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뜨레아 훈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창수라는 아이는 물을 무서워해서 수영장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촌이 옛날 엽전을 주면서 이 엽전을 수영복 주머니에 넣고 있으면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창수는 삼촌의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놀랍게도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수가 삼촌으로부터 받았던 옛날 엽전은 단순히 옛날 동전으로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창수 안에 감춰져 있던 용기를 자극하고 끄집어 내준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엽전은 그 본래의 용도를 넘어서서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떤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 그 자체를 뜻하지 않고 어떤 미지의 힘을 행사하는 역할을 할 때 그것을 ‘상징’이라 합니다.
인류의 모든 주요 종교는 거대한 상징체계입니다. 옛날 엽전이 창수의 마음 안에 용기를 불러 일으켰듯이 종교의 상징체계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기(神氣)를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단순히 예술품을 보는 감흥 이상의 것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신기가 발동하는 느낌입니다. 이런 종교적 상징들은 인간의 지성과 예술적 솜씨를 통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그 뿌리는 역시 그것을 표현했던 사람의 신기로부터 올라온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 상징으로 표현된 작품을 볼 때 느껴지는 감흥은 일종의 공명현상입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내 안에도 같은 것이 자극을 받아 꿈틀하는 것이지요.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신기를 자각하는 것이 종교생활의 본질입니다. 종교(宗敎)라는 단어는 한자어인데 사실 종교 본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지 못합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알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종교를 마치 좋은 가르침을 배우는 학문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 내면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하느님의 기운과 관련된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이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종교의 어원을 살펴보면 본래의 의미가 잘 살아납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라틴어 동사 ‘religare’(다시 연결하다)와 ‘religere’(주의 깊게 살펴보다)에서 파생했습니다. 즉 ‘다시 연결해서 주의 깊게 살펴 보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연결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의 기운이 어떻게 움직이고 내 삶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내면적인 태도가 종교생활의 본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다시 연결하기’의 측면을 강조하시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도 아닌 포도나무에 비유를 하신 것은 이 연결성이 어떤 의미로 우리들에게 다가와야 하는 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인 듯합니다.
예수님과 포도주 혹은 포도나무와의 연관성은 복음서 곳곳에 등장 합니다. 그것은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당대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은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만 하더라도 제국의 변방에 살다가 죽었던 예수라는 인물보다는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포도주와 관련된 신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로마의 바쿠스)였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주신답게 삶에 흥취와 열정을 일으켜 주는 신입니다. 그리고 신들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가 부활한 신입니다. 포도주나 포도나무라 하면 당대 사람들은 당연히 디오니소스를 먼저 떠올렸지 예수님을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생명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모습이 예수님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차용한 듯합니다.
우리 내면의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다시 연결되면 삶에 새로운 생동감이 살아나고 진기 있고 싱싱한 영혼이 됩니다. 그 싱싱하고 맛난 포도주를 마음껏 마시고 살아갑시다. 소주보다 백배 천배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