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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작성자나르치소|작성시간12.06.14|조회수440 목록 댓글 0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을사년(1785년) 봄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明洞)에서 모임을 갖던 천주교인들을 적발 체포한 사건.

1785년 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부자(父子) 등이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聖畵像)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閏夏), 이총억(李寵億),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이 유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짐으로써 이해 3월(음)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 정숙(鄭淑) 등은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려 이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뿐 아니라 친구 친척에게까지 천주교를 물리치라고 강요했고, 안정복(安鼎福)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반향으로 인해 이벽, 이승훈 등은 배교하게 되고,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사진 -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 묘소 및 성모동굴성당 전경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의 묘가 발견된 것은 1989년이다. 이전까지 그의 유배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주변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을 조성했다.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와 너른 잔디밭을 조성하고,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는 등 수년간 묘역을 단장한 후 2005년 9월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2011년 9월에는 순례객을 위한 순교자 김범우 기념 성모동굴성당 봉헌식을 가졌고, 김범우의 시복시성 운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위해 명례방(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김범우 토마스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 끝내 배교하지 않은 그는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났고, 유배생활 중에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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