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15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연중 제3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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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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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fRE7Migpo4
[서울대교구 조성동 안드레아(병원사목위원회 사회사목국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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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천벽력같은 일들 앞에서도 항상 침묵과 기도와 자아성찰에 충실하셨던 성모님!>
제가 사는 곳은 워낙 외진 곳이라 밤이 되면 인적이 뚝 끊깁니다. 그러다 보니 야생동물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밤길을 운전할 때면 늘 전후좌우를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야행성 들짐승들이 차량의 불빛을 보고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습니다. 평소 밤길 운전하면서 주로 만나는 친구들은 고라니나 오소리, 너구리나 들고양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친구는 체구가 어마어마한 맷돼지였습니다.
갑작스레 제가 운전하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는데, 적어도 200kg은 족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더라면 상호 간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순간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제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 눈앞을 스쳐지나간 초대형 맷돼지의 얼굴 표정이며, 유선형의 몸 형태며, 털색깔이며...저는 그 순간 이게 꿈이냐 생시냐, 했습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청천벽력같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을 자헌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의 한평생은 청천벽력같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겪지 못했을 일을 성모님은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전해진 수태고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메시지였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호적 등록을 하러 갔을 때,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해산할 방 한칸 구하지 못해,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출산했습니다.
깜짝 놀랄 일들은 계속됩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일, 아무리 곱씹고 음미해도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 하나하나가 성모님께는 큰 고통이요, 상처요, 슬픔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모님은 예수님으로부터 기가 막힌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었으면 부모 입장에서 벼락같이 화를 낼만한 말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뜻밖의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기도하고 인내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한 평생은 신비스럽고 심오한 존재, 예수님, 그리고 그분이 던지시는 영적 말씀을 이해하고 헤아리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신 나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리아의 부모였던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승을 통해서 두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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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8pHMUS5K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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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성모 마리아 자헌 기념일]
마태오 12,46-50
<당신의 제단이 당신의 인간관계를 만든다>
덴마크의 황량한 바닷가 마을, 회색빛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엄격한 율법에 매여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던 이 척박한 마을에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14년 동안 무보수로 헌신하다가,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그녀가 돈을 가지고 떠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 모든 돈을 쏟아부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프랑스 정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녀가 준비한 최고의 음식과 와인 앞에서, 얼음장 같던 노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미움은 사라지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재산을 다 써버린 그녀에게 "이제 가난해져서 어떡하냐"고 묻자, 바베트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바베트에게는 돈보다 더 중요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술'이라는 제단입니다. ㅔ그녀는 자신의 돈과 에너지를 그 제단에 봉헌했기에, 사람들에게 환희와 화해를 선물할 수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베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안방에, 당신의 심장 한가운데에 어떤 제단을 쌓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라는 제단을 쌓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칩니다.
어떤 이는 '성공'이나 '자식', 혹은 '쾌락'이라는 제단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외모로 사람을 홀리고, 권력으로 사람을 묶어둡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마르지 않는 샘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돈, 명예, 육체적 매력, 이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가 사과와 가지를 줄 수 있을 때 소년은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다 털리고 그루터기만 남았을 때, 소년은 떠나갔습니다. 여러분의 제단 위에 있는 것이 말라버리면, 그것을 보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돈이 떨어지면 돈을 보고 모인 이들이 떠나고, 젊음이 사라지면 육체를 탐했던 이들이 떠납니다. 그런 인간관계에는 '친밀함'이 없습니다.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행복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껍데기뿐인 관계, 그것이 하느님 없는 제단을 쌓은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는 사람들, 참다운 사랑을 주고받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나 헛된 우상에게 제단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께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제단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제단 위로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사람들에게 돈이나 쾌락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이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르며 그분 곁에 모여듭니다.
