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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507 2월21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2.22|조회수55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507
2월21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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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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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fcKF4Z0mEY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주세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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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돌아보니 참 다양한 곳에 초대를 받아 강의를 했습니다. 교도소, 군부대, 대학교, 본당이나 교구 여러 단체, 수도회, 수녀회...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이 있습니다. 한 기업체 신입사원 연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신입사원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깎아놓은 밤톨처럼 반듯하고 늠름하던지? 어찌 그리고 예의 바르고 성숙한지! 꿈에도 그리던 성소자들이 거기 우르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고스란히 단체로 성소의 길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생사고락은 물론이고 미래와 운명을 함께 할 인재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꿀 것입니다. 지적이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고, 균형이 잡히고, 능력도 탁월하고...

그런데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한점 흠 없고 무죄한 청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신앙심 깊은 젊은이를 제자로 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을 보십시오. 그분의 파격적인 선택, 말도 안되는 선택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사람, 인간 세상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금징수권을 목돈을 받고 매도했습니다. 세금징수권을 매입한 개인이나 회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목돈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러한 세금 청부제의 악용은 가난한 백성들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추측케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찾아온 세리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마도 세리들은 적정선의 세금이 아니라 두배, 세배로 세금을 후려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리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도둑!” 키케로는 세리를 향해 “인간 군상들 가운에 가장 천한 족속!” 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세금이 결국 침략자인 로마 제국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세리들을 향해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 칭했습니다.

세리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세리는 언제나 이방인들과 접촉하였기에, 상시적으로 율법을 어겼으므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의로움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그날 밤 레위의 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오랜 친구 레위가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동료 세리들, 죄인들, 나름 한 주먹 한다는 사람들,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다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인들 사이에 태연히 앉으셔서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잔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자칭 의인들인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쫌생이, 찌질이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고,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언제나 파격적이고 관대한 예수님의 선택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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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1MOeEkXI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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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받음보다 비난 받음이 이득인 이유>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첫 토요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며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왜 건강검진을 잘 안 받을까요? 
겉으로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주 고약한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병원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제일 잘 알지, 의사가 뭘 알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착각합니다. 무엇보다 싫은 건, 병원 가서 제 치부를 드러내고 의사에게 "술 끊으세요, 살 빼세요" 하는 잔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의사의 지시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그 오만한 마음, 즉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은 그 교만이 저를 병원 문턱에서 돌려세웁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지, 꾸중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혹은 성당에 나오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번듯해진 다음에 주님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레위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가 봐도 죄인이었고,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숨길 가면조차 없는 절박한 상태에서 자신을 치유해 줄 단 한 분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바로 레위가 가졌던 '솔직한 겸손함'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죄인이었기에, 거룩한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거룩함을 증명하느라 주님의 자비가 들어갈 틈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다 보면, 결국 나 자신조차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당에 나와서도 내 상처를 내놓는 게 아니라, 내 거룩함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병원에 와서 내시경을 받는 대신 복근을 자랑하는 환자가 되는 꼴입니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먼저 나를 죄인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 자신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곤 합니다. 가면이 완전히 찢겨나가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정직해지는 것이지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거룩했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9세기 프랑스의 왕이었던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의 이야기입니다. 833년, 그는 정적들과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수아송(Soissons)의 성 메다르도 수도원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주교들은 그에게 만천하에 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루이는 수많은 군중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려한 왕의 예복을 벗어 던져야 했습니다.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위선을 하나하나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아송의 치욕'이라 부르지만, 영성적으로는 '수아송의 부활'이라 부릅니다. 루이는 온 나라가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하자, 더 이상 '위대한 왕'이라는 가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그의 가면을 벗겨버리자, 그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정직한 단 한 명의 죄인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솔직함이 그를 지옥 같은 절망에서 끌어올려 하느님의 자비를 붙들게 만든 것입니다.  레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죄인이라 불렀기에, 그는 오히려 자유롭게 예수님의 청진기 앞에 심장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이 파격적인 통찰은 교회가 이미 깨끗해진 사람들의 전시장(Casta)이 아니라, 창녀와 같은 죄인(Meretrix)들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순결해지는 중'인 병원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당은 이미 치유된 사람이 자신을 뽐내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을 존중하는 길은 내가 아플 때, 혹은 아프지 않더라도 내 영혼의 숨은 병명을 찾아내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눕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등장하는 '위스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생아를 둔 술꾼이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해를 들어주다 잡힙니다. 처형 전날 그는 감옥 바닥에서 절망합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께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갑니다." 그는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독한 죄의 통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천하에 죄를 드러내는 겸손함이야말로 주님의 자비를 가장 선명하게 듣는 청진기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닙니다. 고해성사하듯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칭찬해주는 '마약'에 취해 삽니다. 그 달콤한 칭찬은 우리 영혼의 암세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이 마약에서 깨어나려면, 나를 비난하고 나의 허물을 지적하는 타인을 '나의 죄를 알려주는 고마운 스승'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스페인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역시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Pati et contemni pro te."(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받고 멸시받게 하소서.) 왜 성인은 이런 당혹스러운 청을 드렸을까요? 타인의 멸시가 내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을 부수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수술 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우리를 부풀게 하지만, 멸시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사막 교부들의 일화집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아바 모세(Abba Moses the Black)의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날 수사들이 그를 시험하려 "저 검둥이 죄인 출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모욕했습니다. 회의 후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 덕분에, 나는 내 영혼이 그보다 훨씬 더 시커멓다는 진실을 떠올렸소. 그들은 내 영혼의 때를 벗겨주는 고마운 비누들이오."

