεωρών τὸν υἱὸν καὶ πιο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ἐγὼ〔ἐν〕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41 Ἐγόγγυζον οὖν οἱ Ἰουδαίοι περὶ αὐτού ὅτι εἶπεν,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ὁ καταβὰς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42 καὶ ἔλεγον, ΟὐΧ οὗτὸς ἐστιν Ἰησούς ὁ υἱὸς Ἰωσήφ, οὗ ἡμείς οἴδαμεν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τὴν μητέρα; πώς νύν λέγει ὅτι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καταβέβηκα; 43 ἀπεκρίδη Ἰησού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ίς, Μὴ γογγύζετε μετ’ ἀλλήλων. 44 οὐδεὶς δύναται ἐλδείν πρός με ἐὰν μὴ ὁ πατὴρ ὁ πέμψας με ἐλκύση αὐτόν, κἀγὼ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ἐ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45 ἔστιν γεγραμμένον ἐν τοίς προφήταις, Καὶ ἔσονται πάντες διδακτοὶ δεούπάς ὁ ἀκούσας παρὰ τού πατρὸς καὶ μαδὼν ἔρΧεται πρὸς ἐμέ. 46 οὐΧ ὅτι τὸν πατέρα ἑώρακέν τις εἰ μὴ ὁ ὤν παρὰ τού δεού, οὗτος ἑώρακεν τὸν πατέρα. 47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ὁ πιστεύων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48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ής ζωής․ 49 οἱ πατέρες ὑμών ἔφαγον ἐν τῇ ἐρήμῳ τὸ μάννα καὶ ἀπέδανον.. 50 οὗτός ἐστιν ὁ ἄρτος ὁἐκ τού οὐρανού καταβαίνων, ἵνα τις ἐζ αὐτού φάγῃ καὶ μὴ ἀποδάνῃ․ 51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ὁ ζών ὁ ἐκ τού οὐρανού καταβάς. ἐάν τις φάγῃ ἐκ τούτου τού ἄρτου ζήσει εἰς τὸν αἰώνα, καὶ ὁ ἄρτος δὲ ὃν ἐγὼ δὼσωἡ σάρξ μού ἐστιν ὑπέρ τής τού κόσμου ζωής․

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39 내게 주신 이는 누구나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40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41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다 그분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42 그리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마시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내게로 오면)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45 예언자들의 (책에) ‘그리고 모든 이들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옵니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 외에 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47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48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 49 당신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습니다. 50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니 이것을 먹고 죽지는 않습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다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

 

원 문

역 문

52 ἘμάΧοντο οὖ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οἱ Ἰουδαίοι λέγοντες, Πώς δύναται οὗτος ἡμίν δούναι τὴν σάρκα〔αὐτού〕φαγείν; 53 εἶπεν οὖν αὐτοίς ὁ Ἰησού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 ἐὰν μὴ φάγητε τὴν σάρκα τού υἱού τού ἀνθρώπου καὶ πίητε αὐτού τὸ αἷμα, οὐκ ἔΧετε ζωὴν ἐν ἑαυτοίς․ 54 ὁτρώγων μου τὴν σάρκα καὶ πίνων μου τὸ αἷμα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κἀγὼ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55 ἡ γὰρ σάρξ μου ἀληθής ἐστιν βρώσις, καὶ τὸ αἷμά μου ἀληθής ἐστιν πόσις․ 56 ὁ τρώγων μου τὴν σάρκα καὶ πίνων μου τὸ αἷμα ἐν ἐμοὶ μένει κἀγὼ ἐν αὐτῷ. 57 καθὼς ἀπέστειλέν με ὁ ζών πατὴρ κἀγὼ ζώ διὰ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ὁ τρώγων με κἀκείνος ζήσει δι’ ἐμέ. 58 οὗτός ἐστιν ὁ ἄρτος ὁ ἐξ οὐρανού καταβάς, οὐ καθὼς ἔφαγον οἱ πατέρες καὶ ἀπέθανον․ ὁ τρώγων τούτον τὸν ἄρτον ζήσει εἰς τὸν αἰώνα. 59 Ταύτα εἶπεν ἐν συναγωγῇ διδάκων ἐν Καφαρναούμ

52 그러자 유대인들이 서로 논란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자기〕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못합니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55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이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는 주로 사건 보도 형식을 취한 복음서라고 한다면, 요한 복음서는 전승 내용들이 음미되고 심층적으로 재해석된 형식을 취한 복음서라고 특정지을 수 있다. 공관 복음서는 “육적인 복음서”요, 요한 복음서는 “영적인 복음서”라고 언급한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의 견해 역시 이를 어느 정도나마 대변해 준다. 한마디로 요한 복음서 작가는 예수 전승을 채록할 뿐 아니라 예수 전승을 두고 그 뜻을 곰곰히 새기는 명상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 복음서는 예수 명상록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 작가는 6장에서, 빵 이적사화와 물 위를 걸으신 이적사화를 합친 예수 전승을 채록한 다음 빵 설교를 실었는데,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밝힌다. 빵 설교는 유대인들과의 대담형식으로 진행된다. 6장의 짜임새는 다음과 같다.

 

․ 6,1-15 : 빵 이적사화

․ 6,16-25 : 물 위를 걸으신 이적사화

․ 6,26-59 : 빵 설교

․ 6,60-70 : 제자들의 불신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요한 복음서 작가가 6장 26-59절에 수록한 빵 설교에 성만찬 전승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제 6장 26-59절의 분석을 통하여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성만찬 전승의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

 

 

4-1-2. 빵 설교 (6,26-59)

 

원문과 역문

 

빵의 설교를 내용에 따라 삼등분 한 다음 풀이를 시도하겠다.

 

1) 6,26-34 : 음식으로서의 빵과 영생으로서의 빵

2) 6,35-51 :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생의 빵이다.

3) 6,52-59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1) 6,26-34 : 음식으로서의 빵과 영생으로서의 빵

 

역문 : 26절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

니다. 당신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27절 :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시오.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당신들에게 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28절 :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29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당신들이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

30절 :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표징을 행하여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31절 : (성경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빵을 그들에게 내려주시어 먹게 하셨다’고 기록되

어 있는 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절 :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모세가 당신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참된 빵을 당신들에게 내려주십니다.

33절 :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기 때문입니다.

34절 :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

 

 

요한 복음서 작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 (6,1-15).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들만 대략 오천명이었다. 예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러고도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유대인들은 빵의 기적 때 배불리 얻어 먹었던 빵 생각이 나서 예수를 찾아왔다(6,26). 그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 생각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빵의 기적이 가리키는 표징(σημείον)을 이해하지 못했다(6,26-27). 빵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 곧 영생이라는 상징을 유대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요한 복음의 예수는 초월자로서 초월적 양식을 거론하시는데, 그의 청중은 지구인들로서 현세적 양식으로 곡해했기 때문이다. 예수와 청중은 말을 주고 받지만 양자의 차원이 너무나도 다른 까닭에 전혀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의 기본 양식 가운데 하나는 오해양식(誤解樣式)이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청중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당신들이 믿는 것이다”(6,29). 여기서 요한 복음서 작가의 그리스도론 골자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서 작가의 그리스론 골자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본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 되셨다(1,1․18; 20,28; 참조 1요한 5,20). 이분이 사람이 되시어(1,14) 하느님을 계시하고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다음 하느님께로 올라가셨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결단을 신앙이라고 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요한 복음서 작가의 그리스도론이요 구원론의 골자이다.

 

2) 6,35-51 :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생의 빵이다.

 

역문 : 35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로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36절 :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나를〕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당신들에게 말했습니다.

37절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올 것입니다. 또 내게로 오는 이를 나는 결코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38절 :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39절 : 내게 주신 이는 누구나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40절 :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41절 :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다 그분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42절 : 그리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마시오.

44절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내게로 오면)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45절 : 예언자들의 (책에) ‘그리고 모든 이들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옵니다.

46절 : (그렇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 외에 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47절 :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48절 :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

49절 : 당신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습니다.

50절 :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니 이것을 먹고 죽지는 않습니다.

51절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다면 영원히 살 것입 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

 

앞문단(26-34절)에서 사람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신 후 사람들에게 영생의 빵을 줄 것이라고 하셨다(6,27). 이제 35-51절에선 예수께서 당신의 역할뿐 아니라 당신의 정체를 밝혀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38․48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4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51절)라고 하신다. 이런 표현은 예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알리시는 자기계시정식(自己啓示定式 = ἐγώ εἰμι Formel)으로서, 계시의 극치이다. 자기계시정식은 요한 복음서에 수시로 나오는데, 6장 밖에도 다음 단락에 나온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8,12).

“나는 (양들의) 문입니다”(10,7.9).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입니다”(15,1.5).

 

보다시피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이미지로써 당신의 정체를 알리신다. 그렇지만 당신의 형이상학적 본질(Jesus in se)을 알리시는 게 아니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습(Jesus pro nobis)을 밝히셨다고 보겠다. 잡다한 이미지들을 아우르는 근본개념은 생명이다. 요한 복음서 1-12장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생명 개념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5,21.26; 6,32.57). 이 신적인 생명이 예수께 넘쳐 흐른다(1,4; 5,26; 6,57).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신적인 생명을 신앙인들에게 베푸신다(5,21.24.25; 6,27.57). 신앙인들이 누리는 생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요(6,41.51) 충만하며(10,10) 영원하다(17,2)

 

이제까지 약술한 자기계시정식, 그리고 아무런 수식어 없이 단순히 “나입니다”(ἐγώ εἰμι)라고 하신 정식(8,24.28.58; 13,19)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신적 존재라는 뜻이 내표되어 있다. 하느님 친히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셨고, 칠십인역(LXX) 역자들은 야훼를 “나입니다”(ἐγώ εἰμι)라고 번역하곤 했다. 그러니까 “나입니다”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자기계시정식인 셈이다. 요한 복음서 작가는 야훼의 자기계시정식을 예수의 자기계시정식으로 삼았다. 이는 요한 복음서 작가가 예수를 하느님으로 신봉한 사실(1,1.18; 20,28; 참조 1요한 5,20)과 매우 잘 어울린다.

 

이제 6장 35-51절의 흐름을 살펴보자.

 

35-42절

역문 : 35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로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36절 :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나를〕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당신들에게 말했습니다.

37절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올 것입니다. 또 내게로 오는 이 를 나는 결코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38절 :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39절 : 내게 주신 이는 누구나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40절 :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 이것이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41절 :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다. 그분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42절 : 그리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 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내가 생명의 빵입니다”(35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41절)라고 자처하시자,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하면서 유대인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예수의 신적 기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6장 26-27절에 이어 또 하나의 오해양식(誤解樣式)이다.

 

43-45절

역문 : 43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마시오.

44절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 다. (내게로 오면)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45절 : 예언자들의 (책에) ‘그리고 모든 이들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옵니다.

 

예수를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받드는 신앙은 결코 자력으로 지닐 수 없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써만 가능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옵니다”(44-45절)

 

46-47절

역문 : 46절 : (그렇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 외에 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47절 :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 외에 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46절)라는 말씀은 44-45절에 대한 변증법적 보완명제라 하겠다. 즉 성부께서 도와주셔야 우리가 예수를 알아들을 수 있지만(44-45절), 또한 성부를 속속들이 체험한 예수께서 성부를 계시하셔야만 우리는 성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1,17-18; 14,8-10 참조). 절대 계시자인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47절)라고 하심으로써 계시 - 신앙 - 영생의 관계를 밝히신다.

 

3) 6,52-59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51-52절

역문 : 51절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다면 영원히 살 것입 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

52절 : 그러자 유대인들이 서로 논란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자기〕살을 우리 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앞 단락의 결어는 이렇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다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입니다”(51절). 유대인들이 이 결어를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자기〕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52절) 대꾸한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적으로 언급하신 “살”을 유대인들은 신체적 “살”로 오해했던 것이다.

