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11
5월2일[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부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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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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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캐오처럼 성체를 영하라>
오늘부터는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이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이나 하늘에서 내려 백성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성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주시는 당신 살과 피입니다. 광야에서 이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책 출판이 허가되었습니다. 제 책은 아마 7월 전후로 나올 것 같습니다. 제목은 『사랑하는 조카들이,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신자가 요즘 냉담이라는 말은 잘 안 쓰고 ‘쉬는 교우’라는 말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쉬운 교우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을 어떻게 쉬겠습니까? 그건 죽고 싶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쉰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현대 성체 교리의 문제점입니다.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알려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기 직전까지도 만나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성체를 영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일어납니다. 이를 잘 표현하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 ‘바오!’입니다.
애니메이션 ‘바오’는 자녀가 떠나간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듯한 한 중국계 캐나다인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만두(바오)를 빚던 중, 자신이 만든 만두 하나가 아기처럼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어머니는 이 작고 귀여운 만두 아기를 실제 아들처럼 여기며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참된 양식) 대신 다른 것을 갈망하듯,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만두 아기에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만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세계를 원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서양인 여자친구를 데려와 함께 집을 떠나려 합니다. 어머니는 또다시 자식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상실감에 휩싸입니다. 아들이 떠나려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으려는 절박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그 만두 아들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는 강론에서 지적하듯,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양식’(성체)을 받아 모시지 않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변 사람, 특히 가장 사랑하는 이의 삶과 자유마저 집어삼키려 드는 왜곡된 사랑, 즉 '사람을 먹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만두 아들을 먹어버린 직후 엄청난 충격과 슬픔, 후회에 빠집니다.
영화는 이 사건이 어머니의 깊은 내면과 두려움이 투영된 일종의 악몽이었음을 보여주며, 실제 아들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 준, 참된 양식 (하느님의 사랑, 관계의 건강한 거리)이 부재할 때 사랑이 어떻게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질하여 상대를 '잡아먹는' 행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성체를 통해 참된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것이 왜 우리 신앙생활과 인간관계에 필수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화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사하는 데 못 쓰는 물건들이 상당히 많은데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다고 하시면서. 불안한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없어도 언제든 새로 사줄 수 있는 존재로 남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건을 먹고, 재물을 먹고, 나중에 사람까지 먹는 일이 없어집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양식’을 주시는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성체성사를 해야지, 세상 것에 대한 배고픔을 더 가중하는 욕구를 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서서히 어떤 것들은 버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많은 발전을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가 더욱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참다운 성체성사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목적이 모르고 성체를 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마음의 배를 채우는 일입니다. 언제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사라지니 사람이 ‘나쁜 놈’, 곧 ‘나뿐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카인이 그랬고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허무하고 불안한 열매처럼 나무 위에 위태롭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는 모든 재산을 다 내어주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효과가 되어야 합니다. 자캐오처럼 성체성사를 영해야 모기에서 예수님처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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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의 신앙 간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성당까지 걸어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입니다. 10일 정도, 약 120킬로를 걷는 순례였습니다. 신부님은 5일째 되는 날 ‘발톱’이 빠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걷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도저히 걷기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걸을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하는데, ‘너는 걸을 수 있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설마’라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걸어서 순례했다고 합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에 신부님은 자신에게 있었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이야기를 마치자, 교우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본인들에게도 이번 성지순례가 마치 은총 같았다고 합니다. 묵주기도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루르드 성지에 가면 환자들이 놓고 간 목발이 있는데 신부님은 ‘실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설마 하는 의심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톱이 빠졌음에도 무사히 걸어서 순례를 하면서 토마 사도처럼 믿음이 부족했던 신부님에게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다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후배 신부님처럼 신기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난번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아버지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하면 보통은 총구역장, 해당 구역장, 반장과 함께 갑니다. 총구역장에게 연락하고, 시간을 정했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한 청년이 전화했습니다. 시간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연락했습니다. 병자성사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일 해야 할 일들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또 전화하였습니다. 복잡한 일이 생겨서 병자성사는 다음에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도 화가 났습니다. 또다시 총구역장님께 전화해야 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겨우 두 번 전화했는데, 저는 참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저를 참아 주셨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화를 내시지 않으셨고,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고작 두 번 바뀐 것을 가지고, 저는 화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을 이해하고, 다음에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큰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아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곳에 성당을 세우고, 밤샘 기도를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려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유하려 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과 치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권력과 명예는 오래 갈 것 같지만,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재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울 수는 있지만 재물이 많아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느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염불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많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여 욕심을 채워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말리엘은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커다란 능력이 있었음에도 미련 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뿌리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권위는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힘은 있었지만, 그 힘을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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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6,7)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 곁에 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6,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빵과 물고기를 가진 아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자신이 가진것을 아낌없이 내주시는 모습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이를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며 부족하면 돌아와서 갚을 테니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장 참조) 말입니다.