성모님의 제단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고, 친밀한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냉정하게 나의 제단을 점검해 봅시다. 나는 오늘 하루, 나의 뜻과 에너지를 어디에 봉헌했습니까? 구약 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를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식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마지막 한 줌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을 위한 제단에 바쳤습니다. 자신의 생존 본능보다 하느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며 자신을 봉헌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땅에 비를 다시 내려 주실 때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여러분 안의 제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를 위해 쌓은 제단은 고독을 낳지만,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 제단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성모님처럼, 여러분의 의지와 욕망,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의 제단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내가 내어놓은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마르지 않는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가족과 이웃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여러분의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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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절두산 성지 미사’엘 다녀왔습니다. 그날 미사는 양재동 본당 신부님과 저 그리고 미사 주례를 한 크리스 신부님이 공동 집전했습니다. 양재동 신부님은 본당 예비자들과 함께 왔고, 미사 후에는 새남터 성당까지 도보로 간다고 했습니다. 미사 주례를 하였던 크리스 신부님은 수도회 신부님이었고, 작년부터 절두산 성지 미사를 하는 외국인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날 조금 이상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외국인 신부님이 한국인 사제를 한국인 순례자에게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크리스 신부님은 유창한 한국어로 그날 축일인 루카 복음사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사가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날 미사에는 양재동 교우, 수원교구, 인천교구, 대전교구에서 순례자가 함께했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미사 중에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양재동 신부님은 예비자 교리를 직접 한다고 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수녀님이나 부주임 신부님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직접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미 세례받은 교우들을 재교육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타성이 젖었고, 그래서 바뀌는 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비자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스펀지처럼 교리를 잘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날도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 참례하고, 새남터 성지까지 도보로 간다고 했습니다. 예비자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함께한다고 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4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제의 솔선수범입니다. 사제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사제가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제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확고한 신념과 믿음으로 방향과 목표를 정하면 교우들도 한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셋째는 소그룹 활동과 봉사자의 활성화입니다. 넷째는 본당을 넘어 이웃에 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본당의 재정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는 본당입니다. 양재동 신부님을 통해서 부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영적 어머니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이제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통해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발현의 현상이지, 발현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신앙인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서는 회개와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루르드에서는 치유와 신앙의 부르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회개, 묵주기도, 단식, 미사 참례, 선행”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앙의 경고와 위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이 변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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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요아킴과 안나가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아들이나 딸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집 아들딸들이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간다고 하면 축복받았다고 말하다가도 정작 자신의 자녀가 그 길을 가겠다고 하면 대다수가 펄쩍 뜁니다. 제 경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밤새워 가족회의를 하였습니다. 제 편을 들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도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자며 저를 붙잡았습니다.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흘리며 버티는 저의 모습을 보시고 사람이 하는 일 같지 않음을, 범상치 않음을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지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반문하시고는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2,49-5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처음에 지니셨던 봉헌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겠지요. 성모님께서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헤아리시며, 아들 예수님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봉헌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기도 때 바치는 봉헌 기도처럼 두고두고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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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교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낸다. 이날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이었다는 것을 묵상하는 거룩한 날이다.
1. 성모 마리아의 봉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는 세 살 된 어린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 어린 마리아가 성전의 계단을 오를 때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는 이야기는, 마리아의 삶이 하느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임을 상징한다. 사실 성모님의 봉헌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이 아니라,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부터 성령의 은총 안에서 준비된 삶의 방향이었다.
2. 복음 말씀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 12,46-50)에서 예수님은 친족 관계를 넘어서는 더 깊은 가족 관계를 선포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이는 피와 혈육이 아닌, 말씀을 실천하는 순종이야말로 참된 친교의 기준임을 보여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였기 때문이다.”(Sermo 25,7) 즉, 마리아의 참된 위대함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실천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3. 신학적 의미: 마리아와 교회
예수님께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족이 된다는 보편적 초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종으로 새로운 하와가 되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협력하였다.”(교회 56항) 따라서 성모님의 봉헌은 교회의 모상이며, 우리 신자 각자에게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말씀을 실천하는 삶의 본보기가 된다.
4.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우리도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다.”(Sermo 72A,7) 즉,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주님을 낳게 할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마리아께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셔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5. 맺음말
오늘 마리아 자헌 기념일은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께 봉헌된 참된 길임을 가르쳐 준다. 성모님을 닮아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말씀을 통해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주님,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가족으로 당신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게 하시며, 특히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 성모님과 같이 사랑이신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는 삶으로 구원을 전하게 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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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형제자매입니다>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하느님께서 믿으시듯
하느님을 믿고
벗들을 믿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희망하시듯
하느님을 희망하고
벗들을 희망하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듯
하느님을 사랑하고
벗들을 사랑하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품으시듯
하느님을 품고
벗들을 품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섬기시듯
하느님을 섬기고
벗들을 섬기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살리시듯
하느님을 살리고
벗들을 살리는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하느님께 그러하고
벗들에게 그러한
우리는
서로와
하느님의
