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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2482 8월9일 [연중 제19주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0.08.10|조회수139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2482
8월9일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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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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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TV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Ddfyckxeuo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47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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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주님은 폭풍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오 복음 14장 24절)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서 높은 파도에 쉼없이 흔들리고 있는 작은 배 한 척!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교회 깊숙히 들어가면 갈수록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미성숙과 부족함, 적나라한 실상과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교회 공동체를 향한 비난의 화살들을 인정사정없이 날립니다. 속수무책으로 화살들을 맞고 있노라면 깊은 슬픔과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야지, 저렇게 쉼없이 흔들려도 되는 것인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들 잘 익은 밀알처럼 튼실해야지, 쭉정이나 가라지처럼 저렇게 칙칙하고 울적해도 되는 것인가?’

위기감이 증폭되면 목소리는 더 커집니다. ‘이제 교회는 끝났어! 교회는 밑천을 다 드러냈어! 이제 배에 물이 가득 차서 거의 침몰 직전이라니까!’

그러나 우리 교회 공동체는 크게 흔들리고 요동치면서도 침몰하지 않고 2천년 세월 동안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계속해서 불안불안하겠지만 결코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이유? 배 심층부 한 가운데는 심한 파도에도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 장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우로 크게 흔들릴 때 침몰될까 다들 두려워하지만 복원력의 근원인 안전장치로 인해서 다시금 배는 중심을 잡습니다.

배 상층부 갑판 위로 올라가보면 흔들릴때마다 꼭 붙들라고 안전장치인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가 기우뚱할때면 만사제쳐놓고 난간을 꼭 붙드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라는 배 안에도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 수 있는 영원한 안전 장치가 있습니다. 든든한 선장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관계로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크게 요동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계시는 복원력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안전장치를 꼭 붙들어야겠습니다.

교회란 나를 포함해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로 구성된 공동체이자 주님 품안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근본적으로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느껴지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편입되고 나서 실망과 허탈을 느끼면 그것은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교회란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폭풍을 헤쳐 나가는 조각배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흔들릴 때 마다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일, 그것처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인간은 왜 두려워합니까?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 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 때로 주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순전히 우리 인간 측의 착시현상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폭풍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비 내 어미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만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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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노력하라 가르치면 자녀 인생 망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VjhMnlnZ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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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이란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습니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 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 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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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모든 신적인 현시, 나타남의 행위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는 것이다.

제1독서: 1열왕 19,9a.11-13a: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주님

하느님 야훼께서는 하느님의 산인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신비스럽게 나타나신다. 이세벨 왕후의 비호를 받던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을 살해하고 왕후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피하였다. 오랜 도보여행으로 심신이 지친 엘리야는 하느님에 의해 놀랍게 원기를 회복한 후(1열왕 19,5-8) 그는 밤을 지내기 위해 한 동굴에 이르렀다. 그 때 야훼의 말씀을 듣고 동굴 어귀에 나와 섰다.(11-13절 참조)

야훼께서는 모세 때와 같이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길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시며 나타나신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13절)

이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현존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작은 일들을 통하여 충실성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 만남 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고통과 걱정에서까지도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방관자’가 되기 쉽다.

복음: 마태 14,22-33: 풍랑에 시달리는 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 또한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이 기적사화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된다.(32절) 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이다. 이제 그분의 현존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론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참조)

이 대목에 교회론적 관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Assisi 1975, p. 344)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듯 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 그리고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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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삶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 거두지 못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1독서의 엘리야 이야기는 복음의 베드로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호렙산으로의 여행에 엘리야를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는 베드로를 당신께 걸어오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과 비슷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돌풍,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잔잔한 미풍 속 작은 속삭임을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엘리야에게 드러내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말과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한순간 순수하여 오직 주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오너라.”라는 말씀으로 초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믿음은 불안과 의심으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다부진 용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우리 자신의 눈길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며 믿음의 길을 갈 때, 주님의 힘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 안에서 둘로 떨어져 나간 상태’,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신감이 허물어진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둘로 갈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흐트러짐 없이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만이, 불안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입을 벌리는 바닥 모를 심연을 뛰어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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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라는 증언이고, “우리는 예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고, 자연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욥기에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하느님께서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일과 같은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 권능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도 신앙고백이 되지만, 33절의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유령이 다가오는 줄로 생각해서 겁에 질린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인 줄 몰랐고, 또 예수님이 그렇게 다가오실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맞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왜 물 위를 걸으려고 했을까?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28-33)

