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욥기
지난 시간에 시편이라는 책을 봤는데요, 아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먼저 설명드리고 욥기라는 책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메길롯이라는 책들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메길롯은 한국말로 번역하면 축제 두루마리 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유다인들도 자신들의 축제가 많은데 그때 읽게 되는 중요한 책들을 모아놨어요. 5권의 책들을 모아놨는데 이것을 메길롯이라고 합니다.
아가는 여기에 속하는 책중의 하나구요. 축제중에 가장 중요한 축제인 파스카때 부르게 되어있습니다.파스카는 저희 부활절과 연결되어 있는 축제죠. 봄에 일반적으로 파스카를 지내게 됩니다.아가의 분위기나 이런게 봄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거예요. 그리고 사랑의 노래를 하고 있는건데 파스카도 결국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사랑으로 본다는겁니다.
사랑이라는 모티브에 대해서 때로는 세속적일 수도 있는데 유다인들은 사랑의 노래인 아가를 파스카때부름으로써 하느님과 자기들의 관계를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가는요 그야말로 사랑노래의 선집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구약성경에 보면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은 몇가지 책이있습니다.
호세아서라든가.이사야서,예레미아서,예언서에 이런부분들이 잠깐 잠깐 나오게 되는데 남녀간의 사랑의 이야기로 책 전체를 다 쓴 그런 작품은 아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특한 책이예요. 하느님 혹은 야훼 이런 말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아서 언뜻 보기엔 그냥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하느님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너무 세속적인 책이 아닐까 이런 오해를 받기도 한다는 겁니다. 시편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된 책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또 다른 시문학 작품인 아가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되게 논란이 많았던 책인데요. 한국말로는 아가, 사랑의 노래라고 번역하지만 원래 히브리말 명칭은 쉬리하쉬림인데 이건뭐냐면 노래들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법에서 같은 말을 두번 세번 쓸때는 최상급표현이 되요. 그래서 최고의 노래라는 뜻이예요. 근데 이런 제목이 붙여지게 된 이유는 노래가 세속적이다, 이게 정말 하느님과의 관계냐? 이런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최고의 노래란 제목을 갖게 된 겁니다.
히브리말에서도 쉬르하쉬림, 그리스말에서도 아스마아스마톤 이라고 해서 노래들의 노래라는 제목을 여전히 갖게 됩니다. 이런 논란이 많았던 책인데요. 저자와 제작연대를 보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봤을땐 솔로몬과 연관된 노래처럼 추정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솔로몬 훨씬 이후의 단어들 아람어, 페르시아, 그리스말의 영향까지도 발견이 되어서 굉장히 후대의 작품이라고 보여지고요.
아주 옛날부터 불려진 사랑의 노래들이 쭉 수집이 되어서 최종 편집은 후대에 만들어진거라고 여깁니다.제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춘향가라는 작품도 한번 부르면 8시간을 부른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아요. 이처럼 어마어마한 작품도 처음부터 8시간 작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기네들 안에서 조금씩 춘향이와 관련되지 않은 다른 사랑의 노래들도 함께 들어오면서 춘향의 스토리 안에 함께 수렴될 뿐이죠.
마찬가지로 이 아가라는 이 작품도 처음부터 만들어졌던 노래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최종편집되면서 이런 거대작품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장소는 분명 팔레스티나에서 유다인들, 이스라엘 땅에서 만들어진 거라 보여집니다. 제가 역대기계 역사서 설명드릴 때 뛰어난 인재들이 디아스포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서안에서는 디아스포라에서 만든 작품들도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근데 이 아가는 그런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그야말로 유다인의 땅, 이스라엘 안에서 만들어진거라 보여지는데요.그 이유가 여러 지명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면 뚝섬, 남산 이러면 아주 옛날부터 유명한 장소로 여겨지잖아요. 그런것처럼 티르챠라는 아주 고대도시, 엔게드의 포도밭, 길앗 비탈길 이런 예루살렘의 주요한 지명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스라엘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여집니다.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여러 가설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결혼 축가때 부르는 노래가 아니였을까, 왜냐면 우리는 현재 결혼식을 하면 빨리 끝내지만 유다인들은 일주일동안 결혼식을 올리거든요. 그때마다 축가로 불려지기 위해서 이런 책이 만들어진게 아닐까란 얘기도 있고 그다음에 드라마 가설이란 것도 있어요. 당시 사람들은 동네 시장이런데서 소위 연극같은걸 하는데 그런 작품이 아니였을까.
