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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21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15|조회수82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21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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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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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6dECTy4HwM
[서울대교구 김형섭 가브리엘(잠실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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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yEoChfQD-M (2020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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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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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나는 꽃이야’와 ‘감사해’가 공동체 안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교우가 함께 무대에 올라 하느님을 찬양했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가 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올해는 ‘인생’이라는 노래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교우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고 길었던 겨울/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보니 어느덧 봄이더라/ 숨 막히게 더운 여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참아내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온 길 돌아보니/ 나의 이야기 남아있고/ 빛바랜 기억과 흘린 눈물/ 우리의 인생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갈 길, 눈 들어보니/ 까마득해 보이지만/ 새겨질 발자국 하늘빛 미소/ 그것이 은총이라”

고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추억과 기억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사람을 잘못 만나서 쫄딱 망했던 기억, 공부 잘해서 의대에 갔던 아들이 지독한 스트레스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던 기억, 푸른 꿈을 안고 왔는데 아들은 평생 투석해야 하고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엄마는 혈액암으로 긴 투병을 해야 했던 기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여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투석하는 아들도 좋은 직장을 얻었고, 암 투병 중이지만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과 딸을 선물로 보내 주셨고, 지금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처럼 등불 같은 친구가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했었다고 합니다.

35년 저의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인생’의 가사처럼 추운 겨울도, 무더웠던 여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험난함의 길목마다 저를 지켜 주셨고, 좋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 첫해에 ‘유행성 출혈열’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요, 인생은 ‘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으로 갔을 때는 큰 본당으로 갔던 동창 신부님이 부럽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 삼 년이 제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딱 맞는 성당을 맡겨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신문사에서 의욕적으로 홍보를 시작했을 때입니다. 미국 서부와 캐나다 밴쿠버까지 특강과 신문 홍보를 한 달 반 일정으로 야심 차게 기획했습니다. 제 앞에도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코로나 팬데믹 동안에 좋은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주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잠언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봇의 포도밭을 탐합니다. 결국 악한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봇은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의 억울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되갚고 싶어집니다. 억울하면 똑같이 갚아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악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를 살린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며, 우리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세상은 “되갚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눈물과 기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고, 앞으로의 길에도 그 손길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이 고백처럼,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기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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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을 다시 이야기하십니다. 이 율법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주려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점점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울타리였지요.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을 지키고, 폭력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정의였습니다. 법은 대체로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나아가 법정의 논리를 넘어, 인간 마음의 깊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악인’은 일상에서 우리를 모욕하고 상처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굳이 “오른뺨”(5,39)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남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등으로 치는 것으로, 당시 노예나 하인을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5,39)라고 하십니다. 이는 굴욕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욕이 우리 안에서 증오가 되어 커지지 못하게 하라는 초대입니다. 모욕을 사랑이나 선의로 꺾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말씀도, 천 걸음을 가자는 이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도, 굴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선의를 끊임없이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억압의 한 걸음을, 사랑의 두 걸음으로 지워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받고 위로받으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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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시며, 인간적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를 가르치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탈출 21,24)는 동태 복수법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장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복수 자체를 초월하는 사랑의 길을 제시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대라’ 하신 것은 단순히 악을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고, 가해자마저 변화시키라는 초대이다.”(Homilia in Matthaeum, XVII, 4 요약) 즉,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능동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가르침을 당신 몸으로 실현하셨다. 채찍에 어깨를 내어주셨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도 저주하지 않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먼저 당신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I,19,58 재구성) 그분은 단순히 이상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삶과 죽음을 통해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겉옷까지 내주어라.”(40절)라고 하신 말씀은 물질적 소유를 넘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더 깊은 차원의 ‘옷’을 가리킨다. 교부들은 이것을 ‘세례로 입는 새 인간’(에페 4,24)으로 해석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주석한다. “육신의 옷을 잃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움의 옷, 곧 그리스도를 잃는다면 우리는 가장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교회는 이 구절을 단순한 윤리적 교훈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초대로 해석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함으로써만, 우리가 인간적인 보복 본능을 넘어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1825, 1965, 2842-2845항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의로움’(마태 5,20)을 요구한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보복의 논리로 움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용서와 자비의 논리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악을 참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사랑과 자비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은총 안에서 ‘다른 뺨을 내어주는 용기’를 낼 때,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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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오직 오롯이>

