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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3 6월7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08|조회수41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3
6월7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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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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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f7GR1xOEjc
[서울대교구 유상준 베르나르도(신당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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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PgBjSYCM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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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3.5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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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 조금은 특별한 조각을 보았습니다. 광장의 한 모퉁이에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에는 한 노숙자가 누워 있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어떤 교구에 설치하려 했을 때, ‘품위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바티칸에 노숙자들을 위한 샤워실과 쉼터를 마련하고, 성탄과 부활에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에 따라 교회는 이 작품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황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외면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교회는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벤치 앞에 서서,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가 바로 저 자리에 계시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도 이와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성체는 단순히 받아 모시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정신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꽃동네입니다. 꽃동네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 의지할 곳 없는 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존엄을 지켜 줍니다. 꽃동네의 봉사자들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이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꽃동네의 사랑은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멕시코와 필리핀, 아이티와 페루와 같은 지역에도 공동체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이 부족한 곳에서는 함께 밥을 나누고, 병든 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들을 돌보며,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족이 되어 줍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그들이 나누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성체성사에서 비롯된 사랑이 국경을 넘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빵을 나누듯이, 그들도 한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의 의미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다시 먹이심으로써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자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며 기도했고, 그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빵을 나누며 우리는 하나의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그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신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파티마의 벤치에 누워 계신 예수님, 꽃동네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체를 제대로 모신 신앙인이 됩니다.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생명의 빵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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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과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탈출 17,2; 민수 20,3 참조). 탈출기에 나타난 싸움의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서로 “말다툼”(요한 6,52)을 벌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결과입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스스로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저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사변적 언어 표현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찢긴 몸과 쏟아진 피를 내 생명의 뿌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면서도 꼭 성체성사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이며, 삶이 그 믿음으로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드러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삶의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 삶과 생명을 이어 가게 하는 실제입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공허와 상처와 좌절의 자리에 그분의 살과 피를 들여놓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 대신 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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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51-5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1. 성체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 백성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성체의 신앙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새롭게 깨닫고 그 생명 안에 살도록 부름을 받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을 살린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의 배고픔을 채운 것은 만나였지만, 그 만나는 말씀의 표징이었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은 하느님의 충실함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요한 1,14) 그리고 그분은 더 이상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이 아니라, 직접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다.

2.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생명의 실재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의 핵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멘’이라 응답하며 받는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너희 자신이 그분이 되기 위함이다.”(Sermo 272 요약) 즉, 성체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이며,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실제적 친교를 뜻한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교리 교육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빵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간구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너는 단순히 감각으로 보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라.”(Catecheses Mystagogicae IV, 3–6)

3. 그리스도의 몸과 피: 완전한 자기 증여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며 놀란다. 이는 인간의 이해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사랑의 절정을 뜻한다. 유다 율법에서는 피가 생명이라고 하여(레위 17,11),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피, 곧 생명 자체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체성사는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화(現在化)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전달하는 표징이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다.”(Summa Theologiae III, q.73, a.3) 이 피는 용서의 피이며, 생명의 피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된다.

4. 성체의 생명: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54,58절)라고 강조하신다. 이는 단순한 내세적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부활 생명의 참여를 뜻한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고, 그분의 사랑과 일치를 살아간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그분의 피와 살을 받아먹음으로써, 우리 육체도 부활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씨앗이다.”(Adversus Haereses, IV,18,5) 이처럼 성체는 우리 몸의 부활과 하느님의 생명에의 참여를 약속하는 구원의 성사다.

5. 성체와 교회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지 하느님과의 일치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의 원천이다. 성체는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는 성체 안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는 성체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세우며, 교회는 성체성사를 세운다. 교회가 성체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태어난다.”(21항) 그러므로 성체 안에서의 일치는 단순한 감정적 유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를 묶는 신적 일치의 실재다.

