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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6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10|조회수16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6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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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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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41k74b6Ho
[작은형제회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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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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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z8pUWN-e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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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덧칠하는 사람들>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뒤흔드는 아주 엄중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아주 위험한 풍조에 빠져 있습니다. 귀에 쓴 약은 뱉고 달콤한 사탕만 삼키려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고해소 안팎에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부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옥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사람을 그런 곳에 던지시겠어요? 지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에 십일조가 웬 말입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꼭 물질을 바쳐야 하나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가짜 복음의 실체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판관이 되어 하느님의 법을 재판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조작 성향이 초래하는 영적 파국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입니다. 독재를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이 처음에 피로 써 내렸던 위대한 칠계명을 하나씩 교묘하게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어기고 자기들이 침대에서 자고 싶어지자, 밤중에 슬그머니 글자 몇 개를 덧붙여 고칩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라고 말이죠. 술을 마시고 싶어지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뒤에 "지나치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수정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기괴한 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글자 한두 개를 고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타협과 조작이 결국 농장 전체를 처참한 노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되겠지.", "이 정도 십일조는 안 바쳐도 하느님이 봐주시겠지."라며 한 자 한 획을 고치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의 법전은 순식간에 사탄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설계도에 인간의 속된 손을 댈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바로 스페인 보르하 성당에서 일어난 예수님 벽화 복원 사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귀한 얼굴을 담은 19세기의 명작 『에체 호모』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떨어져 나가자, 히메네스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좋은 의도로 붓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예쁘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가 어땠습니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선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위대한 작품에 손을 대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무서운 교만이 명작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율법을 내 입맛대로 수정하려 드는 행위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지옥을 지우고, 형편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빼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원숭이 모양으로 짓밟는 영적 히메네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이자 사랑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처럼 보입니다. 획 하나가 삐져나오고 안 나오고에 따라 단어의 뜻이 '하느님'에서 '우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성한 틀입니다. 이 틀을 내 육신의 편안함에 맞추기 위해 찌그러뜨리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닮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조작하는 것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지혜롭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며, 스스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는 자해 행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지키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자 한 획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명하여 영원한 승리를 거둔 위대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머스 모어입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의 결혼 인연을 전면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 했을 때, 영국의 모든 권력자와 주교들까지 국왕의 뜻에 맞추어 교회의 법을 적당히 수정하고 타협했습니다. "왕의 결혼 하나 눈감아 준다고 나라가 망하겠느냐,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 한 줄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라며 모두가 한 획을 지우고 타협의 붓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단 한 줄의 서약도, 단 한 자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융통성 없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단 한 획도 조작하지 않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양심의 성인으로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 삶의 형편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는 뷔페가 아닙니다. 율법의 완벽한 설계도에 내 핑계와 타협이라는 인간의 가짜 붓칠을 더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침몰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 지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씀의 한 자 한 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처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순명과 경외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완전한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안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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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제 이론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지혜입니다. 한곳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 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고객의 투자 성향을 묻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있고, 안정적인 투자도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분산할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하나 정해야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를 여러 곳으로 설정하면 결국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붙잡으려 하면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한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고,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의 차이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다시 협상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긴장과 불안 속에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힘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평화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신뢰와 명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수가 많고 시설이 좋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살아가며 많은 제약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나누고, 더 따뜻하게 함께합니다. 장례가 나면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도 세상의 성공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투자는 분산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모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시작됩니다.

엘리야처럼 혼자 남은 것 같아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랑입니다.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주님을 향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전쟁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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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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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율법을 존중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당신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충만히 드러내셨음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은총의 도래를 예고하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마치 교사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Contra Faustum, 19,7 요약) 즉, 율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따라오신 이들을 은총 안에서 충만히 채워 주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작은 계명조차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서도 충실하다. 그러나 작은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큰 계명도 가볍게 여길 위험이 있다.”(Hom. in Matth. 16 요약)라고 경고한다. 작은 계명 안에도 하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역시 이와 일치한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계명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랑 안에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40, 42항 참조)

율법은 억압을 위한 족쇄가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외적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내적 정신, 곧 사랑과 자비를 살아내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작은 계명 안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작은 친절, 작은 희생, 작은 순종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성 베네딕토 규칙서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작은 시작이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점차 완전함에 이른다.”(Prol. RB 요약) 우리는 작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작은 계명도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기에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교부들은 작은 것의 충실함이 큰 것의 충실로 이어진다고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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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꺼이 오롯이>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기꺼이 오롯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믿음을
믿음만을

믿으십시오

희망을
희망만을

희망하십시오

사랑을
사랑만을

사랑하십시오

기쁨을
기쁨만을

기뻐하십시오

슬픔을
슬픔만을

슬퍼하십시오

품음을
품음만을

품으십시오

나눔을
나눔만을

나누십시오

돌봄을
돌봄만을

돌보십시오

섬김을
섬김만을

섬기십시오

살림을
살림만을

살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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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된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된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주변도 정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한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한다. 

“주님,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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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목적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큰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 노력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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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여기서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려고(또는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완성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오해했고, 유대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에는, “유대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것은, 겉으로만 철저한 것, 즉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위선이 유대교를 망친 주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성전 정화’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는, ‘파스카 축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잘 지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제사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위선이 파스카 축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거나 그저 몇 마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에서 보여주신 그 열정과 철저함과 단호함은 파스카 축제 실행과 하느님의 뜻 실천을 완성시키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잘 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위선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것은 무시하면서 안 지킵니다. 19절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분류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ㄱ.22)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7-28)

율법주의자들은(위선자들은) 외적인 율법 준수만 강조하다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이고, 하느님 없이 율법만 지키다가 하느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율법 실천의 완성에,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요한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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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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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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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맨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선에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구마를 하시면서 정결례 법을 어기시고, 또 단식법을 어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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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며,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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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오늘도 주님께서는
미완성의 자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삶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결코 형식과 구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지 못한다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의 참뜻을
완성하셨습니다.

계명에 머물면
울법이지만,
사랑이 되면
완성입니다.

더 많은 규칙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형식에 갇힌
우리들을 
다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마음의 중심이 되면
계명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삶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미완성의 자리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참된 완성은 
날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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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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