왜냐면 나중에 제가 표로 보여드리겠는데요.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여자가 부르고 합창단이 등장하고 이런 장면들이 나와요. 즉 일종의 오페라처럼 일종의 하나의 드라마가 아니였을까 라는 가설도 있고요. 또 다른 가설은 이방인들의 예배쪽에서 이런게 나왔다. 왜냐면 이방신들은 어떤 전례형태를 가지고 있었냐면 남신과 여신이 항상 있어요. 그래서 두 신들의 결합이러던가 이런 스토리로 일반적으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신들의 모습을 인간배우들이 구현했다고 보는거고 그걸 전례중에 했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 구약성경을 보며 기존의 고대 근동의 신들의 모습과 아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뭐냐면 하느님 혼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분이 전체를 관장하신다는 이 유일신 사상은 오로지 성서안에서만 등장합니다. 그 이외에 다른 신화에서는 언제나 남신과 여신이 나와요. 그래서 혼자서 뭘 하고 이런 경우는 없어요.
이게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배우자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어떤 여신이 있어서 남자 여자 이래서 인간을 만들고 이런 게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는 어떤 여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고 결국 신약성경에서는 하느님과 새 이스라엘 즉 교회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여신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이 기가 막힌 신학은 성서안에서만 발견이 됩니다.
아무튼 여러가설들이 있지만 지금 저희가 뭐가 정답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고 중요한 건 뭐냐면 이런 드라마나 이방신들의 전례로 해석한다면 저희 경전안에 작품으로 들어올 리 없겠죠. 우린 오로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보는 겁니다. 실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은유적으로 노래하고있다는 거죠. 이 해석이 정당성을 가질때만 이 아가가 하느님의 말씀이구나, 정경이구나 하는 위상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역사서 설명할때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어요. 제 2성전이 무너지고 신약 시대로 가면서 헤로데 가문이 무너지고 이러면서 70년에 제 2성전이 재건됐는데 그게 또 다시 무너져요. 그러면서 예루살렘은 완전 초토화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유다인들은 어디에 집결하냐면 잠정적 수도로 정한 곳, 얌니아란 곳이예요.
얌니아란 곳에서 자기네 성경, 유다인들의 성경 타나크라고 설명드린거. 이걸 결정하는데 그때 아가를 집어넣어야 되나 말아야 되냐 에 대해서 굉장히 논란이 많았고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해석한다는 전제하에 성경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파스카라는 중요한 축제 때 이 책을 읽고요. 저희는 성모님축일이라던가 성녀들의 축일 이때에 아가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와서 읽습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구도로 되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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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선곡 |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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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노래 |
1.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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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노래 |
2.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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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노래 |
3.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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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재 노래 |
5.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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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노래 |
6.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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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노래 |
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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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8.8-14 |
여기 표를 보시면 아가라는 것은 최소한 여섯개의 노래가 연합되있다고 보는거고 사실 어떤 학자들은 스물 몇개까지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랑의 노래들이 들어온거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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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노래 |
1,2-4a; 1,5-7;1,12-14;1,16-2,1; 2,3-3,4;4,16;5,2-8;5,10-16; 6,2-3;7,10ㅠ-8,3;8,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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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노래 |
1,9-10; 1,15;2,2;3,5;4,1-15; 5,1;6,4-9,11-12;7,2-10a;8,4;8,5b-7;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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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
1,4b; 1.8.11;3,6-11;5,9;6,1,10; 7,1;8.5ㅁ;8,8-9 |
이 표에서 보듯이 신부의 노래, 신랑의 노래. 합창 이런게 있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창하는모습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강조되는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요. 탈신화화 된 사랑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제책 구약성경 통권 노트라던가 시서와지혜서라든가 이런데서 가장 먼저 아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씀드리는데 당시에는요.
우리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신전에 창귀들이 있어요 .그래서 신약성경을 읽어보시면 신전 남창이런 표현이 나와요. 신명기라던가 열왕기라던가 찾아보시면 많이 나옵니다. 이게 어떤 거냐면요. 당시 고대인들에게 가장 주된 관심은 풍산입니다. 애기도 많이 낳야되고 쌀도 많이 거둬들어야 되고 뭐든지 풍년이 들어야되고 이런거죠. 그럴려면 남신과 여신이 잘 결합을 해야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두 신이 결합을 잘하면 우리도 풍년이 든다 근데 이것을 신들의 모습이 잘 보여지지 않으니 신전 자체내에 창귀들을 둔겁니다. 남성창귀, 여성창귀 들이 있어서 그들이 결합을 하는거죠. 근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퇴폐적인, 아주 성전이 문란한 이런 걸로 전락하게 되죠.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런 신화를 빙자해서 뭔가 성전이 더러워지는 이런 부분들을 강력하게 배제하는 겁니다.
