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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7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11|조회수52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7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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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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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XeGfZS1QLw
[서울대교구 김학수 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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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오른팔 바르나바!>

예루살렘에 본산을 두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모공동체이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최초로 정착되기 시작한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큰 관심, 즉 기도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교회는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감독 한 명을 임명했는데, 그가 곧 바르나바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바르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용기를 고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키프로스 출신이고, 직업은 레위계 성직자였습니다.

금수저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용모에 탄탄한 학문, 깊은 신앙 등,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대세남이었습니다.

원래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 번 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 만큼, 교우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바쳤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초대교회의 한 멤버로서 날개를 달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로부터 홀대받고 의기소침해 있었으며, 곤경 중에 처해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르소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습니다. 바르나바는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만 1년 동안 의기투합했습니다. 두 분의 합심 결과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공동체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첫 번 째 해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바오로라는 큰 인재를 알아봤고 지지한 것이 아닐까요? 바르나바 사도는 지금은 비록 곤경 중에 처해 있지만, 바오로야말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적임자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다 세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문호가 활짝 개방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완고했던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를 설득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이 모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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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망해도 이득인 사랑 장사>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는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 환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 주간만 나의 처방을 따른다면 당신은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처방이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해서 그걸 실천하면 됩니다.”

값비싼 약이나 까다로운 처방을 내릴 것을 기대하고 찾아온 많은 환자들은 대부분 이 싱거운 처방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방을 따른 사람에게는 당장 특효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남을 돕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더니 우울증이 없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은 부메랑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주는 만큼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돌아올 것을 위해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기쁘려면 기쁘게 해 주어야하고 사랑받으려면 사랑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랑도 원금이 보장되는 장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내가 평화를 빌어주는 사람이 그 평화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그 평화는 소진되지 않고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랑은 준만큼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사처럼 이익까지 얹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제자가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음식을 청했을 때 모욕 받고 매 맞으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라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없는 것을 가지게 되니 항상 이익인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투자할 때 원금을 잃지 않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투기성 투자보다는 안전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10년은 가지고 있지 않을 주식은 구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갑자기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기다리다보면 꼭 오르고야마는 그런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투자를 잘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도 반드시 이득을 내는 장사라고 믿으면 누가 사랑에 투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투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손해 보는 일이 없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어주십시오. 결코 손해 보는 일 없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를 받아들이면 나에겐 평화가 사라질까요? 배로 늘어납니다. 평화를 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당신 평화로 더 채워주실 것이고 또한 나 때문에 평화를 얻은 사람이 또한 나에게 평화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의 투자법은 ‘선교’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께서는 내려오시면 우리를 선교의 길로 이끕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로 파견 받습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이 그 기쁜 마음을 유지하고 커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100% 수익이 보장되는 가장 안전한 장사입니다. 그 보상은 영원한 사랑이고 영원한 행복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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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동안 후배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와서 교포 사목을 시작하였으니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3월에 신부님 본당으로 ‘사순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지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상 깊었던 것은 기억력이었습니다. 신부님은 12년 전에 만났던 달라스 본당 교우들의 모습과 그때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의 기억력은 감탄할 만했습니다. 그 비결은 단순했습니다. 기록하고 저장하는 삶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교우들과 함께했던 영상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억은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친화력이었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보내시면서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적응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운동과 음악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렸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결국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합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품으로 공동체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했던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도 바르나바의 헌신과 열매였습니다. 저는 문득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가 떠올랐습니다. 두 선수는 경쟁자였지만, 그 경쟁은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키는 경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선의의 경쟁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르나바가 먼저 길을 열었고, 바오로 사도가 그 길 위에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바르나바가 감성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면, 바오로는 이성적으로 복음을 정리하고 확장했습니다. 바르나바가 공동체를 품었다면, 바오로는 서간을 통해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다릅니다. 바르나바도 바오로도 모두 하느님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루듯, 각자의 은총과 사명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겸손이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의미를 향해, 가치를 향해,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부님 본당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본당도 2027년에 설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두 공동체 모두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오신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여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두 본당의 50주년은 분명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나바처럼 위로하고, 바오로처럼 증언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또한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길이 되고, 희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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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마태 10,7)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의 손길이 이제 제자들의 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은 이성적 설명이나 설득보다 구체적 치유와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 나라의 선물이므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 빠른 인간 세상의 논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복음의 논리는 값이 없기에 값진 것이고, 그 기쁨은 대가가 없기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자들은 가난하게 파견됩니다. 금, 은, 돈, 자루, 두 벌 옷, 신발,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약한 모습으로 길 위에 서며, 그 자체가 하느님만을 신뢰한다는 예언자적 표지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대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책임지신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6,25-26 참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마땅한”(10,11) 사람을 찾아내 한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마땅한 사람’의 열린 태도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가난한 제자가 먹거리와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열려 있고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 나라의 부유함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파견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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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 바르나바의 소명과 정체성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증언한다. 그의 별명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는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한 영적 정체성이다. 그는 재산을 나누어 공동체에 봉헌했고(사도 4,36-37), 바오로 사도를 공동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다리를 놓았다. 이 점에서 바르나바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초대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사도들의 덕행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살았다.”(In Acta Apostolorum Hom. 25 의역) 바르나바는 바로 이런 사도의 전형을 보여 준다.

