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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4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08|조회수42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4
6월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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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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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a7TZ5nZPqo
[서울대교구 구본정 바오로(한강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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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만 원 짜리의 행복!>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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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참행복: 존재 가치 상승 욕구의 충족>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수학 강사는 “강남 아파트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왠지 약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심이 묻어납니다. 40~50억짜리 한강 경치가 보이는 강남 아파트에 아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처음 갔을 때. 그다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잔금을 낼 때. 막상 들어가 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구도 80이 젤 재밌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임영웅, BTS 절대 행복하지 않아.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대학도 마찬가지야.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다음부터는 행복하지 않아. 그 안에 갇혀버린 거니까. 더 갈 곳이 없어.”

이 말 안에서 ‘희망’이 행복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끊임없이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끊임없이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결코 완전히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 명예, 쾌락입니까? 사실 그런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존재 상승 욕구’

그냥 인정받으려는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강남 아파트를 살 때 처음 그 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잔금을 치를 때 느끼는 맛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상승 욕구가 있고 그것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할까요?그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존재 상승 욕구를 추구하는 우리는 모두 두 종류로 나뉩니다. 나의 창조자, 부모를 닮아가며 존재 상승의 기쁨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소유와 경쟁을 통해 타인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명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존재가 상승하려는 노랑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 더 높아지려는 줄무늬 애벌레의 차이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경쟁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신학교에 늦게나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가 향상됨이 자주 느껴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고 첫 주제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부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행복을 좇던 것에서 지금은 주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니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을 때보다 분명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아기보다 어머니가 행복한 것처럼 그래도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더 행복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 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주님 뜻이라 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내가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조금씩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사실 박해도 없지 않은데, 가장 짜릿한 이상한 행복이 그때 옵니다. 그리스도와 매우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또한 끝이 아니기에 행복이 거기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부모를 닮아감입니다. 더는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행복을 잃습니다. 부모처럼 말을 하고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튜브에 보니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가 기뻐서 계속 “엄마, 엄마, 엄마?”라고 하고 그러면 아기도 “엄마, 음마, 암마…”라고 하며 웃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도 기쁘고 아기도 기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나의 변화하는 모습을 행복의 이유로 삼아봅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재미를 들여봅시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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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했습니다. 80년대에 신학교를 다녔던 선후배 사제들입니다. 오스틴으로 새로 온 신부님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만큼 미국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가 됩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자리에는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 7개월이 지난 신부님,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한 달이 갓 지난 신부님은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도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동료 사제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7개월이 지난 신부님은 이제 막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의욕이 넘칩니다.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여유가 있고, 말과 표정에서 감사가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에게 생긴 작은 원칙은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그것이 쌓여 과거가 되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행복 선언’, 또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은 성공하고, 많이 가지고, 인정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은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진복팔단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길입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올라 부모님께 칭찬받았을 때, 뜻밖의 도움으로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서류가 순조롭게 준비되어 영주권이 나왔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픈 교우가 치유되었을 때,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순간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도파민이 매 순간 계속 생성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되는 것처럼, 기쁨도 늘 같은 강도로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에 감사했다면, 아픔의 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뿐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어 줍니다.