그리고 신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것이 왕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왕비가 애기를 못 낳으면 자기네들이 흉년이 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애기를 못낳는 왕비들은 폐위되고 또 다른 왕비가 등장하고 이랬었다는 거죠. 왕족과 신전이 문란한 곳이 될수가 있었단 건데 이걸 철폐하고 하느님의 유일한 사랑은 인간, 이스라엘이다 라고 보면서 탈신화, 이런 신화적인 배경을 전격으로 배제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굉장히 신학적인 작품이라고 보여진다라는거죠.
그 다음에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굉장히 잘 묘사가 되있어요. 너무 아름답게 세세히 표시되어있어서 읽기가 거북할 때가 있어요. 겉을 꾸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자체가 굉장히 아름다움은 하느님이 주신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거죠. 그래서 저희 수녀들은 예쁜 옷도 안 입고 살고 있지만 다들 수녀들처럼 살 필요는 없는 거죠. 중요한건 그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말고 겉꾸밀려고 할 때, 외적으로 꾸밈이 들어가고 거짓말이 들어가고 이럴때에는 아름다움이 손상됩니다.
하지만 자체적인 아름다움은 아가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면 될 것 같고요. 어긋남을 통해서 견고해지는 사랑인데요. 이게 뭐냐하면 아가를 읽어보면 신부가 신랑을 쫓아다녀요. 결국엔 못만나고 서로 어긋나고 이래요. 제가 생활성서라는 잡지에서 얼마전에 쓴 글이 생각나네요. 안보이고 안들리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사실은 선뜻 다가가고 선뜻 멀어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늘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함께 동행하는 일입니다.
선뜻 가까워지고 선뜻 멀어지고 이런거는 사랑이 아닐수 있단 거죠. 하지만 하느님의 존재는 선뜻 다가오거나 갑자기 멀어지는 분이 아니란 겁니다.잘 보이지 않지만 늘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란 건데요.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서로 그런 부분에 대한 확인이 있기에 멀어지지도 못합니다. 인간도 하느님을 포기 못하고 하느님도 당연히 저희 인간을 포기 못하시겠지요.
그래서 세속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과는 굉장히 차별화된 본질적인 사랑 이런것들을 이야기하고있는 아름다운 책이 아가라고 보여지고요. 지금 교황님께서 퇴임하셨지만 가장 먼저 내신 회칙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회칙이였어요. 제가 굉장히 놀랬죠. 왜냐하면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것처럼 엄격하시고 곧이곧대로이신 정통보수파의 대표적 학자셨던 분인 교황님이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그리고 책도 아주 얇은 책을 내셨어요. 상업적으로 많이들 읽으시라고 일부로 양을 줄인 거죠.
의아해 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 놀랍게도 아가페 적인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얘기한게 아니라 에로스적인 사랑도 역시 중요한 사랑이다 이런 진보적인 말씀도 하시는데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랑에 대해 정의할 때 널 위한 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 라고 정의를 할 수 있을거 같아요. 그냥 저사람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내가 할수있는 것을 하는 게 사랑이지,내가 이렇게 하는게 좋으니까 이런 거는 그냥 본능이지 사랑이 아니란 거죠.
엄마 생각에 애가 이정도는 되야 되니까, 이런 건 다 아이를 위한 게 아니란 거죠. 엄격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아니란 거죠. 타인을 위해서 내가 전적으로 봉헌되는 게 사랑이지,내가 필요하니까 내생각엔 이게 맞으니까, 내가 너를 그리워하니까 이런 건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본질적인 사랑하고는 조금 다르다라는 거 기억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서와 지혜서에서 시문학에 해당되는 작품들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시편을 봤고 아가를 봤죠. 지금부터는 지혜문학에 해당되는 다섯개의 작품을 볼텐데요. 오늘은 욥기를 집중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는요 듣기만 해도 많은 분들이 관심가지고 여러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어떤 부분에 주목을 했냐면 의인인데 왜 고통을 받느냐. 의인의 고통, 그리고 무죄한 이들의 고통, 죄가 없는데도 고통을 받는단 거 그리고 특별히 이런 부분에 대한 질문이 굉장히 강하게 제기가 됬었던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 입니다. 왜냐면 말그대로 세계대전이잖아요.