2. 거저 받은 은총과 거저 주는 삶
오늘 복음의 핵심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이다. 은총(Gratia)은 결코 거래적 보상이 아니라, 무상의 선물이다. 따라서 제자는 그 받은 은총을 다시 무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받았으니, 그 선물을 다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야 한다. 은총은 나눌수록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충만해진다.”(Sermones de Gratia 의역) 바르나바의 삶은 바로 이 말씀의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3. 사도의 단순함과 자유로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팡이도, 여벌 옷도, 돈주머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단순히 가난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자유로움을 가르친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떠난 것은, 인간적인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싸우게 하기 위함이었다.”(Hom. in Matth. 의역) 또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다케는 참된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탐욕과 이익 추구를 언급하며, 복음 선포자는 청빈과 무상이 본질이라고 가르친다(디다케 11,3-6 의역).

4. 교회의 가르침과 오늘의 적용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이렇게 강조한다. “평신도들은 받은 은혜를 거저 나누며, 말과 행실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상을 복음의 정신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3항 요약) 바르나바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거저 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세우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일치를 위해 힘쓴 참된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다.

5.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 바르나바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받은 은총을 ‘내 것’으로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을 계산하거나 보상과 교환의 차원에서 이해하지는 않는가?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 재물을 거저 나누며 이웃에게 ‘위로의 아들·딸’로 살고 있는가? 바르나바처럼 우리의 존재가 공동체 안에서 ‘위로와 평화의 통로’가 될 때,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

6. 맺음말
성 바르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삶 전체를 거저 내어주며, 복음을 위하여 마침내 피까지 흘린 증인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의 전구를 청하자. 우리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고,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드러내며,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작은 사도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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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와 함께 있으니>

마태오 10,7-13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나와 함께 있으니>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믿음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믿음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희망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희망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사랑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사랑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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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는 없다고 한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다. 

이곳에 선교 사제가 파견되어 살고 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며 이제는 중학교도 개설하였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는데 공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었다. 검진 결과 “영양실조”였다.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는 말한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한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성실한 일꾼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신부는 ‘한눈팔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걷고 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다. 사실 많이 움켜쥐고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게 된다. 그러나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확을 얻게 된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한다. 또한 우리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으로 배려하며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하길 바란다. 

“주님, 온전한 믿음으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에 투신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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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모은 참모는 대부분 대통령 자리를 놓고 싸우던 라이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각을 사람들이 ‘적수들이 모인 팀’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뛰어난 정치가들이지만, 링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모아 링컨은 하나의 팀이 되게 했습니다. 그 방법을 역사학자들은 그의 유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겸손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공개 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링컨을 향해 ‘이중인격자’라며 비난했습니다. 이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솔직히 제가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라면 이따위 얼굴을 내놓고 다니겠습니까?”라면서 스스로 자기 비하를 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유머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과도 함께 최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화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화합의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겸손이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시고 이로써 하나의 팀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철학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돈, 여행 보따리, 여벌의 옷, 심지어 신발과 지팡이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는 물질적 준비에 의존하지 말고, 선교 여정을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5,12)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이를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잘 전하고 있을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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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여기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믿고 회개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오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말’로도 선포되고 ‘사랑 실천’으로도 선포됩니다. 둘 중에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받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대가로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겪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18-20)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돈으로 사거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2)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줄이면, “빈손으로 떠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와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빈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지고 갈 것은 믿음과 사랑과 자비 등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너희는 먹는 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는 ‘부자들에 관한 지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