마지막으로 성 요한 클리마코(St. Joannes Climacus)의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그대들의 잘못을 꾸짖고 허물을 드러내는 자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십시오. 그들의 혀는 그대들의 영혼에 묻은 교만의 비계를 도려내는 의사의 수술 칼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다이어트 끝내고 검진받겠다는 영적 교만을 버립시다. 타인의 칭찬이라는 마약을 끊고, 나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드러냅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제 안의 병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시고 고쳐주십시오!"

이 정직한 절규가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는 전능한 의사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비참한 환자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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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고타 여행 중에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준비해 준 가족이 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안나 자매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센터와 신부님을 도와주시기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와 같다고 해서 미리 세례명을 정해 드렸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기꺼이 저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우스팅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갔을 때 세례명을 미리 정해 드렸는데 지난 성탄 무렵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교민들의 민원을 잘 해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요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식당을 축성 받았습니다. 신자인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성당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이번도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센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과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콜롬비아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같은 성씨였습니다. 족보를 따지니 저에게는 조카와 같았습니다. 이름이 저의 조카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으니, 저와 같은 돌림 자였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조카와 같은 신부님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위해서 좋은 술을 가져왔고, 저도 신부님을 위해서 용돈을 드렸습니다. 교황 대사관에서 사목하는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몬시뇰은 르완다에도 있었고, 벨기에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콜롬비아로 왔다고 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아는 신부님과 로마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신부님과 몬시뇰과 대화하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외국에 살아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외국에 살면서 ‘주눅’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신부님은 ‘K Culture’의 세대였습니다. 몬시뇰도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콜롬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과 공동체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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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이가 ‘회개’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잘못을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이 전하는 회개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은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회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친다’와 ‘돌린다’는 분명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고친다.’는 뜻의 회개는 잘못을 없애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은 다릅니다. 오히려 잘못을 계기로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회심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죄는 어떻게 되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아도 그저 하느님만 찾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개념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것도 죄이지만, 더 근본적인 죄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이어 갈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고자 하면서도 되풀이하게 되는 잘못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약함일 뿐이며,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힘과 자비를 청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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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27-3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다. 레위는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존재였다. 그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동족을 착취하던 자였다. 그러나 주님의 한 말씀, “나를 따라라.”(27절)는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초대는 단순히 직업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 전체를 주님께 바치라는 부르심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한 말씀은 바다를 가르는 벼락과 같았다. 레위의 마음은 더 이상 세상 재물에 붙잡혀 있지 않고, 주님의 시선에 사로잡혔다.” (In Matthaeum homiliae 30,2) 곧,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내적 속박을 풀고, 새로운 자유로 초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레위는 곧장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는 단순한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은총의 잔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곧 교회의 모상이다. 거기에는 과거 죄인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임재로 그들은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Sermo 99,3) 즉, 주님과 함께하는 식탁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치유와 화해,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총의 자리이다. 교회의 성체성사 또한 바로 이 은총의 연속이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말한 것처럼 “불멸의 약”(Epistula ad Ephesios, 20,2)으로서, 우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 모습을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한다. “병자가 의사에게 나아오듯, 죄인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병자임을 모른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12) 곧, 주님은 죄인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참된 치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교만한 자는 자신의 덕에 만족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닫아버린다.

우리는 다른 이를 쉽게 정죄하거나 배척하기보다, 주님처럼 품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도 레위가 경험한 은총과 기쁨의 잔치가 열리게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그분의 부르심은 과거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은총이다. 우리도 레위처럼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회개와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 또한 성체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잔치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치유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며,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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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당신 곁에>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나 당신 곁에>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내 곁에
당신 없어도


오롯이
나일 수 있으나

당신 곁에
나 없으면

당신
오롯이
당신일 수 없기에


당신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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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ㄴ-32)

