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19
6월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연중 제1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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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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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F35xPrEdQw
[서울대교구 김학수 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워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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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q20cLFYyIY(2021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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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되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면서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
『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 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그때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는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너무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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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길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에만 머무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더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쳤다.”라는 소문까지 듣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입니다.” 이 말씀 또한 마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말씀도 가슴에 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간직하고, 아파도 받아들이는 것이 성모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받아들이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진,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 여러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다섯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첫째,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라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수난, 부활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서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둘째, 성경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식은 자주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으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을 배우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고백성사를 자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 죄가 쌓이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고백성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의 고백성사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넷째, 미사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사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다섯째, 단식과 절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훈련입니다. 절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특별한 신앙인의 길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기본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국 성모님의 마음,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건강과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드님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의 다섯 가지 당부를 마음에 품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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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가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 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 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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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1. 축일의 유래와 의미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에 의해 신심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온 세상을 마리아의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안에 뿌리내렸다. 이후 예수 성심 대축일 바로 다음 날을 성모 성심을 기리는 축일로 자리 잡았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마음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되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모 성심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일치된 사랑의 마음이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마리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어떻게 결합하여 있는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되새긴다.
2. 복음의 신학적 의미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본문에서 마리아의 신앙 여정을 보여 준다.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흘간의 고통: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예시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흘의 고통을 묵상하며,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당하신 고통을 이미 성전에서 맛보았다.”(Sermones 의역)라고 한다.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라고 하신 말씀은 그분의 하느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며, 마리아는 그 신비 앞에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 간직하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 준다.
“간직하였다.”(συνετήρει)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되새기는 신앙의 태도를 나타낸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말씀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Homilia in Lucam 의역)라고 말한다.
3. 교회의 가르침
교회 헌장은 마리아의 성심이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동정녀는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순명의 모범이 되었다. … 그러므로 성모는 믿는 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서 제시된다.”(53, 58항 의역)
성모 성심은 그리스도의 성심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구원의 동반자로서 마리아가 지니는 사랑과 고통의 참여를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리라.”(Haurietis Aquas, 1956)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의 깨끗한 성심은 인류 구원의 제단 위에 예수님과 함께 봉헌되었으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불가분의 표징이 되었다.”(의역)
4. 신앙의 길: 성모 성심 본받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하느님을 잃어버릴 때: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예수님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주님을 자주 잃어버린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다시 성전으로, 하느님의 뜻 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찾게 된다. 묵상의 태도: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 위에 서야 한다.
깨끗한 마음: 성모 성심은 ‘티 없는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도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지향해야 하겠다.
5. 삶에 적용
말씀을 간직하기: 매일 복음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주님을 찾기: 어려움과 방황 중에 세상적인 해결책만 찾지 말고, 성전으로 돌아오듯이 주님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사랑의 마음 닮기: 마리아처럼 깨끗한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대하며,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6. 결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단순한 신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마리아의 온전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도 성모 성심을 본받아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다시 찾으며, 깨끗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마리아의 성심은 교회가 거울로 삼아야 할 완전한 성소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배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1986년 성모 성심 강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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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속에>
루카 2,41-51 (예수님의 소년 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마음속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비운
마음속에
신비 넘치네
열린
마음속에
믿음 스미네
찾는
마음속에
희망 샘솟네
고운
마음속에
사랑 영그네
참된
마음속에
진리 머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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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마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를 가득 채워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성모마리아는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 주십니다. 성모마리아는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경청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면 매우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장19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장 52절에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뜻 앞에서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이, 겸손하게 서 있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께서 당신을 완전히 차지하시고 당신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끔 자신을 성령의 손에 내어 드리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경청, 의탁의 자세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 서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게끔 내맡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성모님께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ㅍ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속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92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것의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계셨고, 이제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주검을 품에 안으셔야 했던 어머니,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전념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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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일까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15%를 써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뇌의 1%만 더 써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손상하는 뇌가 10~2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뇌의 부분이 80~90%나 되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재력입니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한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습니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보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순명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신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사건을 기도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룩한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벽한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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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41-51)
1) 우리 교회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성모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잃은 아들을 애타게 찾으신 성모님의 마음과 죄인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들을(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2)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 계셨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성모님도 함께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도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 마음과 사랑에 응답하려면, 회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관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3-35)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8-20)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마음속의 나쁜 것들을 억누르는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고, 오직 마음의 깨끗함만을 희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마귀를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마르 9,29),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기도’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성모님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쁜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좋은 생각과 말들로만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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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왜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인 1942년에 전세계를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이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로마 전례력이 개정됨으로써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인 토요일에 성모 성심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성적인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된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영적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비체의 머리이며 만민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따라서 성모의 모성적 사랑은 성모의 덕행과 내적 생활, 하느님께 받은 갖가지 은총과 연결됩니다. 심장으로 표현되는 성모 성심은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음이므로 그에 합당한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더 우리의 삶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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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님]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
지난 월요일 청룡산에서 아빠 빠진 꿩 가족을 만났습니다. 엄마 꿩 주위에 병아리 꿩들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털이 보송보송 난 꿩 병아리들이었습니다.