 

53-55절

역문 : 53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당 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54절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55절 :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53-54절).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자구적으로 곡해했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말씀을 자구적으로 이해하면 식인종과 흡혈귀가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겠는데, 유대인들로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인육을 먹지 않았고 피의 경우에는 사람의 피뿐 아니라, 짐승의 피까지 섭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 작가는 “인자의 살과 피”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각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상징으로 현존하심을 요한 복음서 작가는 53-54절처럼 언표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성만찬 때 그리스도의 현존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래 변체설(變體設, transsu-

bstantiatio)로 설명했다. 이와는 달리 독일 종교혁명가 루터는 공체설(共體設 consubstanti-

atio)을 내세웠다.

 

56-57절

역문 : 56절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 니다.

57절 :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 이, 나를 먹는 이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배령하는 이만이 영생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이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56-57절). 가파르나움 회당 설교의 뜻깊은 결어이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의 음식을 매개로 하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4-2.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9․10․14장의 애찬과 성만찬

 

서기 100년경 시리아에서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당시 유대인과 유대계 그리스도교에서 유행하던「두가지 길」(1-6장)을 수용하고 아울러 교회 전례(7-10장), 교회 규범(11-15장), 예수 내림(16장) 등 교회 전승들을 모아 교회사상 처음으로 교회 규범서를 엮었다. 이름하여「열두 사도들의 가르침」(略 디다케)이라 한다. 이 진귀한 문헌 덕분에 우리는 100년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곧, 그 교회의 세례(7장), 주간 단식과 주님의 기도(8장), 감사 기도(9-10장), 떠돌이 사도들과 예언자들 접대(11장), 교우 손님 접대(12장),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 공양(13장), 주일(14장), 감독들과 봉사자들의 선출과 형제 충고(15장), 예수 내림(16장)을 비교적 소상히 알아볼 수 있다.

 

이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略 디다케) 9-10장과 14장 1-3절에 <감사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감사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다행히 학계의 통설이 성립되었다. 통설을 따르면 9-10장은 애찬기(愛餐記 : Agape)이고 14장은 성찬기(聖餐記)이다.

J. Betz, G. Bornkamm, R. Bultmann, J. Jeremias, K. Niederwimmer, Ph. Vielhauer, 정양모 등이 통설을 따른다. 이와는 달리 9-10장과 14장 1-3절 전체를 성찬기로 보는 이설이 있으나 이 설을 따르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4-2-1. 디다케 9-10장 주석

 

원문과 역문

 

원 문

역 문

9,2 Πρώτον περὶ τού ποτηρίου.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ἡμών, Υπὲρ τής ἁγίας ἀμπέλου Δαυὶδ τού παδός σου, Ἧς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ού τού παιδός σου.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3 Περὶ δὲ τού κλάσματος.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ἡμών, 󰐥πὲρ τής ζωής καὶ γνώσεως, Ἧ󰐠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ού τού παιδός σου.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4 Ὣσπερ ἧν τούτο〈τὸ〉κλάσμα διεσκορπισμένον ἐπάνω τών ὀρέων καὶ συναΧθὲν ἐγένετο ἕν. Οὕτω συναΧθήτω σου ἡ ἐκκλησία ἀπὸ τών περάτων τής γής εἰς τὴν σὴν βασιλείαν Ὅτι σού ἐστιν ἡ δόξα καὶ δύναμις διὰ Ἰησού Χριστού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9,2 우선 잔(盞)에 대해서 (이렇게 하시오).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대로 당신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3 빵조각에 대해서 (이렇게 하시오).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생명과 지식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4 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들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영광과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 Μετὰ δὲ τὸ ἐμπλησθήναι οὕτως εὐΧαριστήσατε.· 2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ἅγιε, ‘Ὑπερ τού ἁγίου ὀνόματός σου, Οὗ κατεσκήνωσας ἐν ταίς καρδίαις ἡμών, Καὶ ὑπὲρ τής γνώσεως καὶ πίστεως καὶ ἀθανασὶας, Ἧς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τοὺ τού παιδός σου.·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Σύ, δέσποτα παντοκράτορ, Ἕκτισας τὰ πάντα ἔνεκεν τού ὀνόματός σου,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οτὸν ἔδωκας τοίς ἀνθρώποις εἰς ἀπόλαυσιν, ἵνα σοι εὐΧαριστήσωσιν. Ἡμίν δὲ ἐΧαρίσω πνευματικὴν τροφὴν καὶ ποτὸν καὶ ζωὴν αἰώνιον διὰ〈Ἰησού〉τού παιδός σου. 4 Πρὸ πάντων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ὅτι δυνατὸς εἶ·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5 Μνήσθητι, κύριε, τής ἐκκλησίας σου τού ρύσασθαι αὐτὴν ἀπὸ παντὸς πονηρού, Καὶ τελειώσαι αὐτὴν ἐν τῇ ἀγάπῃ σου, Καὶ σύναξον αὐτὴν ἀπὸ τών τεσσάρων ἀνέμων, τὴν ἁγιασθείσαν. Εἰς τὴν σὴν βασιλείαν, ἥν ἡτοίμασας αὐτ.·“Οτι σού ἐστιν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ύς αἰώνας.

1 여러분은 만족히 먹은 후에 이렇게 감사드리시오. 2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신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해 또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지식과 믿음과 불멸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3 전능하신 주재자님, 당신은 당신 이름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양식과 음료를 주시어 즐기게 하시고 당신께 감사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양식과 음료와 영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4 무엇보다 우리가 당신께 감사드리는 것은, 당신이 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5 주님, 당신 교회를 기억하시어 악에서 교회를 구하시고 교회를 당신 사랑으로 완전케 하소서. 또한 교회를 사방에서 모으소서. 거룩해진 교회를 그를 위해 마련하신 당신 나라로 모으소서.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 문

역 문

6 Ἐλθέτω Χάρις καὶ παρελθέτω ὁ κόσμος οὗτος․ Ὡσαννὰ τῷ θεῷ Δαυίδ. Εἴ τις ἅγιός ἐστιν, ἐρΧέσθω. Εἴ τις οὐκ ἔοτι, μετανοείτω. Μαραναθά. Ἀμήν. 7 Τοίς δε πρφήταις ἐπιρέπετε εὐΧαριστείν, ὅσα θέλουσιν.

6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 다윗의 하느님 호산나! 어느 누가 거룩하면 오고 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 마라나타! 아멘. 7 여러분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감사드리도록 허락하시오.

14,1 Κατὰ κυριακὴν δὲ κυρίου συναχθέντες κλάσατε ἄρτον 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τε, προσ εξομολογησάμενοι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ὑμών, ὅπως καθαρὰ ἡ θυσία ὑμών ᾖ. 2 Πάς δὲ ἔχων τὴν ἀμφιβολίαν μετὰ τού ἑταίρου αὐτού μὴ συνελθέτω ὑμίν, ἔως οὗ διαλλαγώσιν, ἵνα μὴ κοινωθῇ ἡ θυσία ὑμών. 3 Αὕτη γάρ ἐστιν ἡ ῥηθείσα ὑπὸ κυρίου.《Ἔν παντὶ τόπῳ καὶ χρόνῳ προσφέρειν μοι θυσίαν καθαράν. ὅτι βασιλεὺς μέγας εἰμί, λέγει κύριος, καὶ τὸ ὄνομά μου θαυμαστὸν ἐν τοίς ἔθνεσι.》

1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2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모든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는 깨끗한 제사를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위대한 왕이며 내 이름은 백성들에게 놀랍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도다.”

9-10장의 짜임새는 유대교의 회식 절차와 매우 잘 어울린다. 유대인들의 회식 절차는 전식․본식․후식 순으로 진행된다. 잔을 두고 드리는 디디케의 감사 기도(9,2)는 유대교 회식 전작 때 주인이 바치는 찬양기도인 “포도나무 열매를 만드시는 우리 하느님이시오 세상의 임금이신 주님, 찬양받으소서”(미슈나 브라코트 6,1 = 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와 잘 어울린다. 빵조각을 두고 드리는 디다케의 감사 기도(9,3)는 유대교 회식 때 본식을 시작하면서 주인이 바치는 찬양기도인 “땅에서 빵을 생기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이시오 세상의 임금이신 주님, 찬양받으소서”(미슈나 브라코트 6,1 = 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와 잘 어울린다. “만족히 먹은 후에” 드리는 디다케의 감사 기도(10,2-5)는 유대교의 회식 끝에 주인

이 입가심용 포도주 잔(후작)을 들고 바치는 식후 찬양기도(birkat hamazon)와 매우 닮았다. 이제 9-10장의 내용을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9장 2절

원문 : Πρώτον περὶ τού ποτηρίου.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ἡμών,

Ὑπὲρ τής ἁγίας ἀμπέλου Δαυὶδ τού παδός σου,

Ἧς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ού τού παιδός σου.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역문 : 우선 잔(盞)에 대해서 (이렇게 하시오).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대로

당신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잔을 두고 드리는 감사기도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대로 당신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2절)를 번안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종 다윗에게 약속하셨었고 아버지의 종 예수를 거쳐 계시하신 거룩한 포도나무를 두고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한 포도나무는 관련 문구(9,3; 10,2.3)를 눈여겨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룩된 구원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9장 3․4절

3절 : 원문 : Περὶ δὲ τού κλάσματος.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ἡμών,

󰐥πὲρ τής ζωής καὶ γνώσεως,

Ἧ󰐠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ού τού παιδός σου.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역문 : 빵조각에 대해서 (이렇게 하시오).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생명과 지식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4절 : 원문 : Ὣσπερ ἧν τούτο〈τὸ〉κλάσμα διεσκορπισμένον

ἐπάνω τών ὀρέων καὶ συναΧθὲν ἐγένετο ἕν.

Οὕτω συναΧθήτω σου ἡ ἐκκλησία ἀπὸ τών

περάτων τής γής εἰς τὴν σὴν βασιλείαν

Ὅτι σού ἐστιν ἡ δόξα καὶ δύναμις διὰ

Ἰησού Χριστού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역문 : 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들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영광과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빵조각을 두고 드리는 감사기도(3절)의 내용은 잔을 두고 드리는 감사기도(2절)의 내용과 같다. 다만 9장 3절 감사기도에는 지금 세계 만방에 흩어진 하느님의 교회가 종말에 하느님의 나라로 모이기를 비는 간구가 덧붙여 있는데(4절), 그 실상이 더 없이 아름답다. “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이는 18조 기도문 중 제10조 기도문에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결을 비는 간구와 닮았다. “주님, 저희를 구원코자 나팔소리 크게 울리시고, 흩어진 저희를 모으고자 깃발을 치켜올리소서. 유배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10장 1-4절

원문 : 1절 : Μετὰ δὲ τὸ ἐμπλησθήναι οὕτως εὐΧαριστήσατε.·

2절 :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πάτερ ἅγιε,

‘Ὑπερ τού ἁγίου ὀνόματός σου,

Οὗ κατεσκήνωσας ἐν ταίς καρδίαις ἡμών,

Καὶ ὑπὲρ τής γνώσεως καὶ πίστεως καὶ ἀθανασὶας,

Ἧς ἐγνώρισας ἡμίν διὰ Ἰηστοὺ τού παιδός σου.·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3절 : Σύ, δέσποτα παντοκράτορ,

Ἕκτισας τὰ πάντα ἔνεκεν τού ὀνόματός σου,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οτὸν ἔδωκας τοίς ἀνθρώποις εἰς

ἀπόλαυσιν, ἵνα σοι εὐχαριστήσωσιν.

Ἡμίν δὲ ἐχαρίσω πνευματικὴν τροφὴν καὶ ποτὸν

καὶ ζωὴν αἰώνιον διὰ〈Ἰησού〉τού παιδός σου.

4절 : Πρὸ πάντων εὐΧαριστούμέν σοι, ὅτι δυνατὸς εἶ·

Σο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역문 : 1절 : 여러분은 만족히 먹은 후에 이렇게 감사드리시오.