6. 성체의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체의 신비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아멘’이라 대답한다. 그대의 ‘아멘’은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응답이다.”(Sermo 272 의역) 성체성사는 우리를 단순히 은총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 안에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는 성사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존재론적 목적이며, 신화(神化, theosis)의 길이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7. 결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이자, 교회의 생명 중심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형제들과 일치하며,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단순한 전례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다. 성체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미사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자. “주님, 제 안에 오시기를 원하시는 당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제 삶이 당신의 몸이 되어 세상에 당신을 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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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람 밥 세상>

요한 6,51-58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하느님 사람 밥 세상>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나를 살리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으로 삽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게 스미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을 품습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게 머무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께 머뭅니다

당신께서
먹히심으로써
내가 되시니

나는
먹음으로써
당신이 됩니다

당신이 된 내가
먹힘으로써
벗을 살리니

당신이 된 나를
먹음으로써
벗이 삽니다

당신이 된 내가
먹힘으로써
벗이 되니

벗은
먹음으로써
당신이 된 내가 됩니다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이

먹힘으로써
벗을 살리고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을

먹음으로써
벗이 삽니다

당신이 된
내가 된
벗이 된
벗이


다른
벗에게

먹히니 먹고
먹으니 먹힙니다

살리니 살고
사니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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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58)

1) ‘먹는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먹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에도 적용됩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체를 받아먹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성체가 아닙니다. 좋은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다음에(루카 22,14-2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2,21)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루카 22,3-6),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고, 성체를 받아먹고 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겟세마니로 가기 전에 먼저 떠나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에게 성체를 주셨을까?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 이야기가 없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의 발을 씻어 주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유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또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유다는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체를 주신 일도, 그의 발을 씻어 주신 일도 모두 다 그 자신이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더 이상 성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성체 쪽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먹는 사람 쪽의 문제,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명력을 스스로 차단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 모독의 위험성 때문에 비신자들의 영성체가 금지되어 있는데, 신자라고 해도 마음과 믿음이 이미 예수님을 떠났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2)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는다.’ 라는 말은, ‘믿는다.’를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나를 먹는다.”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말로만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제 일’로 이루어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또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한 6,60),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누가 들어도 듣기가 거북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당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거북한 말은 아닙니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태아는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데, 사실상 엄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자기 자신을 먹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엄마들처럼 당신 자신을 먹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곡식과 채소와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땅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이고, 땅을 먹는 일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 일은 다 그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명력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고, 그 힘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을 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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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석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매일 예수님을 받아 먹으며, 나는 달라지고 있습니까?”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 먹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과연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깊이 성찰해 보는 시간이 되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고 하며 혼란스러워하고 말다툼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반응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에 불과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결코 추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음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몸이 부서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끔찍하고 현실적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손에 직접 쥐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철저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당신을 내어주신 이유는, 우리와 생명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순간 예수님의 굳센 생명력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나약한 삶을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보통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소화되어 나의 몸이 되지만, 성체성사는 정반대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성체를 내 방식대로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세상을 향한 연민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거룩한 변화는 그저 입을 벌려 성체를 모신다고 마술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진실한 대답과 굳건한 믿음의 순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모신 나 역시, 이웃을 위한 따뜻한 밥이 되겠다는 간절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성체를 모시고 성당 문을 나서는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내 안의 예수님처럼 평화를 만들고, 타인의 깊은 상처를 따뜻하게 덮어주며, 가난한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참된 의무입니다. 내 안에 오신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우리 각자의 팍팍한 삶의 자리를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한 아름다운 선물로 변화시키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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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민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

<사랑의 신비, 성체>

“성체는 무슨 맛이에요?”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아이들과 동반하며 한 번쯤은 듣게 되는 질문입니다. 처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어떻게 답을 해야 아이들이 잘 받아들이면서도 성체 성사의 신비를 잘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같은 질문을 하면 “성체는 신비의 맛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신비’라는 표현이 조금 어려웠을 수 있었겠지만, 성체 성사의 의미를 잘 담아내는 답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비mysterium란 인간의 이성이나 지력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미사 중 빵과 포도주가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며 말다툼을 벌였던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맛볼 수 있는 빵의 형상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빵의 형상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단순한 빵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큰 사랑이 담긴 성체성사를 가리켜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24항)”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며, 다시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도록 파견됩니다.

