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25
6월19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codkR13zHg
[수원교구 임채룡 베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방법!>
연세가 점점 들어가시는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곰곰이 따지고 보니 도둑들, 날강도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천신만고 끝에 출산해서, 그 오랜 세월 애지중지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 숱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드신 부모에게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참담함이었습니다.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도둑들이 목청을 높이고 활개를 칩니다. 그들은 아들, 딸이요, 며느리, 사위에다 손주, 손녀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자연스레 유산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질 텐데, 그걸 못 견디고 조속한 분배를 요구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가려고 기를 씁니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따로 없습니다.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보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대체 그 보물은 어떤 것일까요? 엄청난 은행 잔고? 잘 나가는 주식? 목 좋은 곳의 부동산? 아파트? 남부럽지 않은 건강, 사랑하는 사람? 재능? 자리?
사실 우리가 보물로 생각하는 대상들은 진정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보물의 특징은 영원성, 불멸성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썩어 내려앉고, 허물어질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물은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따뜻함과 친절함을 보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보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에게 내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건넸습니까? 그로 인해 그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로 인해 미소를 되찾고,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은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d-9nUiCMHA
++++++++++++++++++
<칭찬이 독이 되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빛이 눈을 통해 새어 나온다고 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깊겠느냐?"(마태 6,23) 그런데 빛이 어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빛이 어떻게 어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빛이란 내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곧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 그래서 무엇을 빛으로 삼아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의 전부를 결정한다. 하늘을 빛으로 삼으면 그 사람 안이 환해지고, 세상 것을 빛으로 삼으면 빛이라 여기던 그것이 도리어 어둠이 된다. 빛이 어둠이라는 것은, 내가 빛인 줄 알고 좇는 그것이 실은 나를 삼키는 탐욕이라는 뜻이다. 옛 영성가들은 이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 불렀고, 풀어 말하면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이다.
이 어둠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어느 반려견 훈련 프로그램에 순하기로 소문난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왔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겁을 먹고 드러누워 배를 보일 만큼 소심한 개였다. 그런데 그 착한 개가 유독 가족만은 물었다. 물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릎에 올라 재롱을 떨었다. 가족은 이 개가 본래 착한데 어떤 상처 때문에 그런다고 믿으며, 개가 화내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다. 심지어 개가 좋아하는 화분은 개가 없을 때만 몰래 닦았다. 보다 못한 훈련사가 말했다. 그것은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하며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고.
이 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랑도 받고 싶고 지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어서 가족을 두렵게 만들어 지배하고, 다시 애교로 사랑을 받아 냈다. 화분을 제 것으로 여겨 손대지 못하게 으르렁대다가, 자기 뜻대로 따라 주면 다시 예뻐했다. 이만큼만 받들어 주면 착한 개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가족은 개를 키운 것이 아니라 개를 섬기고 있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사가 이런 개에게는 순종하기 전까지 결코 잘해 주지 말라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어설픈 애정이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 개에게 "앉아"를 시키면 한참을 버틴다. 자기보다 낮다고 여기는 사람 앞에 앉아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칭찬이란 자기보다 높은 이에게 들어야 기분 좋은 법이니까.
성경은 이 어둠을 일찍부터 고발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봉헌물로 바치라 명하신 전리품 가운데, 그는 값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이 나 몰래 자기 천막 땅속에 묻어 두었다.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여호 7,21 참조)라는 그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 작은 어둠 하나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아이 성 앞에서 무너졌다. 빛인 줄 알고 끌어안은 금덩이가, 실은 그를 삼킨 어둠이었던 것이다. 게하지도 그러하다. 스승 엘리사가 한사코 거절한 나아만의 선물을, 게하지는 몰래 뒤쫓아 가 받아 챙겼다. 그러자 나아만에게서 떠난 나병이 게하지에게 옮겨붙었다.(2열왕 5장 참조) 소유욕이라는 어둠은 결국 제 몸에 병을 새긴다.
