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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2279 1월19일 [연중 제2주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0.01.20|조회수244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2279
1월19일 [연중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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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완벽한 조연 세례자 요한>

오세영 시인의 《12월》이란 시(詩)를 좋아하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마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두고 지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뛰어난 언변과 타고난 지도력으로 당대 백성들에게서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오시기로 된 메시아일거야'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은 진정 겸손했습니다. 자신의 신원,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예수님이 주연인 연극에 가장 충실한 조연'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예수님을 향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거침없이 외칩니다. 긴가민가하고 의구심을 갖던 당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틀림없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은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조용히 뒤로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주연인 구세사 무대에 최고의 '남우조연상' 후보였습니다.

자신의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요한이었기에 결코 주연이신 예수님보다 튀지 않습니다. 결코 나대지 않습니다. 주연이신 예수님이 더욱 확실하게 '뜨도록' 목숨 바쳐 열연한 조연 중의 조연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황량한 산 능선에 묵묵히 선 이정표와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위험한 겨울 산을 타는 등산객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전하게 산정(山頂)으로 인도하는 고마운 이정표로서 삶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아이들과 농구경기를 했습니다. 선수교체로 잠깐 들어가 뛰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 올라와서 '이제 나도 맛이 갈 때까지 갔구나' 하는 느낌에 약간 서글퍼졌지요.

반면에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은 펄펄 날더군요. '정말 오랜만에 리바운드 하나 잡는구나' 하고 흐뭇해하는 순간, 어느새 달려온 한 아이가 제 공을 낚아채 갔습니다.

힘으로, 실력으로 아이들을 이길 수 없었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무대를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는 일, 그것도 결코 속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순리에 따른다는 것, 나이에 맞게 적당히 물러서는 일,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고 서로를 위해 너무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을 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바람처럼 떠나는 수행자 뒷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또 없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 수도자들에게 귀감 중 귀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설 때를 확실히 파악했습니다.

비록 그 순간이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소나기 골을 마구 터트릴 수 있는 절정의 순간이었지만, 일말의 아쉬움이나 미련도 없이 확실하게 뒤로 물러섭니다.

때가 왔음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뜨도록', 주님께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죽입니다.

우리 안에서 매일 우리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매일 우리 자신이 소멸되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사라지고 소멸되어야만 비로소 그 자리는 주님 현존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장하시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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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은 하느님의 피다>

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도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는 정결례가 발전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없애는 것이 세례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소개시켜 줍니다. 요한의 세례는 참 세례를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게 하는 씻음인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민은 사무라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성을 짓는 성주에게 가서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 교육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넣고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성에서 사무라이 교육을 받았고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에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계신 기둥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나오는 그 피는 도망치고 싶은 그 아이의 자아를 죽여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무라이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전 본성을 죽일 수 있는 힘은 ‘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본성을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냥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임을 안다면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어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듯 성령도 그리스도의 피임을 믿어야만 우리가 정화됩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피 흘리심임을 믿으며 “아멘!”합시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로 모아집니다.(1요한 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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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명을 참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화답송의 내용을 잘 묵상하여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순명과 희생의 신비이다. 그분은 순한 ‘어린양’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이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의 모든 증언의 핵심이다. 이 ‘어린양’의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과월절 어린양(출애 12,1-28)과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출애 29,38-46)과 연결시켜 생각하기도 하고,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는 고통 받는 야훼의 ‘종’과 관련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의미는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희생되심으로써 결정적 ‘파스카’를 성취하여 실현시키는 ‘고통 받는 종’이시기 때문이다.

이 ‘어린양’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29절) 것이다. 여기서 ‘없애다’(희: áirein)는 말은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의 의미가 있다. 아마 요한복음 사가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본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거룩한‘ 때를 시작케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1요한 3,5-6 참조).