2절 :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신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해

또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지식과 믿음과 불멸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3절 : 전능하신 주재자님,

당신은 당신 이름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양식과 음료를 주시어 즐기게 하시고 당신께

감사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양식과 음료와

영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4절 : 무엇보다 우리가 당신께 감사드리는 것은,

당신이 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10장 1-4절에는 애찬을 “만족히 먹은 후에” 드리는 감사기도 세 편이 적혀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회식을 끝마칠 때 대표자가 드리는 식후 찬양기도(birkat ha-mazon)와 잘 어울린다. 첫째 감사기도(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그리고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지식과 믿음과 불멸에 대해” 감사드린다. 마지막 표현의 뜻인즉, 계시를 믿음으로써 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둘째 감사기도(3절)에서 하느님의 만물창조와 음식제공을 두고 감사를 드린 다음에, “영적 양식과 음료와 영생을 베푸심에” 감사 드린다. 마지막 표현의 뜻인 즉, 영적 양식과 영적 음료를 배령함으로써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양식과 영적 음료는 단순히 애찬 때의 음식이 아니고 성만찬 때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가리킬 것이다. 셋째 감사기도(4절)를 드리는 까닭은 매우 포괄적으로 “하느님이 능하시기 때문이다.”

 

10장 5절

원문 : Μνήσθητι, κύριε, τής ἐκκλησίας σου

τού ρύσασθαι αὐτὴν ἀπὸ παντὸς πονηρού,

Καὶ τελειώσαι αὐτὴν ἐν τῇ ἀγάπῃ σου,

Καὶ σύναξον αὐτὴν ἀπὸ τών τεσσάρων ἀνέμων,

τὴν ἁγιασθείσαν.

Εἰς τὴν σὴν βασιλείαν, ἥν ἡτοίμασας αὐτ.·

“Οτι σού ἐστιν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ύς αἰώνας.

 

역문 : 주님, 당신 교회를 기억하시어

악에서 교회를 구하시고

교회를 당신 사랑으로 완전케 하소서.

또한 교회를 사방에서 모으소서.

거룩해진 교회를 그를 위해 마련하신

당신 나라로 모으소서.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장 5절은 교회를 위한 간구이다. 교회도 악에 물들세라 “악에서 교회를 구하소서”라고 빈다. 교회도 초월적 단체가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이므로 성속의 뒤범벅이다. 교부들은 교회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교회를 일컬어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교회를 사방에서 모으소서. 거룩해진 교회를 그를 위해 마련하신 당신 나라로 모으소서”라고 빈다. 이 간구는 9장 4절의 간구와 표현으로나 내용으로 매우 닮았다. 10장 5절로써 애찬은 끝났다고 여겨진다.

 

10장 6절

원문 : Ἐλθέτω Χάρις καὶ παρελθέτω ὁ κόσμος οὗτος․

Ὡσαννὰ τῷ θεῷ Δαυίδ.

Εἴ τις ἅγιός ἐστιν, ἐρΧέσθω.

Εἴ τις οὐκ ἔοτι, μετανοείτω.

Μαραναθά.

Ἀμήν.

 

역문 :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

다윗의 하느님 호산나!

어느 누가 거룩하면 오고

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

마라나타!

아멘.

 

10장 6절에는 환성들이 겹쳐 나오는데, 이것들은 성만찬 주례와 성만찬 참석자 일동이 번갈아 외친 교송(交誦)이었으리라는 설을 Lietzmann이 처음으로 내세웠고 후학들이 지지하는 형편이다. 주례와 참석자들이 다음과 같이 교송했을 법하다.

 

주례 :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

일동 : 다윗의 하느님 호산나!

주례 : 어는 누가 거룩하면 오고 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

마라나타!

일동 : 아멘.

 

이런 식의 교송은 오늘날 미사 감사송 직전에 사제와 교우들이 주고 받는 교송과 흡사하다. 10장 6절의 교송으로 성만찬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10장 6절 교송에는 예수께서 어서 오시어 새 세상을 열어주십사는 종말임박사상이 드러난다.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의 뜻인즉, 현세는 사라지고 은혜로운 내세가 도래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서 직역하면 “우리 주님 오소서”로 예수 재림을 촉구하는 환성이다. 같은 환성이 아람어 원문으로 고린토 전서 16장 22절에 나오고, 그리스 역문으로 묵시록 22장 20절에 나온다.

 

10장 7절

원문 : Τοίς δε πρφήταις ἐπιρέπετε εὐΧαριστείν, ὅσα θέλουσιν.

역문 : 여러분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감사드리도록 허락하시오

 

디다케가 씌어진 100년경 시리아 교회들에는 두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 첫째 부류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아 다니면서 복음를 전했던 떠돌이 전도사들이다. 11장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그런 전도사들이다. 이들 가운데 더러는 어느 한 교회에 정착하며 살았으니 붙박이 전도사들이라 하겠다. 13장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그런 전도사들이다. 둘째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은 지역 교회에서 뽑힌 이들로서 15장의 “감독들과 봉사자들”이다. 두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떠돌이 예언자들과 붙박이 예언자들이 지역 교회에서 뽑힌 감독들과 봉사자들보다 더 존경을 받고 성만찬 집전에 주도권을 행사한 것 같다(10,7; 15,1-2). 10장 7절에서 떠돌이 예언자들 또는 붙박이 예언자들이 마음껏 감사기도를 바치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이들의 감사기도가 오늘날 미사의 감사송으로 발전했다고 여겨진다. 요즘 미사 감사송은 매우 장중하다.

예언자들의 감사송에 이어 빵과 포도죽 축성문, 주님의 기도 등 성찬문이 나올 법한데 전혀 그와 같은 언급이 없다. 이 현상에 대해서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성찬문은 외부에 노출시켜서는 안되는 비사(秘事)였기 때문에 수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매우 설득력이 있는 설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수 백년 동안 입교 예비자들에게조차 성만찬에 참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4-2-2. 디다케 14장 주석

 

원문 : 1절 : Κατὰ κυριακὴν δὲ κυρίου συναΧθέντες κλάσατε ἄρτον 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τε, προσ

εξομολογησάμενοι τὰ παραπτώματα ὑμών, ὅπως καθαρὰ ἡ θυσία ὑμών ᾖ.

2절 : Πάς δὲ ἔΧων τὴν ἀμφιβολίαν μετὰ τού ἑταίρου αὐτού μὴ συνελθέτω ὑμίν, ἔως

οὗ διαλλαγώσιν, ἵνα μὴ κοινωθῇ ἡ θυσία ὑμών.

3절 : Αὕτη γάρ ἐστιν ἡ ῥηθείσα ὑπὸ κυρίου.《Ἔν παντὶ τόπῳ καὶ Χρόνῳ προσφέρειν μοι θυσίαν καθαράν. ὅτι βασιλεὺς μέγας εἰμί, λέγει κύριος, καὶ τὸ ὄνομά μου θαυμαστὸν ἐν τοίς ἔθνεσι.》

역문 : 1절 :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2절 :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모든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

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3절 :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는 깨끗한 제사를 바쳐

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위대한 왕이며 내 이름은 백성들에게 놀랍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도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전날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안식일 다음날, 곧 주간 첫날에 부활하셨다고 여겼다(요한 20,1․19; 1고린 16,2). 그리스도인들은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지었다(디다케 14,1; 묵시 1,10; 이냐시오스, 마그네시아 편지 9,1).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이 날을 태양의 날, 곧 일요일이라고 불렀다(유스티누스, 「호교론전서」 67).

 

교우들은 주일마다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려야 한다.” “빵을 나눔” 명사는 루가 24,35; 사도 2,42에 나오고, “빵을 나누다” 동사는 사도 2,48; 20,7․11; 1고린 10,16; 디다케 14,1에 나온다. 명사․동사 둘다 성만찬을 가리키는 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이다. “감사”(eucharistia) 명사(디다케 9,1․5)와 “감사하다” 동사(디다케 9,1․2․3; 10,1․1․2․3․4․7; 14,1)는 애찬과 성만찬 둘 다 가리키는 표현이다.

 

14장 1절에선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기 전에” 범법들을 고백하라고 한다. 특히 동료 교우와 불목한 이는 먼저 화해하고 나서 성만찬에 참석하라고 한다(2절). 2절의 말씀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5,23-24)의 번안이다. 1절의 “고백”은 성만찬 전에 교우들이 다 함께 죄를 고백한 공동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헌상 처음으로 여기서 성만찬을 제사(θυσία)라고 한다. 이는 미사 성제라는 말의 효시이다.

14장 3절은 거룩하게 미사 성제를 드려야 하는 전거로 디다케 필자가 말라기 1장 11․14절을 자유로이 인용한 글귀이다.

 

4-3. 이냐시오스의 성만찬관

 

유스티누스가 「호교론 전서」65-67장에서 자신의 성만찬관과 당대 로마 교회의 일요일 성만찬례를 집중적으로 기술한 데 비해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스는 산발적으로 자신의 성만찬관을 피력했다. 110년경 안티오키아 주교 이냐시오스는 안티오키아에서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던 도중에 여섯 교회들과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에게 서신을 써 보냈다. 에페소, 트랄레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스미르나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에 씌어진 반면에, 필라델피아. 스미르나 교회와 스미르나 주교 폴리카르푸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트로아스에서 씌어졌다. 이냐시오스의 편지들은 서로 다른 공동체에 보내진 편지들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단 사상을 규탄하는 내용과 주교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라는 내용이 하나의 중심 주제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제한적이고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성만찬 전승과 관련된 내용이 편지들 여기 저기에 나타나 있다. 성만찬 전승과 관련된 중요한 본문을 꼽아보면 에페소서 5,2; 20,2; 필라델피아서 4장; 스미르나서 7,1; 8,1-2절이다. 이 단락들의 원문과 역문을 수록하면서 차례 차례 풀이하도록 하겠다.

4-3-1. 에페소서 5장 2절

 

원문 : ἐαν μή τις ᾖ ἐντος τού θυσιαστηρίου, ὑστητειται τού ἄρτου τού θεού.

역문 : “어떤 사람이 제단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빵을 얻지 못합니다.”

 

주교가 집전하는 성만찬례만 올바른 성만찬례이므로, 주교가 집전하는 곳에서만 성체를 영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제단 안에”는 “제대 주변에”라는 뜻이다. “제단”이란 표현이 필라델피아서 4장에도 성만찬례와 관련하여 나온다. 이냐시오스는 성만찬례를 제사(θυσία)로 간주한 것 같다.

 

4-3-2. 에페소서 20장 2절

 

원문 : μάλιστα ἐὰν ὁ κύριός μοι ἀποκαλύψῃ, ὅτι οἱ κατ’ ἄνδρα κοινῇ πάντες ἐν Χάριτι ἐξ

ὀνόματος συνέρΧεσθε ἐν μιᾷ πίστει καὶ ἐν Ἰησού Χριστᾡ, τᾡ κατὰ σάρκα ἐκ γένους Δαυίδ, τῷ υἱῷ ἀνθρώπου καί υιῷ θεού, εἰς τὸ ὑπακούειν ὑμάς τῷ ἐπισκόπῳ καὶ τῷ πρεσβυτερίῳ ἀπερισπάστῳ διανοίᾳ ἕνα ἄρτον κλώντες, ὅς ἐστιν φάρμακον ἀθανασίας, ἀντίδοτος τού μὴ ἀποθανείν, ἀλλὰ ζήν ἐν Ἰησού Χρστῷ διὰ παντός․

 

역문 : “여러분이 갈라지지 않은 심정으로 주교와 사제단에게 순종하고 한덩이 빵을 나누려

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함께… 모인다는 것을 주께서 제게 계시하신다면, 저는 더더욱 (다시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그 한 덩이 빵으로 말하면 불사의 약입니다.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입니다.”

 

이집트에선 이시스 여신이 발명했다는 영약(靈藥)이 나돌았고, 그리스밀의 종교에서도 불사의 영약을 거론했다. 이냐시오스는 이런 것들을 엉터리 약으로 보고, 오직 성만찬례 때 축성된 빵만을 불사의 약 또는 영생의 해독제라고 단정한다. 성체를 영하는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운명공동체가 되는 까닭이다.

4-3-3. 필라델피아서 4장

 

원문 : Σπουδάσατε οὖν μιᾷ εὐΧαριστίᾳ Χρήσθαι. μία γὰρ σὰρξ τού κυρίου ἡμών Ἰησού Χριοτ

ού καὶ ἕν ποτήριον εἰς ἕνωσιν τού αἵματος αὐτού, ἕν θυσιαστήριον, ὡς εἶς ἐπίσκοπος ἅμα τῷ πρεσβυτερίῳ καὶ διακόνοις, τοίς συνδούλοις μου. ἵνα ὅ ἐὰν πράσσητε, κατὰ θεὸν πράσσητε.

