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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5 6월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09|조회수47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5
6월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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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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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cI74ioo2go
[서울대교구 박기벽 유스티노(공항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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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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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HtZw4_kP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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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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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칭(名稱)’과 호칭(互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칭은 주체가 ‘나’입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려는 이유를 발표하고, 친구들이 투표해서 반장으로 선출되면 그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반장’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저는 신용 협동조합 ‘업무 이사’를 했습니다. 명칭은 업무 이사이지만 하는 일은 신학교 매점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서품받은 후에 저의 명칭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보좌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작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8년의 보좌 신부 기간을 지낸 후에 교구는 저를 본당 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명칭은 주임 신부,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있을 때는 ‘교육 담당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가 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을 때는 ‘성소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주가톨릭 평화 신문에서 일할 때는 ‘사장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나의 행실과 행동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때로는 나의 외모와 말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신학생 때 친구들은 저를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은 싸움에 능했고, 관우와 장비처럼 도원결의했던 동지는 아니었지만, 제갈공명과 더불어 유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판매부 사장도 하였고, 타종 반에서 삼종기도를 치기도 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외적인 활동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직책이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과 행실이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 행동과 삶이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광인(狂人)’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은 상급자의 행동과 행실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천사,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악마, 욕심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칭’에 대해서 궁금해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옳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를 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호칭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힙니다. 소금과 빛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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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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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존재 의미를 밝히신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사명과 정체성을 발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소금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부패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지켜내고, 진리의 맛을 더하는 역할을 가르치신 것이다.” 소금은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더하며, 정결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교회 전통은 이 점에서 소금을 지혜와 순수의 상징으로 이해해 왔다. 세례 때 소금은 신앙의 지혜를 상징한다. 만약 신앙인이 그 ‘맛’을 잃는다면, 단순히 쓸모없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세상에 전해질 생명의 맛도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빛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양이시고, 우리는 달이다. 달이 스스로 빛나지 않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빛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라.”(16절)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앞에서 스스로 드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선행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교부들은 “등불을 등경 위에 놓는다.”15절)라는 비유를 교회와 연결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등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등경은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은 모든 이에게 빛을 주며, 세상 속에서도 어둠을 몰아낸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0,11 요약)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가운데서 말씀의 빛을 가리는 함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드러남으로써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행이다.”(Sermo 54,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느님께 향하게 된다. 우리는 소금처럼 세상에서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하며,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 또한, 빛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비추며, 우리의 선행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제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우리가 다시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실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만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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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소금과 빛>

마태오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ㄱ)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내님
뜻대로


벗에
스미어


녹아
사라져도


맘껏
살맛나니


내게는
기쁨과 행복이요


내님께는
감사와 찬미라네


내님
뜻대로


벗을
비추어


끝없이
흩어져도


한껏
빛나니


내게는
기쁨과 행복이요


내님께는
감사와 찬미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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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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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표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주에게 얽매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고, 둘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 지금까지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슬람교도의 땅과 재물을 약탈해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터운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전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4차에 걸쳐 전쟁했지만, 제1차 십자군 전쟁만 성공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슬로건을 걸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내용의 전쟁에 절대 함께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보다 평화를 원하십니다. 힘으로 누르는 폭력보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모범적인 우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순수한 소금 자체는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사해 주변에서 구하던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암염입니다. 습지에 노출되어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면 짠맛 없는 하얀 가루만 남게 되어 길가에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어 복음의 가치(짠맛)를 상실하면, 존재 이유를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마태 5,14)

