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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24 6월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20|조회수58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24
6월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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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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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yg__UdqShM
[서울대교구 김형섭 가브리엘(잠실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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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DJ5VlZML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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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로 모든 것을 얻어내는 방법>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시면서 아주 뼈 있는 경고를 덧붙이시죠.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는 하느님 앞에 끊임없이 청구서만 들이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 애 대학 붙게 해주세요. 이번 사업 꼭 대박 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기도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주님의 기도를 주문 외우듯 수백 번 반복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내 편의와 목적을 위해 기도의 본질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전락시키는 무서운 교만이죠.

누군가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이솝 우화』 중에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해 놓고 자기가 먹기 편한 납작한 접시에 수프를 내옵니다. 두루미는 긴 부리 때문에 한 입도 먹지 못하죠. 여우는 속으로 '내가 이렇게 훌륭한 식사를 대접했는데 왜 안 먹지?' 하고 섭섭해합니다. 상대를 향한 묵상이 빠진 일방적인 베풂은 이토록 폭력적입니다.

이 우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텔레비전 프로그램 '개는 훌륭하다' (2019)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 샐리라는 덩치 큰 개의 이야기입니다. 이 샐리는 주인이 손만 대면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으려 하며, 밤낮없이 늑대처럼 하울링을 해대서 이웃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억울해 죽습니다. 자기는 샐리에게 사람이 살 만큼 훌륭한 집을 지어주고, 손수 고기를 입에 넣어주고, 매일 예쁘게 털을 빗겨주며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형욱 훈련사가 와서 내린 진단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보호자님이 문제입니다." 샐리는 어릴 적 파양된 상처와 의지하던 동료 개를 잃은 극심한 외로움과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샐리가 진짜 원했던 것은 주인이 그저 조용히 자기 곁에 머물러 주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기가 해주고 싶은 방식대로 털을 빗기고, 억지로 밥을 먹이려 들었습니다. 샐리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괴롭힘이었던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얻어내려면, 내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지 먼저 읽어야 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글 중에 눈만 오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며칠씩 내려오지 않는 판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속 동물들은 모두 판다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토끼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죠. "판다의 새끼들이 사냥꾼에게 잡혀갔어. 눈밭에 찍힌 자기 발자국을 사냥꾼이 따라왔기 때문이지. 판다는 눈 위에 자기 발자국이 찍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거야." 토끼는 어떻게 판다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판다의 입장이 되어 그 아픔을 깊이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 소원을 뜯어내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지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하는 묵상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기 상권』 13장을 보면, 기도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었다가 파국을 맞은 사울 임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필리스티아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사울 임금은 사무엘 예언자가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쳐버립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뜻이나 그분이 정하신 율법의 질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당장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줄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결과물만 뜯어내고 싶었죠. 하느님의 뜻을 묻는 묵상은 생략한 채 자기 소원부터 들이민 결과가 어땠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에게 "임금님은 어리석은 짓을 하셨소.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제 임금님의 왕권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오."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읽지 않고 내 뜻만 강요하는 기도는 사울의 번제물처럼 결국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올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에 내 마음을 완전히 맞추었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요? 13세기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 대 제르트루다 성녀의 일화가 이를 잘 증명합니다. 어느 날 성녀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제가 청하지 않은 것조차 이토록 넘치게 다 들어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뜻을 버리고 온전히 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나 역시 내 뜻을 버리고 온전히 너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단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내 청구서를 찢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여쭙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한 구절 한 구절 입에 올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 호흡으로 숫자를 세며 그것만 묵상합니다.