마태오 5,38-42 (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늘 오직 오롯이>

늘 착함
오직 착함
오롯이 착함

늘 고움
오직 고움
오롯이 고움

늘 온유
오직 온유
오롯이 온유

늘 겸손
오직 겸손
오롯이 겸손

늘 사랑
오직 사랑
오롯이 사랑

늘 평화
오직 평화
오롯이 평화

늘 품음
오직 품음
오롯이 품음

늘 베풂
오직 베풂
오롯이 베풂

늘 섬김
오직 섬김
오롯이 섬김

늘 살림
오직 살림
오롯이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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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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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과거는 학벌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서울대 나온 판검사, 의사, 대학교수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직업, 지위, 성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그보다 서울의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성공의 척도이고 명함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며 전문직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어느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화에서 부의 열등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보이는가?’

다수가 인정해 주어야 안심합니다. 이렇게 다수에 신경 쓰니 불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눈을 신경 써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척도를 진실로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않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되면, 자신감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주님께서 워낙 사랑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악에 대해 무조건적인 참음과 굴종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는 폭력으로, 억압에는 분노로 대응하는 세상의 공식을 깨뜨리시며 자신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잡이가 마주 선 사람의 ‘오른뺨’을 치려면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이는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모욕과 멸시였습니다. 이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은 도망가거나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나는 네가 함부로 모욕할 수 없다. 칠 테면 손바닥으로 제대로 쳐라.’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당당히 주장하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 역시 당당한 모습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알몸이 되고 맙니다. 가난한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채권자의 탐욕과 부조리한 법정의 민낯을 벌거벗겨 고발하는 것입니다.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 5,41)

이 구절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상황이 배경입니다. 로마 군인은 유다인에게 무거운 짐을 천 걸음 동안 강제로 지고 가게 할 수 있는 징발권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짐을 지고 가면서 속으로 분노를 삭이는 대신, 자발적으로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것입니다. 징발의 한계치를 넘어서서 짐을 져줌으로써, 피해자는 힘없는 노예의 자리에서 벗어나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이 아닌, 능동적인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니다. 세상 기준이 아닌 주님 기준으로 힘차게 세상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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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켜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말에 대해서, “악인에게 천벌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행과 범죄를 당했을 때, 그 일의 심판과 처벌을 사법제도에 맡기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경찰과 사법부와 교도소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제도입니다.

