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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232 5월23일[부활 제5주간 금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5.05.23|조회수32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232
5월23일[부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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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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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X4zzkco03Y
[서울대교구 봉원민 브루노(역삼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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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거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함과 깊이 지혜로움의 대명사였던 옛 인디언들은 친구의 의미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친구는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 현인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친구에 대한 멋진 정의를 내려 보려 애썼습니다.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힘겨운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참된 친구가 있다는 것,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눈빛만 보아도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절친한 친구, 세상살이가 너무 힘겨워 흐느낄 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는 그런 친구,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존재 자체로 큰 위로가 되는 그런 친구.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연옥’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 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 하면서 홀로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4)

여기서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친구 먹자고 제안하신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분신이자 외아들이십니다.

아니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 결국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한없는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나가는 유명인사 가운데 친구가 한 명 있다면 덩달아 어깨가 으쓱합니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자랑합니다. “그거 알아? 모모 국회의원이 바로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요즘 핫한 그 가수 있잖아. 나하고 소꿉장난 친구였어!”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런 친구 두지 못한 것 하나도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즉 하느님 아버지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며 감지덕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거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에 대한 큰 자긍심을 지니며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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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IeSPC6BX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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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기쁨>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친구가 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ㅣ친구는 같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강아지가 예쁘다고 해도 개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강아지의 수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처럼 낮아지셨지만, 당신 친구가 되라고 당신 지위로 높이려 하십니다. 그 방법은 당신의 계명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당신처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인간이 강아지와 완전한 친구는 될 수 없어도 어느 정도의 친구는 될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인간처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강아지를 인간처럼 행동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강아지보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친구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뽑으시고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결국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 평화 등의 성령의 열매지만, 그것으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바로 그 성령의 열매로 우리를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가까운 동료 레오 형제와의 진정한 기쁨에 관한 대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레오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오 형제여, 잘 듣게나. 만약 우리가 하느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온갖 병자를 치유하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 있는 기적을 베풀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기쁨은 아니네.”

레오 형제는 놀라운 기적마저 완전한 기쁨이 아니라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귀를 기울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다시 이어 말했습니다. “또 만일 우리가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우리 수도회가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해도 그것 역시 완전한 기쁨은 아니네.” 레오 형제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님, 완전한 기쁨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프란치스코는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레오 형제여, 우리가 지금 이렇게 혹독한 추위와 폭풍 속을 걷고 있는데, 만약 밤이 깊어 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며 ‘형제들이여,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을 때, 수도원의 형제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게으름뱅이들아, 어서 떠나라!’ 하며 쫓아낸다면, 바로 그때 우리가 이 모든 모욕과 추위를 참아내고 인내하며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일세.”

레오 형제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듣고 깊은 깨달음 속에 침묵했습니다.그러나 무언가 완전한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평소처럼 조용히 혼자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에 특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 레오 형제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레오 형제는 제게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만약 저에게 주시려는 어떤 특별한 은총이 있다면 그것을 저에게는 주지 마시고, 오직 제 친구 레오에게만 주소서. 제가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에게 더 큰 영적 기쁨과 평화를 주시길 청합니다.”

며칠 뒤, 레오 형제는 홀로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넘치는 기쁨과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특별한 위로와 은총이 놀라워 기도 후 프란치스코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은총을 제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레오 형제여, 그 은총은 하느님께서 자네에게 주신 것이 맞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한 은총이기도 하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자네를 나보다 더 위로하고 축복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지.”

