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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262 6월22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5.06.22|조회수52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262
6월22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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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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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BbISglryTE
[서울대교구 조정래 시몬(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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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누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초보 수도자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아침 식사는 빵을 위주로 한 식사였습니다. 당시는 어찌 그리 빵이 맛있었는지. 요즘은 식빵 하나에 계란 하나면 식사 끝인데,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도대체 몇 개면 양이 찰까, 한번 실험을 해봤습니다. 다섯 개, 여섯 개, 열 개, 마침내 길고도 긴 식빵 한 줄이 다 사라지더군요.

세상의 빵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늘 부족해 보입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늘 뭔가 양이 차지 않습니다. 한번 배부르게 먹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너 시간 지나면 또 다른 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빵은 이렇게 유한합니다. 세상의 음식은 우선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하지만, 먹는 순간 그때뿐입니다. 돌아서면 그걸로 끝입니다. 인간의 입이란 것이 간사해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잘하는 집, 더 특별한 맛집을 찾아가게 합니다.

세상 것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눈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입니다. 신기루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피를 양식으로 제공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맛있는 밥상을 한 상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의 재료가 예수님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의 피입니다. 당신의 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우리는 생명의 빵, 생명의 피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성체와 성혈이 정말로 생명의 빵이요 생명의 피로 변화되는 기적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의 몸과 피로 이웃들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가 이웃들에게 헌신할 때, 우리가 이웃들을 사심 없이 사랑할 때, 우리가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참 하느님의 몸과 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만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에서 이웃들의 굶주림 앞에 나 몰라라 할 때,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하지 않을 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을 때,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빵은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지고, 그들에 손에 일일이 건네질 때 참된 성체로 변화됩니다.

쪼개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이웃들과 나누지 못한 음식은 참된 음식이 아닙니다. 쪼갬과 나눔을 통해 빵은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진 우리의 삶은 거룩한 주님의 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빵인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빵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피인 성혈은 세상의 음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음료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만드는 영약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훨훨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금빛 날개입니다.

순교를 목전에 두었던 이냐시오 성인의 증언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세상의 목표도 세상의 왕국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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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v7y5YCaQ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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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요즘 이해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신비가 삼위일체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은총이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사실 이 둘은 가장 큰 진리와 은총입니다. 진리와 은총이 주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아기는 부모님의 진리, 곧 부부 관계의 모범, 그 다음은 그 부모가 주는 은총인 양식과 보호를 통해 자신도 부모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동물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진리와 은총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성체성사가 왜 힘을 잃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체성사가 힘을 잃은 증거는 성체성사를 영하는 것과 영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신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화방송 TV를 보고 미사 하는 것과 성당 와서 성체를 영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지, 삶의 에너지가 다 떨어지게 되는지를 느낀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성체를 영하러 성당 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유는 그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주일미사에도 그렇게나 많이 빠지고 냉담이 많은 것입니다. 

은총이 힘을 잃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이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말씀에 싸여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은총이 초콜릿이라면 이것이 녹아서 흐르지 않게 싼 포장지가 말씀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은총이 와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걸으시며 성경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가슴 뜨겁게 듣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은총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오셔서 나중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에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성물방만 봐도 그렇습니다. 성물, 곧 은총과 관련된 것들은 많은데 책들은 거의 없습니다. 책이 없으면 성물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은총은 말씀을 통해 온 사명에 힘을 주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술을 한 번 마시면 멈출 줄 몰라서 많은 사고를 치고 싸움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문제를 일으키며 사셨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루르드를 갔습니다. 전날도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마셨지만, 성모님 성지에서 하루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정말 성모님의 도움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루를 마시지 않았으니 다음 날도 안 마셔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몇 년째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저를 만나러 와서 제가 술을 마셔도 그분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십니다. 가장 행복해하는 것은 자매님입니다. 자매님은 술을 마시지만, 그걸 보면서도 형제님은 술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성체성사는 마치 이 형제가 루르드에서 받은 은총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 만약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었다면 효과가 있었을까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빵을 주신 기적인데, 만약 그들이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 외진 곳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 기적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항상 은총은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은총은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성취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상징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만약 그들이 모세를 따르지 않고 이집트에 머물렀다면 만나를 통해 얻는 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도 엘리사의 말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이고, 성모님도 성령으로 잉태하시게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님의 종이라고 하시며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체가 나에게 힘을 주게 하도록 말씀과 친해지십시오. 개신교가 ‘말씀만으로’라는 기치를 들고 생겨났기에, 가톨릭은 우리는 ‘성사만으로’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인 강론이 조금만 길어도 신자들이 힘들어합니다. 강론을 듣지 않아도 성체만 영하면 미사를 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강론은 성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강론이 죽는다면 성체도 죽습니다. 