세계 전체가 전쟁에 참여하는 이 어마어마한 전쟁을 1,2,차 겪게 되면서 너무나도 무죄한 사람이 죽게 되고 희생되는 이 상황에서 도대체 열심히 살던 사람들에게 왜 고통을 주느냐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믿을만하겠느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이 제기 됐던 거고 실제로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제시했었죠. 결국 신은 죽었다라는 무신론적인 사고로까지 이어지기도 이랬습니다.
근데 여기서 욥기의 핵심은 의인이 받는 고통이 참 억울하다란 차원이 아닙니다. 사실 고통에 대해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경제적인 발전과 정치적,인문학,신학의 모든 발전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수있을까,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수있을까 이 문제예요. 근데 이 욥기에서는요.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고통을 없애주는 게 하느님의 구원이 아니다.
고통속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본다면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기 때문에 고통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지혜문학적 교실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착하게 살았으니까 고통을 없애주는것, 늘 나약한 인간으로 늘 평탄하고 늘 안락하고 이런 삶을 사는 게 인간의 본질에 들어가는 방법이라고 보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이 뭔지를 본 사람은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누구보다도 충만하게 살 수 있으니 고통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은총의 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하느님을 정말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고통의 시험을 받는 거죠. 지금도 이부분에 대해선 유다인들과 많이 다른데요.
많은 분들이, 특히 유다인에서는 고통을 없애주시는 메시아, 자기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늘 안락하게 하고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내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면, 사실 저희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도 동참하시는 이 메시아를 얘기합니다. 여기서부터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 달라지게 되는거죠.
그래서 욥기에 대해서 폭력적이고 의인을 버려두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재해석이 굉장히 중요한 화두로 제시된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의인들이 고통을 받는 이야기는요. 욥기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혜문학 개관을 설명해 드릴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오는 여러 작품들, 신을 향한 인간의 탄원, 바빌론신정론 , 나는 지혜주의를 찬양하나이다 이런 작품들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보면 의인들이 받는 고통을 주제로 삼고 있어요.
그래서 욥기 작품도 사실은 외국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건데, 다만 거기서는 그냥 고통속에서 어쩌다 보니 구원되고 착하게 살기 때문에 결국 복받고 이러지만 욥기에서의 핵심은 이사람이 복받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 이게 가장 중요시 된다는 게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엔 당연히 삶이 풍요롭고 좋아질 수 밖에 없는 점에서 차별화가 되죠. 명칭과 인물을 보면요.욥이란 주인공 이름이 제목으로 되있죠.
욥이란 이물은 사실 히브리식 이름이 아니라 외국이름입니다. 거기 친구들 이름도 다 외국사람이름인거죠. 엘리후라는 친구가 나오는데 이것만 히브리 이름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다 외국사람인거고 우추란 곳이 배경으로 등장되있는데 이곳도 사실 어딘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학자들이 보기엔 에돔지역과 연결된 지역이 아닐까 라고 보는데 아무튼 의도적으로 장소와 사람들 이런걸 이스라엘 밖으로 하고 잇는거예요.
일부러 외국문학인것처럼 하는데 특별히 에제키엘서에서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에제 (14,14)"비록 그곳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주 하느님의말이다."
에제 (14,20)
"거기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아들도 딸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보면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건 무슨 의미냐면 저희들도 효녀하면 심청이가 생각나잖아요.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현인 이러면 공자 맹자님 생각나시잖아요. 이렇게 유다인들 의식안에서 노아, 다니엘 욥 이러면요. 의인 3총사로 여겨집니다.
아주 열심히 사셨던 분들 그래서 이 에즈키엘서에서도 욥이 등장하는데요. 같은 욥이라고 굳이 연결시킬 필욘 없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서 욥 이러면 의인. 아주 열심히 사시는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인식되있단 걸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왜 외국과 외국인 등장인물 이렇게 했을까?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에 이거는 저자가 외국사람인가보다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문제를 도전하기 위해서 우회하는 거죠. 여기서 아예 이스라엘 사람, 예루살렘 이러면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게 되버리니까 장소나 인물을 외국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이사람들을 통해서 강력하게 고발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외국사람이 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특별히 신명기적 사고, 이스라엘의 전통사고이죠.