또 이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사야는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이사 53,12)고 하고 있다. 이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그분과 같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거저 내어주시고 단신의 겸손과 순명과 무구함을 통해 ’종‘의 사명인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 즉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이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항구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선물들, 특히 ‘세상의 죄’를 태워버릴 성령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반드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사가는 십자가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9,34.36). 이 것은 과월절의 어린양(탈출 12,46)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9,3.5-6: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노래의 둘째 노래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5-6절). 야훼의 종의 활동은 이스라엘의 재건 뿐 아니라 땅 극변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된다. 즉 구원은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해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이 필요하다. 현대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류 생존 자체에 관한 문제들만 보아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이성과 마음을 흐리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의 뿌리 즉 ‘죄’를 ‘없애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단수로 씌어졌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러’ 오신 것은 어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바로 ‘죄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우리 모두가 그분의 도움으로 영신적 물질적 구원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 추구해야할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길, 순진무구함,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어린양’에 대한 증언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닮아 우리 자신 또한 구원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전해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만국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서도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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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할 대상에 대한 탐구나 분석이 아닙니다. 증언은 제 삶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린양”은 그런 외침을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입니다. 유다 사회가 간직한 “어린양”의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대속이었습니다.(탈출 12장; 이사 53장 참조)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유다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버거울 만큼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절망은 하느님을 통하여 희망을 꿈꾸는 것으로 바뀌고, “어린양”은 미래에 펼쳐질 희망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오시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합니다. 

당시 사회는 세상을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 한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직접 주관하신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은 세상을 단절시키고 갈라놓고 찢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오셨고(요한 13,1 이하), 당신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증언을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사유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의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화합과 신뢰, 사랑임을 일깨웁니다. 화합과 신뢰, 사랑은 요한 복음이 쓰인 그 시대를 살아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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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2)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진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탈출기에서,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목숨을 바친 ‘파스카의 어린양’과(탈출 12장)  이사야서에서, 백성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속죄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사 53장)이 합해진 표현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으로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은 아니고, 죄로 인한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어도 인간 세상의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대신해서 회개하신 일이 아니고, 죄에서 비롯된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일입니다. 회개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일, 죄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남이 대신 볼 수 없습니다. 성찰, 통회, 정개, 고백을 남이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속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일 등은 연옥 영혼이 해야 할 보속을 대신 해 주는 일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회개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이 해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은 ‘내가’ 직접 스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이야기들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소녀를 살리셨지만, 일어서는 일은 그 소녀 자신이 했습니다.(마르 6,41-42)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살리셨지만, 일어나 앉는 것은 그 젊은이 자신이 스스로 했습니다.(루카 7,14-15)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는 그것이 더욱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셨을 뿐이고, 무덤에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일은 라자로 자신이 했습니다.(요한 11,43-44) 살기를 원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남이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직접 해야 합니다. ‘남의 덕’으로 나의 신앙생활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식구들이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나의 미사 참례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사랑하는 식구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넓게 생각해서, “우리가 세상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가 무의미한 일로, 즉 헛된 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들이 열심히 바치는 기도 덕분에 은총이 내려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또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식구들이 나의 기도로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 속에서 살던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할 일입니다.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주님을 변화시키려는 기도가 아니라,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죄인이 회개를 면제받도록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고,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평생 동안 학문 연구를 하고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그래서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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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지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의 공현 대축일을 보냈고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맞이하게 된 연중 제2주일인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바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 대상이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는 무조건 내 몸을 움직여 특정한 장소로 이동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어디론가로 움직이는 수고를 아낀다면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듯 신앙에 있어서도 이 “간다”라는 첫 단계를 거쳐야만 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말씀에서 보았던 동방 박사들도 베들레헴까지 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로부터 초대받는 모든 이들은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고와 희생 없이는 구원과 기쁨이 주어지지 않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일에 앞서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심’을 봅니다. 무릇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분명한 대상이 필요한데, 그 대상은 실로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막연히 불특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 길거리나 나간다면 그것은 수고롭기만 할 뿐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존재, 즉 우리 나약한 인간을 위해 특별한 의지를 가지고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조금만 그분께 마음을 열면 먼저 다가오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께로 다가가는 그 길을 걷는 방법을 미사 안에서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몸이 성당 안에 모셔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성체를 내 안에 모실 수도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시어 일상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남은 상호간의 의지를 통해 그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지가 없다면 그 만남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면 우리 역시 그분을 만나기 위해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나와야 하는 근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가가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성당엔 줄곧 빠지면서 혹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으면서 주님께 무언가를 기도하고 그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한다면 그것은 폐쇄된 공간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직접적인 음성을 접하며 그분을 따르기 위한 방법은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며 미사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안에서, 그냥 바라만 보는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한 발짝 나아가, 마음 깊숙한 곳에 오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내가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이 나의 것이 되는 만남, 그 소중한 신비를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강론을 마치기 전에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절실한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잘 담고 있는 일반적인 서정시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정확히 전달되는 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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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성주형 라자로 신부님]