삼구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칭찬하면 안 된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셨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끝내 빛으로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진주가 들어가도 짓밟힐 뿐이다. 그런 이를 어설피 잘해 주어 성당으로 끌어들이면, 그는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한다. 자기가 잘나서 받는 줄 알지, 결코 순종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아도 합당하지 않게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까지 당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유다에게도 당신 살과 피를 떼어 주시고 그 발을 씻어 주셨다. 그 유다는 끝내 스승을 발로 짓밟았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는가. 그가 원하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에게 주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내어 주셨기에, 이제 그의 멸망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본받을 자리도 여기다. 어둠을 빛이라 우기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와 잘해 줄 필요는 없으되, 그가 진정 원할 때는 끝까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가. 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두고 평하는 말을 엿듣게 했다. 한 사람은 줄곧 헐뜯기만 했고, 한 사람은 줄곧 칭찬만 했다. 또 한 사람은 헐뜯다가 끝에 가서 칭찬으로 맺었고, 마지막 사람은 칭찬하다가 끝에 가서 헐뜯음으로 맺었다.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느낀 상대는 누구였겠는가. 줄곧 칭찬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엔 헐뜯다가 마지막에 칭찬해 준 사람이었다. 가장 미운 사람은 누구였는가. 줄곧 헐뜯은 사람이 아니라, 좋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헐뜯은 사람이었다.
까닭은 이렇다.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을 향한 기대를 담는다. 시종 좋은 말만 하거나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짚은 뒤에 건네는 칭찬은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 준다. 다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을 살찌우는 칭찬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칭찬은 상대를 나를 부리는 가스라이터로 키울 뿐이다. 우리가 칭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사람이 참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 모습이다.
여기 합당한 칭찬의 본보기가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이다. 까다롭고 오만한 강박증 환자가 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다 칭찬을 한 가지 해 보라는 청을 받는다.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의사 말도 듣지 않던 자기가 약을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게 무슨 칭찬이냐 되묻자 그가 답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여인은 그것이 생애 최고의 칭찬이라 한다. 돈과 교만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탐욕에서 끌어내 주었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연 것이다. 누군가를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벗어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보다 큰 칭찬은 없다.
그러니 공부를 잘한다, 돈을 잘 번다, 얼굴이 곱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조심하여라. 그런 말은 나를 길들이려는 계략이거나, 나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에 더 깊이 빠뜨려 어둠으로 끌고 가려는 속삭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주고받아야 할 참된 칭찬은, 어둠을 빛이라 여기던 사람이 참 빛을 향하도록 돌이켜 세우는 칭찬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 안의 빛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빛나고, 그 빛이 눈을 통해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탁상용 일정표가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매년 일정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도 있고, 사제관에도 있고, 핸드폰에도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형제님 한 분의 도움으로 구글 드라이브 일정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자동으로 연결되니 어디서든지 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 편리한 시대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탁상용 일정표가 정겹습니다.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가는 그 느낌 속에 지나온 시간과 만났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의 일정표를 보면 대부분 신문 홍보와 신문사 행사 일정이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 미사 일정도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일정도 있었고, 동북부 ME 지도신부로 봉사하면서 봉사자들과의 일정도 많았습니다. 코로나 시절에는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모임과 캠프 일정이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일정들 속에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의 일정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의 일정표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미사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3달 정도의 미사표를 정리해서 주면, 제 일정표에 먼저 기록합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와 같은 전례 일정도 있습니다. 사순 특강과 대림 특강, 성모의 밤과 같은 본당 행사도 있습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 일정도 있고,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의 일정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미 잡혀 있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일정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와 장례미사입니다. 어떤 일정은 저를 지치게도 하지만, 어떤 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교구 사제들과의 만남과 피정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와준 일정도 많았지만, 사실은 제가 더 큰 위로와 힘을 받은 시간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을 깊이 흔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학생은 공부 일정표를 만들고, 회사원은 업무 일정표를 만들고,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정의 숫자가 아닙니다. 그 일정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일정표는 땅에만 기록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기록되는 일정표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시간, 아픈 사람을 찾아간 시간,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 용서하기 위해 참아낸 시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춘 시간이 바로 하늘에 기록되는 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런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입니다. 욕심과 욕망의 불을 끄는 삶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옳은 일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손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됩니다. 우주는 너무 넓어서 빛조차 수만 년을 달려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속도와 선행의 속도는 빛보다 빠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은 희생과 진심 어린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하늘에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닙니다. 하늘에도 기록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입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 속에 기도의 시간이 있었는지,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9-23: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 이 말씀은 세상의 재물과 부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땅의 재물은 한시적이며, 손에서 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소중히 여기면, 마음은 재물에게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다. 반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라는 말씀은 영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가르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참된 보물은 하늘에 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할 때만 인간은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Enarrationes in Psalmos, 23,1 요약) 재물을 나누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 선행과 기도로 하느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 하늘의 보물을 쌓는 길이다. 유다인 모노바스는 조상들로부터 받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친척들이 비난하자, 자신은 하늘에 보물을 쌓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영원한 가치를 선택한 삶의 표징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라고 하셨다. 여기서 눈은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적 지각을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선으로 빛나야 우리의 모든 행위가 빛을 얻는다. 마음이 어둡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해도 그 빛이 어둠에 가려진다.”(Homiliae in Matthaeum, 46,1 요약) 즉,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올바른 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 삶 전체가 빛나고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라는 말씀은, 마음의 방향이 삶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둘 때, 삶의 모든 선택이 선으로 조율된다. 분별력과 마음의 정결함을 지키는 것은 영적 건강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길이다.