성체를 영할 준비는 평소에 말씀을 읽으면서 사명을 찾고 매일 무언가 받은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최고급 식재료(성체, 은총)가 있다고 해도, 레시피(말씀)와 요리를 만들겠다는 의지(사명)가 없다면 그저 냉장고 속 재료에 불과합니다. 레시피는 각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고 조합해야 훌륭한 요리가 되는지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성체'라는 은총을 우리 삶에 어떻게 통합하여 맛있는 신앙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레시피와 같습니다. 

혹은 의사와 처방전의 비유도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에게 의사는 병을 진단하고 약과 함께 생활 습관 개선을 지시하는 처방전(말씀)을 줍니다. 약(은총)이 효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믿고, 제때 약을 먹으며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사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처방전을 무시하면 아무리 좋은 약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체성사도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의 처방전을 따를 때 최고의 효능을 발휘합니다. 

영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주인공 네오에게 "나는 자네에게 문을 보여줄 뿐이네.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자네 자신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트릭스의 진실(말씀)을 알려주고, 네오가 인류를 구할 '그(The One)'라는 '사명'을 제시합니다. 네오가 그 말을 믿고, 두려움을 넘어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행동했을 때, 비로소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는 말씀을 통해 나아가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여행자를 위한 양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으로 오늘의 사명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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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경에는 '파스카(Pascha)'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페사크(פֶּסַח)'라 하며, '넘어간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의 집은 넘어가시고 이집트의 장자들을 치신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그 피를 통해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했고, 파스카는 그 구원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입니다. 그 파스카의 완성이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말씀하시며, 성목요일 밤, 빵을 들어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잔을 들어 “이는 너희를 위한 내 피다.”라고 하시며 새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파스카가 '죽음을 넘어가는 해방의 사건'이었다면, 신약의 파스카는 '죄와 죽음을 넘어가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 성혈 대축일은 바로 이 신약의 파스카를 새롭게 기억하는 날입니다. 미사 때 우리는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체를 모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성찬례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 교구장님이나 교황 대사가 방문하셨을 때면 신학생들은 특별한 노래로 환영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임 쓰신 가시관’이었습니다. '임 쓰신 가시관'은 1985년 신학생들로 이루어진 '낙산 중창단'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비공식 앨범에 수록된 곡입니다. 이 앨범은 당시 젊은 신학생들의 열정과 신앙을 담아낸 노래로, 이후 '임 쓰신 가시관'은 생활 성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낙산 중창단에 함께 했던 신학생들이 40년을 기념하며 지난 5월 도림동 성당에서 중년의 사제가 되어서 당시의 열정을 기억하며 공연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순결한 의지가 그 안에 녹아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성체 성혈’의 신비가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임 쓰신 가시관의 고통까지도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매 미사 때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성가가 있습니다. 성지 순례 길 위에서, 지친 발걸음을 딛으며 부르던 ‘순교자 찬가’입니다. 이 곡은 최민순 신부님이 작사하고, 이문근 신부님이 작곡하였습니다. 한국 가톨릭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가는 9월 순교자 성월이나 특별한 전례 때 자주 불리며, 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 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순교자들은 피를 흘려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피는 성혈의 거울이며, 그들의 헌신은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자세를 비춰주는 반사경과도 같습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진정한 실존은 고통을 통과한 사람 안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체는 바로 그 고통을 통과한 예수님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그 실존을 먹고, 그 피를 마십니다. 마치 순교자들이 육체를 벗어 던지며 영원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도 성체를 통해 이 세상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신앙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것은 단순한 의식의 반복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셨을 때,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 ‘풍요’는 인간의 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총의 기적입니다. 성체는 단지 한 조각의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살아 있는 빵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는 단순한 빵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시관을 쓰신 임의 고통이며,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릅니다. 성체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삶 안에서 실천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들 또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파스카를 기억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닮고자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겠다고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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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먹는 일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시자마자 가축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셨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계셨기에 인간의 그 원천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명은 인간에게 영원히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린 군중 오천 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가(루카 9,11ㄴ-17 참조) 나머지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마르 6,30-44; 8,1-10; 마태 14,13-21; 15,32-39; 요한 6,1-14 참조), 이 본문들 가운데 대부분이 음식을 ‘사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기에 굳이 감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게 하자고 하며 시장 경제의 논리를 끌어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선물의 논리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그때까지 제자들은 군중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들에게 나눌 것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장 경제의 논리가 나눔의 신비로 대체됩니다.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써 당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선물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내주십니다.

