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12
6월6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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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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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OrGZ9HSE8Q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박준섭 루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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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오늘 첫 번째인 독서 티모테오 2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스승 바오로 사도께서 제자이자 동료 사목자인 티모테오에게 착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사제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번째 의무요 과제인 복음 선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복음 선포는 일생에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사제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선포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복음 선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이 허락해도,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들어가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② 복음 선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은 선포 여정에 반대와 몰이해, 시련과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덕이 끈기와 인내의 덕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합니다. 낙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자극도 필요합니다.
③ 주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다시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높은 시련의 파도가 다가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당히 중심을 잡고,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단한 것이, 제자들이나 동료 사목자들에게 그럴듯한 훈시 말씀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선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사셨습니다. 말과 행동, 가르침과 구체적인 생활이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향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복음 선포 여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또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토록 당당하게. 이토록 자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마치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밀도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생애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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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AQujiDf3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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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과 맞서는 자는 하느님을 품지 못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4-15)
찬미 예수님!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6월의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편의 숨 막히는 추격 영화 같습니다. 잔혹한 권력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칼을 빼 들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급히 짐을 싸서 낯선 땅 이집트로 도망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가족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피해 비겁하게 쫓겨 다니는 피난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고도 중대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천사 군대를 동원해 헤로데를 쳐부수지 않으시고, 굳이 성가정을 한밤중에 '도망치게' 만드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 진짜 영적 생존법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품에 갓난아기를 소중히 안고 길을 가는 한 어머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사나운 들개가 침을 흘리며 덤벼듭니다. 이때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어머니가 무술을 연마한 유단자이고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가 저깟 개 한 마리 못 이길 줄 알아?" 하며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개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행여나 흙먼지가 튀어 아기의 눈에 들어가거나 짐승의 발톱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도망을 칩니다.
어머니가 도망치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힘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품에 안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결코 들개와 기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이것이 생명을 품은 자의 가장 위대한 본능입니다.
이 원리는 전 세계 국가 원수들을 보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의 '경호 프로토콜'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VIP가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암살자가 총을 꺼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경호원들은 절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따지거나, 맞서 싸우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느라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경호원들의 제1수칙은 단 하나입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그 즉시, VIP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고 몸을 둥글게 감싼 뒤, 어떤 질문이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안전 가옥(Bunker)을 향해 냅다 뛰어 도망치는 것입니다. 경호의 핵심은 적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살려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상황을 따지고 맞서 싸우려 들면 VIP는 목숨을 잃습니다.(출처: 댄 에머리, 『시크릿 서비스: 대통령 경호의 세계』)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이 '어머니의 본능'이자 완벽한 '영적 경호 프로토콜'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남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니,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요? 하느님이 벼락을 내려 헤로데를 죽이시면 되지, 왜 비겁하게 한밤중에 도망을 가야 합니까?"라며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 요셉의 이끌림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나 내 편안함이 아니라,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고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황의 비참함이나 도망치는 수치심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아기 예수님', 즉 세례를 통해 잉태된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헤로데와 들개들, 즉 내 안의 교만과 분노, 돈을 향한 탐욕, 음란한 쾌락이라는 마귀는 틈만 나면 내 영혼의 아기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의 들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술자리나 쾌락의 유혹이 넘치는 장소에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이 깊으니까 이 정도 유혹은 내 의지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거야.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자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만약 내 품에 갓난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그 위험한 유혹의 자리에 머물며 마귀와 주먹다짐을 하려 들겠습니까? 싸우는 동안 유혹의 흙먼지가 내 영혼의 아기에게 덮이고, 마귀의 발톱에 내 안의 은총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텐데 말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려 드는 자는, 아직 하느님을 온전히 품지 못한 가짜 신앙인일 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스스로는 걷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서 스스로 무력한 아기처럼 머물며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라며 뻗대는 얄팍한 '교만의 화분'에 갇혀 있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히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의 들개 앞에서 나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체면을 버리고 화장실로 숨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겸손'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내가 교만의 화분을 스스로 깨부수는 그 순간, 내 안의 아기 예수님은 비로소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모습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유혹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작아졌을 때, 내 안의 주님은 가장 커지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마귀와 유혹도 단숨에 짓밟을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내 삶에 마음껏 펼쳐 보이십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킨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장애물이 생깁니다. 잔혹한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려워합니다. 그때 천사가 다시 꿈에 나타나 방향을 틀어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깡촌으로 우회하도록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줍니다.