우리는 이제, 재물, 재능, 시간 등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세상의 유혹보다 하늘의 가치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신과 마음을 밝히고, 영적 빛을 통해 삶 전체를 선으로 이끌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재물을 나누라.”는 윤리적 지침이 아니라, 마음의 지향과 영적 빛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는 신학적·영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땅의 보물은 한시적이지만, 하늘의 보물은 영원하다. 눈, 즉 마음이 밝으면 모든 삶이 선으로 비추어지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오늘도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재물과 마음의 주인을 하느님께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벗에게>
마태오 6,19-23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눈은 몸의 등불)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벗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더러울 수 있는
나의 눈이 아니라
늘 맑고 깨끗한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바라보게 하소서
거칠 수 있는
나의 손이 아니라
늘 부드럽고 따스한
하느님의 손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보듬게 하소서
멈칫할 수 있는
나의 발이 아니라
늘 생기 넘치는
하느님의 발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탐욕스러울 수 있는
나의 마음이 아니라
늘 아낌없이 베푸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품게 하소서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의 보물 1호>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생각하자. "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곧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안에 빛이 있어야 하고, 그 빛은 '눈'의 상태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관대한 사람이요, 성하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인색한 사람이다.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몸 안이 빛으로 가득 차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고, 인색한 마음을 가질 때 어둠 속에 있게 된다. 이기적인 보물에 집착하는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한다.
나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 그 보물을 이 지상의 삶이 끝났을 때 가져갈 수 있나? “장례 행렬 뒤를 따라가는 이삿짐 트럭을 본 적이 없다.” 천상을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고정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보물 1호가 무엇인지 중요하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예수님으로 족한가? 감히 '예'라고 하지 못하겠다. 예수님으로 족하다면 그분께서 남겨주신 공덕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베푼 것, 곧 사랑, 애덕, 섬김, 인내, 양선함, 다정함 등등 이것들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
이 시간 맑은 눈을 가진 관대한 사람이 되길 갈망한다.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서로를 지배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한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다. 믿는 이의 삶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구슬이 서 말이라 해도 꿰어야 보배’인데 바보처럼 결심만 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 부디 맑은 눈으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되길 바란다. 한 점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모든 것이 기쁨이다.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볼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늘의 문은 여기 삶의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큼 인색함으로 세상에 매이지 않고 마음이 늘 하늘의 보물을 향할 수 있길 소망한다. 자석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저희가 참된 보화를 찾고 그리하여 어둠의 사람이 아니라 빛나는 사람이 되도록 저희의 마음을 열어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대 청년과 70대 노인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래도 젊음과 힘이 있는 20대 청년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대 노인의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행복도는 20대부터 하락하다가 40대에 최저점을 찍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50대가 되면서 행복도가 회복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한 연구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20대는 연예인, 기업가, 정치인, 운동선수 등 유명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70대는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통해 삶의 우선순위가 행복과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즉, 20대의 젊을 때는 성취가 우선순위에 있었고, 나이가 든 70대는 관계가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성취를 위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관계를 위한 사랑의 삶 속에 행복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궁극적인 대상의 상태에 묶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가난하게 살아라’, ‘저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신 우리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19.20)
땅의 소유를, 이웃을 향한 자선과 사랑, 무엇보다 하느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두고 있을 때, 사라질 세상의 부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어둠에 눈이 멀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1)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는 ‘자신만을 위하여’이기도 하고, ‘현세만을 위하여’이기도 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다.”는,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를 ‘자신만을 위하여’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적인 인생을 살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찾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인생을 살지 마라.”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을 잘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으로 얻는 열매인 ‘구원’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허무한 것들은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등만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예수님의 말씀은 ‘저축’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축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내세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 남아 있게 되는 저축을 해야 합니다. 충실한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이 바로 ‘진정한 저축’이고, 진짜 ‘보험 가입’입니다.