1) 하느님은, 죄인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마태오복음 18장과 루카복음 15장에 있는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쓰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ㄹ-1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2-2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만 만나셔야 한다. 저 사람들은 만나시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일’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잃은 양’ 하나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만,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양은,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배반자 유다도 ‘잃은 양’이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양’이 되었고, 결국 멸망을 향해서 갔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 뉘우침이 회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마태 27,3-5) 유다의 뉘우침은 그냥 ‘후회’입니다. 아마도 지옥은,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죄인들과 자기 죄를 뉘우치긴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다.”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과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4)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특별히 더 점검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자기의 내면에 숨어 있는 ‘위선’입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항상 주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거나...... 말로는 “나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회개하는 척 하는 것과 진짜 회개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나는 진짜로 ‘밀’인가?” “아니면 밀처럼 보이는 ‘가라지’인가?” 위선과 교만과 자만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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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인 체하는 죄인>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한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가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간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한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하면 온전히 따를 수 없다. 
주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이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다.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아닐까?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했다. 스스로 건강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남을 우습게 여겼다. 사실은 그것이 죄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하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함께 잡수셨다. 주님은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신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된다. 사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성 베르나르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희가 어떠한 위험도 겪지 않고,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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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세리 레위가 베푼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벌인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반감을 드러내었습니다.(루카 5,20-21 참조)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하신 논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단식과 관련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5,33-39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불만을 담아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께서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5,32 참조)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앞서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르겠다는 레위의 의지와 결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하느님께 향함, 곧 회개로 부르심을 받은 세리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일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치료를 받으려는 의지와 결심 또한 필요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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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며, 영적으로 일치함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원임을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여 분리해야만 하였던 바리사이들에게 이 선언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의인들의 공동체가 병든 이들을 잘라 내어 배제시킨 건강한 이들만의 공동체였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병든 이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로서 병자들 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들을 돌보고 섬기시는 분이시며, 병자들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치유되는 이들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죄인이라 느끼고, 주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이나 의인이 아닌 병든 이들과 죄인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와 죄인, 레위를 부르신 것처럼, 풍파에 얼룩지고 빛바랜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죄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치유되도록 봉사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이웃을 배제하거나 분리하지 말고, 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우리를 고쳐 주시기만 하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도 하시려고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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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1-32)

온전하게 창조된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온전함은 사는 동안 상처를 입고 흉하게 되었습니다. 축복받은 최초 인간성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 최초 인간성 안에 불어넣어 주신 아름다움과 복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상처 입은 우리를 온전하게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성과 참 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폭행당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아, 우리의 양심에 심어졌다가 잃어버린 그 ‘선함’을 재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상처 입은 우리의 온전함을 치유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인간성과 참 자아를 찾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폭행당한 하늘나라의 신비를 일깨워주시고, 우리의 양심에 ‘선함’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졌던 최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인간성이 얼마나 좋은 모습이었는가를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비인간적으로 될 때마다 아름답고 풍부한 인간성을 지닌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 재창조해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희생양을 찾아다니지만, 주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의 인간성과 참자아와 양심을 치유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을 희생양으로 삼으셨습니다. 희생양이 되셨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성이 되시고, 참자아가 되시고, 양심이 되셨으며, 새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신 주님, 저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상처 입은 우리의 인간성과 잃어버린 참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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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받아들여야 삶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 속에 삽니다. 자기 생각과 행동이 확실하면 곧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이 착각 속에서 스트레스를 겪으며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뇌는 고통보다 불확실한 가능성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100% 확률로 전기 충격을 받는 것보다 50%의 불확실한 확률 앞에 놓였을 때 더 큰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불확실성과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감을 줄여나가고 대신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높이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도 불확실한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평화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리 레위가 등장합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동족을 수탈하는 매국노이자, 부정한 돈을 만지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조차 박탈당했고, 회당 출입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여기서 ‘보시고’의 그리스어 동사는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그를 경멸의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눈으로 그 안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라.”(루카 5,2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또 어떤 대가를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분명 불확실한 말씀인데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숨기지 않고 큰 잔치를 베풉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깊은 유대감과 형제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율법학자들은 죄인과의 식사를 부정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보다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중병(교만, 탐욕, 미움)에 걸려 있는지 의사이신 주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건강검진 성적표가 좋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환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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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렇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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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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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 5,27ㄴ-32)은 '죄인인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큰 잔치를 베풀고,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 잔치에 함께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죄인들도 구원의 잔치에로 들어가게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분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고, 삶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됩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우리도 합시다! 그래서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고 살도록 합시다!

오늘 독서(이사 58,9ㄷ-14)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이사 58,9-11ㄱ)

주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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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예수님의 부르심은 
자격이 아니라 
은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과거로만
규정되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통해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는
부르심입니다.

비난은 
관계를 끊지만
자비는 관계를 
회복합니다.

레위의 일어남은
타인을 바꾸기 전
자신을 바로 세우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레위는 “세리”라는 
규정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 존재를 다시 씁니다.

우리 자아는 혼자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우리 존재는 
과거의 규정 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오늘의 선택 속에서 
새로워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과거를 묻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게 하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으로
은총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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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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