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멸시받던 나자렛 깡촌에 숨겨두셨을까요? 세상의 사나운 들개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술(Camouflage)'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가장 허름한 상자에 숨겨야 도둑이 훔쳐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것없는 마을의 청년으로 30년 동안 완벽하게 숨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도 유혹을 보면 도망쳐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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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기술 공화국’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투자자인 Peter Thiel의 생각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업가를 넘어, 기술이 앞으로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저서 Zero to One에서 “0에서 1로 나아가는 창조”를 강조하며,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기술 공화국’입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기술이 중심이 되어 재편될 것이고, 그 핵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담당해 온 사무직과 지식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들은 생산 현장에서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에너지입니다. 이 모든 기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결국 지능과 몸, 그리고 힘을 균형 있게 갖춘 나라가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에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은 세상을 빠르게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과 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의 시대를 살면서도, 더 깊은 인간성과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오스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전, 교구의 요청으로 그 본당의 상황을 살펴보고 보고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조심스럽게 판단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목을 시작하는 신부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 다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의 뜻’,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먼저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목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 뜻’이 앞설 수 있는데,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먼저 고백하는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신부님의 길 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다짐 속에서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사목이 아니라, 이어지는 사목, 다음을 준비하는 사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마음에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교회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신부님께 환영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신부님을 통해 이 공동체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 안에도 작은 다짐이 생겼습니다. 필요할 때 함께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사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남았습니다. ‘잘 되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겠구나.’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와도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을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작은 정성을 보십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기술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와 에너지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작지만, 정성 어린 헌금을 사랑하십니다. 구원은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정성과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을 간직하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작은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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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나열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언어는 따뜻하고 정겨운 교훈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논쟁의 칼날이 되고, 그 칼날은 율법 학자들을 겨눕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길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향한 우월과 교만의 무대가 됩니다. ‘기도’조차도 제 위신을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장식으로 삼으며, 그리스 말 표현에 따르면 과부들의 ‘집마저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당시 관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과부들을 위한답시고 재산을 맡아 주면서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성전 제의를 위하여 봉헌하라고 권하면서 재산을 빼앗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긴 기도는 제 이익을 위한 구실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더욱 무겁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뒤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곧바로 장면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 맞은쪽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부자들의 많은 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남는 것을 바쳤으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거대한 금과 은을 삼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두 닢으로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또는 무엇을 ‘내맡기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 봉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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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오늘 복음은 두 장면을 보여 준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위선적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과 잔치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원했다. 겉으로는 경건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둘째, 그와 대조적으로 성전의 헌금 궤 앞에서 가난한 과부의 작은 봉헌을 칭찬하신다. 많은 이들이 큰돈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봉헌했다. 예수님은 그 봉헌이 가장 크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넣은 돈의 양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린 마음을 보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치는 것의 크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깊이를 보신다.” 참된 봉헌은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전부의 내어줌이다.
이 과부의 봉헌은 예수님의 자기 봉헌을 예표 한다. 과부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오리게네스는 “이 과부 안에서 우리는 가난하였지만,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본다.”라고 해석했다. 그녀의 작은 동전 두 닢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두 손과 두 발의 상처와도 같이, 사랑의 절정에서 드려진 봉헌의 표지다.
이 과부의 태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신앙은 보여 주기 위한 겉꾸밈이 아니다. 겉으로 경건한 모습에 머물고 이웃을 착취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가 된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우리가 드리는 기도·시간·정성·재물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는 봉헌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드려지는 작은 봉헌은 하늘을 움직인다.”라고 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단순히 헌금이나 물질만이 아니다. 내 시간, 내 재능, 내 노고, 내 고통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얼마나 내어드렸는가?’이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자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릴 때, 그분의 은총은 충만히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봉헌의 모범이다. 그녀는 가진 것이 적었지만, 하느님께 전부를 내어놓았다. 이는 예수님이 당신을 완전히 봉헌하신 모습과 같다. 겉치레 신앙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내어놓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전 존재를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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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로 나>
마르코 12,38-44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받으시고픈 것은
나 아닌 나
아닌
바로
나
내가
하느님께
드리고픈 것은
나 아닌 나
아닌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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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책 ‘어둔 밤’은 감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한 젊은 가르멜 수도자가 말합니다.
“저의 십자고상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성물입니다. 이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십자고상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십자고상을 버리십시오.”