지난해 세계 인구의 9.1%인 7억 3,340만 명가량이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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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한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S.Th., III, q. 65, a.1 ad 1)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표현 양식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졌다고 표현한다.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뿐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여기서 전한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절)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이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한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 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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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사는 살맛나는 세상>

루카 9,11ㄴ-17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사람 사는 살맛나는 세상>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먹는 이는
먹기만 하는
게걸든 세상 아니라

먹히는 이는
먹히기만 하는
서러운 세상 아니라

먹는 이는
먹으니 기꺼이
먹히는 세상이요

먹히는 이는
먹히니 떳떳하게
먹는 세상이라

서로가 서로에게
먹으니 먹히며
먹히니 먹는 세상이

하느님 닮은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몸으로
이루어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
꿈같은 세상

이 땅에
피어나는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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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성체성사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1ㄴ-17)

1)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거두어들이시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력을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갈 힘을 잃는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기념하고 성체성사를 묵상하는 날이고, 성체성사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살아야 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성체성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고,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5-57)

그리고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에서 구체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이고, 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일이고, 천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지상적인 일입니다.

3)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고(요한 1,14),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분”입니다.(콜로 1,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일도 ‘사랑’이고, 당신의 살과 피를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도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사실상 ‘같은 일’인데, 하나로 합해서 말하면, “하느님이신 분이 당신 자신을 빵과 포도주로 변화시켜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입니다. 그 일이 곧 성체성사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하느님이신 분의 사랑과 생명력을 ‘실제로’ 받아먹는 일입니다.

4) 믿음 없는 사람들이 천주교 교리들 가운데에서 가장 믿지 못하는 교리가 성체성사인데,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 방법도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과 마음이 타올랐던 일을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증언’했습니다.(루카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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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구대교구 나기정 다니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은 육적인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표임을 말해 준다.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이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 때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새로운 생명의 계약을 맺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고 계신다. 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현존과 생명을 느낀다. 그 생명은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다시 얻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그분의 크나큰 사랑을 받아 모신다. 이로써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된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사랑의 성사는 우리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이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것을 사랑으로 대하게 된다. 

성체성사는 믿음의 성사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 생명의 양식을 알아듣지 못했다. 믿음 없이는 성체성사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기념하며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모든 교우 믿는 교리, 빵이 변해 성체되고, 술이 변해 성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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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몸의 건강을 위한 양식에 정성을 기울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영혼의 양식에도 관심과 힘을 기울이는 마음의 자세가 더욱 필요한 때 입니다. 

더워지는 날씨, 항상 건강하세요. 주님의 생명을 누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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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태일 안셀모 신부님]

<축복과 감사 그리고 나눔>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독특한 인터넷 방송 콘텐츠 장르 중 하나가 ‘먹방’(먹는 방송)이다. 먹방 유튜버들은 일반인이 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양을 순식간에 먹는다. 우리는 먹는 모습과 소리에 군침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식욕의 유혹에 고민한다.

고민하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그들이 너무 맛있게 먹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 손과 입은 먹을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만족 반 후회 반의 시간을 보낸다.

광야에서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라고 말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빵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 역시 ‘빵’이다.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덱은 아브라함 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였고,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 소유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선사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거행된 최후의 만찬 이야기를 전하는 제2독서 코린토 1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그리고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는 빵 뿐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이에 대한 ‘감사’ 그리고 ‘나눔’이다.

배고픔과 갈증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생명 유지를 위한 본능적 욕구이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1코린 11,26)을 기억하고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것이 아니다. 이상한 점은 생명이라는 단어보다 오히려 ‘죽음’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광야에서 빵으로 유혹하는 사탄에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물질적인 빵을 먹는 것만으로는 유한한 육체적 생명만 유지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아들인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심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몸이며 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먹방 유튜버들은 시각적-청각적 효과를 극대화 하여 자신의 방송을 홍보한다. 하지만 그들처럼 단순하게 먹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다. 구원을 위해서 먹방 유튜버들처럼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을 필요도 없다.