역문 : “여러분은 한 감사례(εὐΧαριστία)에 참여하도록 애쓰시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살도 하나요, 그분의 피와 하나가 되게하는 잔도 하나이며, 제단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료 시종들인 사제단과 부제들과 더불어 (감사례를 드리는) 주교도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 ”.

성만찬례, 성체, 성혈, 제대, 주교가 모조리 하나라고 한다. 성만찬례야말로 주님과 그리스도인 간의 일치,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일치를 이룩하는 근간이라는 사상이 우리 단락 밑바탕에 깔려 있다(3,2-3 참조).

 

4-3-4. 스미르나서 7장 1절

 

원문 : ΕὐΧαριστίας καὶ προσευΧής ἀπέΧονται, διὰ τὸ μὴ ὁμολογείν τὴν εὐΧαριστίαν σάρκα

εἶναι τού σωτήρος ἡμών Ἰησού Χριστού τὴν ὑπὲρ τών ἁμαρτιών ἡμών παθούαν, τῇ Χρηστότητι ὁ πατὴρ ἤγειρεν. οἱ οὖν ἀντιλέγοντες τῇ δωρεᾷ τού θεού συζητούντες ἀποθνήσκουσιν.

역문 : “(예수 가현설 이단자들은) 성체(εὐΧαριστία)와 기도를 멀리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성체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야말로 우리 죄들을 (사하기) 위해서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애로이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배척하는 저들은 논쟁이나 하다가 죽어버립니다 …”.

 

이 단락에서 이냐시오스는 예수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비평한다. 이들이 지론인즉,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적도 없고, 요한 세례자에게서 세례도 받지 않았으며,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비명횡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다만 그러는 척 환각작용을 불러일으켰을 따름이라는 것이다(스미르나서 4,2 참조). 그리고 이냐시오스가 성체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살”이라고 한 것은 요한 6장 51-63절의 표현과 통한다. 이냐시오스가 요한계 전승을 접했다는 전거이겠다.

 

4-3-5. 스미르나서 8장 1-2절

 

원문 : 1 Πάντες τῷ ἐπισκόπῳ ἀκολουθείτε, ὡς Ἰησούς Χριστὸς τῷ πατρί, καὶ τῷ πρεσβυτερί

ῷ ὡς τοίς ἀποστόλοις·τοὺς δὲ διακόνους ἐντρέπεσθε ὡς θεού ἐντολήν. μηδεὶς Χωρὶς ἐπισκόπου τι πρασσέτω τών ἀνηκόντων εἰς τὴν ἐκκλησίαν. ἐκείνη βεβαία εὐΧαριστία ἡγείσθω, ἡ ὑπὸ τὸν ἐπίσκοπον οὖσα ἤ ᾦ ἄν αὐτὸς ἐπιτρέψῃ․·

2 ὅπου ἄν φανῇ ὁ ἐπίσκοπος, ἐκεί τὸ πλήθος ἔστω, ὥσπερ ὅπου ἄνᾖ Χριστὸς, Ἰησούς,

ἐκεί ἡ καθολικὴ ἐκκλησία. οὐκ ἐξόν ἐστιν Χωρὶς ἐπισκόπου οὔτε βαπτίζειν οὔτε ἀγάπην ποιείν· ἀλλ’ ὅἄν ἐκείνος δοκιμάσῃ, τούτο καὶ τῷ θεῷ εὐάρεστον, ἵνα ἀσφαλὲςᾗ καὶ βέβαιον πάν ὅ πράσσετε.

역문 : 1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르듯이 주교를 따르고, 사도들을 따

르듯이 사제단을 따르며, 하느님의 계명을 섬기듯이 부제들을 섬기시오. 어느 누구든 주교를 제쳐두고 교회와 관계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교가 드리는 감사례(εὐΧαριστία), 또는 주교가 위임한 사람이 드리는 감사례만이 유효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καθολική ἐκκλησία)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주교를 제쳐두고 세례를 주거나 애찬(ἀγάπη)을 행하지 마십시오. 주교가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흡족해 하시므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확실하고 적법하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는 주교 중심의 교회 체제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가 집전하는 미사, 그의 위임을 받은 사제가 드리는 미사만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주교는 지역 교회의 우두머리요, 그리스도는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이 단락에 교회 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냐시오스는 애찬을 언급하지만 부연 설명은 하지 않는다.

 

4-4. 유스티누스, 「호교론 전서」 65-67장

 

원문 :

65, 1. Ἡμείς δὲ μετὰ τὸ οὕτως λούσαι τὸν πεπειςμένον καὶ συγκατατεθειμένον ἐπὶ τοὺς λε

γο μένους ἄγομεν, ἔνθα συνηγμένοι εἰσὶ, κοινὰς εὐΧὰς ποιησόμενοι ὑπέρ τε ἑαυτών καὶ τού φωτισθέντος καὶ ἄλλων πανταΧού πάντων εὐτόνως, ὅπως καταξιωθώμεν τὰ ἀλληθή μαθόντες καὶ δἰ ἔργων ἀγαθοὶ πολιτευταὶ καὶ φύλακες τών ἐντεταλμένων εὑρεθήναι, ὕπως τὴν αἰώνιον σωτηρὶαν σωθώμεν.

2. ἄλλήλους φιλήματι ἀσπαζόμεθα παυσάμενοι τών εὐΧών.

3. ἔπειταπροσφέρεται τῷ προεστώτι τών ἀδελφών ἄρτος καὶ ποτήριον ὕδατος καὶ κράματ

ος, καὶ οὗτος λαβὼν αἷνον καὶ δόξαν τῷ πατρὶ τών ὅλων διὰ τού ὀνόματος τού υἱού καὶ τού πνεύματος τού ἁγίου ἀναπέμπει καὶ εὐΧαριστίαν ὑπὲρ τού κατηξιώσθαι τούτων παρ’ αὐτού ἐπὶ πολὺ ποιείται.·οὗ συντελέσαντος τὰς εὐΧὰς καὶ τὴν εὐΧαριστίαν πάς ὁ παρὼν λαὸς ἐπευφημεί λέγων.·Ἀμήν.

4. τὸ δὲ Ἀμὴν τῇ Ἑβραίδι φωνῇ τὸ Γένοιτο σημαίνει.

5. εὐΧαριστήσαντος δὲ τού προεσώτος καὶ ἐπευφημήσαντος παντὸς τού λαού οἱ καλούμεν

οι παρ’ ἡμίν διάκονοι διδόασιν ἐΧάστῳ τών παρόντων μεταλαβείν ἀπὸ τού εὐΧαριστηθέντος ἅρτου καὶ αἴνου καὶ αἴνου καὶ ὕδατος καὶ τοίς οὐ παρούσιν ἀποφέρουσι.

66, 1. Καὶ ἡ τροφὴ αὕτη καλείται παρ’ ἡμίν εὐΧαριστία, ἧς οὐδενὶ ἄλλῳ μετασχείν ἐξόν ἐ

στιν ἤ τῷ πιστεύοντι ἀληθή εἶναι τὰ δεδιδαγμένα ὑφ’ ἡμών, καὶ λουσαμένῳ τὸ ὑπὲρ ἁφέσεως ἁμαρτιών καὶ εἰς ἀναγέννησιν λουτρόν, καὶ οὕτως βιούντι ὡς ὁ Χριστὸς παρέδωκεν.

2. οὐ γὰρ ὡς κοινὸν ἄρτον οὐδὲ κοινὸν πόμα ταύτα λαμβάνομεν.·ἀλλ’ ὅν τρόπον διὰ λόγ

ου θεού σαρκοποιηθεὶς Ἰησούς Χριστὸς ὁ σωτὴρ ἡμών καὶ σάρκα καὶ αἶμα ὑπὲρὶας ἡμών ἔσχεν, οὕτως καὶ τὴν δι’ εὐχής λόγου τού παρ’ αὐτού εὐχαριστηθείσαν τροφήν, ἐξἧς αἷμα καὶ σάρκες κατὰ μεταβολὴν τρέφονται ἡμών, ἐκείνου τού σαρκοποιηθέντος Ἰησού καὶ σάρκα καὶ αἷμα ἐδιδάχθημεν εἶναι.

3. οἱ γὰρ ἀπόστολοι ἐν τοίς γενομένοις ὑπ’ αὐτών ἀπομνημονεύμασιν, ἅ καλείται εὐαγγ

έλια, οὕτως παρέδωκαν ἐντετάλθαι αὐτοίς. τὸν Ἰησούν λαβόντα ἄρτον εὐχαριστήσαντα εἰπείν.· Τούτο ποιείτε εὶς τὴν ἀνάμνησίν μου, τούτ‘ ἐστι τὸ σώμά μου.·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ὁμοίως λαβόντα 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ντα εἰπείν. Τούτό ἐστι τὸ αἷμά μου.·καὶ μόνοις αὐτοίς μεταδούναι.

4. ὅπερ καί ἐν τοίς τού Μίθρα μυοτηρίοις παρέδωκαν γίνεσθαι μιμησάμενοι οἱ πονηροὶ

δαίμόες·ὅτι γὰρ ἄρτος καὶ ποτήριον ὕδατος τίθεται ἐν ταίς τού μυουμένου τελεταίς μετ’ ἐπιλόγων τινών, ἤ ἐπίστασθε ἤ μαθείν δύνασθε.

67, 1. Ἡεμεις δὲ μετὰ ταύτα λοιπὸν ἀεὶ τούτων ἀλλήλους ἀναμιμνήσκομεν. καὶ οἱ ἔχοντε τ οίς λειπομένοις πάσιν ἐπιχουρούμεν, καὶ σύνεσμεν ἀλλήλοις ἀεί.

2. ἐπὶ πάσί τε οἷς προσφερόμεθα εὐλογούμεν τὸν ποιητὴν τών πάντων διὰ τού υἱού αὐτ

ού Ἰησού Χριστού καὶ διὰ πνεύματος τού ἁγίου.

3. καὶ τῇ τού ἡλίου λεγομένῃ ἡμέρᾳ πάντων κατὰ πόλεις ἤ ἀγροὺς μενόντων ἐπὶ τὸ αὐτ

ὸ συνέλευσις γίνεται, καὶ τὰ ἀπομνημονεύματα τών ἀποστόλων ἤ τὰ συγγράμματα τών προφητών ἀναγινώσκεται, μέχρις ἐγχωρεί.

4. εἶτα παυσαμένου τού ἀναγινώσκοντος ὁ πρεστώς διὰ λόγου τὴν νουθεσίαν καὶ πρόκλη σιν τής τών καλών τούτων μιμήσεως ποιείται.

5. ἔπειτα ἀνιστάμεθα κοινῇ πάντες καὶ εὐχὰς πέμπομεν.·καί, ὡς προέφημεν, παυσαμένων

ἡμών τής εὐχής ἄρτος προσφέρεται καὶ οἶνος καὶ ὕδωρ, καὶ ὁ προεστὼς εὐχὰς ὁμοίως καὶ εὐχαριστίας, ὅση δύναμις αὐτῷ, ἀναπέμπει, καὶ ὁ λαὸς ἐπευφημεί λέγων τὸ Ἀμήν, καὶ ἡ διάδοσις καὶ ἡ μετάληψις ἀπὸ τών εὐχαριστηθέντων ἐκάστω γίνεται, καὶ τοίς οὐ παρούσι διὰ των διακόνων πέμπεται.

6. οἱ εὐπορούντες δὲ καὶ βουλόμενοι κατὰ προαίρεσιν ἕκαστος τὴν ἑαυτού ὅ βούλεται

δίδωσι, καὶ τὸ συλλεγόμενον παρὰ τῷ προεστώτι ἀποτίθεται, καὶ αὐτὸς ἐπικουρεί ὀρφανοίς τε καὶ χήραις, καὶ τοίς διὰ νὅσον ἤ δἰ ἄλλην αἰτίαν λειπομένοις, καὶ τοίς ἐν δεσμοίς οὖσι, καὶ τοίς παρεπιδήμοις οὖσι ξένοις, καὶ ἁπλώς πάλώς πάσι τοίς ἐν χρείᾳ οὖσι κηδεμὼν γίνεται.