여기에 굉장히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문학에도 정통했던 분이 이책의 저자라고 추정하고있습니다. 제작시기를 보면요. 재밌는 거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들 익숙하시죠? 이 사탄이란 말도 사실 히브리말입니다. 고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욥기를 보면 사탄이 등장하는데,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사탄이 어디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천당에서 살고 있진 않을거아녜요.
불이 활활타는 지옥에서 사탄이 살고 있다고 생각들 하실텐데 사실 사탄은 우리 주변에 살잖아요. 지옥에만 있으면 저희가 사탄을 경계할 이유가 없죠. 근데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욥기에서 보면 하느님의 궁정회의이 있어요. 하느님의 옥좌가 있고 궁정내신들이 쭉 있는데 거기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에 대한 초기 의식이랄까요. 이런 의식들이 나오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건 제가 늘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적대자로서 사탄이 있는게 아니예요. 하느님은 악과 고통도 이용하시는 분입니다. 사탄이 절대로 적대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반 다른 신화에선 선신과 악신이 대결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성경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대적자는 없습니다. 다만 악도 이용하시는데 거기에 인간 자유의지가 문제로 등장하게 되죠.
내가 하느님을 따라갈 것인가, 악을 따라갈 것인가. 결국 하느님에 의해서 컨트롤 되고 제약되는거 그게 악입니다. 하지만 잘못 생각할 경우, 그러니까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이 유혹을 받는거 그거 하나예요. 그러니까 악의 편을 들 경우, 유혹에 빠지면 ,왜냐하면 하느님이 자유의지를 주셨으니까요.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탄이 등장하고 천상회의의 한 일원으로써 인식되는 그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인거죠. 그리고 욥기에 보면 괴물들 이름이 나와요. 이 괴물이 어떤 괴물인진 잘 모르는데 저희가 추정하기론 악어나 하마 이렇게 추정합니다. 이게 왜 괴물이냐면 유다인들 안에서는 늪지대라는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일강 그 지역에 사는 무시무시한 동물들이 유다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괴물인거죠.
이런 괴물들이 소개가 되요. 그러니 굉장히 후대작품이라고 추정할수밖에 없다는 거죠. 사탄이란 이름이 그리스말 신약성경에서는 디아볼로스란 말로 번역되죠. 디아볼로스는 디아라는 말이 그리스 어 전치사예요. 서로 분열시킨다는 의미가 있어요. 결국 그리스말에서 이야기하는 악의 정체는 뭐냐하면 끊임없이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과 가까이 가는것이예요.
하느님없인 살수없다. 이게 맹목적인게 아니라 그는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길을 가르켜주시니 살려면 하느님과 유착할 수밖에 없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악입니다. 그래서 좋고 훌륭한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디아볼로스예요. 분리 분열 이기때문이죠. 사탄의 개념이 등장을 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전체내용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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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1-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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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3,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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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문 |
42,7-17 |
여길 보시면 전체으론 서문 본문 결문 이렇게 일반적인 추세로 되있는데요. 사실은 굉장히 방대한 작품입니다. 내용이 굉장히 많아요. 이 본문부분이 핵심이 되는데 다음 표를 보겠습니다.
(본문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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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3장-27장) |
세 친구들과 욥의 논쟁 (3,1-31,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엘리후의 마지막 연설 (32장-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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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등장(38장-42,6) |
세 친구들과 욥의 논쟁 |
친구들과의 논쟁과 하느님의 등장, 친구들 셋이 나오는데 세 친구의 논쟁과 하느님의 등장이 본문 내용이예요. 근데 친구들과의 논쟁에서도 굉장히 체계적인 구조를 볼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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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쨰 담론 |
욥-엘리파즈-욥-빌닷-욥-초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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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담론 |
욥-엘리파즈-욥-빌닷-욥-초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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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담론 |
욥-엘리파즈-욥-빌닷-욥 |
첫째 담론, 둘째 담론 셋째 담론 세개의 담론이 등장하는데 이 세개의 담론도 친구들끼리 서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거든요. 근데 순서가 체계적이예요. 욥 엘리파즈 욥 빌닷 욥 초바르 이런식으로 두번째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셋째 담론에서도 똑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방대한 작품이지만 체계적인 구조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걸 볼 수 있어요.