이때 레오 형제는 비로소 프란치스코가 말했던 ‘완전한 기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완전한 기쁨이란, 자신이 가진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과 평화를 자신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곧 ‘구원자’가 되는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에 사는 롯을 위해 하느님과 친구가 되었듯이, 모세도 하느님과 “벗과 대면하여 말하듯”(탈출 33,11)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친구가 됨으로써 얻은 성령의 은총은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한 평화를 누리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기쁨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면 그 지팡이를 받게 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친구가 되었기에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축제가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기쁨은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에 멈추지 않고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녀도 그리스도의 일꾼을 잉태하게 성령을 전해주심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동료들에게 오페라 한 곡을 들려줄 수 있는 바로 그러한 마음, 이것을 갖게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연결되는 통로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마치 사렙타 과부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엘리야와 친구가 되어 죽은 아들을
되살리게 된 것처럼 먼저 예수님의 뜻을 따라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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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각자 자라온 문화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한국은 참 독특한 식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김치,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늘날처럼 빨리빨리 결과를 원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발효는 기다림이고, 인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서서히 변하고, 깊어집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기도한다고 당장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기도하고, 사랑하고, 회개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과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한국은 함께 밥을 나누는 문화를 소중히 여깁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식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성체를 나누는 미사의 정신과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몸을 떼어 주셨듯, 우리는 서로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나눌 때 참된 공동체가 됩니다. 서양에서는 때때로 우리의 발효 음식이나 식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냄새가 강하다, 너무 강렬하다,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냄새와 기다림 속에는 조상의 삶이 담겨 있고, 한민족의 인내와 사랑이 녹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토착화(土着化)'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납니다. 복음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사람들 안에 뿌리를 내리려면, 반드시 그 땅의 문화와 전통을 만나야 합니다. 복음은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도 '새로운 생명'을 주지만, 그 생명은 항상 '그 땅의 언어'와 '그 땅의 삶의 방식' 안에서 꽃피워야 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로마 제국 안에서 자리 잡았고, 로마의 법과 제도가 자연스럽게 교회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로마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고, 특히 아시아에서는 심했습니다. 조선을 예로 들면, 조상 제사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조상에 대한 공경은 단순한 예절을 넘어 삶의 뿌리를 잇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들은 이를 ‘우상숭배’로만 보고 무조건 금지하려 했습니다.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박해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 말씀은 이와 비슷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도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오랜 논쟁 끝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핵심만 지키고, 나머지는 각자의 문화 안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살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깊은 지혜였습니다. 선교사 리카르도 주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은 진리이지만, 복음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그 땅의 물과 햇빛을 받아야 한다." 진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각 문화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선 교회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중심에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있었습니다. 정하상 성인은 박해가 거세질 때, 조선의 왕에게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렸습니다. 이 탄원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찌 나라의 도리를 해치는 일이겠습니까?" 또한 그는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답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조상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조상을 신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조상을 위한 참된 공경은 하느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는 복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의 전통을 존중하려 했던 것입니다. 억지로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살리려 했습니다. 정하상 성인의 이 태도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들은 사도들의 결정과 닮았습니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민족의 풍습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사랑은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문화 안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정원에 다양한 꽃이 피어야 더욱 아름답듯이, 우리 신앙 공동체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더욱 풍성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은 다름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서로를 존중하는 것. 서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삶과 문화 안에서 꽃피워야 합니다. 우리도 서로 다른 이들을 품고, 사랑으로 복음을 심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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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이 주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시듯 제자들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라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 사랑을 배우고 맛 들이면서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사명,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5,12)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 10항 전반부 내용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어제 복음 말씀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가정과 우정 안에서, 연인 또는 부부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친교 안에서, 사랑의 연대와 봉사 안에서, 미사와 기도와 묵상 안에서, 저마다의 길에서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무의미와 권태, 곤경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회칙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인간 내면에 이 깊은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그 결실로 인간은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을뿐더러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깊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 사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기쁨이 충만한 이들이 참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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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2-17: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된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 사귀어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사귈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따랐으며,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열매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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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호소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곧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설명입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떻게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먹는 일’은 ‘생존’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말은, 먹고 남은 음식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함께’ 먹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조금 남은 음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주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 자신은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굶주리고 있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몇 개씩 던져준 일은, 결코 나눔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루카 16,19-21) 똑같이 나누어서 함께 먹어야 합니다. ‘배부름’을 나누는 것은 ‘배고픔’을 나누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2)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헌금함에 다 넣은 것은, 자기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 헌금이 불우이웃돕기에 사용되었다면, 그 과부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실천한 셈이 되고,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비용으로 사용되었다면, 온 마음과 목숨을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셈이 됩니다.

<수혈을 해야 하는 환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헌혈’을 하는 것도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 실천’입니다. 헌혈 한 번 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피를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는, “사랑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입니다. 여기서 ‘친구’는, ‘구원받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아무 관심도 없고, 그래서 이웃 사랑 실천도 전혀 하지 않고, 혼자서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죽어서 내세에 가 보니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다면, 그곳이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4) 17절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종합해서 한 번 더 강조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것이, 하라고 명령하신다고 하게 되는 것일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호소’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간곡히 호소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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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요한 15,12-17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벗>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당신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그럴 만하지 못한
나를 벗이라
부르시니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끝내
당신의 벗일 수
없다 해도

쉼 없이
더디더라도

지금
당신의 벗이
되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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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셨으니 내가 예수님께 맞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으신 분에게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출처 -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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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손우배 요셉 신부님]

<신을 인간으로 만나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처럼 느끼고, 슬퍼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자기가 믿는 신을 우리처럼 인간으로 만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더욱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당신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당신과 일치하도록 초대된 자녀들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품격은 엄청난 격상을 하게 됩니다. 옹기장이는 자신이 만든 옹기를 소중히 아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만든 옹기를 사랑하고 또 벗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옹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나’라는 옹기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 놓으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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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이사 41,8)과 모세(탈출 33,11)는 ‘하느님의 벗’으로 불립니다. 신앙의 정수를 살아간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고(창세 18,17 참조),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하여 사귀셨습니다.(탈출 33,11; 신명 34,10 참조) 사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오직 하느님께서 호의로 베푸신 매우 예외적인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당부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종과 달리, 벗의 뜻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동의하여 그를 따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운 순종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할례를 비롯한 지난날의 복잡한 규정들을 이방계 신자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우상 숭배)과 피째 고기를 먹는 일(‘생명[피]은 오직 하느님의 것’)과 불륜을 금하는(가정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계명만을 요구함으로써, 개종한 형제들도 ‘주님의 벗’이 되어 자유롭게 순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보잘것 없는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내가 어찌 누구를 미워하고 내 벗이 될 자격이 없다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을 닮아 목숨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나를 뽑아 세우신 주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사랑과 구원의 열매를 맺는 그분의 사랑받는 포도나무로 영글어 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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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상 위에 커피가 담긴 텀블러가 놓여 있습니다. 이 텀블러를 유심히 바라보는데, 2차원으로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형으로, 위에서 보면 동그라미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3차원으로 보면 원기둥이 됩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동그라미, 직사각형, 원기둥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텀블러가 어떻게 생겼어?”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동그라미, 직사각형, 또 원기둥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과연 텀블러의 모양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을까요?

