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11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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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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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mjsnI6enN8
[작은형제회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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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도 사랑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언젠가 공동체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데, 살짝 늦게 일어난 한 청소년이 성전 문 앞에서 쭈볏쭈볏,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저는 활짝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크게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청소년은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야행성인지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늦게라도 미사에 나와준 것이 감사해서 강론 시간에 크게 칭찬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자주 묵상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신 분,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미사 좀 늦었다고 대노하고 격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전 6시, 9시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도 잘 왔다고 칭찬하시며, 넉넉한 하루 품삯을 건네시지만, 게을러터져서 정오, 오후 3시, 5시에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도 어여삐 보시며 똑같은 품삯을 건네시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오늘 에수님께서는 하느님,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사실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님은 혈육을 취하신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하느님을 너무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내 가정, 내 공동체, 나 자신의 사라사욕만을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자판기같은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전 세계, 모든 만민, 모든 생명체를 두루 보살피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신데, 내 고장, 내 혈육, 내 가문, 내 나라만 애지중지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복을 베푸시는 편애하시는 하느님으로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나만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는 크신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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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P-tR_UG4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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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왜 하.사.시.가 기쁜 소식이었을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7)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9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신비로운 대목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율법 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스스로 성령의 바탕에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참조).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성서 해석이 끝나자, 성경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기뻤을까요? 예수님이 성경 퀴즈 대회에서 율법 학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었기 때문에 그저 통쾌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군중이 환호하며 기뻐했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들의 '자존감'을 단숨에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던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다"라는 교리는 철저히 혈통과 행위, 그리고 세상적 권력을 중심에 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잣대 안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군중은 영원히 구원의 변두리에 머무는 쓸모없는 존재들에 불과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나 되는 복잡한 규정을 들이밀며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끊임없이 '행위'만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행위의 굴레에 얽매인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무거운 감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는 단순한 다윗의 핏줄이 아니라, 다윗조차 우러러보는 창조주 하느님 본인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치하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끌어올리러 오셨다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먼저 "너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먼저 "너는 하느님께서 친히 목숨을 걸고 찾아오실 만큼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은 딱 자신이 가진 자존감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먼저 주지 않고 행위부터 요구하면, 복음은 짐이 되고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얽매임이 됩니다.
오늘 군중이 느꼈던 이 '복음의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강렬한 체험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활자 매체, 즉 책을 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튜브 쇼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저는 빠르고 자극적인 쾌감을 즐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무려 10권짜리나 되는 방대한 책을 장장 5년에 걸쳐 끝까지, 그것도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읽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비가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원제: 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던 제가 왜 이 방대한 책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 책 속에서 저는, 제가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무섭고 명령만 하시는 심판관' 예수님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님은 너무나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보잘것없는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심장을 다 쏟아내시는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제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분이 그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제게는 숨이 멎을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그 따뜻한 예수님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제자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저분과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 저분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싶다." 이 간절한 갈망과 기쁨이, 세속의 쾌락을 좇던 저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결국 사제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뻐야 합니다. 나를 심판하는 규칙서가 아니라,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분의 정체성을 깨달아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고 싶게 만드는 거룩한 자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미사에 빠지면 대죄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 "봉사를 해야 축복받는다"라는 행동 강령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전하여 신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보다는, 율법의 채찍으로 영혼을 닦달하며 "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지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성모님의 진짜 정체성을 온전히 마주할 때,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외감과 마주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사제 성소에 대해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송탄성당에 홀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님 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성모님 상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처럼 변하더니, 온몸에서 푸르고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압도적이고 거룩한 빛 앞에서,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밀려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성모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성모님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분들의 진짜 위대하고 거룩한 정체성을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구나.'
최근에 제가 진행했던 '요한복음 8주 강좌'를 들으신 어느 형제자매님의 후기 글은, 이 '머무름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키는지 완벽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오랜 냉담과 방황의 고독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던 나를 따뜻한 말씀의 빛으로 이끌어 주신 신학적 통찰과 다정한 강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강좌가 내게 준 것은 새로운 지식도, 신앙의 무지를 단숨에 깨부순 것도 아니라, '그 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분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조금씩 살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8주의 여정 동안 말씀의 표징들을 따르는 사이,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걷고 있었다. 거창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강의를 열고 말씀을 듣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 걸음이 어느새 내가 광야를 벗어나 그분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아주 정확하게 복음의 핵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결심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분처럼 그저 주님의 곁에 "다시 붙어 있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 선포는, 주님이 나무이심을 알게 하고 우리가 가지임을 깨달아 그분께 기쁘게 붙어있게 만드는 생명의 초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가장 벅찬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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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에 본당 교우들과 함께한 성지순례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특별히 본당 성경반 교우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수녀님, 부제님, 평신도가 함께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이 있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국 교회에도 ‘청년 성서 모임’, ‘성서 40주간’, ‘성서 100주간’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신앙인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우리는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도 성경을 묵상하며 살아온 분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서 깊은 믿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례를 하면서 또 하나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공항을 이용할 때 프리체크(PreCheck), 라운지, 글로벌 엔트리(Global Entry)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긴 줄을 서지 않고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프리체크, 기다림 속에서도 편안히 쉴 수 있는 라운지, 입국 절차를 간편하게 해 주는 글로벌 엔트리. 같은 공항, 같은 비행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정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과 참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영적 프리체크’와 같습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또한 ‘영적 라운지’와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머물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적 글로벌 엔트리’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윗이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단순한 문자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성인 역시 이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이라는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여정은 달라집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삶의 길이 분명해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본당의 성경반과 교회 안의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의 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지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길을 찾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쉼을 얻고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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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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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35-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정체를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율법 학자들은 다윗이 시편 110에서 장차 나타날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른 것을 근거로,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가진 시대적 의미다.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 기대했다.