두 시간 동안 주님의 기도를 한 번만 바칠 때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그분 마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십니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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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반가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60주년과 문규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50주년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형제 사제인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걷기보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오셨습니다. 한 분은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옥살이하셨고, 다른 한 분은 임수경 양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옥살이하셨습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현장에도, 용산 철거민의 거리 성당에도, 세월호의 팽목항에도 두 분은 늘 약한 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은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말보다 삶으로 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의 문장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암송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의 배고픔과, 외로운 사람의 눈물과, 힘없는 사람의 절망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분, 노 사제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바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오늘은 두 분 신부님의 ‘서품 기념’을 축하하면서 제가 2009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7년 전의 글입니다. “어제, 저녁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께서 단식 도중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전주교구 신부님이십니다. 이제 나이가 60이 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쾌유하시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문 신부님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임수경 양과 함께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온 최초의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혼자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올 임수경 양을 생각하였고, 임수경 양이 받아야 할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였고, 착한 목자의 심정으로 임수경 양과 함께 돌아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문 신부님은 성령의 관심사를 생각하였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였고, 불의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들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세상은 힘과 성공과 효율을 이야기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생명과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민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벽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웃고 살아도 마음속에는 말 못 할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문장이 아닙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한다면 굶주린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한다면 미움과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내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 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승의 길이 제자에게 이어집니다. 신앙은 책으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삶으로 이어집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삶으로 전해지고, 사제의 믿음도 결국 삶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년의 두 사제를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제로 살아오면서 자주 부족함을 느낍니다. 강론은 할 수 있지만 삶으로 증언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고, 침묵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주님의 기도를 어떻게 살고 있느냐?”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랑과 작은 희생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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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 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는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는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는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삶을 다룹니다. “일용할 양식”(6,11)은 모호한 내일의 잔치가 아닌, 오늘 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됨을 강조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6,13)는 삶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여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마지막 청원이 이어지지요.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조용히 봉헌하며 내맡기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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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단순히 말의 공식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로서, 모든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기도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신자에게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아들 안에서 믿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De Trinitate, 8,5 재해석) 즉,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는 단순한 찬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살아가게 해 달라는 청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과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20,1 재해석) 즉, 기도는 삶으로 구현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라는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와 통치가 우리 삶과 세상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 시민인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순종과 선행을 통해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서는 주님의 기도를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그분의 통치를 따르는 삶으로 인도하는 기도”(2816-2827항 참조)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11-12절)라는 청원은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필요를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한 마음을 나타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구절을 해설하며, 양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죄의 용서 청원은 타인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하려는 의지를 전제한다.(마태 6,14-15 참조)

마지막 청원은 우리를 사탄과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이다. 성 베네딕토는 이를 영적 투쟁의 기도로 보며,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악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기도다. 우리가 오늘도 삶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참다운 제자가 되도록 힘쓰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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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대화>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온유와 자비와 평화로
나의 이름을
거룩히 드려내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나의 나라를
곱게 피우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내가 있는 곳에서처럼
너희가 있는 곳에서
나눔과 섬김과 살림으로
나의 뜻을
정성껏 이루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주린 탐욕에 노리지 말고
맛난 밥으로 내어주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내가 너희를
늘 용서하듯이
나날이 서로에게
날선 단죄를 거두고
너른 용서가 되어주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검은 유혹이 아니라
바른 길이 되어주려무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땅에 있는
내 아들딸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거친 악이 아니라
살가운 선이 되어주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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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간절한 믿음의 기도>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고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하오나 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것임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성 보니벤뚜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묵상할 때 감각적으로 무엇을 느껴야만 제대로 기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감각적인 느낌 없이 기도하는 편이 하느님께 더 큰 봉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감각 없이 기도를 지속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감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런 감각이 자칫하면 그 사람을 부풀게 만들고 자기가 성덕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 나머지 교만해지고 게을러져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그저 사랑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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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간과 쥐, 누가 더 똑똑할까요?

미국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교의 파크리사누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제비 뽑기 실험’이 있습니다. 실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는 A와 B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뽑기를 총 200번 진행합니다. A를 뽑으면 75%의 확률로 1,000원을 벌고, B를 뽑으면 25%의 확률로 1,000원을 법니다. 물론 참가자는 이 확률을 모른 채로 실험에 참여합니다.

참가자는 A와 B를 선택하며 시행착오를 거치고, 100번쯤 했을 때 A를 뽑으면 B를 뽑았을 때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보상받는다는 규칙을 눈치챕니다. 그런데도 대다수가 A와 B를 왔다 갔다 하며 수익률을 떨어뜨렸습니다. 반면 쥐는 눈치를 채자마자 계속 A만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쥐가 사람보다 1만 2,000원을 더 벌었습니다. 왜 쥐보다 어리석은 판단을 할까요?

눈치를 채고서도 자기의 첫 판단을 함부로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이 신중한 사고 체계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 판단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징과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향한 이유가 충분한데도, 자기 안의 고정관념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단순히 미사 때 암송하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양식의 나눔과 용서를 실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면서,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용서에 관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용서, 상대의 보상에 따른 용서를 외치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이웃을 향해 마음을 닫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기도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기 삶을 하느님 뜻에 맞추는 영적인 조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치면서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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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다른 민족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게 바치는 기도는 그 자체로 ‘빈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빈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믿음 없이’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만일에 기도를 하면서 “기도한다고 이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빈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당신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두 번째, ‘실천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가리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온갖 일을 시키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세 번째, ‘사랑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만일에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입니다.

네 번째,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고, 바라고 있다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만일에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심이 가득 차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2)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도 기도를 ‘빈말’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날마다 바치는 기도여서 특히 더 그렇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라는 말은,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다는 뜻인데, 기도에 간절함과 정성이 없으면, 그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주님과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들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연결됩니다.(요한 17,20-21) 용서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회개’로 응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주님께서 다 해 주시는 일은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쪽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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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주님의 기도는 바치면 바칠수록 그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이 기도는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바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모임을 시작하면서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 안에 원해야 할 것과 원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반부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을 최상의 위치에 놓은 다음 자신의 필요와 소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나보다, 내 원의보다 하느님의 원의를 찾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순서여야 합니다.

