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22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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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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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uWb6SttJY4
[수원교구 임채룡 베다(문호리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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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대죄를 지었어도...>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합세해서 간계를 꾸며 아무 죄도 없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에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며 왕비란 자들이 그토록 비겁하고 옹졸하며 사악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인간말종의 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 악의 세력이 더 확장하고 활개를 치도록 마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 대죄인들에게 마치 철퇴처럼 강력한 펀치를 날리십니다.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오...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의 강력한 경고에 아합은 다행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개를 숙입니다.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맨몸에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자루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 묘한 분이십니다. 그토록 사악하고 악랄한 아합이었지만, 갑작스레 한풀 꺾인 그의 모습에 강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느낍니다. 그의 뉘우치는 모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매일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치는 우리를 보시고, 진노하시고 벌하시려는 당신 마음을 바꾸십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부족하고 부실한 왕이었지만, 그래서 부인 이제벨의 꼬임에 넘어가 인간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행동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산 아합왕이었지만,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무게가 엄청납니다.
그는 비록 대죄를 지었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에 즉시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 앞에 크게 가슴을 치며 자신을 바짝 낮추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진노는 그의 후대에게로 미뤄졌습니다.
우리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하시면서도, 가련하고 나약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마음 앞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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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GamowYXNec (2020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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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화를 절대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면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0살을 갓 넘은 마리아 고레티 성녀도 자신을 죽어가면서 자신을 수십 차례 찌른 청년을 용서하고 같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가 시카고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돈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저명한 의사를 초대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그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습니다. 로렌스 박사인 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제가 되어보니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한 것 같고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에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보이지만,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면, 당신은 내일 기쁘면서 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주머니에 넣어 보니 그 돌멩이들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제의 그 목소리처럼 기쁘면서 후회스러웠습니다. 기쁜 것은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기쁠 것이고,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것들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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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활 성가 대회’를 준비하면서 친교 분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작년보다 참가팀이 적었습니다.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취소하고, 내년에 하자는 의견과 참가팀이 비록 적어도 연습한 시간이 있으니 계속 진행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참가팀이 적어도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본당 성가대에서 찬조 출연하고, 본당 밴드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정했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일 먼저 성가대가 멋진 화음으로 생활 성가 대회를 열었습니다. 참가팀은 4팀이었습니다. 벤저민 팀이 출연했습니다. 6살 이하의 어린아이 30명이 출연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팔방미인 팀이 출연했습니다. 바이올린, 오보에, 피아노, 플롯, 기타와 4가족의 합창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소에 반 모임을 꾸준히 하던 분들입니다. 울림 중창단 팀이 출연했습니다. 두 달 전에 본당에 음악 교실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에서 공부하던 분들이 팀을 만들었습니다. 끝으로 자작곡 ‘주님은 나의 사랑’을 준비한 형제님이 출연했습니다. 참가팀이 4팀이라 모두에게 상을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에게 하였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저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참가팀을 보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내년에는 저도 부주임신부님과 수녀님으로 한 팀을 만들어 찬조 출연하려고 합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인터넷 서점을 방문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트렌드 2026’입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표징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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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율법의 핵심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도, 인간이 그 계명의 뜻을 축소하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암묵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면으로 깨뜨리십니다. 본디 레위기의 문맥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범위를 ‘친구’로, ‘자기 사람’으로 점점 좁혀 왔지요. 그러면 사랑은 이해관계에 따른 윤리가 되어 그 이해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배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는 낱말을 민족이나 정치의 범주로 제한하시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 나를 적대시하는 존재 전체로 확장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악과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압도’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바탕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품으신 선의에서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분의 차별 없는 자비가 곧 하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리나 이방인도 자기편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제자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선의가 친구와 자기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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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절정을 제시하신다.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이 계명은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드러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이 말씀은 우선 원수를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109, 4 요약) 즉, 증오는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병들게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증오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기도는 그분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실천이었다. 초대 순교자 스테파노도 같은 사랑을 드러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가리켜 “스테파노는 말로만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닮았다.”(Homilia in Acta Apostolorum, XVII 참조)라고 평가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성 아타나시오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태양은 차별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혜도 그러하다. 그 빛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일 뿐이다.”(Orationes contra Arianos, II, 67 요약) 따라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성이다.”(1827항)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선택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 속에서 은총의 가능성이 열린다.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는 단순히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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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나에게 달렸다>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나에게 달렸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사랑이
나에게
달렸다
내가
사랑할
네가
아니라
너를
사랑할
나에게
사랑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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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_라파엘_신부님
연중 제 11주간 화요일 6.16.