<증언의 삶>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상의 빛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지만,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태어날 때도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그분을 차가운 말구유 위에 눕혔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분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실 때도 세상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에,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님께 세례를 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바로 그 시작이었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증언과 더불어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증언이 필요했고, 증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세상 곳곳에 전해졌고, 그분에 대한 믿음은 퍼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지금도 필요하고, 지금도 있어야만 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많은 피조물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았다고. 내가 증언한다고. 세상 속에서 내 삶으로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여러분이 증언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삶으로 그분을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미 계신 그분은 세상 속에서 참되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증언이 있어야 확증됩니다. 여러분의 증언의 삶이 있어야 그리스도는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여러분만을 믿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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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준 마르코 신부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가끔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저 역시 한참을 기다리다가 끝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면 먼저 묻습니다.

“어르신 죄를 고백하셔야지요.”

이 물음에 이런 대답을 자주 듣습니다.

“사는 게 죕니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지은 죄도 많아지나 봅니다. 이제 40년 남짓 살아온 저도 느끼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 말씀 속 요한의 외침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기에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 가운데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이 간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죄를 좀 지으면 기도가 더 간절해지거든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많은 성당에 가보아도 성당 의자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이심을 보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에 의도하였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죄는 쌓이고 쌓여 예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게 되나 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거의 대부분의 분들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이야기한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그리하여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분들이시지요.

그런 우리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모태에서부터 선별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죄”의 그늘 아래 자주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오셨어야만 했나 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많은 성인의 삶에도 죄의 얼룩이 진하게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삶의 여정 안에서 그분들이 지었던 죄의 크기보다 하느님 자비의 크기가 훨씬 컸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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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송창현 미카엘 신부님]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인 시기에 보내주시리라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에게 맡기신 사명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합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있었고 그의 선포와 세례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지 않고 오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겸손을 배우려 합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억지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려는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올바로 자리매김합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어디에 놓을지를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할 때,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허상에 매달리게 됩니다.

허상은 착각을 낳고 착각은 욕심을 낳게 됩니다. 허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허상에 기초한 자기 파악은 하느님과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더 높고 화려해 보이는 자리를 탐하게 합니다.

잘못된 자기 파악이 잘못된 자리매김을 낳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파악하고 자리매김하는 사람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올바로 자신을 파악하고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기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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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하느님의 어린양>

사람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광포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드시는
여리고 약하고 힘없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탐욕스런 세상을 맑게 하시는
비우고 비워 아무 것도 아닌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아무 것도 아님으로써
모든 이의 모든 것인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세상 속 깊이 보내지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 안에서 무참히 죽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당신의 무죄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참으로 살리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죽기 위해 살아오시어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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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영안이 열리는 날에>

어느 본당에서 사순시기 매일 밤 기도(오후 9-11시)를 끝내고 봉사자들과 함께 새벽 2시에 해장국집에 갔습니다. 잠시 후에 7-8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이 들어와 식당이 한순간에 시끄러워졌습니다. 노출이 심한 옷에다가 짙은 화장품 냄새와 담배 냄새, 욕을 섞은 거친 말투가 오가다가 한 아가씨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내일 내 생일이니까 일 끝나고 이 시간에 선물을 가지고 와라.”
그러자 다른 아가씨가 “이 **년, 놀고 자빠졌네. 우리 같은 *들이 무슨 생일이냐? 내일, 이 선지 덩어리에다 초 꽂아 줄까?”라고 말하자, 다른 아가씨가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더러운 세상에 왜, 태어났니?”
그리고 자기들끼리 울다가 식당을 나갑니다. 옆에서 아가씨들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식당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해장국 아주머니에게 “저 아가씨들 매일 오냐? 내일도 오냐?”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술집 아가씨들은 매일 온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에게 새벽 2시에 아까 자리를 예약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왜요, 뭐하시게요?”라고 묻자, 아까 내일 생일을 맞이하는 아가씨를 위한 생일 파티를 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가서 플랜카드, 케이크, 샴페인, 꽃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좀 늦게 온 아가씨를 위한 생일 파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케이크도 끄고 선물도 주고, 특별히 수녀님께 부탁해서 꽃을 아가씨에게 직접 주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저기 저기서 감사의 말과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그 후에 아가씨 중에 4명과 해장국 아주머니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세례를 받고 자기 일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떠나서 시집도 가고, 성당에도 나가고 믿음 생활도 하면서 잘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의 능력입니다.
 