나를 마주친 엄마 꿩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습니까? 엄마 꿩은 새끼들이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길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서있었습니다. 엄마 꿩은 “내 새끼들을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듯 했습니다.
엄마 꿩의 그 사랑을 범할 수 없어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습니다. 이윽고 길을 건너 꿩 가족들은 낙엽을 신나게 뒤적이며 평온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길을 버티고 서있던 그 엄마 꿩의 사랑은 저에게 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지만,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냥 길 한 가운데 멈추어 선 그 엄마를 어찌 하찮은 날짐승 한 마리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 마리 까투리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저에게 전해진 엄마 꿩의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꿩 가족을 뒤로하면서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의문표를 저의 가슴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저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 파묻혀 그 고귀한 사랑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님의 마음을 우린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덜거리는 걸레처럼 찢겨질 대로 찢겨진 통고의 심장을 우린 눈물도 없이 그저 사랑이라 일컫습니다.
아들의 절규에 구멍이 뻥 뚫린 어미의 마음을 얄팍한 감상에 젖어 잠시 눈시울을 적시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서 그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짓거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갑남을녀가 된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돌아오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절규에 이제 마음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음을 어머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담긴 사랑과 고통을 이젠 우리 마음에도 담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밀어내면 사랑이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어미 꿩이 그랬듯이 언젠가 새끼 꿩도 엄마처럼 그렇게 새끼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어미 새가 저에게 전해준 그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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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당하는 고통>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정녕 복되십니다.”
성모님께 있어서는 모든 이가 부러워할 정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복되다’라고 딱히 드러낼 만한 구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생애 막바지에 가서는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성모님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정녕 복되십니다. 고통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제목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의 버금가는(함께하는) 고통”(Passion of Christ and Compassion of Mary)으로 달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낳을 때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까지 늘 함께하셨기에,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복되다’라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며,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웠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학교’에서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것인지를 배울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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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교황 비오 9세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나셨습니다.
언제나 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 또한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받아들이시어 저희 또한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그 사랑의 성심으로 제 형제들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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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도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 어머니시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도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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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말씀을 통해 성모님의 마음을 만나는 날입니다.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입당송).
미사를 여는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을 임신하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노래한 성모 찬송의 '한 줄 요약' 같습니다. 미사의 시작부터 기쁨과 환희가 펼쳐지는 것 같네요.
사실 우리는 "성모성심" 하면 성모 칠고를 상징하는 칼 일곱 개에 심장이 찔리신 성모님 성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그분의 인생이 고통 투성이였고, 인류의 어머니로서 무수한 자식 걱정에 근심이 그칠 날 없는 숙명을 보여 주는 것 같지요.
하지만, 평생 사랑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인생을 묻는다면, 늘 고통과 비탄 뿐이었다고 푸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면서 사랑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환해낼 것 같지 않나요? 마리아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침묵과 인내로 품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교회가 마리아를 기념하며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루카 2,46)
복음은 예루살렘 축제 후 소년 예수님을 잃었던, 부모로선 십년 감수했을 사건을 들려줍니다. 외아들을 찾아 헤맨 사흘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겠지요. 사흘은 마리아께서 먼 훗날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견뎌야 할 고통의 사흘을 예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다행히 예수님을 찾긴 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사흘 졸인 가슴에 사과는 커녕 영문 모를 당당함까지... 아마도 마리아는 어미로서 한계를 느끼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을까요? 고통? 조바심? 두려움? 괘씸함? 한계? ... 놀랍게도 오늘의 말씀은 제게 '그건 기쁨이었다'고 속삭이십니다. 마리아의 성심 안에 가득 찬, 티없이 깨끗한 기쁨을요.