아울러 이 빵 또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와 성체성사로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능력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주려 한다면 늘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내주기 시작한다면, 나의 시간과 사랑, 관심과 돌봄의 손길을 건네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웃음과 행복의 꽃이 피어나겠지요.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라고 전합니다. 이는 십자가와 성체성사로 드러나는 예수님과 우리 모두의 부활을, 그 충만한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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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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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엇을 얻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2-6)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1-15)
1)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 있는 이야기와 조금 다릅니다. 공관복음에서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라 ‘표징을 찾는 사람들’이고, 당신이 ‘어떤’ 분인지 계시하기 위한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신 기적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없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뒤의 26절-27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2)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바란 대로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어 주신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매 끼니마다 기적을 일으켜서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생계를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그런 생활을 원했던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하느님 나라는 노동 자체가 아예 없고 모든 사람이 놀기만 하는 나라일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쪽 세상에서 죽도록 일만 하고, 정당한 품삯을 못 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놀기만 하는 나라를 희망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일 차제가 없는 나라가 아니라, 더 고생하는 사람도 없고, 더 편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는 나라, 부당하게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도 없고, 남보다 덜 받는 사람도 없는 나라, 똑같이 일하면서, 똑같이 배불리 먹고, 똑같이 행복한 나라일 것입니다.>
3) 7절에 있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주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9절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 “사람들을 먹일 빵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4) 이야기 속의 군중은 몸을 배부르게 하는 빵만, 즉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다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요한 6,66)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다가 실망하고, 신앙생활을 중단하는(냉담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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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꿈을 이루어 갑니다>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꿈을 이루어 갑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내
밥만
챙기는
나에게서
네
밥도
챙기는
나에게로
그리하여
내
밥만
챙기는
세상에서
네
밥도
챙기는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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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웠을 때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빵의 기적으로 최후 만찬을 통해 이루어질 성체성사를 미리 보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든지 시간이 없어 하느님께 기도할 여유가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외진 곳까지 찾아간 군중은 자기가 처한 어려움에도 용기 있게 하느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쓰시도록 맡기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은총을 받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성만 있으면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먹이고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굶주리지 않게 먹이실 뿐 아니라 차고 넘치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군중이 먹고 남긴 열두 광주리의 빵 조각은 풍요로운 은총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적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슴 벅찬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풀밭에 자리 잡은 군중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 풀밭에 우리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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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의 도시 벳사이다로 가십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던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 (요한 복음 5장 9절 참조) 목격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욕망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시험하시며 당신의 길을 뚜렷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필립보는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으며, 그 돈을 누가 내어놓을 것이며, 그렇게 한들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계산하는 세상의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가진 보잘것없이 적은 것으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논리를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특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혼자 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시는데, 부자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이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내어놓음, 감사의 기도, 그리고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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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요한 복음 6장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15절), 물 위를 걸으신 기적(16-21절),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와 제자들의 반응(22-71절)으로 구성됩니다. 오늘부터 평일 미사에서는 이 순서에 따라 복음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십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 기적 사건을 “표징”(그리스 말: ‘세메이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사용되는 ‘표징’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행위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표징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려고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어 활동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빵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빵의 표징으로 사람들은 믿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 표징을 목격한 이들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려 온 예언자, 곧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임금으로 받아들려는 ‘위험’을 피하여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물러나심’은 또 다른 활동을 펼치시려는 준비입니다.
요한 복음의 표징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다양한 사건들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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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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