부분만을 떼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도 이렇게 부분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연히 진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년필을 좋아해서 만년필 검색을 종종 하게 됩니다. 비싼 만년필이 정말로 많습니다. ‘이런 만년필로 글을 쓰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면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기도구로만 규정하면 비싼 만년필이 필요 없어집니다. 모든 만년필이 똑같이 보입니다. 즉, 가격과 디자인이라는 부분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구분보다는 근본적인 것을 봐야 했습니다.

주님 따를 때도 이것저것 생각합니다. 기도, 봉사, 희생, 자선….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앞서 말씀드렸던 기도, 봉사, 희생, 자선 등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것저것 나누어 생각하면서, 정작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가장 근본적인 사랑 자체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르는 길도 명확해집니다.

이 사랑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렇게 가장 근본이 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일을 시키면서 그 일의 목적이나 결과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이 관계에서는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종이 아닌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주님을 선택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근본적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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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여기 공동체에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요? 우리가 꼭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대체 왜 모여 살아야 하나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곁에 함께 있지 않고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사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해야 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왜, 벗을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대체 “친구”이 누구이기에, 그러실까? 나에게는 그러한 벗이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이라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15 참조),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친구”인 우리 주님과 함께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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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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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밖엔 길이 없다”

예나 이제나 제 영원한 화두는 “사랑”입니다. 수도생활 43년, 평생 정주의 수도생활중에 참 많이 썼던 시들의 주제도 결국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1988년 7월부터 2025년 5월 지금까지 거의 만37년 동안의 요셉수도원 정주중에도 참 많은 시들을 썼습니다. 발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시시때때로 꽃처럼 피어난 시입니다. 시인이 따로 있나요?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시처럼 삽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이은 세 번째 책 제목이 결론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그렇습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신록의 빛나는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운 신록과 꽃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사랑공부에는 누구나 영원한 초보자 일뿐입니다. 제 주변에는 놀라운 사랑의 모범이 많습니다. 

어제는 한 자매가 저를 찾았습니다. 해마다 어버이날 전후 5월에, 영명축일 전후 10월초 일년에 2회, 30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70대 중반되기 까지 30년 이상 한결같이 저를 찾는 사랑입니다. 산전수전같은 삶중에도 신자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사랑에 최선을 다해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온, 가정을 지켜온 자매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서두에 나오는 글에 이어 두편의 글을 나눕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온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히 지지않는 꽃이 있는가
결국 한때의 사랑이다
다 변한다
변하는게 생명이요 자연이다
슬퍼할 것 없다
그러나 어찌 꽃사랑만 사랑인가
뿌리내림의 숨겨진 사랑도 있고 
푸른잎들 열정의 사랑도 있고
익은 열매 성숙한 사랑도 있다
살아있음 자체가 사랑이다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말고 가만히 들여다 보라
환하게 타오르는 사랑보리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 안에서 살다가 
사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인생이다
영원한 사랑이다”<2001.4.28.>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외로움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내는 것이다. 하늘이 별들 피어내듯 땅이 꽃들 피어내듯 사랑꽃을 피어 내는 것이다.”<2001.8.17.>. 날마다 꽃피어 내듯 쓰는 강론입니다. 잠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교과서 같은 대헌장을 나눕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은 견디어 냅니다.”(1코린13,4-7)

정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늪에서 못 벗어 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고별사 일부를 이루는 단숨에 읽혀지는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유일한 “사랑의 교과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아가페 사랑입니다. 집착이 없는 초연하고 깨끗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짐을 덜어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이자 스승이자 형제인 예수님의 친구다운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의 사랑을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열매중의 진짜 열매가 사랑의 열매요 사랑의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갈 때 아버지께서도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또 주님앞에 갔을 때 주님은 우리 사랑의 열매들을 헤아릴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사랑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주님은 우리 모두 사랑하라고,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당신의 친구로서 우리를 뽑은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바로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전부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매사 판별의 잣대가 됩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이요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바로 이런 이웃 사랑의 참 좋고도 멋진 본보기가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회의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실라스도 보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필수 사항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곧 1.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2.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3.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판단의 잣대입니다. 참으로 이웃의 불필요한 짐을 덜어주어 자유롭게 하는 아가페 사랑이 답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충만한 기쁨의 아가페 사랑을 살게 하십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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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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