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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27 6월21일 [연중 제12주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21|조회수40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27
6월21일 [연중 제1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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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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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1jrkgsIrMU
[춘천교구 이태원 시몬(서석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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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 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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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gSCGcbX5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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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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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참례 인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900명이 넘는 때가 많았고, 지난 부활 대축일에는 1,155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가대 모임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원이 늘어서 연습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성가를 배우고 싶은데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포 사목의 현실은 점점 고령화되고, 봉사자는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오히려 봉사자가 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고, 교우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입니다.

감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성당 경계를 이루던 나무 몇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나와서 퇴비를 뿌리고,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전에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와주던 정의의 로봇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그런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묵묵히 나타나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지난 Mother’s Day를 앞두고 형제님들은 어머니들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모여서 고기를 썰었고, 정성껏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님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성모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인 1996년입니다. 봉성체를 가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갔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이 큰 병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점점 근육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첫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기뻐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어느 날 제게 짧은 시 한 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맑고 따뜻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 청소를 하는 분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 성가대로 봉사하는 분들, 힘든 교우를 위로하는 분들, 말없이 헌금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고, 미사를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제도 때문만도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겼습니다. 시련은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오해받을 때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외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힘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땀방울입니다.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봉사하고, 기쁘게 나누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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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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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반복된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루카 2,34), 박해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동반자처럼 존재해 왔다.

1. 예레미야의 상징성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제1독서(예레 20,10-13)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을 증언한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공포가 사방에 있다!”라는 조롱을 받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충실함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2.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된다. 우선,  심판 때에의 담대함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된다.(26절) 즉, 진리의 말씀은 결국 드러날 것이므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복음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감출 수 없으며, 진리를 감추는 순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참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육신만 죽일 수 있지만, 영혼과 육신을 함께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28절) 이는 인간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 곧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일깨운다. 사람의 칼은 육신을 베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영혼과 육신을 함께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칼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섭리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자.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 전체가 아버지 손길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3. 고백과 증언의 책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용기와 순교 신앙의 의미를 드러낸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쳤다. 교회 헌장도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당해 왔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부활의 빛을 드러내는 표징이다.”(42항)

4. 은총이 죄를 압도한다: (로마 5,12-15)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죄보다 더 큰 것이 은총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죄의 세력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은 두려움보다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5. 신앙인의 삶에의 적용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는 인간적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맺음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진리는 드러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의 섭리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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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중에>

마태오 10,26-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기도 중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기도 중에
들릴 듯 말 듯
그분께서 속삭이신다

들리느냐
지체하지 말고
네 삶으로 외쳐라

귀를 막은 이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보일 듯 말 듯
그분께서 비추신다

보이느냐
두려워하지 말고
너를 살라 비추어라

어둠을 즐기는 이들까지
빛에 잠기도록

기도 중에
알 듯 모를 듯
그분께서 알려주신다

알겠느냐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네 목숨을 걸고 증언하여라

거짓을 일삼는 이들까지
진리에 무릎 꿇도록

기도 중에
느낄 듯 말 듯
그분께서 함께하신다

느끼느냐
아낌없이 남김없이
너를 바쳐 느끼게 하여라

홀로 삶에 맛들인 이들까지
더불어함께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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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한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도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 5,17)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8)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분명 “아니오”하고 답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길 희망한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는가?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 누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겠는가? 세례명을 받은 사람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아버지 하느님 앞에 당당하길 소망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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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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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26-33)

1) 26절의 말씀을 앞의 25절,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에 연결하면, 26절은, “누가 진짜로 하느님 편이고, 누가 사탄 편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탄과 그것의 추종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6절을 27절에 연결하면, 26절의 뜻은 “너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겨도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는 활동이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 편에 서 있는 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7절의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는 제자들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셨지만,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고 파견하셨습니다.(마르 16,15)

2)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데,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희망,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참고 견뎠고, 그런 그를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28절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멸망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주신다.”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참새보다 더’ 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베드 1,7)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과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느님께서 전부 다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니까 힘든 일을 만나도 기죽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는, “그를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연상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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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달력을 보니 하지(夏至)입니다. 일 년 중 가장 해가 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새벽 5시 정도가 되면 해가 뜨는데, 저는 해뜨기 전에 일어나니 꽤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왜 일찍 일어나는가? 잠이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배가 고파서? 해가 뜨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인간극장”이라는 방송에서 우연히 본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칩니다.

다섯 살 된 외동딸 다은이에게 아빠가 묻습니다. “다은아,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응, 아빠가 보고 싶어서” 다은이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고 대답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딸입니다.

그 옛날 신학교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아침 기상 시간이면 ‘주님을 찬미합시다.’(Benedicamus Domino)  ‘하느님 감사합니다!’ (Deo Gratias)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참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는데 이제야 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왜 일찍 일어나는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이라고….