그때 저는 세례를 집전할 때 이런 강론을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차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저분은 여러분을 소중한 한 영혼 한 영혼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저분에게는 여러분의 직업이나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고 위로와 은총 속에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한눈에 알아보고 말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본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알려 주셨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매일 매일 광야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고행을 하면서도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 여러분도 삶의 자리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삶의 광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 삶의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구세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편에 있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편에 계십니다. 또한,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측은하게, 불쌍하게 보십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그러기에 오늘 미사 중에 예수님께서는 고운님들의 영혼을 보십니다. 사제를 통하여 성체를 들고 분명하게 외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고운님들은 지금, 이 순간에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모시는 거룩한 순간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은 구원의 영광인 성체를 모시기 전에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낫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고운님들을 위하여 마련해주신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미사의 은총 시간입니다.

저 두레박 사제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운님들이 다른 영혼들을 돌보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께 찬양과 흠숭,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고운님들은 죽기 전에 다른 영혼을 돌보고 자비를 베푸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 나누어 주지 못했을까?”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을까?” “왜, 용서하지 못했을까?”

제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저는 오늘 미사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를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의 자녀들’과 함께 나누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매 순간 고운님 모두가 영적으로 지혜로운 눈(영안)이 열려, 다른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돌보면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복된 날이 되고, 고운님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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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81)

♧♧  시편 71편 6절…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니 저의 찬양이 언제나 당신께 향합니다."

‘태중에서부터’란 말은 다윗이 아직 하느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시기를 말하며, ‘의지해 왔다’라는 말은 ‘세우다’ ‘돌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다윗이 태어나기 전부터 다윗 자신을 성별하시고 특별히 보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배 속에서부터 성별하시어 당신이 선택한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주권자입니다.(시편 22편 10-11절. 이사야서 43장 1절. 예레미야서 1장 5절. 참조)

* 저의 찬양이 언제나 당신께 향합니다.
마침내 일생을 돌아볼 때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아니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다윗의 감격적인 고백입니다.

♧♧  시편 71편 7절…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기적과 같았으며 당신은 저의 굳센 피신처이셨습니다."

*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기적과 같았으며...
다윗이 곤경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께 징벌을 받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추어졌습니다.
즉 고대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만 이해하였으니, 다윗 주변의 사람들 역시 고난 중에 처해 있는 다윗을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느님께 심판받는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곤경에 처했으나,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하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 당신은 저의 굳센 피신처이셨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조롱하였을지라도 다윗은 이처럼 하느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굳센 피신처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대적들로부터 해코지 당할 것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영광으로 흠숭을 드렸다는 것입니다.(8절) 이는 마침내 참된 믿음이란? 모든 염려를 물리치는 능력이 됨을 저희에게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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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세계적인 인권사회운동을 펼쳤던 펄 벅(1892~1973)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지금 이 나이를 누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많은 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더욱더 잘 살 것만 같고 지금의 후회를 만들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가 펄 벅의 말처럼 지금까지 치른 값을 생각한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최고의 시간인 ‘또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하는 삶이 아닌, 우리에게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고로 만드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죄 속에서 힘들어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오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단에 봉헌되는 짐승들은 다섯 종류였습니다. 즉, 황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양은 숫양, 암양 그리고 어린양으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양은 어떤 때 봉헌될까요? 바로 일일 번제물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매일 번제물로 우리 대신 봉헌되시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 모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결코 지금을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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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은 행복이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의욕과 함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도가 조금씩 떨어지게 되지요. 예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어떤 청년이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이번에 임용고시에 붙었어요.’

