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7
4월6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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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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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wowFpMVC4 (하정호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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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루하루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안에 살아갑시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은혜롭고 또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2절)
이 한세상 살아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묵직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노예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돈의 노예, 쾌락의 노예, 죄의 노예, 과도한 일의 노예, 사람의 노예...
결국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떠나 살 때, 매일 선포되는 복음 말씀과 멀리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쇠고랑만 차지 않았다 뿐이지, 노예 같은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갖은 속박과 부자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자유를 주시겠다고 공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은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조건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루하루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을 화두처럼 붙들고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내 구체적인 생활 안에 조금이라도 적용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 안에 살아갈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는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 청년은 자신들의 생사에 대한 전권 손에 쥐고 있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를 강요하며, 숭배를 거절할 때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임금의 협박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다니엘 예언서 3장 17~18절)
세 청년의 놀라운 용기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그들은 평소 주님의 말씀 안에 푹 잠겨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매일 주님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용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 안에 살아왔던 세 청년은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봐, 그들을 꽁꽁 밧줄에 묶어 불가마 속에 그들을 던졌지만, 그들은 화상이라고는 조금도 입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불가마 속을 거닐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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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말 안에 '머무르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두 장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잉거솔이라고 하는 대령이었는데, 잉거솔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b무신론에 대한 책까지 저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루 윌리스라고 하는 육군 대장이었는데 하느님에 대하여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서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스 장군의 부모는 그리스도교인 이었지만 윌리스 자신은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모독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잉거솔 대령이 말했습니다. “그 예수쟁이들 말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허튼 소리나 하는데, 그 예수라는 사람을 소재로 하여 에로틱한 소설을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많은 돈도 벌 수 있을 겁니다.”
윌리스는 전역을 하고서 이것저것을 해 보았으나 신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윌리스는 생각 끝에 이전에 잉거솔이 말한 대로 예수를 소재로 한 에로소설을 쓰기로 작정 했습니다. 계획하는 일이 성공하려면, 먼저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스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현장에 가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가 실재 인물로 자신의 마음에 다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원고를 마친 내용은 처음 계획한 내용하고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탈고를 마친 윌리스는 무릎을 꿇고 예수를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영화로도 제작된 ‘벤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말씀은 진리이신데,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그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기적을 보는 것과 같은 신기한 말씀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위의 예처럼 안 좋은 지향으로 성경을 읽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머문다’는 단어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게 머물러서 나의 것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말씀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그들 마음에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야 참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나 잘 알던 바오로도 결국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은 읽고 공부해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말씀 때문에 변화될 때까지 그 말씀을 잡고 놓지 않는 끈기와 성령의 비추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아나니야에게 안수를 받아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다시 묵상해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읽고 쓰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충분히 머무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의사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하루 120번의 발작을 일으키는 4살짜리 악성뇌종양환자를 수술해서 완치시켰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으로 불리며 성공을 거둔 벤 카슨 박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보고 그가 위대한 의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8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소년기에는 흑인불량배들과 어울려 싸움을 일삼는 장래가 어두운 아이였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는 항상 꼴지를 도맡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한 마디 말에 머물 줄 알아도 삶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흘러넘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이런 열매를 맺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 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보석 감정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한눈에 그것이 보석인지 알아맞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문가도 랜턴이 달린 커다란 돋보기를 쓰고 핀셋으로 집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그것에 진품인지 가짜인지 확신이 들 때까지 집중하여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보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한 마디, 혹은 한 단어라도 그것이 완전히 성령의 비추임으로 완전히 나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씀 안에 머물 줄을 알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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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31-42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절) 라고 한다.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 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절)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절)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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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은 인간들을 구원하는 ‘계시 진리’입니다.) ‘자유’는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은, “내 말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이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는 “참된 신앙인이 된다.”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구원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죄’와 ‘죽음’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죄를 통해서 죽음이 들어왔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안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b그런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억압 속에서 계속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자유인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고, 그냥 ‘죄의 종’으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는 말씀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는(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죄의 종으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다.”라는 뜻입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지만”이고,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는 “회개해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회복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자유를)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7-38)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39ㄴ-41ㄱ)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요한 8,42)
이 말씀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내세우지 말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아비’라는 말은 ‘악마’를 뜻합니다(요한 8,44)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악마의 자손이다.” 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듣고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데”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악마가n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 즉 “구원을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과b순종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같은 신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라는 말씀은,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예수님의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을(참된 자유를) 얻어라.”라고 가르치시는데, 사탄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하느님의 반대쪽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마음대로(욕망대로) 사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는 평화도 없고, 안식도 없고, 행복도 없고, 전쟁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이기 때문인데, 그곳은 이기적인 욕망은 없고 형제애만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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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년 만에 함께 모여서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간식을 준비 하였습니다. 귤을 준비하였습니다. 30명이 모였는데 300개를 준비하였습니다. 30개 였으면 금세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300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귤을 안 먹는 사람이 있다면 혼자 20개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 피정이 끝날 때까지 귤은 넉넉히 남았습니다. 