어두운 밤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한 성인의 요구였습니다. 사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진짜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집착도 큽니다. 자기 뜻과 맞지 않다면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역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끊어야 할 집착은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끊어야 할지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낮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동전으로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할 만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사람들은 헌금함에 들어간 동전의 액수를 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비율을 보신 것입니다. 즉, 부자들은 자기의 풍족한 재산 중 일부를 바칩니다. 과부의 헌금은 가장 작았지만,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원어인 그리스어 ‘생활비’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과부는 내일 당장 살아갈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 전체를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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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38-44)
1) 여기서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위선자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의 큰 문제점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는, 거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이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자기를 존경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존경한다는 뜻으로 공손하게 인사했고, 회당 예배 때나 잔치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윗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존경은, 진심으로 하는 존경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것을 즐기는 쪽만 위선자였던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쪽도 위선자였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흉내 낸 것, 또는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탈출기에,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이 있습니다.(탈출 22,21)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3)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과부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이,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뜻이긴 하지만, 누구다 다 전 재산을 바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성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형편이 안 되어서 그 과부처럼 가진 것을 다 봉헌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진 것을 다 봉헌한다고 해도,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힘없는 과부들에게서 빼앗은 돈 가운데 일부를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도짓 같은 일로 빼앗은 돈을 봉헌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무슨 제물이든지 간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레위 22,17-25) 그 전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 자신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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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문갑 비오 신부님]
<신앙생활의 기준은 믿음의 중심이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과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을 구분 짖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믿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로 구분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믿음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뜻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 받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윗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과의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 속에는 그 믿음의 중심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과부가 보여주는 봉헌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과부가 보여준 봉헌은 율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진 봉헌이었습니다.
과부의 봉헌 속에는 어떠한 계산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 주님을 찬양하며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속에는 율법학자의 모습도, 가난한 과부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아무런 조건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거래를 하며 내 뜻에 주님을 맞추려는 마음으로 철저히 나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번 한번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해 드릴테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정성을 들였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느냐“ 원망하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할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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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동환 마티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38-44)
우리가 헌금할 때 그 정성과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과부의 헌금이야기는 자기가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사서 먹을 돈을 모두 하느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옛날 예수님이 사시는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즉 봉헌을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헌금도 상당히 많이 바쳤다고 합니다. 많은 돈을 내놓는 부자 옆에서 한 가난한 과부가 렙톤 2개를 넣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렙톤은 그리이스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화폐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다가 이렇게 칭찬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돈 중에서 얼마를 헌금하였지만, 이 부인은 있는 것을 모두 다 헌금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재산 중에 일부를 떠에서 남겨 놓고 그 일부를 헌금했지만 , 이 부인은 아주 작은 돈을 헌금하였지만 가지고 있던 것을 몽땅 내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소유한 모든 것을 바쳤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그녀는 진실로 하느님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을 하고 때때로 한 부분만을 바치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아주 중대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뿐인 당신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기꺼이 당신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은 바로 그 과부가 헌금한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하느님께 이웃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가난과 궁핍 속에서, 곧 죽어 가는 마당에서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느낄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필요한 것까지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 과부는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든 이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헌금할 때 그 정성과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기쁘고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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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도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이끌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막중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삶의 모범으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것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새 마음 안에 교만함과 공명심이 더 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공명심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타인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가르침과 견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지, 그 수단과 방법만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지도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혼을 담아서 그것에 몰두하고, 자신의 온 삶을 담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그 자체가 진정한 가르침이고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비록 액수가 렙톤 두 닢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친 것이기에, 어떤 헌금이나 어떤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봉헌이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가진 직무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참된 삶을 보여 주는 사람이 진짜 스승이요, 참된 봉사를 보여 주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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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음의 순수한 지향>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마음으로 헌신해야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동시에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순수한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일지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 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는 지향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갈림이 없이 오롯하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하는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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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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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ㄷ)
<온 마음과 정성을 담자!>
오늘 복음(마르 12,38-44)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명예욕과 자기 과시와 탐욕에 물들어 있는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왠지 성직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단죄를 받을까 겁도 납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자들을 더 엄중하게 단죄하신다고 하시니.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신자들의 봉헌 정신과 봉헌의 자세를 일깨워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하게 당신께로 향해 있는 마음이기를 바라십니다.
봉헌할 때마다 흥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얼마를 봉헌할까를 고민하고 있지는 않은지? 봉헌할 때마다 아까워 하는 마음은 아닌지? 한번 함께 우리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신적 행위입니다. 그러니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나의 정성된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닮지 않도록 경계하고, 나의 봉헌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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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놓는
봉헌을 만납니다.
참된 봉헌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을
어떤 가치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봉헌의 삶은
돈의 가치가 아닌
마음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마음의 가치는
겸손함 속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큰 것을 기억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봉헌된 작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고도
감사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도
내어놓을 줄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참된 삶입니다.
참된 삶은
하느님께 내어맡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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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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