7. τὴν δὲ τού ἡλίου ἡμέραν κοινῇ πάντες τὴν συνέλευσιν ποιούμεθα, ἐπειδὴ πρώτη ἐστὶν

ἡμέρα, ἐν ᾗ ὁ θεὸς τὸ σκὸτος καὶ τὴν ὕλην τρέψας κόσμον ἐποίησε, καὶ Ἰησούς Χριστός ὁ ἡμέτερος σωτὴρ τῇ αὐτῇ ἡμέρᾳ ἐκ νεκρών ἀνέστη.·τῇ γὰρ πρὸ τής κρονικής ἐσταύρωσαν αὐτόν, καὶ τῇ μετὰ τὴν κρονικήν, ἥτις ἐστὶν ήλίου ἡμέρα, φανεὶς τοίς ἀποστόλοις αὐτού καὶ μαθηταίς ἐδίδαξε ταύτα, ἅπερ εἰς ἐπίσκεψίν καὶ ὑμίν ἀνεδώκαμεν.

역문 :

65, 1. 우리는 진리를 알게된 후 (모범적인) 행동을 하며 선량한 시민들로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로 인정받고 영원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동의한 사람에게 이와같이 세례를 베풉니다. 그 후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영적으로 깨끗한 사람들 및 사방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형제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세례 받은 사람)를 데리고 갑니다.

2. 기도가 끝나면 우리는 입을 맞추면서 서로 인사합니다.

3. 그 다음에 빵과 물과 포도주가 섞인 잔이 장상에게 봉헌됩니다. 그는 그것들을 받고

나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만물의 아버지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고, 그분(성부)께서 허락하신 이러한 호의에 합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긴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이러한 기도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아멘’ 이라고 응답하면서 동의를 표합니다.

4. “아멘”은 히브리어로서 “그대로 되소서”란 뜻이다.

5. 장상이 감사 기도를 드리고 모든 사람이 동의한 후, 우리가 부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빵을, 그리고 포도주와 물을 나누어 먹게 하고 불참자들에게도 그것을 날라다 줍니다.

66, 1. 우리는 이 음식을 감사성찬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르친 것을 진리로 믿고, 사죄와

재생의 세례로 깨끗하게 된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은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2.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먹는 빵이나 흔히 마시는 음료와 같이 이것들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듯이, 그리스도의 간구 말씀으로 축성된 음식을 살을 타고 나신 저 예수의 살과 피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 축성된 음식으로 우리의 피와 살이 소화과정을 거쳐서 길러집니다.

3. 왜냐하면 사도들은 복음서들이라고 불리우는 자기네 회고록들에서 (예수께서) 그들에

게 명하신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빵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이는 나의 몸입니다. 그리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피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그것들을) 넘겨 주셨습니다.

4. 사악한 악마들은 이를 모방하여 미트라의 비밀예식에서도 동일한 예식이 행해지도록

묵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비스런 입교예식에서도 빵과 물잔이 주문과 함께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거나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67, 1. 이후 우리는 서로 이것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우리들은 늘 함께 지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들을 두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을 통해서 만물의 창조주를 기립니다.

3. 태양에 따라 이름을 붙인 날(일요일)에 도시들이나 바깥 여러 지역에 사는 이들이 모

두 모여 공동체 모임을 가집니다. 우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회고록들과 예언자들의 책들을 읽습니다.

4. 독서가 끝나면 장상은 말로 훈계하고 이러한 훌륭한 행위들을 본받을 것을 권합니다.

5. 그러고서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우리의 기도를 바칩니다. 기도가 끝나면,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빵과 포도주와 물이 봉헌되며 장상은 정성을 다하여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백성은 ‘아멘’ 하면서 동의를 표합니다. 성찬의 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고 부제들은 그것을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날라다 줍니다.

6. 부유한 사람들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대로 그들이 내놓고 싶은 그들 자신의

소유물을 바치고, 장상은 모여진 것을 맡아 고아들, 과부들, 병 또는 다른 이유로 궁핍한 사람들, 포로들과 다른 지방 출신의 낯선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그는 궁핍한 사람들을 모두 보살펴 줍니다.

7. 우리 모두는 일요일에 공동체 모임을 가집니다. 그 까닭인즉, 일요일은 하느님께서 어

두움과 물질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날이었기 때문이요, 아울러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같은 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유대인들)은 토요일 전날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그분은 토요일 다음날, 즉 일요일에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여러분에게 숙고하도록 전해준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유스티누스의 생애에 관하여는 자신이 쓴 작품들과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와 에피파니우스의 작품에 근거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사마리아의 풀라비아 네인폴리스(옛 지명 : 시켐 ; 오늘날의 지명 : 나블루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프리스쿠스(priscus), 할아버지의 이름은 바키우스(Bacchius)였다. 이런 이름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유스티누스는 로마 또는 그리스 이주민 가정 출신인 것 같다. 유스티누스는 생애 말기를 로마에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이 가운데 세 작품, 곧 「호교론 전후서」그리고 유대인「트리포(Tryphon)와의 대담」이 남아 있다.

유스티누스(100년경-165년경 생존)는 로마에서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을 썼다.「호교론 전서」는 155년 경에 써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바친 것인데, 이 책 61장에서는 세례를 논하고, 65-67장에선 성만찬을 상론했다. 65-67장의 성만찬기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65장에서 방금 세례받은 수제자를 성만찬례로 인도한다. 66장에서 성만찬례 참석 자격, 성만찬의 뜻, 성만찬의 기원을 밝힌다. 67장에선 2세기 중엽 로마 교회의 일요일 성만찬례 진행을 기술한다. 65장의 성만찬례와 67장의 성만찬례는 다 같이 일요일 성만찬례라고 생각된다. 즉, 로마 교회는 일요일에 먼저 세례를 베푼 다음 이어서 성만찬례를 집전했다고 여겨진다. 이제「호교론 전서」65-67장의 성만찬기를 차례 차례 풀이하도록 하겠다.

 

 

4-4-1. 65장 풀이

 

어느 일요일 방금 세례 받은 신입교우를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인도하면서 함께 성만찬례를 지낸다(1절). 세례 장소와 시간, 성만찬례 장소와 시간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성만찬례는 ① 기도 ② 입맞춤 인사(2절) ③ 빵 및 물탄 포도주를 장상에게 봉헌함 ④ 장상(주교)의 긴 감사기도에 회중이 아멘으로 답함 ⑤ 부제가 회중에게 성만찬의 빵과 물탄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부재자 교우들에게도 날라다 준다(3-5절). 유스티누스는 67장에서 주일 성만찬례 절차를 훨씬 더 자상하게 기술한 것이다.

 

4-4-2. 66장 풀이

 

66장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누가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배령할 자격이 있는지 밝힌다. 세례 받은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사람” 만이 성만찬의 음식을 받아 먹을 수 있다고 한다(1절).

 

둘째, 성만찬의 뜻을 밝혀 우선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듯이, 그리스도의 간구 말씀으로 축성된 음식은 살을 타고 나신 저 예수의 살과 피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2절). 하느님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살과 피를 타고 사람이 되신 사실(受肉 = 降生)과, 주교가 대행하는 예수의 축성 말씀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하는 사실(聖變化)을 병행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드러나는 예수 강생 신앙, 강생을 일컬어 “살과 피를 취하셨다”고 하는 점(요한 1장 참조), 성만찬의 성변화를 일컬어 “축성된 음식은 살을 타고 나신 저 예수의 살과 피다”라고 한 점(요한 6장 참조)은 유스티누스가 요한 복음의 전승을 접했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유스티누스는 66장 2절에서 성만찬의 뜻을 또 한가지 밝혀 이렇게 말한다. “그 축성된 음식으로 우리의 피와 살이 소화과정을 거쳐서(κατὰ μεταβολήν) 길러집니다.” 영성체로 우리가 영적 자양분을 얻고 성장한다는 말이다. 유스티누스가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κατὰ μεταβολήν은 당대 페르가뭄 출신 명의 갈레노스(Glaudios Galenos 129년 페르가뭄 - 199년경 로마?)가 소화과정을 말할 때 사용한 낱말이다.

 

셋째, 유스티누스는 66장 3절에서 성만찬례의 기원을 밝혀 예수의 최후만찬이라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최후만찬례를 “복음서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도들의 회고록들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스티누스가 인용한 최후만찬기는 신약성서에 적힌 어느 최후만찬기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스티누스는 신약성서에 네 차례 나오는 최후만찬기를 스스로 적당히 혼합했거나, 또는 당시 로마 교회에서 항용하던 성만찬문을 인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4-4-3. 67장 풀이

 

유스티누스는 67장에서 2세기 중엽 로마 교회의 일요일 성만찬례 절차를 자상하게 밝힌다. 이는 1-2세기 기록 가운데서 가장 소상하고 정확하게 논한 귀중한 정보이다. 67장 순서대로 일요일 성만찬례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도들의 회고록들과 예언자들의 작품들을 읽습니다.”(3절). 신약 복음서들과 구약 예언서들을 읽는다는 뜻이다. 지금의 말씀 전례 전반부에 해당한다.

2. 집전자 주교는 회중에게 복음서들과 예언서들의 행적을 본받으라고 설교한다(4장).

3. 회중이 공동으로 기도를 바친 다음 빵과 포도주와 물을 집전자에게 봉헌한다. 집전자가 기도와 감사 기도를 바치면 회중이 “아멘”이라고 응답한다(5a절).

4. 부제가 성체와 성혈을 참석자들에게 분배하고, 불참 교우들에게는 날라다 준다(5b절).

5. 장상은 교우들에게 헌금이나 봉헌물을 받아서 고아들․과부들․병자들․버림받은 사람들․포로들․나그네들을 돕는다(6절).

6. 교우들이 일요일에 모여 성만찬례를 지내는 까닭을 명시하여, 일요일은 천지창조 첫째날이요,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7절).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여긴 나머지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정했다. 그런데 유스티누스는 그 날이 천지창조 첫째날이라는 근거를 추가로 덧붙였다.

 

 

Ⅴ. 예수의 최후만찬

 

5-1. 최후만찬 날짜

 

예수께서 언제 최후만찬을 드셨는가는 예수께서 처형되신 날짜와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 처형되신 연월일에 대해서는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정설이 있다. 이 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유대지방 총독으로 있던 기원 후 30년, 더 정확히는 그해 4월 7일에 처형되셨다는 것이다. 비록 복음서에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마르코 복음서 14장 52절과 요한 복음서 19장 3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때 최후만찬을 드시고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다. 자정으로 하루가 끝나고 새 날이 시작하는 우리네 시간 계산방식으로는 최후만찬 날 다르고 처형되신 날 다르다. 그러나 일몰을 기준으로 하루가 시작하고 끝나는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는 최후만찬과 처형이 하루동안에 모두 일어난 셈이다.

 

공관 복음서에 의하면 그 날은 과월절이었다고 한다. 공관 복음서의 보도를 따르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저녁 때 과월절 만찬을 드신 다음 같은 날 체포되시고 재판을 거쳐 처형되신 셈이다. 마르코 복음서(14,12)와 루가 복음서(22,8․11․15)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더 정확히 말해서 ‘니산’ 달 15일이 시작하는 첫 저녁 별이 떠오른 다음 최후만찬을 드시면서 과월절 저녁만찬을 드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축제를 한창 지내고 있던 금요일에 처형되신 셈이 된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전날에 최후만찬을 드신 다음 체포되시고 처형되셨다고 한다(13,1; 18,28; 19,14). 이날은 과월절을 준비하는 날, 곧 ‘니산’ 달 14일이었다. 그러니까 공관 복음서를 따르면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 될 것이고, 요한 복음서를 따르면 과월절 하루 전날에 잡수신 이별만찬이 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요한 복음서의 보도에 신빙성이 있고, 이는 신약학계에서도 광범위한 동의를 얻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즉, 마르 14,22-25의 성만찬기 주석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만찬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한 이별만찬이라는 말이다. 또한 당시 유대 사회의 관행으로 보나, 율법규정으로 보나 이스라엘 최대의 종교적․민속적 과월절 축제에 어떤 사람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르 14장 2절이 보도하는 군중들의 반응도 이와 같은 근거를 뒷받침해 준다. :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됩니다.” 백성의 소요 때문만 아니라 축제 때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따라 예수께서는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때 최후만찬을 잡수시고, 다음날 7일 금요일 오후에 예루살렘 성밖 골고타에서 숨을 거두셨다.

