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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4628 6월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6.06.22|조회수40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4628
6월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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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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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CRS1CrpO1g
[예수회 도윤호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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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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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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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운이 좋다.” 혹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고, 뜻밖의 도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운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걷고, 또 걷고,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오솔길이 되고, 큰 신작로가 되고, 마침내 고속도로가 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희생, 용서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원망했고, 시대를 탓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무너졌고, 희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시간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상을 따르며 세상의 욕심에 흔들렸음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눈물의 자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목적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에 있어도, 달라스에 있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했습니다. 산행을 가면 저는 늘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 했고, 식사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로미테 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산장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를 맡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뒤처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형제님 한 분은 달랐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산 아래까지 내려가 약을 사 왔습니다. 저 역시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아무 불평 없이 저와 함께 산 아래까지 내려가 새 신발을 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 다른 산장으로 옮겨야 할 때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였습니다. 걷다 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성공이라는 산장에 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산장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적할 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의 길은 남을 판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길입니다. 원망과 비난 속에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때로는 험하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서로 손을 잡아주고, 기다려 주고,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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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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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종종 선입견, 제한된 정보, 감정적 판단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이는 심판이 오직 하느님의 고유 권한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3-5절)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티는 작은 잘못이나 사소한 흠이며, 들보는 자신의 큰 잘못이나 죄악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쉽게 판단할 때, 사실은 자신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하는 위선에 빠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죄를 직시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죄를 꾸짖는 자는, 스스로 정의를 행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죄를 짓는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30,1 요약)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큰 잘못을 제거한 후에야 다른 이를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세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결함을 깨닫고 정화함으로써, 이웃에게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성찰은 단순히 자기반성을 넘어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바로잡을 수 없으며, 먼저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이만이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Homiliae in Matthaeum, 33,2 요약)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겸손과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삶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힘쓰고, 그 후에 주변 사람들을 진심 어린 관심으로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절)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겸손한 사랑을 통해 참된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정화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에게 도움과 격려를 해주는 삶이 바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 마음속 들보를 먼저 제거하고, 그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의 작은 티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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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로소 보입니다>

마태오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보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나를 봅니다

나를 보려
나를 봅니다

내가 보는
나를 봅니다

너를 보려
나를 봅니다

너를 보는
나를 봅니다

네가 보는
나를 봅니다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너를 봅니다

너를 보려
너를 봅니다

네가 보는
너를 봅니다

나를 보려
너를 봅니다

나를 보는
너를 봅니다

내가 보는
너를 봅니다

비로소
네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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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마음에서 자유로 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관대하고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너그럽고 부드럽기를 기도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 -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최고보다는 최선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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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생각나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내 빤스 어디 있지?”라고 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로댕이 그런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자세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오른팔을 꺾어 턱을 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는 것도 너무 불편합니다. 한 번 이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아마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 것입니다. 로댕은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불편한 생각을 불편한 자세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 작품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새롭게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알려는 노력보다 그냥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쉽게 판단하고, 그 뜻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함부로 판단, 단죄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여기서 심판한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정당한 비판이나 판단 능력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방의 동기나 영혼의 상태까지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고, 그를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향해 들이대는 그 엄격하고 냉혹한 잣대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타인에게 자비가 없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돕고 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자기의 죄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보다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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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하느님의 뜻’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요한 3,17) 만일에 죄인 자신이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겠지만, 그 심판과 멸망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12)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6-17) <이 말에서 ‘죽을죄’는 ‘죄인 자신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죄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라는 뜻인데, ‘파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파문당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형제애 실천’은 ‘함께 가는 일’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티’와 ‘들보’는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누구의 눈에 무엇이 있는지, 즉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 그것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들보’와 ‘티’ 라는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너나 잘해라.”가 아니라, “너부터 잘해라.”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인데, 내가 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 없는 일, 이기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어야 합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서는 ‘나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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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님]

<하늘을 무서워하라>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잘 살기를 바라서일진대 오늘 독서에서는 온통 ‘넘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열왕기 하권에서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들었다.(열왕기하권 17,5-8.13-15ㄱ.18)

그리고 복음에서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7,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다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사무엘 예언자 때 사울을 초대 왕으로 하여 왕국을 세웠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거친 후 왕국은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두 왕국도 나중에 강대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북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남 왕국은 그보다 150년 후인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에 의해 망한다.

오늘 제 1독서는 기원전 722년에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어 백성들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이를 성찰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그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열왕기하권 17,7-8)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목이 뻣뻣하였다.

