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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18 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성화의 날)]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12|조회수77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18
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성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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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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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0vGbOYmkHE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ACN 한국지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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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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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NvaTbGWEKM(2020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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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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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한국에서는 소풍과 수학여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안전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서열화됩니다. 그러나 소풍과 수학여행에서는 달랐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서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친구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소풍을 가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응원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성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소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풍과 수학여행은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의 공간도 아니고, 규율의 공간도 아닌, 관계가 살아나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사랑입니다. 평가하기 전에 사랑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학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길 위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소풍과도 같고, 수학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평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불러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마음, 부족해도 품어주시는 마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소풍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잘 다루고, 또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봉사할 것입니다. 그 모든 모습이 소중합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점수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신앙은 평가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비교하기보다 격려하며, 평가하기보다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당신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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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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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1. 예수 성심의 의미
초기 교회로부터 예수 성심(聖心)에 대한 언급은 이미 존재했다. 성심은 단순히 신체적 기관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가운데 사랑의 중심이자 구원의 샘으로 이해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심장은 교회의 탄생을 낳은 샘이며,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사들의 기원이 되었다”(Tractatus in Ioannem 120,2 의역)라고 말한다.

이는 요한 복음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에 대한 교부적 해석으로, 교회가 성체와 세례성사로부터 태어남을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195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상한 구세주의 심장에서 구원의 샘이 터져 나와 온 인류에게 은총이 흘러넘친다. 성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다.” 따라서 성심 공경은 단순한 감정적 신심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사랑,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응답이다.

2. 역사적 전개
13세기 이후 독일 신비가들과 시토회 전통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신심이 보편 교회 안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17세기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을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에게 발현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냉담과 배은망덕에 찢어지고 있다. 너는 이 마음을 공경하게 하고, 보속의 첫 금요일을 바치게 하여라.”

이 요청에 따라 교회는 성체 성혈 대축일 후 첫 금요일을 성심 공경의 날로 정했고, 후에 비오 9세 교황이 보편 교회의 대축일로 선포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랑에 대한 감사의 날로서 더욱 깊은 전례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한다.

3. 복음 묵상: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오늘 복음(마태 11,25-30)은 예수 성심의 핵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25절)라고 하신다. 이 “철부지 어린이들”은 세속적으로 무력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순명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은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방식이다. 그분은 힘이나 권세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겸손으로 구원을 완성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초대는 곧 그분 사랑의 방식을 배우라는 부르심이다.

4. 성심과 성체성사의 연관성
예수 성심 대축일이 성체 성혈 대축일 직후 금요일에 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체는 곧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실체이며, 성체 안에서 우리는 “상한 심장”의 사랑을 체험한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듯이, 지금도 우리는 성체와 세례의 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성사적 표현이며, 우리의 성체성사 참여는 곧 성심 안에 들어가 그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다.

5. 오늘의 실천과 성찰
예수님의 성심은 단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 사제들에게는 성심을 닮아 사랑으로 봉사하는 마음, 평신도들에게는 가족과 이웃 안에서 그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는 마음이 요청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이며, 성체성사와 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사랑의 표현이다.”(478항)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랑의 도구가 된다.

6. 결론
예수 성심 대축일은 단순히 신심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소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 안에 평화를 누리며,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예수 성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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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으니>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으니>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느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넘겨주셨으니