 

5-2. 최후만찬 장소

 

최후만찬이 벌어진 장소에 관한 언급은 최후만찬 준비 이야기에만 나온다(마르 14,13-16; 마태 26,17-19 ; 루가 22,7-13). 마르 14장 13-15절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안으로 가시오, 어떤 사람이 물항아리를 지고 당신들에게 마주 올 것이니, 그를 따라가시오.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곳을 보아 그 집주인에게 말하시오, 선생님께서, 내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리를 깔아 준비한 큰 이층방을 당신들에게 보여 줄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를 위해 (음식) 준비를 하시오’.”

 

이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가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큰 이층방에 미리 과월절만찬 준비를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만찬이 아니었고, 이 말씀을 따르면 예수께서는 선견지명을 지녀 앞일을 환히 내다보신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각색된 보도일 가능성이 높다. 이 보도가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시내에 살고 있는 어느 친지의 이층방(τὸ ἀνάγιον)에서 최후만찬을 드셨다는 것 밖에 다른 정보는 없다. 따라서 최후만찬 장소는 단순히 예루살렘 어디인가였다고만 말할 수 있겠다. 요즘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으레 참배하는 시온산 위의 최후만찬 기념 경당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다.

 

5-3. 최후만찬 참석자

 

공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수신 최후만찬에 참석한 이들은 12제자였다(마르 14,17; 마태 26,20; 루가 22,14). 반면에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12제자 외에도 ‘애제자’가 예수 곁에 앉아 있었다 한다(요한 13,23). 따라서 예수의 최후만찬에 참석했던 이들은 예수를 포함하여 모두 14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5-4. 최후만찬 절차

 

최후만찬 절차를 언급하기에 앞서 살펴볼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요한 복음서 13장 1-7절의 이야기이다. 요한 복음서에는 성만찬기가 들어 있지 않지만 그대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삽입하여 성만찬의 의미와 제자들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대교 풍습에는 식사 전에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이 가끔 있었다. 때로는 자녀가 부친의 발을 씻어 주거나 부인이 남편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예수께서 잡수신 최후만찬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가는 이 만찬이 과월절 기념만찬이었는가, 아니면 유대교 회식의 일종인 단순한 이별만찬이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미 마르코 복음서에 들어 있는 성만찬기를 통하여 살펴 보았듯이 예수의 최후만찬은 과월절 기념만찬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잡수신 최후만찬은 유대교 회식의 일종으로서 유대인들의 만찬 순서에 따라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회식은 전식․본식․후식으로 진행된다. 주례자는 가장 또는 주빈이었다.

 

(1) 전식 : 손을 씻고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신다.

(2) 본식 : 주례자가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빵을 나누어 모든 참석자들이 다 른 음식과 함께 먹는다.

(3) 후식 :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신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식 절차에 따라서 만찬을 잡수셨으므로 예수의 최후만찬 역시 다음과 같은 절차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1) 전식 : 예수께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포도주를 마신다.

(2) 본식 : 예수께서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3) 후식 : 예수께서 다시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제자들에게 잔을 돌리신다.

제자들은 돌아가며 그 잔을 마신다.

 

마르코 복음서의 성만찬기에는 유대교 회식 중 전식 부분이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는 실제로 전식이 있었겠지만 전승과정 중에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마르 14,22절 주석 참조).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유다인들의 회식 절차인 전식․본식․후식 순서를 따르셨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스라엘 회식 범절을 곧이곧대로 따르셨던 것이다. 본식으로 들어갈 때 주례자는 양손에 큰 빵덩어리를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법이다(마르 14,22 = 마태 26,26). 그런데 이 찬양기도에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뜻도 담겨 있으므로 바울로와 루가는 예수께서 ‘사례하셨다’(에우카리스테사스 : εὐχαριστήσας : 1고린 11,24; 루가 22,19)고 한다.

 

 

 

5-5. 최후만찬에서 하신 예수 말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식 절차에 따라서 최후만찬을 잡수셨다. 그러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시면서 하신 그 행동 자체는 유대인들의 회식 때의 동작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다만 두 가지 행동의 뜻을 밝히신 말씀들, 곧 빵에 관한 설명어와 포도주 잔에 관한 설명어가 독특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마르 14,22; 1고린 11,24).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는 그리스어식 표현이고 서술법이 없는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재번역하면 단순히 “받으시오, 이는 내 몸”이 된다. 여기 “내 몸”은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제유법(提喩法)에 따라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받으시오, 이는 내 몸”을 의역하면 “받으시오, 이 빵은 나”라는 뜻이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잡수시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미리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식사가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만찬이 될 것임도 잘 아셨을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자리에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했던 것이다. 바울로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는 내 몸입니다”(1고린 11,24), 루가는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는 내 몸입니다”(루가 22,19)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와같은 사상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내 몸을 수식하는 “여러분을 위하는”은 바울로가 덧붙인 말이다. 한평생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해 사신 삶답게 예수께서는 종생에 이르러서도 제자들을 위해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시겠다는 말씀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빵을 나눈 후에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마르 14,24; 1고린 11,25). 여기서도 “이는 내 피입니다”는 그리스어식 표현이고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재번역하면 단순히 “이는 내 피”가 된다. 이 경우에도 제유법에 따라 “내 피”는 단순히 혈액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는 내 피”를 의역하면 “이 잔에 담긴 포도주는 피를 쏟아 죽을 나”라는 뜻이 된다. 예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실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돌리면서 붉은 피를 쏟으며 죽임을 당할 당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가 담긴 잔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피를 쏟아 죽게 될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상징적 행위라 하겠다.

그런데 빵에 관한 말씀과는 달리 포도주 잔에 관한 말씀에는 “내 피”를 꾸미는 수식어, 곧 “계약의”와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르 14장 24절 주석에서 밝혔듯이 “내 피”를 꾸미는 이 두가지 수식어는 전승과정 중에 생겨난 신학리(神學理, theologumenon)다. 곧,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준 계약(출애 24,8) 그리고 제2이사야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52,13-53,12)를 원용하여 예수의 죽음을 구원론적으로 풀이한 신학리로서 예수님 자신의 발설이 아니다. 이 신학리에 따르면 예수께서 쏟으신 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재정립된다는 것이요, 예수님의 죽음은 만민을 위한 대속죄사라는 것이다. 바울로의 잔 설명어에 들어 있는 “새로운 계약” 역시 또 다른 신학리로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스라엘이 멸망한 때 희망의 지표로 예고한 새로운 계약이란 표상(예레 31,31-34)을 본딴 것으로 이 역시 예수님의 발설이 아니고 전승과정 중에 생겼거나 아니면 바울로가 그 표상을 빌려 덧붙였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잡수시면서 빵에 관해서는 “받으시오, 이는 내 몸”이라고 하셨을 것이고 포도주 잔에 관해서는 “이는 내 피”라고 하셨을 것이다.

 

 

Ⅵ. 초대교회의 성만찬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를 창립하면서 만든 예식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성만찬례는 유대인의 회식에 따라서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본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최후만찬을 거행하면서 하신 말씀들을 전승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 말씀들 속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되새겼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다 또다른 의미들을 덧붙여서 성만찬례를 거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서기 30년부터 200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거행된 성만찬 변천사를 정확히 밝히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서와 고린토 전서에 나타난 성만찬기와 2세기 몇몇 교부들의 성만찬 전승을 토대로 해서 성만찬의 변천과정을 어느 정도는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6-1. 명칭

 

가톨릭교회에서 전례의 핵심인 성만찬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초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매주 한번 모여 함께 나눈 공동체 회식을 일컬어 “주님의 만찬”(κυριακὸν δειπνον : 1고린 11,20)이라 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이 회식을 할 때에는 가장 또는 주빈이 빵을 들고 하느님께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빵을 떼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예수께서도 유대교의 회식 절차에 따라 그렇게 하셨고 초창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만찬을 거행했다. 여기서 “빵을 나눔”(κλάσις τού ἄρτου)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일세기 말엽부터는 “주님의 만찬”, “빵을 나눔” 대신 “감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명칭은 유대교 회식 시작 때 가장 또는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히브리어로 ‘브리카’)기도를 드렸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옮길 때 “찬양”(εὐλογία)이라고 직역할 수도 있지만 “감사”(εὐχάριστια)라고 의역할 수 있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즐겨 사용하는 “미사”(Missa)라는 명칭은 5세기 중엽에 통용되기 시작한 것인데, 아직까지 그 어원의 유래와 의미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성만찬 예식을 마치면서 “이떼, 미싸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말을 한 데서 생겨난 명칭이라는 게 정설로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성만찬의 명칭은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지만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이어받아 교회가 거행한 예식을 “성만찬”, 또는 줄여서 “성찬”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6-2. 성만찬 일시

 

그리스도인들을 “주간 첫날에”(1고린 16,2; 참조 루가 24,13; 사도 20,7) 또는 “일요일”(유스티누스,「호교론 전서」67,3)에 모여 성만찬을 거행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모여 성만찬을 지낸 까닭은 예수께서 금요일에 처형되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유스티누스,「호교론 전서」67,7). 그리서 일세기 말엽부터 주간 첫날 또는 일요일을 일컬어 “주님의 날”(ἡ κυριακη ἡμέρα : 묵시 1,10; ἡ κυριακη κυρίου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14,1)이라 했다.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는 일몰을 기준으로 하루가 시작하고 끝나니까 유대인의 일요일은 토요일 저녁 해 질 때부터 일요일 저녁 해 질 때까지를 말한다. 초창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역시 유대교의 시간 개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럼 유대계식 일요일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각에 성만찬을 거행했을까? 초창기에는 아무래도 일요일 낮보다 토요일 저녁에 모여 성만찬을 거행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마지막 식사가 만찬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리스도인들 역시 저녁 때 모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고린 11,17-22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교우들 중에는 부유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노예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아무래도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녁 때나 돼서야 성만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만찬 거행 시간이 일요일 아침으로 바뀌었다. 그 전거가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 쁠리니우스 2세가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실태를 보고한 서간과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누스의 편지 63,15-16에 있다. 정양모 교수가 번역한 역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쁠리니우스 2세 편지 7항 :

“그리스도인들은 주장하기를, 자기네 죄악 또는 잘못이라야 다음의 사실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일정한 날 밝기 전에 모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마치 신과 같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 그런 일들이 끝나면 그들의 관습에 따라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모여 음식을 드는데, 이는 해롭지 않은 보통 음식입니다.”

 

치쁘리아누스 편지 63,15-16 :

“감사(예식)은 저녁 때 제정되었지만 우리는 아침 제사로(in sacrificiis matutinis)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그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리기 때문입니다.”

 

6-3. 성만찬 장소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기 전까지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한 까닭에 신전을 지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박해가 심할 때면 지하묘지에 숨어서 성만찬을 거행했고, 박해가 덜 할 때면 교우들 집에서 성만찬을 거행했다.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우들 역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성만찬을 거행했다. 예루살렘 교우들의 생활상을 요약한 사도 2,46-47에 따르면 교우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흥겹고 순순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한다. 교회 건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교우들 가정에서 돌아가면서 성만찬을 행했다는 보도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본디 건물이 아니라 가정에서 모인 신앙 공동체였다 하겠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또 다른 전거가 신약성서 곳곳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을 거행하기 위해서 모였던 장소는 교우들 가정집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6-4. 성만찬 주례

 

서기 30년경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예루살렘 모교회의 교회지도자들은 열두 사도들과 일곱 봉사자들이었다. 이들 다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돌본 이들은 원로들이었다(사도 11,30; 15,2․4․6․22․23; 16,4; 21,18). 그러므로 예루살렘 모교회에서는 주로 이들이 성만찬을 집전했을 것이다. 서기 33년경 바울로는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사도가 된 후 44년경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세워진 공동체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그 교회를 돌보았다. 그후 45년에서 58년경 까지 바울로는 지중해 주변의 여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해서 사도들과 전도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어느 지역 교회에 사도가 찾아왔을 때는 물론 그가 성만찬을 집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그 지역교회의 책임자들, 곧 연장자나 주빈이 성만찬을 집전했을 것이다. 고린토 전서 11장 17-22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바울로가 없을 시 자기들끼리 성만찬을 집전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누가 성만찬을 집전했을까! 신약시대는 교계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지역교회마다 교회 지도자들의 직분 이름이 달랐다. 성서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울로 친서에 나타난 교직자들

 

서기 50-52년경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로는 유럽 땅에 건너가서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그리고 고린토등 네 개의 공동체를 세웠는데, 각 공동체들마다 교회 책임자들의 직분이 달랐다.