형제자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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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봉헌’은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신 분’입니다(1코린 15,28).> 따라서 봉헌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⁴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그래서 더 이상 ‘나’는 없고, 나의 모든 것 안에서 주님만 존재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을 ‘봉헌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나의 것’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 주신 ‘주님의 것’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맡은 것 가운데 일부를 조금씩 주님께 돌려드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전부 다 돌려드리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경우는 순교로써 봉헌을 완성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임종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즉 인생 전부와 목숨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하면서 봉헌을 완성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 전 재산을 봉헌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은 봉헌의 여러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2) 성모님은 ‘봉헌’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은, 성모님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하느님 쪽에서 확인해 주신 말씀이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성모님의 응답은, 성모님 쪽에서 당신의 봉헌을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라는 말은, 모든 신앙인이 본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공경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온 삶으로’ 성모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식구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인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나의 참 가족이 된다.”로 이해됩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말은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말만(생각만) 해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
삶’을 다 바쳐서 노력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삶을 다 바친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봉헌을 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곧 봉헌하는 생활입니다. 봉헌은 신앙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4) 봉헌의 ‘나쁜 예’를 사울 왕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이 말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고,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기만 하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사울 왕을 사무엘 예언자가 꾸짖은 말입니다. <참된 봉헌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대표적으로 ‘봉헌의 나쁜 예’가 됩니다(사도 5,1-11). 그 부부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명예욕을 동시에 채우려고,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부를 바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봉헌을 한 것이 아니라 죄만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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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 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곳에 사랑이신 그분이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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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있지만, 이 관계는 단순히 혈연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본보기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인간적인 혈연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요청하는 듯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와 관련된 일 앞에서 하느님의 뜻이 뒤로 밀려나는 경험을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복음적 삶에 따르는 역경과 환난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지만, 자신의 자녀만큼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 줄 알면서도 가정의 안정과 안락을 위해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옳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죄의 동기가 되고 죄의 변명 거리로 전락해 버릴 때, 이는 사랑이 아니라 혈연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자녀에게 물질적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세속적 처세가 아니라, 영적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곧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곧은 마음, 다른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고통받는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있는 지혜, 배려와 희생을 아는 성숙함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자라납니다. 신앙의 전달 안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는 거룩해지고, 진정한 의미의 성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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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주환 안셀모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6-50절)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법>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특징 중에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있었습니다. 대가족 공동체는 사회적 공존의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신명기에 나오는 두 가지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마르코 7, 8-13 참조)
헬레니즘 문화의 전파, 로마 제국의 탄압, 그리고 납부해야 하는 세금이 계속 늘어나는 문제는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먼저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상은 더 많은 사람이 소외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더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선포하십니다. 혈연관계를 넘어 신앙적 유대감으로 이어진 하느님 안에서의 가족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렇듯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자매,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예수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개인을 중시합니다. 다른 누군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더 늘어갑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우리의 참 가족인지를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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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삶을 당신께 바치겠다고 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연 많은 눈물, 벗들의 따뜻한 눈빛, 순수했던 나의 가슴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강과 많은 산을 만났습니다. 일어섬과 넘어짐의 시간들. 그 안에는 늘 당신께서 계셨지요.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는 것이 내 삶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많이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곁에 있어주셨지요. 내 안의 너무 많은 것들 때문에 그저 당신을 뿌리치고 싶었던 날들. 그러함에도, 봉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간들. 어제의 일만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싸워야 할 나와의 다툼입니다.
나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당신. 다시 일어서렵니다. 당신 종이 여기 있습니다.]
한 선배 신부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쓰신 반성과 참회, 다짐의 글입니다. 이 글에서 신부님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으로써 사제 서품식 때 가졌던 첫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지, 매순간 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서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계시지요. 문득 나 자신은 ‘봉헌’된 사람으로써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내어놓기 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성모님은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온전히 봉헌하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봉헌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 졌습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봉헌된 것입니다.
이는 계산된 기부나 봉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놓는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또한 성모님의 자헌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그러셨듯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위한 도구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 생애 동안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나 관계에 매여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내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발적인 봉헌은 참된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마니피캇’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노래하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의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혈연관계로 묶인 가족마저 내치시는 차가운 분이라고, 그래서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과의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왜 당신의 ‘참 가족’인지 그 이유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혈연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당신의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자세로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을 충실히 실행하시는 분이기에 하느님의 참 가족이라는 것이지요.
그 원칙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입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분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이라면 매 선택의 순간마다 기꺼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만, 그분의 자녀로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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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1.21.금.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49)
자헌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관계는
언제나
봉헌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 전체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내어줌이
성장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깨닫게 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봉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행하십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하느님과
나누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를
우리가 이루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는 것으로
전환했습니다.
봉헌이
새 시대를
엽니다.
봉헌은 비움이고
비움은
내어드림이고
내어드림은
생명의 길입니다.
내어드리는
자헌의 길은
새롭게 태어나는
길입니다.
자헌으로
사랑과 겸손을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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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배를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2) 기도하게 합니다.
3)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합니다.