믿음으로
믿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희망을
넘겨주셨으니

희망함으로
희망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넘겨주셨으니

사랑함으로
사랑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빛을
넘겨주셨으니

빛남으로
빛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넘겨주셨으니

기뻐함으로
기뻐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움을
넘겨주셨으니

고움으로
곱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움을
넘겨주셨으니

부드러움으로
부드럽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곧음을
넘겨주셨으니

곧음으로
곧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품음을
넘겨주셨으니

품음으로
품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눔을
넘겨주셨으니

나눔으로
나누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돌봄을
넘겨주셨으니

돌봄으로
돌보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살림을
넘겨주셨으니

살림으로
살리게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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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움입니다.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리면 모두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결코 절망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7)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자주 묻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그것이 겸손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주시어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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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는 전축을 사 오셨습니다. 전축은 ‘전기축음기(電氣蓄音機)’의 줄임말로, LP(레코드판)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라디오, 앰프, 스피커 등이 하나로 통합된 오디오 시스템을 가리키는 옛 표현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A면을 다 들으면 B면으로 뒤집어서 세심한 손길로 바늘을 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또 내구성이 약하고 먼지에 대한 취약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compact disc)가 등장했습니다. 간편한 데다 음질도 깨끗하고 선명했습니다. 이 CD가 음악시장을 완전히 평정할 줄 알았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CD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음원의 등장과 인터넷을 이용한 음원 스트리밍으로 전체 음반 시장이 급격한 속도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의 엘피판이 자연스럽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며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또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인 분이시기에 그분께 집중함으로 인해 사랑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또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 직무를 더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을 윽박지르는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이를 어루만지는 온유함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는 겸손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멍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농경 문화에서 ‘멍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었습니다. 어린 소가 멍에 메는 법을 배울 때, 힘센 어미 소와 한 멍에를 매게 하여 어미 소가 사실상 모든 짐을 감당하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는 것은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한 멍에를 매시고 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삶 안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결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예수님 성심 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하고 내 짐은 분명 가벼워집니다. 특별히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사제직이라는 멍에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무척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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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5-30)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멍에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닌가?”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짊어지신 멍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고 가는 ‘나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한 일이다.”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한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멍에를 완전히 없애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벗기고 덜 무거운 멍에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과 30절의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반어법적 표현일 뿐이고, 이 말의 진짜 뜻은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멍에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으면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라.”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 너희에게 참된 해방과 안식을 주는 열쇠다.”입니다.

<지금 ‘열쇠’ 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쪽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해방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고, 스스로 멍에를 벗는 능동적인 응답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이 가엾다고 울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31)

이 말씀은,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여라.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공경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25절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말씀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감추시고’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감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자들이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이고, 그런 자들이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입니다.>

4)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한눈을 팔다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이미 벗어버린 짐과 멍에를 다시 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2베드 2,20-21)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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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준석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라고 느낄 때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제안하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말들 중에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집착하고 결국 내 것을 찾으려하는 속성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일종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검증은 ‘희생’입니다.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면서 다른 이의 참다운 이익을 도모하는 사랑은 결코 거짓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옆구리에서 솟아나온 물과 피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셨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사랑을 받아 누립니다.

물로 상징되는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깨끗하여지고, 피로 상징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양식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살기로 다짐합니다.

‘희생’을 동반한 진정한 사랑,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성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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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손우배 요셉 신부님]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

언제인가 결혼을 앞둔 한 신랑이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던 게 생각납니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제 곧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매사가 즐겁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여유 있고 친절하게 대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조차 흥에 겨워 일하는 그에게 우리는 “뭐 좋은 일 있어?”라고 묻게 됩니다. 사랑이 가득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또 내가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면, 생활이 즐겁고 생기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엔가 있고,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함께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합니다.

우린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온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함을 느낍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며, “내 안에 주님 사랑이 가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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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넉넉한 마음, 편한 멍에>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오라는 말씀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따듯하게 합니다.  ‘오너라.’는 말씀은 지친 자녀를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겨 안으시는 어머니의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느껴집니다.

‘모두’라는 말씀은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느껴져 우리를 안심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없애 주겠다.’ ‘고생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도 벗겨주시고, 고생도 없애주시고 싶어 하실 것이고, 그럼에도 벗겨주시지 않고, 없애주지 않으시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짐을 벗겨주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지만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야말로 이를 악 무는 더 큰 사랑의 마음이겠지요.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식이란 주님이 짐을 지는 방식이지요.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방법이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편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편하면 짐이 가벼워집니다. 배낭이 몸에 딱 맞아 편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군에 있을 때 배낭이 불편하여 고생을 하다가 몸에 맞는 배낭을 메니 배낭에 많은 것을 집어넣고 구보를 하여도 훨씬 편하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편한 멍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거칠고 거세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마음은 작은 짐도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 목줄을 매는 개가 목줄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목이 옥죄는 것처럼. 그러나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더 큰 짐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견딤을 통해 더 큰 힘이 생깁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이고 힘이 들어와야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힘내고의 역학 관계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겠습니다. 온유한 마음 이상으로 짐을 져야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는 순간, ‘왜 이것이 나에게?!’라는 마음을 거두는 순간, 자기가 지는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반기는 것 또는 어여쁜 것이 되고 짐을 지는 행위는 노역이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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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11,25-35)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는 말씀'과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제들을 기억하는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인 예수 성심을 다시금 기억하고 이를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무대리자'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제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축하하고, 사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내'입니다.
... ... ...
예수님의 마음은 '완전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오늘 제1독서 신명 7,6-11 참조)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오늘 제2독서(1요한 4,7-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7.10)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1.16ㄴㄷ)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사제들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들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됩시다!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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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9)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복음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불안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깊은 갈증에 대한 
참된 해답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니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성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언제나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을 만납니다.

사제 성화의 원천 또한
바로 예수 성심에 있습니다.

예수 성심은 사제의 마음이
머물러야 할 자리이며,
사목의 출발점이자
성화의 샘입니다.

사제 성화는 신앙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며,
교회 쇄신은 무엇보다도
사제의 성화에서 시작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품으셨고,
겸손함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고, 십자가는 
그 사랑이 이룬 완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사제 성화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듣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 성심을 닮아 갈수록
교회는 새로워지고,
세상은 더욱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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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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