(하느님의 등장(38장-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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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느님의 연설 |
38,1-40,2/ 40,6-4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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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욥의 한계 |
40,3-5/ 42, 1-6 |
그리고 위의 표에서 보듯이 하느님과의 등장안에서도 하느님의 연설과 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지그재그 구조로 되있습니다. 하느님의 연설, 욥의 회계, 다시 하느님의 연설 욥의 회계 이렇게 교차배열적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제가 본론부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서론과 결론은 산문체로 되있습니다. 그냥 쭉 평서문으로 되있는겁니다. 그렇지만 본론부분은 시,운문체입니다.
그래서 서론과 결론은 산문체, 본론부분은 운문으로 되있는데 내용도 좀 다릅니다. 본론부분이 굉장히 체계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서문과 본문, 결문여기에서 서문과 결문 이렇게 묶이고 본문만 따로 나뉘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요. 서문하고 결문은 산문으로 되있는데 여기 등장하는 욥은 굉장히 착한 모습이예요. 항상 하느님이 시련을 내려도 별로 저항을 안하고 순명하는 모습을 보여요. 결문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운문체로 되있다고 말씀드렸죠. 이 본문의 욥은 하느님과 저항을 하는 욥이예요. 불순명하는 모습으로 되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두개의 다른 작품이 있었는데 이개 연합된게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착한 욥의 이야기가 먼저 있었다는 거예요. 어떤 고통을 줘도 그냥 숙명하는, 근데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항상 착할수가 있느냐,
너무 억울하면 하느님과 싸우기도 하지 않을까 이러면서 착한 욥, 착한 사람 모습 안에 나쁜, 하느님과 대항하는 욥을 첨가함으로써 기존의 이야기를 개정(Revision)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거죠. 두 번째 가설은 맨 처음 있었던 것은 악한 욥이라는 거예요. 맨날 대들고 싸우고 이러는, 근데 이게 너무 불경스러워서 앞뒤에 착한 욥의 모습을 마지막에 끼워넣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수정이죠.
개정(Revision)이 아니라 수정(Modification) 이란 거예요. 너무 욥의 모습이 불경스러우니까요. 그런데 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개정(Recision)이 맞다고 봅니다. 착한 욥의 모습이 원래 있었지만 살다보니까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겠더라 , 그러니 하느님과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첨가됐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현재와 같은 욥의 모습이 나왔다고 보는 건데요.
사실 이스라엘이란 말도 하느님과 맞서는자, 하느님과 싸우는자, 엘은 하느님이고 사라 라는 동사가 있는데 이게 뭐냐면 맞서다, 싸우다 라는거예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느님과 맞서다 혹은 하느님과 싸우다란 의미가 있어요. 야곱이 천사랑 싸우잖아요. 거기서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별칭을 얻게 되죠.
결국엔 하느님과 마주하는 이런 운명이 인간의 모습인걸 이스라엘 안에서 볼수있습니다. 이 사라라는 동사는 싸우다란 의미도 있지만 이게 명사로 쓰이면 사라, 아브라함의 부인이죠. 레이디란 의미가 있어요. 그야말로 마님, 부인이죠. 같은 스펠링이지만 동사로 사용할 때와 명사로 사용할 때 의미가 다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이라는 말에서 나오는 동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도대체 욥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뭘까 하실텐데요.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제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적 이론을 가지고 와서 정.반.합으로 소개해드리는 게 제일 맞다고 보여집니다. 즉, 이렇게 보시면 되요. 이 욥기라는 작품은 원래 '정'의 입장에 있었다는 거고 이 '정'의 입장은 일종의 전통사상입니다. 이스라엘 전통사고는 신명기적 사고였죠?
즉 신명기적 사고에 의하면 고통은 뭐냐하면 죄의 벌이예요. 죄의결과. 즉 이스라엘 전통사상안에서는 고통이 뭐냐? 죄를 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벌로 고통이 주어진다는 거죠. 내가 갑자기 문둥병에 걸린다거나 갑자기 어떤 병에 걸린다거나 망한다거나 이럴 경우에는 이 고통이 왜 오는거냐? 전통사상에 따르면 언젠가 너가 죄를 졌고 그 죄에 대한 결과로 원인론적인 결과로 나오는 것 뿐이다 이렇게 보는데 이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 입니다. 욥이 갑자기 망하잖아요. 몸도 아프게 되고요.