누군가 인생의 위기를 물을 때, "아, 정말 진짜 힘들었어요. 죽을 뻔했다니까요" 하며 사건의 초반부터 구구절절 한숨과 눈물을 섞어가며 과정 위주로 들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러게요 분명 어려운 순간이었는데 그럭저럭 지나갔어요. 견딜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며 승화시킨 결과를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요. 아마도 전자는 고통과 슬픔이, 후자는 감사와 기쁨이 마음속에 더 짙게 간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그의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되고 영성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제1독서는 이렇듯 마리아의 기쁨을 예언합니다. 풍요하고 순탄해서도 아니고 누리며 대접 받는 삶이어서도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축복과 구원과 의로움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져 의탁한 이에게 부여되는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녹록치 않은 삶에서도 마음속에서 기쁨을 길어올리시는 성모님처럼, 믿음과 의탁으로 마음속에 기쁨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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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얘야,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오늘은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예수 성심대축일에 이어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드님 예수님을 길러주신 어머니이시며 성요셉과 함께 가정을 꾸려 나가셨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유대인들의 가장 큰 빠스카 축제를 위해 예수님과 부모 요셉과 성모님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말씀이 세상에 오신 신비’대로 한 가정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가정은 보통 부모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나타는데, 복음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애타게 예루살렘에서 그를 찾으러 다니고, 마침내 성전에서 아들을 만났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가족의 성원을 일일이 밝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친 가족없이 외아드님과 성가정을 꾸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 그러니까 성전에서 그분과 부모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독자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오면서 아들이 친척들 사이에 있으려니 생각했다가 그들 속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되 돌아와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는 한편 반갑기도 하고 한편 놀라기도 해서 아들에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 습니까?”(루카 2,49)라고 반문합니다. 루카는 부모도 예수님의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2,50)라고 적으며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님의 모습은 루카의 표현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이셨습니다. ‘평범 속에 비범’이라는 말이 있듯,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질문하고 대답하는 모습, ‘제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모습을 성모님은 마음에 담아 간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이사 61,10)
예언자는 실의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위로하며 이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이 성취됨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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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간직하는 마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리고 난 다음 날에 성모님의 깨끗한 마음도 기리는데 오늘 저는 깨끗하심에 대해 다른 때와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통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면 마음 안에 지저분한 것들, 예를 들면 욕심 같은 것이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얘기해도 충분하겠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느 집에 죽치고 있던 악령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니 집이 깨끗이 치워진 채로 비어있었고 그래서 그 악령이 다른 악령들을 더 많이 데리고 오자 그 비어있던 집은 복마전으로 바뀐다는 얘깁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악령이 나가고 깨끗이 비어졌다면 성령을 모셔 들임으로써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더 많은 악령이 들끓는 복마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도 같은 뜻일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잡동사니나 티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나 깨나 하느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자나 깨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성령의 정배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삼종 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지금 우리는 하느님 말씀이라고 믿고, 그 말의 뜻이 뭔지도 알지만, 당시의 마리아는 믿기도 알아듣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 말을 바로 마음에서 밀어내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아들 예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행동과 말을 마음 안에 간직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깨끗한 마음일 뿐 아니라 간직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다른 수많은 말을 비어내고 하느님 말씀만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말씀을 마음속에 계속 잘 간직하여 완성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순간 깨끗한 마음으로 있다가 냉큼 모셔 들이는 것도 본받아야 하지만 들은 말씀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가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먹었다가 바로 뱉어내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에 우리에게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영원히’가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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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ㄴ)
<성모 성심!>
오늘 복음(루카 2,41-51)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말씀'으로, '환희의 신비 제5단의 내용'입니다.
'환희의 신비 제5단 :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어제는 예수 성심, 오늘은 성모 성심입니다. 5월은 성모 성심, 6월은 예수 성심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아들과 어머니는 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Fiat voluntas tua!"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마리아, 이 선택에 순종한 마리아는 이후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로서 한 생을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성심을 간직하셨고, 예수 성심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이런 모습으로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좋아하고,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의 공경을 받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성모 어머니를 닮아 '예수님'을 간직하고, '말씀'을 간직하고, '십자가'를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 전체를 묵상하는 묵주기도'가 '공염불'에 그치는 '죽은 기도'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본기도)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생명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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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오로지
깨끗한 마음입니다.
참된 지혜는
깨끗한 마음 안에
깊이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품고
세상에 전해 준 마음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성심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인간 마음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절망에 머물지 않고
고통을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원망보다 감사로,
조급함보다 기다림으로,
집착보다 내어맡김으로
살아가는 삶이
성모 성심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맑은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이나 욕심을
결코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가장 큰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를 품으시는
하느님으로 가득 찬
마음이십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마음에서
모든 관계는 새로워집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말씀을 익혀 가는
믿음의 밭입니다.
성모 성심과 함께
신뢰와 희망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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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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