세상에는 귀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금,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기 때문에 소중한 것도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많았지만 남획과 자연의 파괴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지 않으면 멸종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지 않으면 도시화가 되면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사라진 것들이 있습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정말 많은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흔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동네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냇가에는 빨래터가 있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평상에는 어른들이 장기를 두셨습니다. 그리 바쁠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족해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도가 있고, 세탁기가 있고, 에어컨이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른 긴장이 있습니다. 가족이 모여서 대화를 하기보다는 각자의 방에서 인터넷을 하고, 식사할 때에도 스마트 폰을 검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명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에 가족과 이웃과의 대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져가는 것들이 귀하고 그립습니다. 21세기 첨단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 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것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전에는 이런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그리고 '하느님!'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TV , 유트브 , 영상 매체가 넘쳐납니다. 사순시기를 정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성찰하고, 묵상하지 않으면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이렇게라도 우리가 40일 동안 단식하고, 절제하고, 기도하고, 나누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천연 기념물’이 되지 않을까요? 2022년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 예전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그리운 것들을 생각해 보면 어떠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귀한 것,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화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에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떠난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불가마 속에서도 능히 지켜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재물, 명예, 권력은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과 계명은 진리를 향해 나가는 정거장과 같습니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같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진리를 가리키는 작은 손가락일 뿐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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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에 억눌리고 여러 가지 족쇄를 차게 되는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하였듯이,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가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어느 신앙인의 삶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과 일치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과 일치를 추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게 되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를 체험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욕망을 절제하고 선행을 베풀면 마음속에 커다란 기쁨이 샘솟습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묵상하였던 회개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입니다. 사순 시기의 기도와 극기, 선행은 우리의 영혼을 광야로 인도해 자유를 체득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시간과 노력은 영적 자유를 얻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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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요한 십자가의 요한 신부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벌써 사순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시에서의 농촌에서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과연 하루의 시간 안에서 얼마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요?
지금 이 잠시의 시간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잠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낙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우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 걱정거리, 즐거움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당연히 우리 삶의 작고 귀여운 행복들, 즐거움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나에게 오고 있는 걱정거리, 고민들이 별문제 될 것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 웃고, 아주 작은 일에 울고 하며 살아갑니다. 세계의 평화가 어떻고, 전쟁이 어떻고, 정치나 연예계 이야기, 군대 이야기로 시간을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걱정거리, 고민들은 사실 나와 그렇게 가까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라크의 어린이들처럼 전쟁을 눈앞에 보지도, 기근으로 무엇을 할 수도 하지도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며 살고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거리를 잠시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분명 그 대답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의 수 만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대답을 모으면 결국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행복... 행복은 무엇일까요? 각자 원하고 바라고 찾는 행복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얼마나 잘 버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 그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 자유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 그것이 자유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유,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일까요. 그것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잘 버릴 수 있는 자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버려야 하는 것을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 그렇게 힘들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생명을 주신 주님의 자유를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많은 다툼과 슬픔과 아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다툼과 슬픔과 아픔을 없애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사랑의 자유’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픈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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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면>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의 참 많이 있습니다.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보다 예수님이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그분의 마음이 담긴 독백과 같은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복음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묵상하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묵상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한 공간과 시간 안에 하느님과 공존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랐다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또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니 나를 따라오라로 끝나는 긍정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이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이유, 곧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예수님과 사람들이 결코 함께 살 수 없다는 슬픈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는데도 반대당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류의 희망, 아브라함의 후손인데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지도 듣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예수님과 이스라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 아들과 그 아버지가 선택하신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서 계신 상황은 그 옛날 하느님 아버지와 아브라함처럼 사랑의 관계는 아닙니다. 한 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사람들에게 와서 그 모든 것을 전하려 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만을 이어내려 오고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만큼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 옛날의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짜 하느님은 그들을 오히려 속박하는 신이 되어 그들의 이기심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복음의 현실이요 예수님의 처지였던 것입니다.
불쌍하신 하느님만 당신 진실을 지키셨고, 사람은 죄에 물든 아담과 하와의 잘못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진리로 삼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에 아브라함의 이름은 위로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핏줄에 후손일지 몰라도 아브라함 믿음의 후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리하십니다. 그것은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라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대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이기를 포기, 혹은 탈랐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죄를 피해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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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임가 동시에 진리에로 그리고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에 응답의 첫걸음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을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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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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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유, 스스로 비롯하기 위하여>
요한 8,31-42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자유, 스스로 비롯하기 위하여>
스스로 비롯하시는 분만이
스스로 비롯할 수 없는 나를
스스로 비롯하게 하실 수 있으니
스스로 비롯할 수 없는 내가
스스로 비롯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비롯할 수 없기에
스스로 비롯하게 할 수 없으며
스스로 비롯하게 못하게 하는 것을 끊고
스스로 비롯하게 하실 수 있는
스스로 비롯하시는 분에게만 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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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 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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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원은 구원의 보증 수표처럼 이해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따르면 세 가지 약속, 곧 수많은 후손과 땅과 축복이라는 선물이 상속 재산처럼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창세 17장 참조)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중요시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복음 속 유다인들 뿐 아니라 인류는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른다면, 이 믿음의 진리는 믿는 이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선사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아니며, 인간적 성찰과 사유로 얻게 되는 단순한 내적 자유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얻게 되는 자유로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는 능력입니다.