우리 신앙인은 매일 매일의 미사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을 보고,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시는 당신 자신의 ‘나눔’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에 감사드리고 나눔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 신앙인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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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양태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랑과 생명의 성사>

“그리스도의 몸~!”, “아멘~~”.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먹고 마시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몸짓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너무나 큰 은총입니다. 사랑과 자비, 겸손의 극치인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6월, 예수 성심 성월에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성체성사,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기념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그 거룩하신 몸과 하나가 되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지극히 거룩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영적 생명의 성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온몸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세상과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력을 취하게 하시고, 우리는 그 신적이고 영적인 생명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미사성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 깊은 사랑을 우리의 생활 현실 안에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예수님의 현존을 바로 오늘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바꾸어 줍니다.

매일 매 순간이 성체와 성혈의 축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비, 성체성사를 통해 그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사랑과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온갖 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을 잊지 말고 필히 실천하라는 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담긴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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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문갑 비오 신부님]

<새 계약>

오늘은 주님의 몸과 피로 맺어진 새로운 계약을 기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교우님들께 가득히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계약이란 말속에 담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가끔 우리는 계약이란 말을 거래라는 말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귀한 신앙생활을 주님과의 거래관계 정도로 퇴색시키기도 합니다. 거래의 뿌리는 언제나 나의 이익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래는 나의 이익과 부합할 때는 잘 유지되지만 나에게 이익이 없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면 언제든지 파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계약은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계약의 뿌리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증거인 주님의 몸과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변함없이 영원한 이상 절대 파기될 수 없는 관계가 주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입니다.

우리는 성체 성사를 이루는 미사를 통해 영원하신 주님의 사랑이 담긴 새 계약을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이 체험이 반복될수록 우리 안에 맺어진 새 계약은 더욱 자라나고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새 계약은 우리를 자존감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고 완성해갑니다.

세상에서의 자존감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집니다. 늘 내가 너보다는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에 남에게 인정받고 보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삶에서 이웃은 사랑할 수 없는 경쟁 상대이거나 장애물로 다가옵니다.

새 계약이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 얻어집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고 있다는 그 자체로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보여주는 삶보다는 주님과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선택합니다. 이웃 또한 내가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소중한 존재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새 계약을 맺은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자존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주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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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남 흉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단체의 리더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리더이면서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비판하는 분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본당 신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미국의 한 노동 단체가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로 ‘리더 흉보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흉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남을 흉보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에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남 흉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시각은 어떨까요? 이 역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좋은 점 한 가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부정적 시각의 대부분을 지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특히 리더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나무를 보고 있는 중에도 리더는 숲을 봅니다. 당연히 나를 다른 것을 바라보니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리더의 존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운동경기에 감독과 코치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앞에 나서는 것은 선수이고, 이 선수들만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숲을 보면서, 그 선수의 능력을 더 높여줍니다. 이렇게 리더는 한 방이 있습니다.

우리의 리더는 누구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들의 이런 괘씸함에 당신의 사랑을 접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다가오십니다. 즉, 성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전해 주십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기에, 주님을 향해 불공평하신 분, 무관심한 분, 자기들의 기도를 외면하는 분이라고 계속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다짐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크기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뒤에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필요한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면 주님께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면,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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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9,17) 

저는 3년씩 두 차례 병원 원목 신부로 활동하는 관계로 경기도 안성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했었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모든 것을 혼자 하려니 좋은 면도 더러 있지만 뭔가 부족하고 불편한 면도 많았습니다. 함께 살 때는 주방 자매님이 식사를 준비해 주었기에, 제 몫은 열심히 준비해 준 음식을 형제들과 함께 맛있게 먹으면 되었습니다. 혼자 살면서는 제 입맛에 맞는 국을 끓이고 반찬을 준비해서 먹었지만, 먹어도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여성들은 공감하겠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의 행복은 식구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단지 식사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준비하고, 사랑을 나누는 자리이기에 밥상은 단지 밥만을 먹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한 가족임을 깨달아 가는 시간이고 자리라고 봅니다. 