후반부는 우리 인간의 필요에 관한 것이지만, 그 역시 하느님을 향하는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는 것이며,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봉헌하는 것이고, 유혹에서 보호하여주실 것을 청하는 것은 위로자이신 성령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전 존재를 나의 모든 생활 영역 안에 모시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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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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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집회서 集會書,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는 유대교 얌니야 공의회에서는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그 칭호도 ‘교회의 책’이라는 뜻으로 ‘에끌레시아스티꾸스 ecclesiaticus'라고 붙여졌습니다. 그전에는 책 말미에 붙여진 저자의 이름을 붙여서 ‘벤 시라의 책’이라는 ‘세페르 벤 시라 ספר בן סיר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BC 180~175경에 유대교 율법과 관습에 정통한 저자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있는 유대인들이 조상의 믿음과 관습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용이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사고적(思考的)인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일상생활의 세세한 지혜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집회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대표적인 인물인 엘리야 예언자의 업적에 대해서 칭송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엘리야는 삶의 위로와 희망이고 메시아였습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집회 48,10-11)

당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가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낯선 고국을 떠난 낯선 이국의 생활에서 삶을 살아가는 버팀목이이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엘리야의 제자 엘리야에 대해서도 훌륭한 예언자임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빌론 유배 후의 자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집회서를 통해서 고국을 떠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나마 볼 수 있습니다.

‘다아스포라’는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왔는데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해외 교포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저자의 입장에서 더 자세한 이 말의 의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동포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하겠지요.

그들의 말은 이스라엘의 말인 히브리(hebrew)였는데 그들의 후손 세대는 당시 통용어 였던 희랍어(greek) 여서 이 성경도 희랍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의 국수주의(國粹主義)에서 히브리 말이 아니라는 이유와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쓰고 있다는 배타적인 이유로 디아스포라에서 이미 쓰고 있던 소중한 이 집회서를 성경의 정경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사해문헌과 알렉산드리아 에즈라 회당 창고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발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드러났습니다. 희랍어 성경만 있는 줄 알고 성경에서 배제 시켰던 그들의 편협된 사고가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집회서의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 지금도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정통성’ ‘아집’ 때문에 단절된 세계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의 기도들이 길고 산만한데에 비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간결하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구원된다고 믿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사상과 연결되면서도 또 새로운 기도라는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구약 시편의 기도를 따르면서도 인간의 실존에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빵을 청하는 기도, 인간으로서 참으로 어려운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힘으로만 도와 줄 수 있는 유혹과 악의 세력에 대해서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너무 세력이 커서 율법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낯선 타향의 땅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즐겨 읽고 힘과 위로를 받았던 집회서의 기도를 되새기며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시도록 청합시다.

우리도 낯선 땅에서 주님을 향해 걷는 순례자의 삶을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우리가 어떤 악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주시도록,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오늘의 빵만을 청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주시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좋으시고 사랑이신 주님께 우리의 발걸음을 기쁨과 평화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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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줍니다. 곧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중세 시대로부터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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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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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찬미예수님 
학창 시절 이런 저런 일에 쫓길 때, 유학 시절 학업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마음을 짓누를 때 가장 크게 받는 유혹은 “기도 시간을 줄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보다는 학교에서의 일 혹은 공부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니 이 시간마저 기도로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상기하던 것이 다음의 마더 데레사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마더 데레사가 동료 수녀들과 아침 회의를 하는데, 여러 수녀들이 건의를 하였습니다.
"수녀님, 요즈음 일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어요. 돌봐야 할 사람들이 막사에 넘치도록 몰려와서 하루 종일 일만해도 일손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아침 기도 시간을 1시간에서 반시간으로 줄이면 어떨까요?“

그러자 마더 데레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할 일은 많고 일손이 모자란다구요? 그러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 시간을 2시간으로 늘려야 하겠어요. 주님의 도움 없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거든요.“

이 일화를 되짚어보면 기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실제로 마더 데레사는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행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느님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일이고 그분의 도움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듯, 결코 인간이 홀로 이룩할 수 없는 사랑의 업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이토록 중요한 기도의 모범, 즉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는 그 만큼 기도의 전형이며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 중에 간구하는 내용의 순서를 보면, 앞에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뒤에 네 가지는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 안에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일용한 양식”에 관한 청 말고는 세속적인 청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하게 개인기도 안에서 바치는 청원들, 이를 테면 가족의 건강, 자녀의 학업, 자신의 미래, 사업의 성공에 관한 청원은 모두 배제되어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기도에 우리가 흔히 하는 개인적 청원이 빠져있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용서 받는 것이며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제의 복음과 오늘 복음에서 모두 강조하듯, 숨은 일도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님의 기도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 즉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구원”입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뜻만을 하느님께 관철시키고자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늘 욕심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떠한 어려움에 있든지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아는 것,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의 유혹과 미움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쉽게 암기하듯 지나치는 주의 기도가  우리의 구원을 청하는 기도임을 명심하며 정성스럽게 주의 기도를 틈틈이 바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데레사가 가장 좋아했던 기도문이며 나아가 사랑의 선교회에서 매일 바치도록 의무화 되어 있다는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문은 어떠한 기도를 하든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마음 가짐에 대해 잘 보여주는 기도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 존  헨리 뉴먼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뿌리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영혼이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흘러 넘치게 해주십시오. 저의 존재 속에 당신이 들어오셔서 완전히 소유하시어 당신의 빛으로만 저의 삶이 빛나게 해주십시오.