이 자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칭호나 명예 같은 것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내적 친교와 일치를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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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나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 고통 앞에서 낱낱이 드러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십자가 고통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통 앞에서 넘어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곧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고통 앞에서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고통의 의미를 찾습니다.
나는 어떤 신앙인인가?
오늘 독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인데, 죽음의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 세 젊은이의 큰 믿음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패망하여 바빌론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가 통치할 때, 이스라엘에서 끌려온 젊은 세 사람,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는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고 바빌론 신을 섬기라는 임금의 말, 그렇지 않으면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임금의 말을 단 칼에 거절합니다.
"임금님,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다니3,18)
그러자 여느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어진 불가마 속에 던져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해 내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제9처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예수님이 세 번 넘어지신 것을 묵상하지만, 실제로 몇 번 넘어지셨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 번 넘어지면 백 번 다시 일어나고, 천 번 넘어지면 천 번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설 때마다 천사들이 박수를 칩니다. 부러움의 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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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로 유명한 자신의 책 ‘팡세’에서 ‘내기’에 관한 논증을 이렇게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면, 그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얻은 것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면,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분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쪽에 내기를 거는 게 현명하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은 지금 삶에서 의미를 찾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파스칼의 말처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데 어떻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인 것처럼 살면서, 정작 어리석은 삶을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하느님을 부정하고 의심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의 점령되면서 민족적인 종살이를 해온 처지였지요. 이집트에서 종살이했고, 바빌론에 끌려갔었고, 현재는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번영의 약속을 굳게 믿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언젠가 외세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끝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진리가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며 항변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지금 종살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외세에서의 해방이라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간은 언젠가는 끝낼 수밖에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해방을 넘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죄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 진리, 즉 주님을 알고 굳게 믿는 신앙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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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구호도 생각납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 바로 사람의 정의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자유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행복이요 참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은 자유의 여정이자 우리의 자유는 선물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의 여정인지요? 수도회사 영문서적 제목 부제로 씌어있던 ‘더 큰 자유를 위해서’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소설을 쓴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 여행가 등의 수많은 이름을 지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 나무 십자가 아래 있다는 낮은 묘비에 그리스어로 씌어 있는 묘비명도 생각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오늘 말씀을 대하자 즉시 떠오른 자유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두편의 자유에 관한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을 본다.
텅비어 있는 하늘
자연스럽게 뻗은 무수한 나뭇가지들
하늘은 사랑이다
자유다.”-1997.3
시를 읽으면서 새삼 참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또 한편의 시를 나눕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역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집착없는 아가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자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요한복음이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한 정의는, 자유의 비결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복음의 예수님이 아니고 누구에게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참으로 주님 말씀 안에 머물러 제자가 되어 살 때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고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새삼 진리는 깨달음의 선물이자 이런 진리의 깨달음과 함게 가는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동시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진리의 깨달음과 더불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이라는 것이며 우리 수도자들의 궁극의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참 자유도 없음을 봅니다.
참으로 구도자들이 평생 추구한 것이 진리와 자유였습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불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진리의 협력자’로 불려 지길 원한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입니다. 참으로 자유를 갈망했던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하버드대학교 로고는 ‘진리veritas’ 이고, 서울대학교의 로고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이 우리의 참 자유의 개념을 명확히 해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젠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구체적입니다. 전혀 추상적이거나 애매 모호하지 않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정녕 우리는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천명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바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짐과 더불어 자유의 능력도 계속 신장될 것입니다. 새삼 자유는 선물이자 동시에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마다 진리의 깨달음 정도에 따라 자유의 정도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날로 신장되는 자유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 자유는커녕 죄의 종이 되거나 세상 우상들의 노예가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좌파나 우파도 아닌 예수님 진리파에 속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흡사 오늘 강론이 자유예찬, 진리예찬처럼 생각됩니다.
결론하여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참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가마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자유롭게 거닌 이스라엘 세청년이 역경의 시련중에도 참으로 자유로운 자유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찬탄과 찬미의 고백이 참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은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시며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의 여정에 날마다의 미사은총보다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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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q9YQiJs5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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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 36)
하얀 목련과
하얀 벚꽃이
자유로이
피어난다.
자유가 사라지면
하느님의 현존도
사라진다.
우리가 찾았던
참자유가
다름아닌
예수님임을
깨닫게 된다.
가려졌던
참자유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유를 버린
우리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신다.
예수님을 통해
자유를 다시
얻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다.
자유가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에서
시작되는
복음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자유이다.
사람이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참된 자유이다.
죄를
벗어 버리고
소중한 자녀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자유가
우리를 자유로
이끄신다.
이 자유를
따른다.
자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자유를 향한다.
하느님은
자유이시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정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이며
구원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신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유이며
자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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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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