 추방되어 ‘세몬’이라는 구두장이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이 주신 3가지 질문, 첫째로 인간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 대한 답을 찾고 다시 승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질문, ‘인간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미카엘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자신을 보살펴 준 세몬과 마트료나 부부 안에서 찾게 되는데 그 답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세몬의 구둣방을 찾아온 부자의 돌연한 죽음을 통해서, 미카엘은 인간에게 허

락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6년이 지난 어느 날 비록 엄마를 잃었지만, 쌍둥이를 이웃의 착한 아주머니가 거두어서 젖을 먹여 길렀는데, 벌써 여섯 살이나 되었고, 쌍둥이 딸은 어미가 없어도 이웃집 여인의 따뜻한 사랑을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미카엘이 깨달은 마지막 답은 사람은 자신의 계획과 고민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랑으로 산다, 는 것입니다. 미카엘은 세 가지 답을 깨닫고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추측해 보건대 즉 장정만도 오천 명 정도였다니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할 때,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묘안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마음과 생각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9,13)라고 요청하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기적의 결말은 다음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9,17)

이 놀라운 5병2어의 기적은 우리의 계획이나 생각보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우리의 의지를 주님 뜻과 맞도록 내어놓을 때, 비로소 주님의 거룩한 영이 놀라운 변화를 일어나게 하신 겁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빵으로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이젠 순례 여정 속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영적 배고픔을 당신의 성체와 성혈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배고픔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영적 배고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것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11,24)라는 주님 사랑의 업적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9,13)하고 당부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아직도 배고픈 모든 이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그분께서 마련하실 천상 잔치에 참여하고 일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체성사를 언어에 비유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의 울림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말이 되고, 말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진리가 되듯이,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빵의 표지도 빵이라는 본질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신비로 변화돼 갑니다." 이 말씀은 성체성사의 신비뿐 아니라, 신앙인이 생명의 빵으로 어떻게 변화돼야 하는지 깨우쳐준다고 봅니다. 같은 빵을 나누고 같은 잔에서 포도주를 나누는 이 단순한 행위에는 그저 배고픔을 채운다는 의미만 담겨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는 행위가 단순히 육신의 배고픔을 없애기 위한 행위만 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나누는 일이기도 합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라는 동반자Companion이라는 단어는 ‘함께Com’라는 단어와 ‘빵Panis’라는 단어가 합쳐져 ‘빵(밥)을 함께 먹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인생의 길을 함께 간다는 것이고, 나의 존재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은 먹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먹는 일은 생존의 기반이기에 밥을 함께 먹는 일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생명의 나눔이며, 서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나누는 친교와 사랑의 주고받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마음 안에 받아 모신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삶과 생명을 함께 함을 전제합니다. 우리 내면 저 깊은 곳에 함께 계시는 주님 현존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바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겠다는 응답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빵이 되셨다면 우리도 이웃을 위해 빵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빵과 포도주는 우리 안에 녹아 스며듭니다. 동화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우리 안에 스며들어 주님과 우리를 일치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의 혈육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행위는 살아 계신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 주님의 생애와 말씀을 내적으로 되새기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과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아는 마더 데레사 성녀가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성녀 마더 데레사는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영성체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 하루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면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씩 만난다는 것이지요. 소외당하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이야기하던 마더 데레사 성녀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내 것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그곳에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 한다고 해서 모두가 거룩해지고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면서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주님과 일치되어 사랑의 삶을 살고자 결심한다면, 마더 데레사 성녀와 같이 어려운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힘겨운 삶의 자리에서도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자기 전부를 내어놓으신 주님께서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사랑을 나누면서 일상의 삶 안에서 풍성히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여러분은 이제 무엇으로 살아가렵니까? 마더 데레사 성녀는 “성체는 바로 나를 지탱해 주는 음식이기에 성체 없이는 나의 봉헌 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정성껏 받아 모시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알렐루야”(복음 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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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성체성사 예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를 실감하는 요즈음의 대한민국입니다. 창공의 별처럼 빛나는 순교선열들이, 순국선열들이 수호천사들이 되어 대한민국을 돕습니다. 여전히 기상후 계속되는 만세칠창중 “대한민국-한반도 만세!”기도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과 보호를 얼마나 많이 받은 대한민국인지 체험하는 요즈음입니다. 올해의 5월, 6월은 유난히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6월 예수성심성월은 더욱 그러합니다. 