얼마나 기뻤으면 제게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을까 싶었습니다. 휴대전화 너머로 정말로 행복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달 뒤에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요. 이러려고 선생이 되었나 싶어요.’ 이렇게 시작하는 문자 메시지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계속해서 담고 있었습니다.

행복이 왜 불과 몇 달 만에 사라지고, 고통과 시련의 삶이 된 것일까요? 설렘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임용고시 합격으로 선생님이 되었다는 설렘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설렘이 사라진 것이지요. 설렘이 사라지면 희망이 없어지고 행복하지 않습니다.설렘의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설렘으로 내 삶을 채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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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고 있습니다. 종교, 윤리, 철학, 영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가 있었고, 현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성찰은 종교가 되었고, 윤리가 되었고, 철학이 되었고, 영성이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터넷의 시대에도 현자들의 고민과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난민(難民)의 문제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재자의 폭압을 피해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민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난민의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난민이 배고프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가는 난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태(生態)와 환경(環境)의 문제입니다. 이제 익숙해진 ‘지구 온난화’는 기상 이변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숲이 사라지고, 숲에서 살던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입니다. 자연과 우리가 하나라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빈부의 격차(隔差)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 중  30억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하루에 1~2달러의 돈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 사는 운 좋은 이들은 평균 수만 달러의 연 소득을 누리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세계는 안전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21세기 최대의 도전인 동시에 과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부와 기회, 책임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땅 끝까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합니다. 출애굽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난민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겁니다. 2013년 교황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장 먼저 찾아갔던 곳도 난민이 머무는 람페두사 섬이었습니다. 2019년에도 교황님은 난민을 바티칸으로 초청해서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모든 권한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생태를 그런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기에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하느님의 평화는 무엇입니까? 다시는 배고픔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셔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거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안,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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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삶의 핵심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습니다. 죄와 병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앞으로 죄가 많아질수록 병도 또한 많아질 것입니다. 고백할 죄에 대한 앎의 결핍도 문제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 앞서 언제나 죄의 용서가 선행했음을 봅니다.

죄인이자 병자는 우리의 동시적인 모습입니다. 죄의 용서와 더불어 병의 치유이니 용서는 참 좋은 죄의 병에 대한 약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 받을 때 영육의 치유입니다.

지난 금요일 교황님의 강론 주제가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삶의 핵심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Essence of life is our relationship with God)’,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의 관계 없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완전 무지와 허무속에 방황할 수 뿐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삶, 참으로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우리가 누구인지도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참 중요한 근본적인 교육이 하느님께 관한 교육이요 죄에 관한 교육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알아야 할 분이 하느님입니다. 죄의 회개와 깨달음은 함께 갑니다. 평생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평생 끊임없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입니다. 이런 삶의 여정속에 점차 무지로 인한 죄에서 벗어나 영육은 치유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깨달음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가 단수로 쓰이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죄와 그것들이 야기하는 모든 것까지 포함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두 가지 전통적 표상을 혼합하여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상기시킵니다. 첫째는, 자기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의 표상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의미의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세상 모든 죄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우리 삶의 핵심적 문제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미사중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사제와 주고 받는 다음 말마디는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지키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지키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참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이 우리의 죄의 용서와 치유에 결정적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깨달음이 계속 깊어집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서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으로 파악합니다이런 깨달음 역시 순전히 은총입니다. 요한의 깨달음은 마지막 감격적 말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이런 ‘봄(見)’의 깨달음 역시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하는 요한입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주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예수님뿐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중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은 역시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인, 세상의 빛인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우리 또한 세상의 빛,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고,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예로운 과제입니다. 새삼 ‘세상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세상의 빛’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어디에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양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치유의 구원이요 무지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참 자유로운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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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받는 죄인>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 받았고 직책상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이 행위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겸손한 죄인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으며 자신이 실천한 외적인 의로운 행위로 상급이 마땅하다고 믿는 교만한 죄인”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 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나의 완고함이 문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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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증언이 들립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