 

․ 필립비 교회 : 감독들(ἐπισκόποι)과 봉사자들(διακόνοι)이었다(필립 1,1).

․ 데살로니카 교회 :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교우들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τοὺς

κοπιώντας καὶ προϊσταμένους ὑμών ἐν κυρίῳ καὶ νουθετούντὰς ὑμάς)이었다(1데살 5,12).

․ 고린토 교회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시기를, 첫째는 사도들(ἀποστόλοι)이고 둘째로 예언자들(προφήται)이며 셋째로 교사들(διδασκάλοι)입니다”(1고린 12,28).

 

2) 가탁서간에 나타난 교직자들

 

바울로 사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ἀποστόλος)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προφήτας)로, 어떤 이들은 복음전파자(εὐαγγελιστής)로, 어떤 이들은 목자(ποιμὴν)와 교사(διδασκάλος)로 삼으셨다”(에페 4,11).

바울로의 친서는 아니지만 그 당시의 교계제도를 보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사목서간집에는 “감독”(ἐπισκόπος : 1디모 3,1-7; 디도 1,7-9), “봉사자들”(διακόνοι : 1디모 3,8-13), “원로들”(πρεσβύτεροι : 1디모 5,17-22; 디도 1,5-6)이 책임자들이었다. 사목서간에서는 바울로 친서에서와는 달리 교계제도가 상당히 기틀이 잡혔다. 교직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자들을 배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로들이나 감독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이들은 안수례를 통해서 그 직분을 받았다(1디모 4,14). 감독과 원로들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원로들은 교직자단에 속해 있으나 그 역할은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감독은 사목서간에서 언제나 단수로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원로와는 다른 직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직분이 동시에 언급되지 않는 사실에서 추론하면 이 무렵에는 아직 동일한 직분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원로들은(1디모 5,17) 감독(1디모 3,5)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도 1,5-7에서도 원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원래는 서로 다르게 쓰인 두 가지 용어를 사목서간이 씌어진 당시의 교회에서는 같은 직분을 가리키는 동일한 개념으로 나란히 사용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3)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 씌어진 100년경 시리아 교회들에는 두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 첫째 부류는 사도들과 예언자들로서 이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떠돌이 전도사들이다(9․11장). 이들 중에서도 더러는 어느 한 교회에 정착하여 살았으니, 곧 붙박이 전도사들로서 예언자들과 교사들이었다(13장). 둘째 부류는 지역 교회에서 뽑힌 교회 책임자들로서 감독들과 봉사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15장). 이 두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 떠돌이 예언자들과 붙박이 예언자들이 지역 교회에서 뽑힌 감독들과 봉사자들보다 더 존경을 받고 성만찬 집전에 주도권을 행사한 것 같다(10,7; 15,1-2). 따라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교회에 찾아올 때면 그들이 성만찬을 집전하고(10,7), 그들이 없을 때는 감독들과 봉사자들이 그 직무를 이행했을 것이다(15,1).

 

4)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스가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 8,1-2에 비로소 가톨릭 교회의 현행 교계제도와 흡사한 성직계급들이 나타난다. 정양모 교수가 번역한 역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치 예수께서 아버지를 따르듯이 여러분은 모두 감독(주교)을 따르시오. 그리고 여런분은 마치 사도들을 따르듯이 원로단(사제단)을 따르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존경하듯이 봉사자들(사제들)을 존경하시오. 어느 누가 감독을 빼놓고 교회와 관련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감독 자신이나 또는 그가 지정한 사람이 집전하는 그런 감사(에우카리스띠아)만이 적법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감독이 나타난 곳에 (교회의) 무리가 있어 마땅합니다. 감독을 빼놓고 세례를 베풀거나 애찬(아가페)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편지에 의하면 110년경에 이미 교회에는 세 부류의 성직자들, 곧 감독(ἐπίσκοπος)과 원로단(πρεσβύτεριος) 그리고 봉사자들(διακόνος)이 있었다. 이냐시오스는 스미르나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감독(주교)과 감독이 지정하는 사람만이 성만찬을 집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6-5. 성만찬 절차

 

서기 30년 예루살렘에서 창교된 모교회(Urgemeinde)는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본따서 성만찬을 거행했을 것이다. 교우들은 토요일 저녁 때 모여서 예수님의 최후만찬 순서에 따라 주례가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면 다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本食), 끝에 가서 또 다시 주례가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다음 교우들로 하여금 마시게 했다(後食). 즉, 빵 분배, 식사, 포도주 분배 순으로 성만찬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절차는 유대교 회식 절차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빵 분배, 식사, 포도주 분배 순으로 진행된 성만찬에 관한 뚜렷한 전거는 남아 있지 않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의 만찬기에는 성만찬 중간에 식사가 없고 빵과 잔에 관한 행위와 말씀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고린토 전서 11장 17-22절을 보면 성만찬과 식사가 분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말씀에 의하면 고린토 교회 교우들은 식사를 먼저하고 나서 성만찬을 거행한 것 같다(1고린 11,17-22 주석 참조).

이처럼 바울로의 성만찬기, 전후문맥(1고린 11,17-22․27-34)을 보면 이미 50년대에는 성만찬이 식사 끝으로 이동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성만찬에 앞서 교우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또 한 가지 전거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9-10장과 14장이다. 통설을 따르면 9-10장은 애찬기(Agape)이고 14장은 성만찬기이다. 특히 9,1-10,6에 있는 감사기도문은 공동체 식사 때 드린 기도이고, 그 식사에 이어 예언자들이 주례가 되어 성만찬을 집전했을 것이다(10,7). 다만 10장 7절에 이어서 성찬 전례문이 나올 법한데 전혀 그와같은 언급이 없다. 이는 성찬문은 외부에 노출시켜서는 안되는 비사(秘事)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열두 사도들의 가르침」10장 7절 주석 참조).

적어도 일부 교회에서 성만찬과 식사가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한 첫 번째 전거는 폰토와 비티니아의 총독 쁠리니우스 2세가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이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른 새벽 해가 솟기 전에 성만찬을 행하고 일단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모여 공동으로 회식했다(“성만찬 일시”에 소개된 역문 참조). 더 확실한 증거는 유스티누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 전서」65․67장 등으로서, 여기에는 처음으로 성만찬 절차가 상세하게 나오는데 식사에 관한 말은 전혀 없다. 즉, 이 「호교론 전서」 65․67장에 의하면 155년경 지역 교회에선 식사는 없어지고 성만찬만이 거행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이 되는 성만찬 전례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거행되었는가를 유스티누스「호교론 전서」65․67장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는 현존하는 문헌들 가운데서 성만찬 절차를 상세하게 전하는 첫 번째 전거가 된다. 이「호교론」은 155년경에 씌어진 문헌으로 그 당시에 거행되던 성만찬 전례를 소개하고 있지만 이미 이 책이 씌어지기 전부터 교회 안에서 행해져 오던 성만찬 전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호교론 전서」65장에 의하면 성만찬 전례는 세례식에 이어서 거행되었는데 예수께서 잡수신 최후만찬의 기본 절차를 이루는 행위와 말씀을 중심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물준비 : 65장에 의하면 세례식에 이어 성만찬을 거행했는데, 이 때 그리스도께서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술을 형제들의 으뜸으로 예식을 주례하는 이에게 드린다.

2) 찬양기도 : 주례자는 그것을 받아들고 성자와 성령의 이름의 만물의 아버지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이렇듯 큰 선물들을 내려주신 이들의 이름으로 긴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기도와 감사 끝에 참석자들은 모두 동의한다는 뜻을 표시하여 ‘아멘’이라고 한다.

3) 영성체 :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과 같이 빵을 나누어 잔과 함께 먹고 마신다.

 

또한「호교론 전서」67장은 일요일에 거행된 성만찬을 보도하고 있는데 2세기 초엽부터 성만찬 앞의 식사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를 담은 말씀의 전례가 성만찬의 고정요소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말씀의 전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독서 : 교우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공동체 모임을 가지면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자들의 책들을 읽는다.

2) 강론 : 독서자가 독서를 마치고 나면, 모임의 지도자는 덕행의 사표들을 본받도록 모 든 이들을 훈계하고 권면하는 강론을 한다.

3) 공동기도 : 강론이 끝난 후에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바친다.

4) 말씀의 전례가 끝난 후에 성만찬 전례가 이어진다.

 

「호교론 전서」65․67장을 보면 성만찬 거행양식이 두 번 반복해 나오는데, 앞의 것은 세례식에 이어 새 영세자들과 함께 거행된 것이고 두 번째의 것은 말씀의 전례와 함께 일요일에 거행했던 성만찬 전례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거행되는 미사와 상당히 비슷한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성만찬 전례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으며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이를 거행하였다. 따라서 현행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 전례는 2세기초부터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Ⅶ. 결론

 

마르코 복음서와 고린토 전서의 성만찬기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이 성만찬기에 나타나 있는 성만찬의 원초적 의미에 대해서 해석학적인 반성을 내리도록 하겠다.

 

7-1. 계약사상과 대속죄 사상

 

마르코 복음서(14,22-25)와 고린토 전서(11,23-26)의 성만찬기에는 계약사상과 대속죄사상이 들어 있다. 이 두 사상은 “빵에 관한 설명어”(1고린 11,24; 1고린 11,23b․24a)와 “잔에 관한 설명어”(마르 14,24; 1고린 11,25a)에서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계약’(혹은 ‘새로운 계약’)이라는 낱말과 “많은 이들을 위해서”와 “여러분을 위하는”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 먼저 계약 사상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약’으로 번역한 헬라어 διαθήκη는 그리스 언어권에서 원래 ‘유언’이나 ‘약속’, 혹은 ‘의지’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διαθήκη가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תי󰕉󰔶의 번역으로 쓰이면서 ‘계약’이라는 뜻을 얻게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계약’이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 즉 일반적이라기보다는 쌍방의 의무를 규정하는 의미로 쓰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쌍무계약’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번역이 될 것이다(출애 24,4-8). 그러나 신약성서의 최후만찬 보도에 등장하는 ‘계약’이란 구약성서적인 의미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먼저 마르 14,24(마태 26,28)의 “ …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지켜야 할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라는 측면은 철저히 외면되고, 오히려 ‘죄의 용서’라든가 ‘깨끗해짐’이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예수가 ‘많은 이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피를 흘린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고린 11,25(루가 20,20)에서는 "이 잔은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καινή διαθήκη)입니다"라고 하여 ‘계약’의 의미를 예레 31,22-24의 내용으로 확대시켰다(1고린 11,25 분석 참조), 그러나 ‘새로운 계약’이란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계약’에 비해, 최후만찬 보도와는 더 어울리지 않는데, 예레미아서의 ‘새로운 계약’이란 ‘피’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가 잔을 돌리며 잔 속에 든 포도주를 자신의 피와 일치시키면서, 피와는 상관도 없는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상을 머리에 떠올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몇몇 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의 것이 원형에 가깝고, 고린토 전서의 보도는 후대에 이루어진 신학적인 의미 부여로 간주한다(예레미아스, 파취, 페쉬 등등).