축제의 6월같습니다. 6월 모든 주일이 대축일입니다. 첫주(6/1)는 주님승천 대축일, 둘째주(6/8)는 성령강림 대축일, 오늘 셋째주(6/22)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그리고 넷째주(6/29)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또 금주내에 성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이 있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이 있으니 예수성심 6월은 대축일의 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은 물론 모든 대축일을 하나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사랑 대축일’입니다. 모든 대축일이 결국은 참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성체성혈 대축일로 사랑의 성체성사를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성체성사 예찬”이라 정했습니다.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자랑할 것도, 할말도 많은 성체성사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체성사로 살아가듯 참으로 믿는 이들 역시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명실공히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성체성사를 통해 고스란히 표현됩니다. 진정 하느님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은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에 대한 교리서의 가르침입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

문득 양노원 지도신부로 계신 옛 장상의, “낙이라곤 미사 하나 뿐인데 내가 이분들을 두고 휴가를 갈 수 없다”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는 물론 평생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미사은총으로 우리는 ‘일상의 늪’,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고 아름답고 거룩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즈카르야 후렴도 충만한 기쁨과 흥겨움을 선사했습니다.

“너는 멜키체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방금 부른 성체송가의 은총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요! 제 주특기가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 자랑하듯 계속 이어갑니다. 2007년 이때쯤 쓴, 가끔 인용했던 “온 세상 제대로 삼아”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둥글고 커다란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성체 모시고, 태양성체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존엄한 품위의 존재로 살게 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 또한 삼위일체 신비와 흡사하여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같은 생각이 들지만 용기를 내어 세측면에 걸쳐 세독서 순서대로 특징을 나눕니다.

첫째, 성체성사는 ‘축복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축복을 주시는 일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람을 축복한 멜키세댁은 예수님은 물론 사제들의 예표가 됩니다. 축복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바랔’이 세 번 연속하여 나옵니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적들은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멜키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를 올리시며 우리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둘째, 성체성사는 ‘기억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일회적 성사가 아닙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성체성사의 은총을 기억하고 현재화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하나된 성체성사적 삶을 살게 합니다. 기억이 과거를 현재화하고 희망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날도 계속되는 성찬례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찬례는 언제나 교회 생활의 중심입니다. 순례여정중인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성찬례의 거행으로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전하면서,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앉게 될 천상 잔치를 향하여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셋째,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미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주님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필요한 이들의 병을 고쳐주시니 바로 미사의 전반부 말씀 전례를 상징합니다.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에 해당됩니다. 하늘 아버지와 늘 일치의 삶을 사셨던 주님은 제자들이 지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시니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 황량했던 광야는 낙원의 천국으로 변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축복하신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눠주시니,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혜가 차고 넘칩니다. 공동체는 일치와 더불어 주님을 닮은 섬김과 나눔의 사랑의 공동체로 변모됩니다. 다 달라도 공동체의 중심은 성체성사의 주님을 바라보고 모시니 공동체의 견고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성체성사는 삶의 중심입니다. 여기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는 수도형제들은 성당에서 성사(聖事)에 참여하여 축복을 받고, 식당에서 식사(食事)를 통해 육신의 힘을 얻고, 일터인 농장에서 농사(農事)로 먹을 것을 자급합니다. 이런 성사, 식사, 농사의 삼사(三事)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성체성사입니다.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자 선취(先取)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하늘과 새땅’의 천국을 앞당겨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다음 묵시록의 고백은 저절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Veni, Domine Iesu; 묵시22,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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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9,17ㄱ)

<미사의 큰 은총!>

오늘 복음(루카9,11ㄴ-17)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랑을 특별히 기억하고 묵상하는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속죄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인 미사를 제정하셨습니다.
"받아먹어라.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교회 안에서 매일 미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미사(Missa)'는 '성사 중의 성사'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은총의 가장 큰 은총'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이자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사제들이 신자들로부터 존경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은총받기 위해서 성당엘 다니고 자주 미사에 참례합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 미사 준비를 잘하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 가까이로 나아가 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정신을 다해 미사에 임합니다. 그렇게 하여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에서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이 '미사의 큰 은총'입니다.

1년 6개월 21일 만인 어제 오후 4시24분에 신.구약성경 두 번째 필사를 마쳤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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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17)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성체 성혈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성체 성혈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눔에서
피어나는
충만함의
기적입니다.

나눌 때
채워지고
머무를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먹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 성혈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자기 전부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봉헌입니다.

감사와 나눔
일치와 희생이
우리를 바꿉니다.

변화의 시작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변화는
옛 자아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거룩한
변화는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세상의 양식은
썩지만
성체 성혈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이렇듯
성체 성혈은
삶의 방향이며
가장 친밀한
일치입니다.

함께 나누는
성체 성혈이며
함께 살아가는
성체 성혈의
실천입니다.

성체 성혈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성체 성혈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진정한 사랑이란
성체 성혈같이
남김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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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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