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우물 18.
상처 받는 교회, 상처 주는 교회
언젠가 어떤 신자 한 분이 잔뜩 화가 나서 성당에서 동료들에게 울분을 토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말인즉, 본당 신부님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천주교 신부라면...”이란 전제하에 그가 쏟아내는 비난의 말들은 모두 신부로부터 상처받은 일들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신부도 사람인데...”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에게 사제라는 사람은 하느님 같지는 않아도 보통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맹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사제들이 신자들로부터 받는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다. 좋은 칭찬 뒤에는 항상 비난이 따르기 마련, 아무리 사제들이 열심히 사목을 하고 신자들을 위해 전심을 기울여도 신자들 중에는 열심하지도 않으면서 비판만 잔뜩 해대는 신자들도 있다. 내 동료 신부 중에는 기도하는 사제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한 신부가 있다. 그를 두고 어떤 신자는 그의 선임 본당 신부님보다 기도생활이 게으르다고 남모르게 비난하더라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뭘 해도 비난 받는 사제들의 삶 때문인지 어떤 사제들은 동굴로 피신하여 신자들과 담을 쌓고 살거나, 아예 신자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사제들까지 나온다.
솔직히 교회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만,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가톨릭 신자가 된 기쁨 보다는 미운 신자들을 핑계로 교회에 등을 돌리거나, 내가 원하는 것만 찾아가는 “자판기 신앙”을 즐기는 신자들이 있을 수 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조차도 봉헌된 자신의 교회에게 상처를 주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기도 한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지만, 내가 교회에 준 상처를 기억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최근에 로마 교황청은 미국을 비롯하여 남미, 유럽 전역에 걸친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황님은 이례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들이 교회에 준 상처들을 고백하고, 이들 사제로부터 상처 받은 신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죄를 지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문화가 다른 한국 교회에서는 좀처럼 이 같은 문제가 겉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사제들의 신원의식의 변화는 근래 한국 교회에도 적지 않은 도전이 되고 있다.
상처는 죄의 결과지만, 동시에 용서 이후에도 남는 기억의 아픔이다. 사람 사이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상처받고 상처를 줄 수 있다. 제도 교회가 신앙이란 이름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신자들을 강요하고,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역사가 있는 반면, 수많은 세속의 권력과 신앙으로부터 일탈된 신자들로부터 상처 받은 교회의 역사도 있다. 교회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 역사도 있고, 박해와 편견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순교의 역사도 있다.
교회는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이거나, 나의 능력과 재주를 뽐내고 인정받는 장소가 아니다. 내가 싫으면 관두고, 미우면 욕을 하는 대상도 아니다. 교회 역시 상처받는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살아 있는 돌”이다. 흔히 교회가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교리적인 설명은 우리가 아무리 뭐라 해도 교회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져 “저승의 세력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분의 뜨거운 마음이 교회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상처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는 이 상처들을 씻고, 기워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교회는 건재하다. 가톨릭 교회가 수많은 역사의 죄과에도 불구하고, 2천년을 넘게 한결같이 존재해온 것은 교회를 사랑하며 자신을 봉헌한 적지 않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살아가며, 말없이 교회에 봉사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쏟는 그들의 보속과 희생이 있기에 상처 받은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조금만 주변을 눈여겨보면 남몰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사제들과 신자들, 하느님의 백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이다.
상처투성이인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일까? 어려운 질문들 앞에서 그나마 내가 확신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의 교회를 사랑하신다. 아니 그 분은 우리를 포기하는 법을 모르신다.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결코 내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분을 외면해도 그 분의 짝사랑은 정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내가 부족한 사제로 살면서도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을 삼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 분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나를 사랑하신다. 마치 미워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부모님처럼, 싫어도 함께 지내야하는 배우자처럼, 못나도 내 자식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맺은 인연을 사랑하신다. 그것이 내가 교회에 헌신하고,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다. 상처 받은 교회를 위해 죄인인 나지만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성심을 기억하면서 사제의 해를 마무리하는 6월.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하자. 성체 없는 가톨릭 교회를 상상할 수 없다면, 사제 없는 가톨릭 교회 역시 상상할 수 없다. 비록 부족한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사제들이 받는 사랑 만큼이나 그들이 신자들을 향한 열정도 커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점은 한국 교회가 받은 축복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