저는 행복은 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깁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웃과 함께 걸어갈 때 그 자리에 행복의 길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 수 있다면, 기쁨의 순간에도,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이 말씀은 결과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복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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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는 군중과 제자 모두를 향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또한 끝맺습니다(마태 4,25; 7,28-29 참조). 산상 설교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울고 웃는 문제, 그리하여 이 삶을 그토록 모질게도 살아 내야 하는 까닭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은 현재 상태를 미화하거나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함, 슬픔, 무력함, 굶주림이라는 인간의 낮은 자리를 들추어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은 하느님 나라를 억지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족함을 견디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은 유다의 쿰란 공동체가 말하던 ‘영 안에서 낮아진 이들’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유배의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내며, 자신의 힘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기회이자 초대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행복 선언이 그리는 현실의 ‘슬픔’은(5,4 참조) 역사 속 이스라엘이 겪은 상실과 폐허가 된 시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현실이 팍팍하여 가난과 힘겨움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합니다. 힘이 없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부드럽기에 ‘온유’합니다(5,5 참조).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5,6 참조) 단순한 윤리적 욕망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정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5,7-9 참조) 꿋꿋이 살아 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박해받는 이들에게(5,10 참조) 약속된 하늘 나라는, 세상이 짓밟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뒤집어 주실 새로운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가 가리키는 행복은 현실의 찬란한 성공이 아니라, 상처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기어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어이’를 붙들고 살아 내는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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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오늘 우리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연결해 이해했다. 모세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새 율법, 곧 사랑과 은총의 법을 선포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완성하러 오셨다. 산 위에서 선포된 참 행복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주는 헌법이다.”

참 행복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자체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참 행복은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하며, 동시에 그분의 제자들의 삶을 드러낸다.”(1717항) 다시 말해, 참 행복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닮아가는 길이자,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모습(창세 1,27)을 회복해 나가는 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산상설교에서 참 행복이 서로 단계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을 성숙으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가난함은 출발이고, 마음의 깨끗함은 정점이며, 하느님을 뵙는 지복은 완성이다.”

세상은 부유함, 권력, 성공을 복이라 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의 사람들이 복되다 하신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불행하고, 가난한 이는 하느님만을 희망으로 삼을 때 복되다.” 이처럼 참 행복은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자유롭고, 온유한 이는 폭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 자신을 맡기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참 행복은 결국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가난한 이”: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비우신 주님, ★“슬퍼하는 이”: 인류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신 주님, ★“온유한 이”: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조차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주님,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 아버지 뜻에 충실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말한다.

참 행복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초대이다.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참 행복을 사는 이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새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다.” 참 행복은 “예수님의 얼굴”이자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교부들의 해석처럼,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하나 계단처럼 오르며 하느님과의 친교에 나아가야 하겠다. 오늘 우리 각자가 세상의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을 선택하는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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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

마태오 5,1-12 (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행복>

서로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으며
함께 마음이 가난한
행복

서로 슬프게 하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

서로 거칠게 대하지 않으며
함께 온유한
행복

서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으며
함께 자비로운
행복

서로 불의의 제물 삼지 않으며
함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

서로 더럽히지 않으며
함께 깨끗한
행복

서로 짓밟지 않으며
함께 평화로운
행복

서로 하느님을 핑계 삼지 않으며
함께 하느님을 따르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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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는데 특징을 보면, 복의 근원을 현재 상태가 아니라 다가올 새 나라 새 질서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종국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외적인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겪는 고달픔과 시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셨다고 하면서 두 마음을 품게 되면 불행합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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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이가 콧물을 흘립니다. 이를 보고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선천적 결함을 의심할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감기의 증상으로 생각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두통이 있습니다. 이때 뇌종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의 신호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피로 등의 단순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까요? 만약 콧물이나 두통을 가지고 심각한 병으로 의심하고 있다면 아마 주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몇 년 전에, 우리 교구에서 병원에도 암을 감별하는 펫시티(PET CT)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미리 모든 암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교구 신부들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으며, 이 펫시티 검사를 했습니다. ‘나에게 암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발견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가정을 통해서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그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산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들로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어리석음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십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옛 율법(십계명)을 받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규칙과 금지 조항을 넘어선 ‘사랑과 은총의 새로운 율법’을 산 위에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옛 율법은 ‘무엇을 하지 마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전혀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유함, 웃음, 권력, 인정받는 것 등을 행복이라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박해받음을 행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나의 외부적 조건이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에는 결핍과 고통으로 보이는 상황조차도,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은 옛 율법으로 인해 힘든 상태였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조항으로 인해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 조항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만 생각했습니다. 이 모두를 지킬 수 없기에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특히 사랑의 관계 안에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것에 대한 걱정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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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2)