저를 통하여 제 안에서 빛나는 당신으로 하여금 제가 만나는 모든 영혼이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주님, 그들이 저를 통해 당신만을 보게 해주십시오.
저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그러하셨듯 저도 빛을 내기 시작하겠나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도록 하겠나이다.

주님, 빛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빛은 저를 통해서 타인에게 빛나는 당신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가장 좋아하시는 방식대로,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밝힘으로써 당신을 찬미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말로써가 아니라 당신을 닮은 표현을 보임으로써 힘을 내게 하고, 당신을 품고 있는 제 마음이 동정심에 넘치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을 설교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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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뜻이 이루어지는 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번 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로 우리는 치프리아노 성인의 ‘주님의 기도’ 묵상을 내내 읽습니다. 어제 성인은 이렇게 주님의 기도 한 부분을 묵상하고 나눕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스리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습니까? 과거에 항상 있었고 또 미래에도 중단이 없으실 하느님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있었고 나는 늘 하느님 나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 나라가 있다고 고집할 때부터 나는 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나라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가 제 안에서 자동 시작되는 겁니다. 내 나라가 없으면 나는 자동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나라가 있는 것이 좋을 것만 같지만 내 나라가 있으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내 나라에 갇히는 꼴이 됩니다.

이는 은둔형 외톨이가 자기 방에 갇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한집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방의 문을 닫고 거기에 갇힙니다.

종종 Privacy(사적 공간)를 과하게 고집하면 이렇게 되곤 하지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자유가 침범당할까 너무 두려워하여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방과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내게 오심을 막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여는 것이 이미 와 계신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치프리아노 성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그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겸손, 행동에 있어서의 정의, 활동에 있어서의 자비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받는 해를 잘 참아 내는 것, 형제들과 화목을 유지하는 것,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 이 모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따르기만 하면
우리도 우리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 되는 경지에 도달할 터인데,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이렇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이 경지를 얘기할 때 저는 공자의 그 유명한 나이론을 얘기합니다. 공자는 나이 서른에 입지, 마흔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을 얘기한 다음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를 얘기합니다.

나이 칠십이 되면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가 돼야 한다는 말인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으로 바꿔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올라 있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경지로 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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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마태오. 6,7,9)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가운데 힘을 사용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드립니다.

아람어를 사용하신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윤리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을 넘어 ‘폭력을 사용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우리가 힘에 의존하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철저히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의 왕국과 다르다고 예수님은 강조하셨습니다. 힘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왕국은 때로 폭력마저 정당화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철저히 비폭력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타협이 어려울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대화할 수 있는 역량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힘을 사용하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다수의 힘이나 정치적, 경제적 혹은 조직의 힘이든 힘의 사용은 사랑을 거스르게 됩니다.

어떠한 힘이든지 힘은 상대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을 움직이면 사람들의 자유는 억압받게 됩니다.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개인이나 국가나 공동체가 힘을 사용하면 폭력적으로 됩니다. 힘은 오직 봉사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던 예수님은 힘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나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갈망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힘이 없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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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9ㄱ)

<완전한 모범!>

오늘 복음(마태 6,7-15)은 '올바른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7-9ㄱ)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자주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절대적 길'인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하느님의 자녀들이 매순간 반드시 해야 할 생명행위'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영혼의 호흡(숨)이며, 예수님을 통해 쏟아진, 아니 매일 쏟아지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거룩한 생명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로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에 대한 '완전한 모범'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와 찬미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청원기도'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빈말을 되풀이하는 '공염불 기도'가 되지 않도록 올바르게 기도합시다! 올바르게 청하고, 올바른 것을 청합시다! 사랑과 용서를 청하고, 사랑과 용서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다시 부활하는 생명이 됩시다!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물사랑, 생명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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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8)

하느님의 사랑은
기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움직이십니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며,
무엇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기도는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십니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때,
삶의 우선순위는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길입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오늘에 감사하며,
서로를 용서하고,
바르게 살아가겠다는
자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비추어 주는 삶의 거울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던 마음은
마침내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기도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그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는
자녀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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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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