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22
5월13일[부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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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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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ckBdQPkS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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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형 인간관계 모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22절에서 30절 말씀을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착한 목자께서는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앞장서’ 나아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책임을 느끼실까요?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지만, 인간적인 애정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양 떼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매우 ‘쿨’한 분이십니다. 관계에 있어 질척이거나 끈적이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하시고, 앞장서 나아가실 뿐입니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것은 양들의 선택이며, 그에 대한 심판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양 떼를 이끌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양들은 흩어집니다. 목자가 자신을 보호하려고는 하지 않고 귀찮거나, 심지어 잡아먹으려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가 ‘케인에 대하여’입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한때 자유로운 여행가였던 에바가 아들 케빈을 낳으면서 겪게 되는 깊은 내적 갈등과 파국적인 결과를 그린 작품입니다. 에바에게 아들 케빈은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앗아간 존재, 축복이기보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처럼 여겨집니다. 그녀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 열정적으로 세상을 누비던 자신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방 한가득 붙여놓고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에바의 무의식적인 거부감은 케빈과의 관계에 처음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케빈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엄마인 에바에게만 적대적이고 까다로운 아이였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기면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의 말을 따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에바의 인내심을 시험합니다. 반면, 아빠 프랭클린 앞에서는 비교적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프랭클린은 에바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여기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에바는 아들 케빈이 아빠와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케빈은 부부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에바를 더욱 고립시킵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려 애쓰지만, 그 사랑은 일방적이고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며, 케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에바는 케빈의 행동 이면에 있는 악의를 감지하지만, 남편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합니다. 결국, 케빈은 십 대가 되어 학교에서 끔찍한 사건을 저지릅니다. 그는 활을 사용하여 다수의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아빠 프랭클린과 여동생마저 살해합니다. 이 사건으로 에바는 아들을 둔 ‘가해자의 엄마’로서 사회의 모든 비난과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양 떼를 이끌고 주인에게로 향하는 목자로서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케빈의 엄마가 남편에게 아이를 잘 키워서 데려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러한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앗아간 존재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아들과 아빠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시키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에바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아들의 죄를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전에 이러한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능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일해서 아이를 키웠는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를 미워하고 학교 가기도 거부합니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아이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엄마는 이혼을 다시 생각합니다. 아이를 키워서 데려갈 대상이 없는 채로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잡아먹는 엄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 떼를 이끌고 나아가는 참된 목자로서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관계에 휘둘리거나 집착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고 오히려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일 것입니다. 내가 먼저 아버지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나를 따르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도망 다닐 것입니다. 계속 정진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자녀들은 끝까지 쫓아올 것입니다. 물론 그다음은 하느님께로 내가 먼저 나아가며 쫓아오게 하면 영원히 자녀는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좋은 예가 ‘정은표 씨 가족’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은 정말 교회의 가르침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아빠가 아이들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아이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가 가자면 가는 것이지, 이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엄마는 아이들에게도 사랑받습니다. 김하얀 씨는 이런 면에서 목자형 인간관계를 맺을 줄 아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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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2024년, 제가 달라스 본당에 처음 부임했을 때 두 가지 사목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눈에 보이는 공간의 변화입니다. 사제관을 성당 내로 이전하여 신축하고, 협소해진 친교실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사제관이 본당 내에 있으면 교우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지고, 병자성사나 교우 방문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친교실은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의 규모로는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건축위원회를 발족했고, 교우들의 소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많은 분이 공감해 주셨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시간 속의 여정입니다. 3년 후면 본당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연륜과 신앙의 깊이를 지닌 분들과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지난 50년을 성찰하고, 다가올 50년을 향해 걸어가려는 소중한 첫걸음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인간의 성숙을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축을 꿈꾸는 것도, 50주년을 준비하는 것도 단순히 구조물을 짓고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계를 마주하면서, 공동체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박해를 피해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유대인뿐 아니라 그리스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 복음 선포의 열매로, 안티오키아에서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이고 삶의 방식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것은 단지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본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지 공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리를 넓히는 것입니다.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축입니다. 단순한 50주년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시간을 새롭게 여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신축을 계획하고, 50주년을 준비하는 것도 바로 용기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을 주는 빵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사랑과 공동체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듯이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제 저는 교우 여러분을 알고, 교우 여러분도 저를 믿어주시니, 모든 것이 잘될 거라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새의 두 날개처럼 ‘건축위원회’와 ‘50주년 준비위원회’가 조화를 이루어 함께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여정의 동반자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다시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받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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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순교 뒤에도 계속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까지 퍼져 나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주님께 돌아서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안티오키아 교회입니다. 