1)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 평화, 안식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중에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행복하게 될 테니, 가난해도 참고 살아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가난에 굴복하지도 말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가난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가난에 굴복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등지고 돈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가난을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상태로 오해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고통입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가 결국 중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 공동체가 무관심하다면, 그 무관심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일은, 대부분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남들보다 더’ 궁핍한 사람도 없었고,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먹을 때 함께 먹고 굶을 때 함께 굶는다면,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한다면, 가난함이 고통이 되지 않고,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행복하여라.”를 “행복하기를(구원받기를) 바란다면”으로 읽으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늘나라만 추구하여라.”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가르침은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태 6,24)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포함됩니다.(1티모 6,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이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그 자격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금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해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가르침은,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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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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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설교’(마태 5,1-­7,29)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스도교 사랑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다인 지혜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는데 세상을 떠날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펴고 간다. 왜 그럴까?’라고 묻는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이렇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을 다 두 손 안에 넣겠다고 두 손을 불끈 쥐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모두 비우고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손을 가지런히 펴게 된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뛰어넘는,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워 내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욕심을 버리고 물질적인 집착을 떨치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로 살아가려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우고 소유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내주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깊이 반성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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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경욱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주님의 설교, 즉 산상 설교의 첫부분인 참된 행복의 8가지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진복 8단이라고도 하는 이 말씀은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산에 오르십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에 자리잡고 앉았을 것입니다. 산에 오르시는 대목은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탈출기의 대목을 떠올 릴 수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세가 십계명으로 이스라엘의 율법을 정한 것처럼 산에 오르시어 새로운 계약의 뜻을 설명해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 행복이 무엇입니까? 아니 행복하십니까? 예전에 대선에 나온 한 후보는 연설을 하면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혹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하고 인사한 기억이 납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진짜로 행복해질 까요? 아니 살림이 궁색하면 다 불행한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값을 정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하늘에서 또 사람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8가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요약하면 오직 한가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올곶게 섬기는 길입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가난에 몸서리치게 거부하고 달아나려 한 때가 있고, 경제적인 성장이 있기 전에는 정말로 고생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가난하다... 즉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에 얽매이지않고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서 물질 너머에 있는 영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을 의미하는 온갖 욕심과 집착을 벗어던진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대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이 세상의 환란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비록 인간적인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해도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둔 이들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땅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땅은 온유한 이들 즉 하느님의 새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모두 행복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고,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행복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제사를 바라지 않으시고 자비를 바라신다고 하셨으며, 심지어 제단에서 태우는 연기는 역겹다고 하시며 진정으로 바라는 제사는 회개이고 자비를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써,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앞서 선언한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들이며, 온유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의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어떠한 박해나 고통도 그들을 묶는 어떤 사슬도 하늘 나라를 향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내 가정, 내 가족만을 위한 안락함을 제공하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내 집안에서만 맛보는 그래서 문을 꼭꼭 닫고서 내것만 챙겨서 행복해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잊고 사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베품의 행복이고, 나눔의 행복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저버린다 해도 우리 가슴에 품은 행복, 하늘나라를 향한 행복은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그리고 옆 사람도 행복하길 기원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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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한 사람>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곧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먼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대체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시 1,1; 2,12; 119,1-2; 128,1-2; 루카 1,42-45; 11,27-28; 마태 16,17)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이요, 참 제자들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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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들여진 가닭입니다.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신 까닭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주님,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으로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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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흐려진 우리 마음을
다시 맑게 비추어 보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집니다.

마음의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며,
하느님을 뵙는 것은
그 여정의 완성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현재의 진실을 놓치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세상 한가운데서도
욕심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맑은 마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세상의 욕망과 두려움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해질수록
사람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맑은 마음의 행복한 여정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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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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