그들은 점령당한 나라에서 해방자를 바라며,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메시아상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 기대를 넘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과 사랑을 드러내며, 천상의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임을 알려주신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 예수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으로서 다윗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는 주님이시다.”라고 설명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복음을 해설하면서, “육체적 계보와 신적 권위가 결합하여 예수님께서 참된 메시아이자 참된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 역사 안에 인간으로 오셨으며, 다윗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혈통의 계보만을 보고 메시아를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관념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참 의미와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내 생활의 편안함이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내 신앙의 중심은 현세적 안락에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과 구원의 길에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것임을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교부들은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동의”라고 표현했다. 즉,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참된 믿음이 된다. 이러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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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1)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할 왕이(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그 믿음은 다음 예언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36절의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에서 앞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뒤의 ‘주님’은 ‘구세주(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메시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를 지상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는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왕’이라는 예언입니다.
37절의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는,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기 때문에, 다윗보다 더 높은(초월적인)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2) 예수님의 말씀에는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라는 말은, “메시아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군중이 바로 알아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다윗 왕실을 재건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메시아라면, 메시아 덕분에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독립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배 계층도, 기득권층도, 계급도, 신분도 없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이쪽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쪽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면, 그런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렇게 찬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물론 기득권층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빈손이 된다면...... 그런데 그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에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다.’라는 말은,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온 삶으로’ 어린이가 되라는 뜻이고,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학식이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나 권력 같은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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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동환 마티아 신부님]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35-37)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조금어려울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으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셨을까요?
실제로 다윗왕은 장차 자기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왕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자신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똑바로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는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상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혹시 이렇게 생각해보신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활안에서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신적은 없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똑똑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 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내 자신은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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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47)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리코라는 동네에 들렀을 때 앞 못 보는 거지 하나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애원하던 소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정도로 소경이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을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소원을 물으시고 볼 수 없던 그의 눈을 치유해 주셨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목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나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루카 1,27) 마리아에 의한 아기 예수 잉태와 탄생이 그 예이지요.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 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루카 2,4)
또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이렇게 예언서와 신약성경 등에서 분명하게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 학자들에게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고 하시며 다윗의 자손이 아닌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만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였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써 단지 다윗 나라의 영광과 가문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며 온 인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지 이스라엘만의 구세주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예수님을 단지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나만의 예수님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류의 구세주이시지요. 편협한 나만의 기도와 축복만을 바란다면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바로 나를 위한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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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문갑 비오 신부님]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
이번 주 복음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층간의 치열한 전쟁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수난의 길의 가시기로 결심하시고 그 결심의 증거로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중심부인 성전을 정화하시는 사건을 시작으로 메시아로서 당신의 소명을 강렬하게 표출하셨고 이것은 스스로 하느님과 제일 가깝다고 믿고 백성을 가르치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와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집요하게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지난 화요일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려고 했고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부활 논쟁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정하려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또 한번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메시아의 칭호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까지의 모습은 담을 수 있지만 부활 후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권위를 부정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 또한 메시아를 주님으로 불렀음을 깨우쳐 주시며 참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다시 한번 선포하십니다.
이토록 집요하게 예수님을 깍아 내리려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왜저러나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스러운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이 조금은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처럼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더 칭송받고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더 높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의 본성일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받으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높아 보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기에 많은 힘이 들어가는 방법이기에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좀 더 쉬운 방법입니다. 내가 높아지기 힘드니까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서 상대적으로 내가 높아지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많이 깎아 내리면 내릴수록 내가 더 많이 올라 가는 것처럼 보이기에 너무나도 쉽고 매력적인 방법 같지만 결국 상대방도 나도 그 자리에 항구히 멈춰 버리는 허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 이 방법으로 다가 갔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이 믿던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하며 살라는 가장 큰 계명을 들었습니다.
내가 인정받고 싶고 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가려 정작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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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찬미예수님
요즘 많은 신자분들께서 저를 보고,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냐, 어디 아픈 것 아니냐 걱정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성실히 운동을 했을 뿐이며 살이 빠진 것이 아니라 예전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해명하곤 합니다.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예전에 비해 살이 너무 많이 쪘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에서 공부를 마칠 즈음 동료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매번 외식 자리가 있었고 한국에 와서는 환영의 자리가 이어졌으니 살이 찌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들, 짜장면, 순대, 떡볶이 등을 기회가 될 때마다 챙겨 먹었으니 시간이 갈수록 얼굴은 부어오르고 몸은 게을러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작년 여름 우리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운동과 절식을 시작하는데, 사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참아야 한다는 것, 배고플 때 군것질을 삼가는 것, 시간을 쪼개 밖으로 나가 뛰는 일 하나하나가 커다란 숙제였습니다.