우리가 오늘 받아 모시는 성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입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신비로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더욱 깊이 머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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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강재 요셉 신부님]

<제일 큰 선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대상 그 존재 자체이지 않을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도 나 자신일 겁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구요? 너무나 뻔하기에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의외로 뻔합니다. 그 뻔한 걸 이해하거나 실천하지 못해 한평생 무난하게 살 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 사람이 나에게 물질적인 큰 가치를 주어야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 자체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원하는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그 사랑하는 존재에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마움은 무언가 눈에 보이는 가치로 주어져야 믿으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고마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증 거가 바로 성체입니다. 너무 식상하고 뻔하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뻔한 걸 잊고 살기에 주님의 사랑을 잘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고마움을 알 수 없듯이,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한다면 나는 훨씬 더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성체를 모실 때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아 주님께 "아멘!"이라 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성체성사의 다른 말은 "감사의 제사"이니까요. 나의 신앙의 크기는 주님께 대한 감사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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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보통 ‘손님은 왕이다’라면서 고객 중심의 운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매장의 점원들은 손님에게 도도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히려 고객이 점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하기 힘든 유명 가수 콘서트 티켓을 주고, 여기에 비행기표까지 얹어준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실제로 있습니다. 에르메스 벌킨 백 판매장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이 가방의 가격은 수천만 원에 달하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살 수 있는 가방도 아닙니다. 손에 넣으려면 보통 1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그전에 에르메스의 다른 제품 여러 개를 사야 하고, 점원에게도 잘 보여야 합니다. 이곳 점원의 불친절을 오히려 “역시 고급 매장은 달라.”라고 말합니다.

명품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제작 비용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품의 기능,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품위와 자존심이 아닐까요? 이런 명품보다 더 특별한 품위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에 교회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포하시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면서 거센 반발을 보입니다.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조차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순히 비유이고 상징이라고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시지요. 반드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보통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인 성체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성체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으로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체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특별합니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특별해졌습니다. 그 특별함을 담아 고귀함과 품위를 드러내는 명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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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몸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곧 이어 우리는 곧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준 그 크신 사랑을 먹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마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이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도 형제들과도 한 몸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이 얼마나 찬미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려온 빵'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을 줄 빵은 그 빵이 되기에 앞서, 밀이 바수어져 물과 함께 반죽이 되듯, 그렇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빵'이 될 수 있고,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양식은 결코 우리가 획득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은총입니다. 당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빵'과 '살'과 '생명'입니다. 이는 같은 지평에 자리잡은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수 있는 단어는 51절과 58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 양식이 가 닿을 수 없는 신적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인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 존재와 존재 양식 모두를 신적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곧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몸’이 쪼개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신적 생명을 '먹고 마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봅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생명의 밥이요, 양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둘째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고린 10,16)

셋째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음’을 말해줍니다. 
이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 모두는 ‘빵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됩니다. 그리하여 갈라지고 패인 우리 가슴 골골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피, 구원과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랍고 크신 사랑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 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 맺음을 배워야 하고, ‘예수님의 피’에서 사랑의 유대와 일치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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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그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오니,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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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오늘 복음(요한6,51-68)은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1.55)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성 목요일 저녁에 최후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온 존재를 내어 놓으신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힘'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힘'입니다. 그 힘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이 지극한 사랑의 현존을 얼마나 믿고 있으며,
이 사랑을 먹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가?'

성체성사, 곧 미사의 본질은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모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부활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미사에 참여하는 근본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사제를 공경해야 하는 근본이유입니다.

이 근본이유 때문에 우리는 미사에 기쁘게 참여하고,
사제와 함께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미사에 참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고맙습니다!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놀라운 성찬의 성사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성체 성혈의 신비를 공경하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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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성체 성혈의 신비는
하느님과 하나 되어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증여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게 됩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서
살과 피로 오십니다.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생명의 
거룩한 가치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생명을 세상 안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으로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삶이 곧 
성체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삶이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의 생명으로 만나는
사랑의 가장 좋은 
감사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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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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