이때에 친구들이 와서 한다는 말이 니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유없이 고통은 없다. 죄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죄를 빨리 회개해라.그러면 원래대로 원상복귀 될거다 라고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에 '반'의 입장은 욥의 입장이예요. 왜 친구들과 대립이 되냐하면 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죄가 없다.
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회개를 할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는데 고통이 왔다라고 '반'의 입장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신명기적 사고는 전통 주류사상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는데요. 어떤 공동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상식이었는데 이제 사람들의 의식이 깨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상하다,
나는 열심히 살아도 늘 가난하고 늘 병들고 늘 꼬이는데, 저사람은 저렇게 죄가 많은데도 늘 잘되더라 이러니 전통사상은 문제가 있다라는 반론이 구약시대 후기로 가면서 제기가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란 인물을 통해서 '반'의 입장이 제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제 '합'의 입장, 결론의 입장으로 저자의 입장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거입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답답하기만 한 욥이 그야말로 폭풍우속에서 부르짖죠. 이제 정말 하느님을 만나게 해달라고요. 근데 하느님을 만났더니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걸 명쾌하게 얘기하시는게 아니고 하늘의 주춧돌은 누가 놓았느냐 바닷물은 누가 모았느냐는 둥 이런 엉뚱한 소리들을 하세요. 그러면서 강조하는건 모든것은 하느님 뜻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너가 고통받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게 하느님의 뜻이었다라고 보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지금까지 욥은 열심히는 살았지만 하느님을 만난 사람으로서의 신앙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의인이고 교양인었고 지식인이었고 그래서 괜찮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을 원체험한 그런 신앙인은 아니였다라는거죠.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젠틀한 사람을 만들어내는게 신앙이 아니란 겁니다.
하느님을 만나서 하느님 뜻에 따라서 살게끔 하는 것 이게 신앙의 목적이란 거고, 그것은 언제만 가능하냐하면 모든 것이 제거된 상황, 아무것도 없어야 비로소 거기서 하느님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한계상황이 아니면 하느님을 만날수가 없었고 그래서 너를 여기까지 초대했다라는 겁니다. 즉 죄의 벌이 아니라 의인이였기 때문에 초대를 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고 나니까 어떻게 되죠?
몇배의 상급을 받게 되죠. 왜냐하면 존재가 바로 서면 나머지 문제는 바로 해결됩니다. 존재가 제대로 안 섰기 때문에 잘 안되는 거죠. 그래서 이 정,반,합을 통해서 기존의 전통사상과 새롭게 고통을 이해하는 부분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무튼 욥기는 시간관계상 이 기가 막힌 작품을 다 보진 못하겠는데요. 제 책, 시서와 지혜서로 보충을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결국 이말입니다.
신앙은 소문으로만 들어서 만난 하느님 이거가지고 만은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은요 제 3자의 하느님이예요. 근데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읽는 이유는 바로 1인칭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말고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런 정보들을 성경을 통해서 확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잘 안다고 해서 신앙이 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그게 왜 하필이면 고통이냐, 이게 인간의 한계죠. 저희가 신학하면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신학은 루저의 감수성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말을 합니다. 루저는 잃어버린, 다 뺏긴 상실한 자죠. 신학은 오히려 뺏겼을때 가능한것 같습니다, 제가 신학의 본질을 얘기했던 중요한 예문이 있는데요.
미켈란젤로가 삐에타라는 작품을 만들죠. 너무 기가 막힌 걸작이 나와서 사람들이 인터뷰를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멋진 작품을 만들게 됐냐 이랬더니 이분이 하시는 얘기가 나는 한 게 없다. 나는 깎아내고 쪼개내고 없애버린거 말곤 없다. 맞는말이죠. 대리석안에 이미 하느님이 기가 막히 모습을 마련했던거고 자기는 깎아내고 상실하게끔 했던거 말곤 없다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 구원입니다.
뭔가를 더 많이 만들고, 소유하고 이래서 본질에 도착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상실했을때, 깎아졌을 때, 쪼개졌을때 우리는 본질의 아름다움에 도달할수있다 라는 거죠. 상실이 없을때는 신앙을 살기가 굉장히 어렵다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욥이 모든 것을 상실한 상황에서 삶의 본질을 보고, 본질을 봤다라는건 이제 하느님과 함께 존재를 구축했단 이야기고 존재가 구축되면 나머지는 다 저절로 따라올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여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