2) 그런데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 제1독서에 왕비 이제벨의 악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 자리에 앉히시오.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1열왕 21,9-11) 바로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봇에게 가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비 이제벨과 원로들과 귀족들과 불량배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아무 잘못도 없고 힘도 없는 나봇을 죽인 그 일은, 사랑과 자비보다 ‘선과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나중에 왕비 이제벨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30-37)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나봇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데, 가해자의 힘이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그 일과 비슷한 일이 바오로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만일에 악행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 침묵 때문에 더 큰 악행이 계속 저질러진다면?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 주는 것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악을 더 큰 악으로 키우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행에 동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7,3ㄴ)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것도 선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뺨을 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에 대해서, “가르침과 행동이 다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신 일이고,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은,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꾸짖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때에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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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주님께서 들려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자니 난감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고 하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탈출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싸우다가 …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동태복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우리 삶의 윤리로써 자리 잡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러한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무자비한 율법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의 배경에는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한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그 댓가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법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만 복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시면서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손등으로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손등으로 뺨을 맞을 땐 그 배 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까지도 참아내면서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날 뺨이나 겉옷이 어디 있겠으며, 두 다리가 성할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겁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뺨’, ‘겉옷’, ‘십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온유함을 닮음으로써 참된 평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시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손해를 손해로 되갚지 않는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면 속이 풀릴 것 같지만 오히려 앙갚음은 내 마음을 더욱 망가뜨리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없는 말을 하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오히려 희생하고 손해 보며 그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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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도 공정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른바 ‘동태복수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이가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거나 그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이 ‘동태복수법’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이 ‘동태복수법’은 기원전 450년경의 로마법의 모체인 열 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법조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의 고대 사회의 수많은 법 규정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된 법의 집행 방법이 바로 ‘동태복수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는 ‘동태복수법’은 어긋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 ‘복수’는 악을 악으로 무찌르고, 하느님의 정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어 집행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수’는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자인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태복수법’의 근본취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난 행위를 한 이에게 그의 행실대로 똑같이 갚아주어 깨어진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이 법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는 ‘함께함의 법’이었고,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보복하여 이른바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막는 ‘정의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함께함’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결국 범죄의 악순환만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법의 완전한 폐기를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네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를 ‘용서 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 용서를 하는 사람 모두의 얼굴을 밝게 해 줄 것입니다.

단순히 나한테 죄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얼굴을 밝게 해 주는 ‘용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를 함께하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스스로 먼저 잘못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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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동태 복수법으로 알려진 이 표현은 어찌 보면 가장 공정한 법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와 똑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나 물건으로 그것을 교환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만 갚아 준다면 잘못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는 것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정당하지도 않고, 평화로운 방법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상처는 크게 새기고, 자신이 입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똑같은 상처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주고받아야만 공정한 계산이 되는 경제적, 법적 관념에서는 한없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복수는 복수대로 확대 재생산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계산기를 가지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보여 주신 죄 없는 수난과 죽음의 모범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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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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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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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 대인(大人)>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란 어떤 악인인지 맞선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 내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인이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라면 그런 악인도 맞서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신 다음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네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셨지, 다른 사람의 뺨을 칠 때 내버려 두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도 남이 아니라 내게 재판을 거는 사람에게,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갑절로 해주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보통의 우리와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악한 짓을 할 때는 눈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내게 악한 짓을 하면 길길이 날뛰며 맞대응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은 끔찍한 짓인데도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면서 내게 한 것은 악행도 아니고 그저 내가 싫어하는 행위를 할 뿐인데도 우리는 그 사람을 싫어하고, 싫어하기에 나쁜 놈이라고 하고 악인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므로 내게 악한 짓을 하거나 내가 악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짓을 할 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런 것을 계속 다 ㅏ니라 보통 사람은 그로 인해 불행케 되는, 그 정도의 악행을 내게 저질러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랑하는 대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게 대한 악행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악인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대인입니다.

엄마는 자식과 맞서지 않고, 엄마의 사랑은 자식의 어떤 악행도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적어도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려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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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ㄱ)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오늘 복음(마태 5,38-42)은 '폭력을 포기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곧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는 복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방법 마저도 거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조금도 손해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인데, 과연 불가능해 보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악과 맞서 싸워 승리해야 하는데,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이런 물음 앞에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이렇게 다가 왔습니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욕과 상처가 너를 죽이는 증오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더 내어주는 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은 '모든 모욕과 상처를 짊어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온전한 믿음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생명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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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8)

새벽은 밤과 싸우지 않고도
어둠을 물러가게 합니다.

어둠과 싸우는 삶이기보다,
먼저 빛이 되어가는 삶입니다.

선으로 악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악의 방식으로
악을 이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삶의
모범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셨고,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악의 뿌리까지
변화시킵니다.

지독한 악의 늪인
분노와 복수의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끈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
복음을 실천하는 
복음의 사람입니다.

악인은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악에 맞서는
증오의 방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악에 맞서지 않는 사랑,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힘입니다.

악을 이기는
그 힘을 진정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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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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