음식을 줄여야지 생각하다가 실패하기도 반복했고 운동을 결심하고 옷까지 갈아입었다가 이런 저런 핑계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무리해서 뛰다가 다리를 절뚝이기도 하고 제대로 된 자세를 익히지 않고 달리다가 근육이 파열되어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다보니 이제야 좀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 운동을 함으로써 얻게 된 가장 큰 축복은 예전보다 훨씬 활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살이 많이 빠졌다는 이야기이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운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고 목적이 높을수록 고통도 따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쉽고 편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볼 수 없고 그저 가만히 하느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시길 기대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인용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
한국말로 번역된 이 말씀만 보면 뭔가 애매해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려우니 이 말씀의 본문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이 말씀의 “주님”은 창조주 즉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아리송한 것은 “내 주군” 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과 분리된 다른 존재인데 임금인 다윗이 주군이라고 칭하는 이 존재 말입니다. 이 주군은 주인을 의미하는 말로써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 즉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임금이 주군이라고 부를 사람은 메시아 외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쉽게 풀어 말하자면 “야훼 하느님께서 내 주인이신 메시아에게 말씀하셨다. ‘내 오른 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 놓을 때 까지”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아 예언시’라고도 불리우는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자기 위에 영원한 왕 메시아가 계심을 잊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연약하며, 자신의 다스림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지만,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는 부족함이 없으시고 강하며, 그분의 다스림은 완전하고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진짜 왕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문제는, 당시 유다인들이 장차 다가 올 메시아의 호칭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소망하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호칭 속에는 단순한 족보가 아닌 로마제국 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당시 유다인들의 원했던 “메시아”의 참 의미입니다.
이미 세상에 함께 하고 있는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찬란한 왕, 정복자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시는,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결국 세속적인 성공과 복수를 바라는 당시 유다인들의 관점은 틀린 것이며 진정한 승리, 즉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실 분은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수행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구원 받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유다인들처럼 지금 당장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물리쳐주시는 예수님을 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왕의 모습으로, 찬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속죄 행위가 필요했고 커다란 고통과 희생이 뒤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고 그 목적이 높을수록 고통도 따릅니다. 하물며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어마어마한 목적 앞에서 치러야 할 메시아의 희생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때로는 지루한 기도 시간을 견뎌야 하고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내리눌러야 합니다. 물론 바쁜 일상 안에서 시간을 쪼개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때로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성당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사랑만으로 모든 고통과 희생을 이겨내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속적인 가치를 거슬러 올라가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 그 분이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높으신 다윗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분의 삶을 따라가고자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훗날 그 열매는 충만한 결실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성체송은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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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드리렵니다>
2026. 06. 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12,35-37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당신께 드리렵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ㄴ)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품으려고
오시는 당신을
품는
품으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품음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받들려고
오시는 당신을
받드는
받들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받듦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베풀려고
오시는 당신께
베푸는
베풀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베풂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섬기려고
오시는 당신을
섬기는
섬기려고
오시는 당신처럼
섬김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살리려고
오시는 분을
살리는
살리려고
오시는 분처럼
살림의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당신께 드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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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기를 보면 어른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도리도리 까꿍’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리도리 까꿍’이 무슨 뜻일까요? 별 뜻 없는 단순한 의성어, 의태어일까요? 찾아보니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에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도리도리는 길 도(道)와 다스릴 치(治)를 쓰고, 까꿍은 ‘각궁’에서 나왔는데 깨달을 각(覺)과 몸 궁(躬)을 씁니다. 즉, 천지 만물이 하늘의 도리로 생겼으니, 너도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손바닥에 손가락을 찍으며 ‘곤지곤지’합니다. 하늘 건(乾)과 땅 곤(坤)을 쓰는데,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으면 천지간 무궁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죔죔’하지요. 이는 ‘지암지암(持闇持闇)’에서 나왔는데, 쥘 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 세우는 ‘섬마섬마(西摩西摩)’는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굳건히 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기가 위험한 데로 가려거나 손을 대려고 하면 ‘어비어비’하면서 못 가게 하지요. 이는 한자 ‘업비업비(業非業非)’에서 왔는데, 일함에 도리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의성어, 의태어가 아닌 이렇게 깊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서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안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다윗이 장차 올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조차도 경배해야 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신적인 권위를 지닌 주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자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혹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조력자 정도로 한정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정한 나의 주님이십니다. 제대로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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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메시아로서의 주님의 정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 학자들과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로 이해해 왔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시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그들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을 부수어버립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곧 당신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이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예수님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신성으로는 창조 이전부터 계신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시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주님이오니, 당신의 말씀이 저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기쁨이오니, 저희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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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삼아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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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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