(마태5,43-48)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배우자가 될 수 있고, 자녀가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며 결국은 원수처럼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이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신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니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다. 그러므로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말자.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길 기도한다.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이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 없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원수사랑! 이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 이다.
“주님, 저희가 누군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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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오른 사람은 1953년 정상을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정상에 올랐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상 도착을 증명한 사진에는 에드먼드 힐러리가 아닌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각종 인터뷰에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에드먼드 힐러리의 사진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의심했습니다. 이 의문이 점점 커지자, 에드먼드 힐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기에 에베레스트 정상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텐징이 카메라를 다루지 못했기에 힐러리가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텐징만 사진에 남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지고 있는 사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과연 누가 찍어줬는지를 생각합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진에 있는 사람만을 기억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진을 남긴 결정적인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삶 안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우리를 돕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런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4)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기 민족, 같은 교파로 좁히고, 이방인이나 적대자들은 하느님의 원수이므로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한적인 사랑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성품을 닮은 진짜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5,45 참조)
주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닮아서 끼리끼리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기가 받을 보답이나 상대방의 태도에 좌우되지 않는 주도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빛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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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기 전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창세 3,21).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습니.다(창세 4,15) 그 일들은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들도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1-23)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20) 배반자 유다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으신 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을까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것도 거부하고 사랑받는 것도 거부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묵상할 때, 사랑을 실천하는 입장에서만 묵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신다. 이웃들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답은, 회개와 보속, 그리고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 이웃이 원수 같은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인 유대인을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베풀어 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고마워한다면, 자기에게 사랑을 준 사마리아인에게만 보답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야 옳지 않은가?>
3)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높은 벽들을 없애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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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래아 신부님]
<원수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로마서 5장 10절)였던 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들을 완성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너그러우신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덕에 앞섭니다.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활력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콜로새서 3장 14절)이고, 모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지어줍니다.
애덕은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며 귀결입니다. 애덕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합니다.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함으로 들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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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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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사랑의 발판이요 계단인 원수 사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모르는 이 없고 원수 사랑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진 애를 썼지만 원수 사랑이 쉽지 않아 원수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때보다 더 괴로웠던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고통에다 원수 사랑에 실패한 고통이 더해지는 경험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원수 사랑을 왜 굳이 해야 합니까? 주님의 명령이기에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주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원수 사랑을 왜 하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혹시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라고 하신 그 뜻을 알고 해야겠습니다.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가 있으면 내가 불행하고, 원수를 미워하면 내가 고통스럽잖습니까?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복수의 칼을 가지고 다니면 원수에 대한 미움이 나를 먼저 괴롭게 하고 복수의 칼이 먼저 나를 찌르잖습니까?
그러니 원수가 없게 되거나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원수가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려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원수 사랑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불가능한 사랑을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을 리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원수인 한에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원수이고 그래서 미워하는 것인데 어떻게 원수인 그를 원수인 채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원수였던 자가 원수가 아닌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원수의 개과천선으로 그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걸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걸 바라는 것이니 내가 바뀌어야겠지요.
어떻게?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참고삼으면 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ʻ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 부르시고 기꺼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게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것들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벗으로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했는데 원수 때문에 행복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했는데 하느님 사랑 때문에 원수를 발판, 디딤돌, 계단 삼아 원수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원수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고 벗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완전한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의 그 완전한 사랑에까지 올라가게 하는 계단들입니다.
원수의 등급을 매긴다면 1등급의 원수는 제일 밑의 계단이고, 2등급, 3등급, 4등급의 원수들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 삼아 올라가다가 마침내 99와 100등급의 원수까지 사랑케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에 있어서 100%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오늘 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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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5,44)
<완덕이란?>
오늘 복음(마태 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산상설교의 말씀(마태5-7장)'은 오늘 복음처럼 어떤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내용이 짧고 간결해서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실행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십자가를' 자주 바라봅니다. 그 큰 사랑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합니다. 거기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원수를 사랑하셨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스도인들은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온전한 일치'가 바로 '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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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박해하는 사람이나 박해받는 사람이나 우린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누굴 위한 박해와 광기인지를 물게 됩니다.
다시금 삶의 무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우리를 천박하게 만듭니까. 하느님조차 다가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삶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확실한 도피처가 마치 신앙의 본질인양 마구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오신 이유를 묻고 또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온전한 기도입니다. 온전한 기도가 참된 사랑의 시작이 됩니다. 자신이 먼저 정화되지 않고서는 다른 이를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종교적 건물 사이로 쓰러져있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종교가 또 다른 권력이 되어 사람을 박해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에 사랑과 기도가 빠져있다면 더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침묵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처럼 길 잃은 한마리 양이 우리자신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납니다.
오늘 이 하루는 우리 자신이 참된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먼저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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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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