성경 저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민족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로 엮어진다. 그것은 왕의 역사로서 민중은 왕들 역사에 조연으로 나타난다. 왕의 역사라는 것은 권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영웅이 강조된 역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왕의 능력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그들에게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는 인간만의 역사가 아니었고, 영웅들에 의한 힘의 역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한가에 따라 성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역사였다.

이 역사는 하느님 편에서도 그러하여 하느님만의 역사란 없다.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펼쳐진다. 이스라엘인들은 한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망하는 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흥하는 것은 하느님께 충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읽은 열왕기 후서는 지금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함락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약하고 아시리아가 강한 때문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한 탓이라고 보며 민족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만이 한 나라의 역사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는가? 언뜻 보기에 그러한 것 같다. 어느 나라도 자기나라 흥망의 역사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러하여 한반도에서 생겨나고 사라진 여러 나라들,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를 거쳐 지금의 남한과 북한도 나라의 흥망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다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흥망의 역사가 이웃나라의 침략과 무능한 왕 때문인 것 같지만 나라가 망한 근본원인은 왕이 민심을 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관도 근원적으로는 저 이스라엘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 민족은 하늘을 이스라엘처럼 야훼 하느님으로 숭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왕은 하늘에 죄를 짓지 않고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

왕이 자연과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아니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거슬려 백성을 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이나 정치인들은 저 이스라엘처럼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한 탓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 자기 힘만을 믿고 백성을 무시하고 종교를 타락시켜가면서까지 정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늘과 우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백제가 망할 때 괴상한 망조가 온 나라에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왕을 비롯한 백성을 다스리는 고관들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의 힘만을 믿고 정치하면서 사치하고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재물의 신, 향락의 신, 권력의 신)을 경외하다가 나라를 망친 것이다. 고려가 멸망한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로 불교의 타락을 드는 역사가들도 있다. 하기야 종교는 타락할 수 없다.

타락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소위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종교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위협하며 착취한 까닭이다.

종교를 우상과 미신으로 여기게 하는 일이 고려 말에 일어났던 것이다. 진정 종교인들이 사심 없이 올바른 불심을 발하였다면, 그러한 불심으로 정치인을 조언하였다면 고려가 멸망하는 일을 피해갔을지 모른다.

열왕기 후서의 저자는 이렇게 종교(인)의 타락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아쉬워한다. 그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다면, 그들이 하느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른 잡신들을 섬기지 않았다면...

열왕기 후서 저자의 역사관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위기를 많이 이야기한다. 국민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데에는 부끄럽게도 종교의 타락이 근원적으로 일조하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위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올바른 대통령, 올바른 지도자를 가지지 못해서인 것 같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이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자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의 본질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종교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회자되는 ‘고소영’에 종교가 끼어 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타락한 종교와 타락한 정치의 결탁를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를 드린다면 올바른 신심을 발하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진정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7,3-5)

남을 회개시키려고 하기 전에 고소영이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여 고소영의 탈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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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알 수 없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주 특별한 인간이며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이미지들, 거짓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자신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허구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꿰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은 부풀려집니다. 잘못되어 있거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상대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편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속에서 모든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선해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선한 것, 두 가지 입니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토록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과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과장시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과장되고 투영된 다른 사람의 악함 앞에서 우리는 마치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면 우리는 입에 힘을 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방식으로 많든 적든 소위 선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구나 타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가 허구를 떨쳐 버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우리가 만일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허구들은 곧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부터 그 들보를 들어내면 우리는 비로소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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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은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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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 것이지, 죄를 바로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주듯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5-16)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1티모 5,20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하시면서, 자신의 죄를 먼저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의 ‘큰 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또한 단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는 대체 어떻게 빼낼 수 가 있을까?  그것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는 것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호의와 자비의 마음’,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7,5 참조)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그보다 적극적으로 ‘호의로 선을 베푸는 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 '용서'를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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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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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ㄱ)

<죄인은 심판할 수 없다!>

오늘 복음(마태7,1,5)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 7,3-4)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어떠한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실행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 노력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완전함 앞에서,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부족함이 많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리처럼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복된죄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를 심판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심판과 판단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2열왕 17,13ㄱ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복된 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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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산은 스스로 높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보는 남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리한
편견과 교만,
고정관념과 자기중심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만을 탓하면서도
우리 역시 교만했고,
이기심을 비난하면서도
우리 역시 이기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성찰과 기도입니다.

정화의 출발점은
남을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참된 회개는
남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들보를 빼내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영적 여정입니다.

자신 안의 들보를 깨닫고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더 인간다워집니다.

그리고 타인의 부족함 앞에서도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고,
참된 사랑은 그 들보를 
내려놓는 데서 완성됩니다.

오늘도 교만과 편견의 들보를 내려놓고,
겸손과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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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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