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부활 제2주일 자비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그 자비로우신 분을 닮아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뜻인가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우님들도 까칠한 사람보다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으시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에 따라 교우님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마음으로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가운데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예수님이 아니면 더듬어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조건을 가지고 보이는 하느님으로 오셔서 그분이 말씀해 놓으신 것이 있고, 그분이 행동해 놓으신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고 그 자비를 우리가 어떻게 닮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도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의심이 많은 토마스를 만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령을 불어 넣어주시는 그 장면을 통해 자비라는 것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왜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하고 다 도망쳐 숨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문을 닫아걸었다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자기들도 찾아 죽일까봐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수님으로부터 닫아걸고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때와 장소에는 평화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 죄책감, 스승님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 이런 것들이 그 분위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그 장소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뭐죠?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왜죠?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여 있는 제자들이 갖고있는 죄책감과 두려움, 미안함으로 팽배해있는 그곳에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였거든요.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함으로써 그 제자들이 갖고 있던 두려움, 죄책감들을 일소에 평화의 분위기로 만들어 주시는 장면,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토마스가 이야기했어요. “나는 그분의 손바닥에 있는 못 자국에 손가락을 관통시켜 봐서 그것이 진짜인지, 창에 찔린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자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토마스도 함께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 어떻게 하셨죠? “손가락을 여기에 넣어보아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라.”하십니다. 토마스의 그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비열하다면 비열한 요구거든요. 십자가의 길을 도망간 주제에 얼토당토하지 않게 손가락을 넣어 보겠다구요? 이제 겨우 아물어가는 그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서 헤집어 보겠다구요?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겠다구요? 이 비열하고 얼토당토한 요구에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내어서 “너가 원한다면, 너가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긴다면 그것을 위해 나는 다시 한번 아픔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시자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했다고 나옵니다. 보세요, 오늘 장면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강생하셔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의 방식을 보면 오늘 복음내용의 흐름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분은 상대방을 내 입맛과 요구에 맞추는 방식이 아닌 당신 자신을 상대방의 필요성에 맞추어 나가시는 그런 모습, 그래서 제자들이 배가 고프면 당신 자신이 빵이 되시는 모습... 그렇게 예수님이 못마땅하고 미워서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시는 방식,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넣기를 원하는 요구를 했을 때 넣어보라고 손을 내미는 방식, 이런 흐름이 쭉 오늘 복음까지 이어져 온 것이고 저는 이 모습이 예수님의 자비이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개념으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내 요구에 따라 만들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못 자국에 손을 넣어보겠다는 그런 비열한 요구에도 맞추어 주는 방식,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하느님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기를 그렇게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에 당신 몸을 내어 주시는, 그들의 요구가 합당하건 합당하지 않건, 그들의 요구가 선하건 비열하건, 그런 모든 것을 떠나서 상대방의 요구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맞추어 주시는 방식으로 쭉 이어지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자비로운 모습이고 자비라는 것은 상대방을 내 입맛에 맞게 개조하는 방식이 아닌 나에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했을 때 그것이 합리적이다 아니다 라는 차원을 떠나서 상대방의 요구에 나 자신을 변형시키고 십자가에 못 박고 상처 입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내어주는 방식이 자비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새 성당의 개념은 성모님의 모태, 예수님께서 잉태되어 열 달 동안 자라신 성모님의 아기집을 형상화해서 저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의 아기집이 바로 자비의 장소입니다. 왜요? 아기가 잉태되는 모든 순간부터 어머니의 몸은 아기생명이 요구하고 커나가는 모든 요구에 응하는 방식으로 몸의 리듬이 바뀝니다. 지금 엄마들은 임신하면 너무나 똑똑하고 잘들 알고 의사들도 잘 만나고 해서 영양도 균형을 맞추어 살지만 예전의 못 먹던 시절, 특히 6.25피난에는 왜 이리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는지...... 그럴 때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이 안 되니까 엄마와 아기들이 같이 쓸 영양분이, 예를 들어 칼슘이, 모자르게 되는 것이죠. 모자르면 어떻게 되죠? 엄마의 몸 안에 있던 칼슘이 아기 쪽으로 다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엄마 치아는 다 상하게 되고, 골다공증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주는 자비주일입니다. 교우님들 대부분 노부부가 남으신 분들이 많은데요, 서로에게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내 아내는 정신적으로 얕어....세상판단이 어두워. 그러니까 뭐든지 내 뜻대로 해야 돼.” 이것 자비로운 마음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상대방에게 사라판단이 옳다 그르다를 넘어서서 상대방이 요구하면 그것이 옳다 그르다 차원을 떠나 상대방의 요구에 나를 변형시켜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들 잘 하시잖아요? 손자들 요구하는 것 중에 합리적인 것이 몇 가지나 됩니까? 할아버지께 총 쏘는 것이 합리적이에요? 총 쏘면 총 맞고 돌아가시잖아요. 오직 그 아이가 요구한다면 내가 내 자신을......사실 그것은 정상적인 어른들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바보 천치 짓이죠. 장난감 총 맞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어린 아이가 어디 어른한테 총을 쏩니까? 말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모든 윤리적인 합리적인 판단을 뛰어넘어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쓰러져 주잖아요. 자기 자신의 요구에 예수님을 맞추고 다른 사람을 다 꿰어 맞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거든요. 내 뜻을 실천하고 내 뜻에 맞추어 나가는 그런 강압과 폭력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끝까지 자기 자신은 요구만 하고 누군가에게 나를 향해서 맞추라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배우자, 가족들, 국가사회공동체들에게 내 자신을 어떻게 그들의 요구에 합당하게 내어줄 수 있는 모습이 될 것인가 잘 생각해 보셨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때 그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시 묵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