신앙생활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과 먹을 것이 있는데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고민하는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정말로 굶주리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남겨 주신 숙제 같은 것입니다. <굶주리는 처지가 아니고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고민하고 집착하는 경우라면, 또 ‘믿음의 힘’은 안 믿고 ‘돈의 힘’만 믿는 경우라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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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정녕 위로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둘 생각으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바오로는 비로소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바로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신자가 바오로를 두려워할 때 바르나바만이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인도해 줍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곳과 가까운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외로움 속에 있던 바오로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소아시아 일대를 함께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렇듯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건넨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밝힌 본문이 없습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마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를 믿어 주고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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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이어서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은 주님께 거저 받은 권한과 능력을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거저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의 은사는,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직무적 사명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권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저마다 지닌 은사(카리스마)와 재능(달란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와 재능은 그 사람의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하느님의 선물로 서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은 그 자체로 선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명이 되지만, 가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높이는 데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사에 생명을 주고 그 은사가 참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선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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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는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르나바는 제자들이 맨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어 사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린 것에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께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더욱이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다섯 설교 가운데 하나로 ‘파견 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과 사명을 열두 사도들이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거저 받은 것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은 얼마나 될까요?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 시간, 가족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된 믿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사랑과 기쁨, 희망,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먼저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세상 모든 형제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 그리고 주위 형제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위로와 나눔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축복과 평화를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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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하고,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ㅣ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할 직무가 주어졌지만,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 나라는 우리가 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도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 나라가 주어졌고, 하늘 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 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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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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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8)

거저 주려면 쓰고 남을 때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큰 유혹입니다. 가지려는 욕구는 끝이 없어 우리가 남는 것을 자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혹시 남아도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고 진짜 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아서 버리더라도 남에게 거저 주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거저 주려면 모자랄 때 주어야 합니다. 항상 모자라기에 우리는 남아도 여전히 모자람을 느낍니다. 모자람을 느끼는 것은 우리 존재가 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모자라고 불완전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모자람을 다 채우려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욕심이라고 합니다. 채워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모자람을 받아들일 줄 알 때 행복합니다.

거저 주려면 우리가 존재의 모자람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세상을 다 가져도 채울 수 없는 존재의 모자람은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지 채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존재로서 모자람은 주님이 채워주시는 공간입니다. 우리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모자라도 살아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자람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거저 주어야 빚을 갚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준 부모에게 빚지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준 자연과 환경에게 빚지고, 우리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맡기신 창조주께 진 빚을 우리가 거저 줌으로써 갚아야 합니다. 빚을 지고 있지만 빚진 줄 모르고 사는 우리는 거저 주어야 빚을 갚습니다. 사실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 진 빚을 갚을 뿐입니다. 살면서 거저 주지 않으면 죽으며 억지로 거저 주고 떠나게 됩니다.

거저 주는 것은 우리가 비우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다 비워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비우고 생각도 비우고 몸도 비워야 비로소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남김없이 비워야 들어가는 곳이며, 하나라도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빈손으로 우리가 함께 만나는 곳입니다. 거저 주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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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ㄷ)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도가 되자!>

오늘 복음(마태10,7-13)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7-8)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10,9-10ㄱ.12)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이 드디어 세상 안으로 파견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지만, '사도'는 '세상 안으로 파견된 이'로서, 예수님을 따름과 동시에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제자인 동시에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가야 하고,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했던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사도11,21ㄴ-26; 13,1-3)는 바르나바 사도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11,24)

'그리스도인'은 어떤 지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도가 되려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먼저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착해야 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 자체가 복음화'입니다.

오늘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도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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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물이 고이면 썩고,
흐를 때 비로소
맑아집니다.

우리의 삶 또한
철저히 거저 받음에서
시작됩니다.

맑은 하늘도 거저이고,
시원한 바람도 거저이며,
빛나는 유월의 햇살도 
거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주신 선물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사랑을
세상에 거저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 성장하고,
사랑을 나눌 때 성숙해집니다.

은총은 움켜쥘수록 줄어들고,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총은 소유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계산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손해와 이익의 경계를 넘어서는
참된 자유로 이끄십니다.

받은 은총을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하며 살고, 감사하는 사람은
기쁘게 나누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참된 사명입니다.

참된 신앙은 거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저 나누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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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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