요즈음 이른 아침이면 사제관 뜰과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냅니다.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아침 식사가 맛있습니다. 겁나게 좋습니다.

남도 사투리 중에 ‘겁나게’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가끔 이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너무너무’ , ‘아주’ , ‘매우’ 등등의 표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말 그대로 ‘겁난다’ , ‘두렵다’ 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행하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29)고 하시면서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0,31)

정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살아가는 귀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분 섭리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 안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인식한다면 나는 정말로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지닐 때 삶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은 그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내용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하루를 시작하며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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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병준 필립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오 10,26-31 참조)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는 원하지도 않은 예언자의 길을 걸으면서 조국의 멸망과 동족들의 쓰라린 미래를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죽을 고생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믿음의 갈등은 특별히 억울한 고통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벗어나려고 믿음을 찾는데, 그 고통이 믿음 안에서도 없어지지 않기에 믿음의 벽에 부딪히고 냉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이시고 핵심이시며 목적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은총과 축복의 샘물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지 못하는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애는 참으로 불행하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으며, “하실 수만 있다면 쓴잔을 거두어 달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 믿음의 발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점지하신 사람은 십자가도 많고 눈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성모님도 그러셨으며 성인 성녀들도 비슷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은 이들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만, 못난이들은 도망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와 자유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한 이들의 길은 험난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수많은 이들이 투쟁했습니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애처롭게 바쳤습니다. 그들이 권력과 타협했더라면 더 편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받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습니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 덕분입니다. 여러분, 밀알이 열매를 얻으려면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고 썩어야 합니다. 신앙도 민주주의도 행복도 평화도 마찬가집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만일 시련을 외면하고 배척한다면 그는 죽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서 고생해서 천국에서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죽음의 굴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확고하다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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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왜곡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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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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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끔 아주 오랜 전에 찍었던 제 사진을 보고 놀라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실 제 머리의 탈모는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하느님도 제 머리카락 숫자를 분명히 세어 두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제 머리카락 숫자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트레스로,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강했지만 더 이상 셀 필요가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이젠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저야 이젠 제 머리카락 숫자에 별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은데 설마 무척 분주하실 하느님께서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두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쏟고 계실까요?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을 보낼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고 당부하시면서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무엇을 말할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약속한 성령이 오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상황에 적절하게 말씀하시고 이끌어 줄 것이다.”라고 다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에는 천둥이나 번개, 태풍만 불어와도 놀라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고향 전남 순천엔 한낮부터 엄청난 집중 폭우로 제방이 무너지고, 물이 범람해서 갯가에 있던 집을 피해 높은 빌딩(=국민은행,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로 기억하지만)으로 피신해서 밤새 내내 두려움으로 떨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1베3,14)라는 말씀은 체험으로 깨달은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의도는 사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 4,8)라는 말씀의 요지도 거의 유사합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어 봅시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27,1)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짙게 내재해 있다가, 일어난 사건과 생생한 실제 상황에 의해서 우리 의식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봅니다. 사람이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 질병(=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결혼과 일에 대한 두려움, 취업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와 노후에 대한 두려움 등 어쩌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숱한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런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라”라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으로 위로받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마태10, 28)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앎은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이 진리의 빛으로 비춤으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 존재에 비해 하찮은 참새마저 지켜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두려움은 더 이상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8, 5) 두려움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겨울 눈이 따뜻한 봄의 햇살로 녹듯이 사라지라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거룩하신 만군의 주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더러운 우리의 입술과 마음을 씻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타는 숯으로 우리의 더러운 입에 대시면서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 7)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심판의 두려움에서 일으켜 세워주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가톨릭 성가 472번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가사를 마음으로 조용히 불러 보도록 합시다. 『온갖 두려움과 모든 근심 저 멀리에 던져 버리오며 주님 아름다움 생각할 때 내 마음엔 큰 기쁨이 넘치네. 주님은 저 하늘 펼치시고 태양과 바다 꽃 만드셨네. 그러나 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과 사랑의 은혜 찬미하리.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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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ㄱ)

<당당한 신앙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10,26-33)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선포하여라. 너희가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자!'
'성당 안에만 갇혀 있는 신자가 되지 말자!'
'성당 밖에서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자!'
'성당 밖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드러내자!'
'당당하게 성호경을 긋고, 기도하자!'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이 되려고, 복음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고 복음이 되어야 할 자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저는 그곳이 바로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예수님이 되고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화만사성'이기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겨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며 그 사랑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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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두려움은 줄어들고
감사가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우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이미 소중하고 귀합니다.

참새는 참새로서 소중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두러움보다 
먼저 와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걱정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불안과 경쟁이 
일상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자주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은 더 이상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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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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