2)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냐? 잘 반성해 보아라.”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1-2.5-7)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는 말씀은, 주님의 은총이 아닌 것을 은총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4)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누리는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함’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목 생활 중에도, 이집트 종살이 시절에도,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 땅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구약에서 땅은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풍요와 안정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역사와 신앙을 담고 있는 보이는 터전이었던 땅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머무시고 마련하여 주신 자리, 곧 하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땅은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은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하늘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생각은 우리를 구약의 세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으며, 아무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시민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 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고,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 신명 7,6)
또한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것으로,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가 있고,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도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맞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지금 나의 눈이 나 자신을 ‘향하여’ 있는지,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여기 우리 안’에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우리에게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볼 것'(마태 5,8 참조)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주님!
제게는 당신이 보물이오니, 제 마음이 당신께 사로잡히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당신 사랑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 눈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고, 제 마음이 당신께 다다라 있게 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재물인가? 보물인가? 필요한 것인가? 중요한 것인가?>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오늘 주님께서는 보물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보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을 보물로 삼음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재물은 재물로만 여겨야 하는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재물을 보물로 여기며 일생을 삽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요강이나 돈지갑을 국보 1호라고 하는 것과 같고, 잠시 보물로 여겼다가도 웬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깨달아야 하는데 재물을 계속 보물로 여기며 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이고, 일생을 깡그리 망치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겠습니까? 돈이나 재물이 우리 삶에 있어서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돈은 필요한 것이지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설사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이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돈의 비중이 사람과 사랑보다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재물을 재물 정도로 여길 줄도 알아야 하고, 지상 재물을 천상 보물로 바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성인들은 이것을 안 분들인데 그 대표적인 성인들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이며 가난 면에서는 클라라가 프란치스코보다 더 천착한 분입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지상 재물을 천상 보물로 바꾸는 아주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클라라는 하느님과 재물을 둘 다 섬김 수 없음과 복된 가난을 얘기한 다음 “이 얼마나 크고 찬양할 만한 교환인가! 영원한 것을 위해 현세적인 것을 버리고 지상의 것 대신에 천상의 것을 받으며, 하나 대신 백배를 받고 복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나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복된 가난은 교환이고 위대하고 찬양할 만한 교환입니다. 썩어 없어질 재물과 천국이라는 보물을 바꾸는 교환이고,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사는 복된 교환입니다.
클라라가 말한 Magnum laudabile commercium(위대하고 찬양할 만한 교환)에서 Commercium은 옛날 물물교환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이 상업적인 말이 점차 뜻이 풍부해지고 교회 안에서는 마침내 영적 의미도 담게 됐지요.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 주님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되는 뜻으로도 쓰였고 미사의 물과 포도주를 섞는 예식을 할 때는 사제가 “이 술과 물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클라라도 같은 맥락에서 지상 것과 천상의 것의 Commercium(교환)이 복되고 찬양할 만한 가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고 어떤 교환을 하며 삽니까? 재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중요한 것입니까? 머리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임을 아는데 마음과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런 성찰과 함께 욕심을 채우는 데 쓰이던 재물이 이웃 사랑을 위해 쓰이게 되면 이것도 재물이 보물로 바뀌는 복된 교환이 됨을 묵상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마태 6,20ㄱ)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
오늘 복음(마태 6,19-23)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는 말씀과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는냐?"(마태 6,22-23)
어느 봉사자 자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누구로부터 봉사 잘한다고 칭찬받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이렇게 말한 그 자매님은 분명 하늘에 보물을 쌓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
'하늘에 쌓아야 보물'은 '지금 여기에서 기쁘게 하고 있는 하느님의 일들'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몸소 행하신 일들'입니다. 곧 '희생과 봉사인 사랑'입니다. '용서와 화해인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여깁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너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고 감춥니다.
나도 그런 사랑이 되어봅시다!
나도 그런 희생과 봉사가 되어봅시다!
나도 그런 용서와 화해가 되어봅시다!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물사랑, 생명운동입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심 가치인
보물은 금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곳을 향해
흘러갑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참된 보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물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었으며,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무엇을 보물로 삼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보물을 닮아가고,
그 보물이 우리 삶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합니다.
사라지는 것에
마음을 두면
불안이 따르고,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참된 보물은
하느님을 향해
머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인격을 만들고,
인격이 결국
그 사람의 삶을
완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머물 때,
우리의 삶은 은총과 축복으로
빛나게 됩니다.
마음의 방향이
곧 인생의 방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비추시는 빛이시며,
우리 삶의
가장 귀한 보물이십니다.
오늘도 하느님이라는
가장 큰 보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며,
감사와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