바울로가 ‘계약’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예를 들어보면, 우선 대표적으로 하느님이 아브라함가 맺은 ‘계약’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갈라 3,15-20에 보면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었고 430년 후에 율법이 등장했다고 하며, 율법이 계약을 절대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이란 ‘약속’이라는 의미로서, 출애급 시절의 ‘계약’과는 거리감이 있다. 바울로의 편지들에서 ‘새로운 계약’과 상대되는 구체적인 개념인 ‘낡은 계약’은 2고린 3,14에 등장하는데 2고린 3,1-18절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모세의 율법을 뜻한다. 그리고 이 ‘낡은 계약’의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벗겨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로가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구원’이라든가 ‘죄의 용서’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만찬례문에 등장하는 계약 사상은 비록 그 뿌리를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는 해도 신약성서에서는 온전히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었다. 원래 출애급 시절의 ‘계약’이나 예레미아서의 ‘새로운 계약’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이 공동으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제 이스라엘의 역할은 사라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구원 의지만 남게 된다. 말하자면, 구약성서의 계약 사상이 최후만찬에서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획득했다고 하겠다. 최후만찬 보도에 내포되어 있는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는 ‘대속죄 사상’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에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사적인 의미는 ‘대속죄의 죽음’이라는 사상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ὑπὲρ ἡμων)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죽음 이해는, 특히 바울로의 편지들에 잘 드러나 있는데(1데살 5,10; 갈라 3,13; 로마 5,35-36; 1고린 11,24; 15,3; 2고린 5,21 등등), ‘용서’, ‘속죄’, ‘새로운 계약’과 같은 개념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이 본문들을 살펴보면 ‘죽음에 대한 언급’이 어떤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ὑπέρ(~을 위하여)라는 전치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식의 문학적으로 고정된 틀을 두고 흔히 ‘정식’(Formel)이라고 부르며, 정식들이 성립된 시기는 대체로 바울로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로 잡는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죄’의 의미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던 태동의 순간부터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바울로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물려받은 ‘선포문’(1고린 15,3-5)과 예배 때 이루어지던 ‘성만찬기’(1고린 11,23-25)에 나오는 ‘ὑπέρ 정식’에 근거하여 대속죄 사상을 발전시킨 셈이다.

바울로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모든 이를 위한’,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궁극적인 구원으로 이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대속죄 죽음에 대한 바울로의 개념 설정은 후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르침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바울로의 가탁서간들(에페 5,2․25; 디도 2,14 등등)과 요한계 문헌(요한 6,51; 1요한 3,16 등등)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물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서도 바울로의 대속죄 사상이 ‘구원 신학’의 중심에 있음은 두말한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대속죄 사상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아무래도 예수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읽으려 했던 (바울로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순절 사건을 배경으로 할 때 제자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한 가치있는 죽음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즉, 오순절 경험이 제자들의 공동체에게 스승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 부여는 아마 예수가 살아생전 선포한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죽음에 관한 풍부한 표상을 제시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부활한 분을 믿음으로써 획득되는 예수 죽음의 구원론적인 전환이 대속죄의 죽음이라는 방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문자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대속죄 사상의 또 한가지 배경으로 유대교 문헌들을 꼽을 수 있다. “마카베오 시대 때의 영웅들은 “계약을 위해(ὑπὲρ)”(1마카 2,50), “조상들의 율법을 위해(περί)”(2마카 7,37) 죽었다고 한다. 이런 표현들은 분명히 유대적인 사고에도 ‘대속 사상’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구절들이다. 특히, 의로운 자의 죽음은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의 죽음인데, 엘리자의 기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소서. 우리가 겪은 고통이 이제 충분한 것이 되게 하소서, 내 피를 깨끗하게 하소서, 그래서 그들의 생명 대신(ἀντι ψυχον αὐτων)에 나의 목숨을 가져 가소서”(4마카 6,28-29). 여기에 나오는 표상에서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눈에 ‘의로운 자’의 기도와 그의 순교자적인 죽음은 민족의 생명으로 갚아야 할 죄를 대신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백성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지게 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이사 52,13-53,12와의 관계이다.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의 능력은 ‘우리’, 아니 더 나아가 ‘많은 이들’ 에게 혜택을 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많은 이들’을 대리한다는 사상을 이사 52,13-53,12에서 찾았는데, 그렇게 보자면 대속은 예수를 추종하는 한정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의 전편에 흐르는 사상인 ‘하느님의 종이 많은 이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시작될 때부터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많은 이들을 위해서” : 마르 14,24 분석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사야서의 대속 사상이 갖는 의미를 단순히 유대적인 표상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개를 뒤좇는 수준에서 구축한 것이 아니라, ‘야훼’와 ‘종’사이의 유일회적이면서도 고유한 관계로 발전시켜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종은 그의 운명에 따라 파견되었으며, 그의 파견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종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하느님의 세상을 위한 구원 의지를 대변하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계약 사상과 대속죄 사상이 어떻게 만찬례에 흡수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창출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지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만찬례문을 통하여 이는 비단 구원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으로 의미의 심화가 이루어진다. 즉, 죄인의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된 하느님의 구원 의지로서 ‘계약’이라는 표상이 이런 사고 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오순절 경험을 토대로 하여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했고 이를 만찬례에 투사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을 내어놓고 죽은 것을 단지 ‘우리를 위하여’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우리를 위하여 내어졌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이란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의도되어 시작된 대속의 사건으로, 하느님 스스로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대속을 선사하는 행위이다. 이로써 구약성서 - 유대적 개념들이었던 ‘의로운 자의 죽음’, ‘대속 사상’, ‘계약’, ‘새로운 계약’등이 그리스도론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같은 예수 이해는 로마 3,25에서 함축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그분을 세워 그분의 피를 통해서 신앙으로 (얻는) 속죄 (제물)로 삼으셨으니, 그것은 과거에 저질러진 죄들을 너그럽게 보아넘기심으로써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7-2. 그리스도론적 의미

고린토 전서 11장 26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성만찬례가 선교와 관련하여 거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해야 할 것은 빵과 포도주의 나눔이요, 기억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알려야 할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빵과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를 배령할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회상하고 그 죽음을 그 분이 재림하실 때까지 알려야 하는 것이다. 즉, 성만찬에 참석한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1고린 11,23)을, 그리고 예수님의 비극적 죽음(1고린 11,26)을 되새겼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학수교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거․현재․미래, 삼차원적 그리스도론이 들어있다 하겠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빵과 잔이라는 상징 안에 임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음식의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51년)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풀이했다. 겉은 빵과 포도주로 남아 있지만, 속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교리이다. 실체가 변한다해서, 실체변화(Transsubstantistio)교의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실체변화 대신 실체공존(Consubstantiatio)이라 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화란의 진취적 가톨릭 신학자들이 앞장서서 의미변화(Transsignificatio) 또는 목적변화(Transfinalisatio)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빵은 여전히 빵으로, 포도주로 남아 있되,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 의미가 바뀌었다. 그 목적 또는 용도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신학계에서 흔히 상징의 개념을 도입하여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이해하려 한다. 빵은 여전히 빵이요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인 까닭에 물질의 변화는 없다. 그러나 이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교를 맺어주는 상징적 매개물인 까닭에 이 빵은 여느 빵이 아니요 이 포도주는 예사로운 술이 아니다. 환원하면 성만찬 때 물질의 변화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관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우리 모두의 죄를 속죄하고자 죽으신 역사적 예수의 죽음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빵과 잔의 상징에 현존하신다지만 현상적으로 부재하시는 “주님께서 오실 때”(1고린 11,26), 곧 주님의 내림을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성만찬례는 과거에 우리 모두의 죄를 속죄코자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되새기고, 부활하여 빵과 잔이라는 상징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장차 내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예수잔치라 하겠다.

 

7-3. 교회론적 의미

 

첫째, 성만찬의 의미는 “친교”(κοινωνία)이다. 그런데 ‘친교’는 가진 것들을 나눌 때 실현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성만찬이 지니는 ‘친교’와 ‘나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는 친교(코이노니아)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6-17).

 

성만찬의 뜻인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요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친교라는 것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그리스도인들끼리 하나되는 잔치가 곧 성만찬례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빵을 뗌과 기도들에 전념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서로 한마음 한정신으로 일치하여 친교를 이루며 가진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아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 하였다(사도 2,42-47)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의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우들이 성만찬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일찌감치 모여서는 자기네끼리 미리 먹고 마시는 비리를 개탄하였다(1고린 11,17-22). 그러니 가난한 교우들, 특히 주인들에게 얽매인 노예․머슴 그리고 빈자 교우들은 음식이 없어 굶주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업신여김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1고린 11,20-22). “친교”와 “나눔”이 없이 행해진 성만찬례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성만찬을 일컬어 “빵을 나눔”이라고 한 것은 성만찬이 가지는 나눔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스티누스의 「호교론 전서」 67장 6절에 성만찬이 지니는 나눔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부유한 사람들과 원하는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대로 그들이 내놓고 싶은 그들 자신의 소유물을 바치고, 장상은 모여진 것을 맡아 고아들․과부들․병 또는 다른 이유로 궁핍한 사람들․포로들과 다른 지방 출신의 낯선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그는 궁핍한 사람들을 모두 보살펴 줍니다.”

 

예수께서 주는 몸과 쏟는 피는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만찬은 주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현존하신다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의미이고, 아들의 파견과 성령의 오심도 하느님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주면서 우리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도록 자신을 음식으로 주신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계속해서 받으면서 자기도 준다. 이것이 성만찬이다. 나눔은 당신 스스로를 주신 예수께 일치하는 것이며, 또한 형제들과의 일치이며, 많은 사람을 위해 개방된 생존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례에 참석할 때마다 이런 친교와 나눔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아 하느님이 초대하신 이 거룩한 식탁에 자신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웃과 함께 참석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그분 안에 같은 살과 피를 가진 하느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성만찬의 의미는 “섬김”(διακονία)이다. 예수께서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라고 말씀하셨다. 즉, 많은 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마음이다. 이러한 의미는 성만찬의 핵심을 이루는 “여러분을 위한 내 몸”과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내 피”라는 말씀에도 드러나 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을 시작하실 무렵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다(요한 13,1-17).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세를 당부하셨다. “주요 또는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14-15). 이 섬김의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 하겠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에 임하실 때 평소에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0). 그리고 그분은 인류를 위해 생명을 바치시고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셨다(에페 58,2). 성만찬의 기본정신은 사랑이고 이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섬김이다.

 

셋째, 성만찬례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덕목은 되돌아섬(μετάνοια)이다.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성만찬례를 거행하기에 앞서 가져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이는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각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병자들과 허약한 이들이 많고 또 잠든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이런 심판을 받으면서 교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영영) 단죄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고린 11,27-32).

 

“합당하지 않게” (ἀναξίως)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게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신다는 것은 1고린 11,17-22에 의하면 공동체 회신(docks)을 합당하지 않게 행하고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행위를 뜻한다. 또한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μὴ διακρίνων) 먹고 마신다는 의미 역시 공동체 회식에서 부유한 교우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교우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겠다(1고린 11,21-22). 그러므로 “합당하지 않게”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행위와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행위는 공동체 회식에서 부유한 교우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미리 먹는 바람에 배고픈 사람과 술취한 사람이 생기고(1고린 11,21), 그 결과로 공동체가 분열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1고린 11,18)과 내용이 일치한다. 그래서 바울로는 이런 비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고린토 교회 교우들이 먼저 자신들을 살피고(1고린 11,28․31), 성만찬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일 때에는 가난한 교우들을 기다려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1고린 11,33)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성만찬례에 참석하는 이는 누구들지 자신을 살피고 공동체 회식에서 올바른 행동을 취하는지를 판단하여 ‘되돌아섬’(μετάνοια)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7-4. 사목적인 반성

끝으로 사목적인 반성 한 가지만 내려 보도록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성만찬례로 만들어 매주 토요일 석식 때, 나중엔 일요일에 재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성만찬을 지낸 까닭은 예수께서 금요일에 처형되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유스티누스 「호교론 전서」 67,7). 즉, 성만찬례는 주간예식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매 일요일마다 이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반복실행 명령”(1고린 11,24b-25b)을 만들었다. 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지침으로서 요즘 미사 통상문 안에 들어 있는 전례 지침서(rubrica) 같은 것이다.

 

․ 1고린 11,26b :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 1고린 11,24a : “여러분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시오.”

 

그러니까 사도 교부시대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매일 미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성만찬례를 거행했던 것이다. 오늘날 매일 미사를 드리는 교우들은 하루라도 미사를 드리지 못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특히 수녀원에서는 미사 드릴 신부를 구하지 못해 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처럼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이 사목적인 측면에서 순기능이 있음은 분명하나 자칫 미사가 습관적으로 행해져 신선함이 떨어지는 역기능도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