신앙인은 세상 위로 높이 드러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거룩한 모범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그래서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 유익을 주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선함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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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2)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나 혼자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등불로 모든 사람을 비추라는 예수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처럼(마태 2,9)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3) 13절의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여기서 ‘쓸모없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진다.’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멸망한다.’라는 뜻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쓸모없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인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씀일 뿐이고,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제 맛을 잃은 소금’에서 ‘본래의 맛을 찾은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쓸모없다.’라는 말을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즉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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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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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타락과 멸망을 막고 더 나은 세상, 더 맛깔나는 세상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기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9,50) 하고 이르십니다. 또한 콜로새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4,6)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빛은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둡고 차디찬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초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녹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지고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그 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내 앞길만, 내 가정만, 우리 교회만 비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이를 환히 비추는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이가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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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 나의 주변을 밝고도 즐거운 세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포함한 우리를 두고 소금이라고 강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소금의 짠맛은, 음식에 간을 맞추어 제 맛을 내게 만들고 또 음식물을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게 합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그 자체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두고 빛이라고 강조하시며 또 말씀하십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빛의 목적은 서로서로 보게 하고 길을 밝혀주며 그 무엇을 환하게 비쳐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지 속의 등불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나에게, 함께 얽혀 살고 있는 너와 나와의 관계서 간을 맞춰 맛을 내는 소금과, 서로서로가 삶의 올바른 길을 밝혀 주는 빛의 역할을 다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 나의 주변을 밝고도 즐거운 세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오늘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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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의 사명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곧 내가 하는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까? 혹 욕하지는 않을까? 

내 행동이 진정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향하여 있는가? 내 행실은 사람들 앞을 비추고 있는 빛인가? 아니면, 뒤에서 궁시렁대며 불평하는 어둠인가?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까닭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 때문이요, 이미 우리가 그 사랑을 먹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소금처럼 녹아들고’ ‘불처럼 태우되’ 그것을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빛이요,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이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빛이신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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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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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 찬미예수님
교구에서 유학 발령을 받게 되었을 때, 이미 유학을 다녀오신 어른 신부님들께서 저에게 해 주신 조언은 ‘건강 잘 챙겨라’ 그리고 ‘사제로써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꼭 덧붙이는 말씀이 있었는데, “네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충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학을 나가는 것과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어떻게 연결 될 수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주제를 잡을 때가 되어서야 선배님들의 충고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는, 결국 논문 주제를 잡을 때 거창한 주제를 잡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논문 주제를 잡을 때 학생들은 많은 욕심을 내게 됩니다. 특히 박사 논문이 그렇습니다.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가 통과되어야 하는데  그 기준이 사실 “혁신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쓰고자 하는 논문의 주제가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가 통과 기준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무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주제를 잡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는 교수들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주제의 경우 학문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논문 주제를 잡을 때, 남들이 다루지 않았지만  자료를 취합하기 좋은 주제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논문 지도를 하고 있는 지금, 똑같이 조언하곤 합니다. 논문 주제를 정하는 데 있어서 뻔하지 않되, 자료가 충분한 것을 선정하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조언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주제가 학문적 차원에서 혁신적인 것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학문을 조금이라도 연구해 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혁신이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연구 업적이 쌓이고 쌓여 탄생된다는 것임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빛과 소금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내가 빛과 같은 존재인지 혹은 소금과 같은 존재인지를 자문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소금이란 맛 좋은 음식에 반드시 첨가 되어야 하며 빛 역시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소금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 혹은 빛이 계속헤서 유지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소금은 결코 한 순간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소금 결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햇볕 및 바람과 같은 환경의 요소도 중요하고 생산되기 까지 20일에서 25일 정도가 걸립니다. 

소금이 생산된다고 해서 과정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6개월간 창고에서 간수를 제거한 다음에서야 소금은 상품으로 판매되는데 작업 방식과 환경에 따라 소금의 품질과 종류가 달라집니다. 결국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나는 과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잘 성숙하고 있는가?”입니다. 즉 소금이 본연의 짠 맛을 내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듯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이러한 준비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이미 저마다 소금으로 탄생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 안에서 짠 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탄생 되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야말로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역할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이 동일한 밀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빛은 영롱하지만 또 어떤 빛은 희미하고 위태롭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은 점점 더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그 과정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이미 우리가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 자신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과정이 어떠한지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짠맛이 덜하다고 해서 혹은 스스로 발하고 있는 빛이 약하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성숙해지는 맛 그리고 더욱 밝아질 빛을 지향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시기를 미뤄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가 너무 늦춰지다 보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모든 행실이 점차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너희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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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녹여
다른 것의 맛을 살리고,
생명을 보존합니다.

자기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합니다.

소금은 말없이
모든 음식에 스며듭니다.

너무 많으면 짜고,
너무 적으면 싱겁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바꿉니다.

내어줄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감사와 은혜라는
소금의 맛을
잊어버리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작은 감사가  큰 은총을
다시 살립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녹여 세상을 살리는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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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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