말 그대로 위기가 곧 기회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분’이라 믿고 바라 왔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그러한 믿음과 희망의 사람 바르나바를 만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로 ‘사울’이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지금의 튀르키예 남동쪽에 있는 타르수스로 가서, 회심한 뒤 고향에 내려와 있던 사울을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갑니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크게 회심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누구도 사울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을 때, 바르나바는 사울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기도 하며 또 이방인 선교 길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 길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바오로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 없이는 사도 바오로도 없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패배 의식과 절망이 낳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부활한 새 생명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믿고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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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라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내가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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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2-30)
1)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라는 말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괴롭힐 작정이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져 있어서, 당시의 기득권층이 그 상황을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앞의 6장 66절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떠나고 열두 사도와 몇 명의 신자들만 남아 있었는데도 예수님이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떠났다고 해도, 일반 군중이 예수님에게 품은 기대감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 요한복음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7,31; 8,30; 10,42; 11,45),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즉 지도층과 기득권층이 불안해 할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지도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말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고, 로마제국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에 만족하면서, 정치적인 독립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는 말은, 비유 같은 것을 사용하지 말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선언하라는 요구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역죄’로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 줄 정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마도 유대인들은 “메시아도 아니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라고 이스라엘 최고의회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2)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는데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징이나 비유 같은 간접적인 표현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요한 8,23),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같은 말씀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메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 자체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3)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양이 될 수 없다.”이고, 이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당신을 믿으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표현만 보면, 처음부터 ‘양’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양’이, 즉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듣는다.”는, “알아들어라.”이고, “따른다.”는, “따라라.”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결합과 일치를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믿음’과 ‘따름’의 목적, 또는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것도 침해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손상되지 않는,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유혹도, 죄도, 악도, 또 가난이나 질병이나 ‘늙음’ 같은 것도 그 ‘영원한 생명’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점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동등하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진리’ 라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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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요한 10,22-30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길>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믿음을 따라
나선 길
믿음의 길
믿고파
걷는 길
걸어야만
믿음 되는 길
희망을 따라
나선 길
희망의 길
희망하고파
걷는 길
걸어야만
희망 되는 길
사랑을 따라
나선 길
사랑의 길
사랑하고파
걷는 길
걸어야만
사랑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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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 하고 유다인에게 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먼저 믿어라. 그리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보려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완고한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 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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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우상 숭배로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다시 정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자신을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일컫던 안티오코스 4세가 저지른 신성 모독을 모든 이가 뼈저리게 되새기던 그날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목숨을 건 정면 승부였습니다. 이러한 ‘도발’을 서슴지 않으신 것은 유다인들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이며, 그들이 진리와 생명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앗아갈 셈이오?(직역)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 대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금껏 거듭 밝혀 오셨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돌로 치려고 한 것을 보면(10,31 참조) 그들은 처음부터 불신과 완고함을 거둘 뜻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주님 탓으로 돌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내 숨통을 조이시는 분’으로 여기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듣거나 보면서도 자신을 더 설득해 보라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도 실천 없이 기대만으로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양들은 당신 곁에서 귀 막고 있는 유다인들이 아닌, 용기와 결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응답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랑받는 양으로 살아갑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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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답답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던 힘과 권력의 메시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이 공격적인 질문 속에는 불신과 증오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 관념에 가두어 두려는 편협함이 엿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오만한 유다인들은 그 표징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러한 유다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빗대 “때는 겨울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자신의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고, 아량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빗대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떠한 표징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시의 빛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얼음장 같은 편견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겨울”이라는 표현 속에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운명을 맞게 되실 것인지도 예표되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바르나바처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거짓과 오류에 맞서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물어봅시다. 나는 과연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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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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