정답은 3번입니다. 이는 생텍쥐페리의 말입니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도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배 만드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일로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배를 만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전례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금세 자기가 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 대한 그리움 없이 친목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대부분 냉담으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되고, 미사를 비롯한 전례에 집중할 것이며, 성경 공부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리움에 집중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철저하게 주님 중심이었고, 이는 태어나신 뒤부터 계속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늙은 나이에 얻은 귀한 딸을 3세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하느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성모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쁘게 성전 계단을 올랐으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셨다고 하지요.
이 봉헌은 ‘자헌’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의에 의한 봉헌이 아니라 성모님 스스로가 당신 의지로 하느님께 온 존재를 바쳤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 주셨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에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모범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하는 삶,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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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참 가족>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예수님이 성모님과 요셉의 아들로서 혈육의 가족에 묶여있지 않는 ‘새로운 가족’을 지니게 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부모의 슬하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가족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실 이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곧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과 다윗 사이의 계약’의 신탁이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이렇게 내렸습니다. “주님이 너에게 집안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한다. ...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너의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1-16) 이는 '집'(히; 바이트), '집안', '가문'(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집안'은 공간을 지칭하는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그룹을 지칭하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는 하느님께서는 다윗 후손의 '아버지'가 되시고 다윗의 후손이 '하느님의 아들'이 됨을 선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로서의 '가정', '집안', '가문'이 새롭게 구성되고 정립됨을 선언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과의 부자 관계가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서 전체의 핵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분의 집안'(가족), '그분의 나라', '그분의 왕좌'가 영원히 튼튼할 것이 선언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이 가정 이야기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부부 가정에서, 방주에서 식솔들과 함께 오는 노아의 가정에서, 12형제들의 지파로 이루어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혈연을 넘어 민족을 형성한 모세의 가정을 거쳐, 마침내 초민족적 보편적 가정을 예수님의 가정이 이루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로서 진정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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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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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른 봉헌과 재 봉헌>
성모 자헌 축일-2020
오늘 축일의 우리말 이름이 '자헌'이기에 성모님이 봉헌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것처럼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승적인 차원에서 보면 세 살 때 부모가 봉헌하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축일의 의미를 성모님이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모가 봉헌했지만, 마리아가 그 봉헌을 뒤집지는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의 경우 부모가 대신 결정하는 일이 많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미성숙한 자식은 내 결정이 아니라며 그 결정을 뒤집거나 불성실하게 따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미성년일 때 부모가 결정한 것을 어른이 되어도 뒤집지 않고 성숙하게 다시 받아들여 자기의 결정이 되게 하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성숙해도 이러한데 영적으로 성숙한 성모님은 더욱더 부모의 봉헌을 따라 자신을 재봉헌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른 봉헌이고 다른 하나는 재봉헌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성숙할수록 일찍 자신을 봉헌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언니들이 수녀원에 들어간 영향도 있었겠지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신을 봉헌하고픈 열망이 있었지요.
가끔 저에게 성소 문의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안타깝게도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이들 중에는 결정 장애가 있어서 그런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늦게야 자신을 봉헌할 마음이 생긴 분들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늦게야 봉헌의 의미를 찾은 분들입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어땠던 겁니까?
자신의 봉헌이 아니라 자신의 실현에 의미를 뒀겠지요. 프란치스코가 젊은 시절 기사가 되고자 했던 것처럼.
실상 하느님을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는 누구나 자기의 실현이 삶의 의미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봉헌이란 영적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봉헌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재봉헌이란 봉헌이 한 번으로 그칠 수 없고,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 번의 봉헌으로 봉헌이 완성될 수 없기에 재봉헌을 통해 완성을 이루어가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렸을 때의 마음 또는 초심을 잃고 마치 토했던 것을 다시 먹듯 과거로 돌아가곤 하기에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음의 갱신을 하곤 하지요.
이처럼 갱신이 초심 또는 과거로 돌아가는 면이 있다면 완성은 초심을 잃는 것을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봉헌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감의 뜻이 큽니다.
사랑으로 치면 풋사랑인 첫사랑 또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이 성숙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초심이나 첫사랑 같은 것에 향수와 같은 것이 있고 그래서 그리로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도 있는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초심이 아니라 완성이지요.
초심에 순수한 면은 있지만, 초심이 완전한 것은 아니니 공연히 초심과 첫사랑에 대한 패배주의적 향수 때문에 완성을 위한 열망을 꺾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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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 12,47)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예수님의 첫 제자요 참제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예고를 순명으로 받아들이신 후,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셨고,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을 공경하면서 닮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서로를 부를 때 세례명을 붙여서 이렇게 부릅니다. "마태오 형제(님)!" 또는 "사비나 자매(님)!"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시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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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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