교회는 이 "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모여들게 하고, 주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게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과 사랑으로 따릅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에서 나신 빛이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4-9 참조). 그분은 세상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 빛을 선사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증언은 단순한 해설 이상의 선언입니다. 게다가 증언하는 이의 공신력이 증언 내용에 무게를 더하지요. 요한은 온 이스라엘이 예언자로 인정한 존재이니 이 증언은 과연 참되고 진실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도 매일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라고 고백하며 자비와 평화를 청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희생된 어린양,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이나 번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고, 또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바로 그 어린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이사 53,6)지요.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영성체송)

예수님께서 기꺼이 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로 상을 차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가득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이고, 또 그분과 우리의 혼인잔치에 마련된 사랑의 포도주이며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1코린 1,2) 그렇습나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정체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무리, 거룩한 제자를 가리키는 "성도"라는 말씀 안에 곧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일은 참 행복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그분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존재라면, 우리의 사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의 본질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어린양이신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피 흘리고 죽어간 창백한 모습의 희생된 어린양을 관상합니다. 약하고 힘 없고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제단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살은 세상을 풍요롭게 할 생명의 양식이 되고 그의 피는 세상을 정화하고 흥겹게 할 포도주가 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의와 독기 앞에서 무장해제가 된 존재입니다. 저 어린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쳐 살아온 우리가 저항도 항변도 없이 침묵하며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작고 소소한 일에서라도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악의와 독기가 우리에게서 더 확산되지 않고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더 선량해지고 더 밝아지고 구원의 길도 더 확장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만큼은 못되지만, 보복과 앙갚음을 포기해 악과 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이라도 섣불리 이 선택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죽음이니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더 애틋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진다면, 지금 그분이 함께 어린양이 되자고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응답입니다. 주님의 종이고 어린양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작은 빛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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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합니다. 곧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이 다섯 번 나옵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나오고,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 나옵니다. 곧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와 평화 예식이 끝나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눌 때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이어서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곧 주님께서는 세상의 죄인들을 쓸어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겠다는 결심을 다집니다.

<성경>에서, 우선 ‘어린양’은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아버지, 제사에 쓸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아들아, 그 어린 양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리라."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참된 어린양은 예수님입니다.

<둘째>. 파스카의 ‘어린양’입니다(탈출 12,1-27;레위 23,5-6;신명 16,1-7).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죽음의 재앙을 내리는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이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대신 죽는 속죄의 희생양으로서의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양떼와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치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천막 주위에 사나운 맹수들이 다가 와서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며 괴롭혔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줍니다. 그 때 맹수들에게 보내지는 양이 '아자젤'이라 불리던 ‘속죄양’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대속사상이 나타나게 되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희생양 제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일 년에 한 차례(매년 7월 10일)씩 지난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희생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위에 자기의 손을 얹고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4.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이시다(묵시 5장). 어린 양은 목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이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도대체 누구인지? 개인적인 한 인물인지? 아니면 하나의 집단인지? 남은 자들(렘난트)의 무리인지? 야훼의 가난한 사람(아나빔)인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신진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게 재조명해 보았지만, 여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세례자 요한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이를 밝혀줍니다. 이 표상에는 ‘야훼의 종’과 ‘대속의 희생양’의 두 가지 표상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사> 53,7.12에 나오는 ‘야훼의 종’임과 동시에, <출애>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인 구약성경 곳곳에 나오는 희생양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예수님에 의해 “야훼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어린양”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Agnus Dei, Qui tolis peccata mundi)라는 표현에서 “세상의 죄”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포함하며, 옛날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악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또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어린양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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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도 원망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오히려 자신의 내어 주고 피 흘려 구원하는 제물의 삶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드리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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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증언>

"나는 보았다."

오늘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을 증언합니다.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었고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빛이 내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실거라고 ~..

증언은 말로 확고한 믿음과
신뢰를 두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갖는 확신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질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상대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이루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줄 아는 눈을 갖는다면
당신은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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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가슴 찡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살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십니다.

매일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을
또한 들어높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어린양이 되십니다.

어린양처럼
누군가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 삶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죄를 없애십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
어린양의 힘이십니다.

약할 때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내는
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앞장서시며
삶의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과연 보았고
마침내 믿습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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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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