“주님,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은,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인데, 앞의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과 합해서 생각하면,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셔서 그것을 증명하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이 말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또 주님을 시험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 명령하십시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대단히 독특한 표현입니다. 명령을 요청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말투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내면서도 그것을 요청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명령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제자들(신자들)은 주님께 명령할 수 없습니다. 요청(간청)만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은 주님만 하시는 일이고, 제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것을 의식하고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독특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려고 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예수님께 가고 싶은 심정에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든 그의 요청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을 받아 주신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중간에 물에 빠질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게 하려는 생각으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 주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 때문에 큰 파도가 밀려오자 그 파도를 바라보았을 것이고, 파도에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그가 물에 빠진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 파도에 대한 무서움이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물에 빠졌을 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셨는데, ‘의심’이란, 여기서는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갈라졌고, 또 제자에게 물 위를 걷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과 물 위를 걷는 사람을 물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갈라졌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만 믿는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 사도의 진짜 문제점은, 믿음이 부족하고 약해서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도 물 위를 걸어가고 싶다고 소망한 일입니다. 그는 왜 그것을 소망했을까?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일까, 아니면 물 위를 걷는 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까, 또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불경스러운 교만일까? 아마도 그런 것들이 모두 합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불순한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어쩌다가 기적을 일으킨 것 같은 일이 생기면 교만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욕망과 교만은 모두 죄입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선을 실현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그 일은 선의 실현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간 일은 선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는 말 한 마디로 장애자를 고쳐 주고(사도 3,6-7), 죽은 사람을 살리는(사도 9,40) 기적을 일으키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는데,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일에서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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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책임(責任)을 뜻하는 영어는 'Responsibility'와 ‘Accountability'가 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강재구 소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훈련도중 수류탄이 떨어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습니다. 강재구 소령은 부하들을 위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육군은 전 장병이 모금을 해서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동상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유의 전선 월남 출정을 위한 맹호부대의 수류탄 던지기 연습 중 한 부하의 실수로 많은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순간 터지는 폭탄을 막아 안고 자기 몸을 희생하다.”

베드로 사도의 ’Quo vadis Domine(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다가오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도망쳐 나온 로마로 가는 길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금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두려움과 어둠에 직면한 인류에게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Responsibility'를 다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법적인 의미입니다. 행위가 있었고,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독일은 인류와 역사 앞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지만 아직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전범이 안치된 곳에서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와 국제사회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사의 경영이 악화되는 경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기업인이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는 기업인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2000년 3월 12일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인류 앞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로 과학적인 진리를 가리려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재판에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Accountability'를 통하여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있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물 위를 걸어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걷다가 그만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 사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두려움의 바다, 상심의 바다, 근심의 바다, 욕망의 바다, 시기의 바다, 분노의 바다에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큰 바람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진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불길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은 내적인 침묵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주님과 떨어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합니다.’

교회가, 신앙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면, 주기보다 받으려 하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욕망의 바다에, 욕심의 바다에 빠지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하고, 먼저 나누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세상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희생의 빛으로, 사랑이 빛으로, 희망의 빛으로 손을 내밀었고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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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낯선 사랑>

마태오 14,22-33 (물 위를 걸으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낯선 사랑>

거센 파도를 거슬러
목숨마저 걸고
내게 오시는

당신의 사랑이
두려울 정도로 낯선
까닭은

그 사랑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은 내가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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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성우 마티아 신부님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짧은 유머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던 관광객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당도했습니다. 안내원이 “나룻배로 여기를 건너는 데 20달러입니다.”라고 광고하자, 한 관광객이 “아니 뱃삯이 왜 이렇게 비싼 거요?”하고 불평했습니다.

“손님, 여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호수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줄은 알고 있소만 그래도 너무 비싸지 않소?”

“손님! 여기가 바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바로 그곳이잖아요. 그래서 비싼 겁니다!”

“거 보슈! 얼마나 뱃삯이 비쌌으면 그 양반이 물 위를 다 걸어갔겠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신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올라가는 때와 내려가는 때를 경험하게 됩니다. 매사가 순풍에 돛 단 듯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역풍을 만나서 힘겨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올라갈 때보다 오히려 내려갈 때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겨루어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그들을 모두 다 쳐 죽여 버립니다. 이때 엘리야의 기세는 아무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기세등등했지요.

그러나 ‘바알’의 숭배자였던 왕후 ‘이세벨’이 복수를 다짐하고 엘리야에게 칼을 겨누자 그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서슬 퍼렇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하느님께 죽여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엘리야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한때의 승리로 오만해질 뻔한 엘리야를 그분 없이는 초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5천 명을 배불리 먹인 표징을 일으키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기도를 마치시고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물 위를 걸어서 오십니다.

마치 당신 없이 한번 살아보라는 듯 멀리 계셨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자들에게로 돌아오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해집니다.

여러분! 인생이라는 바다에는 때로 사나운 바람과 성난 물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이 닥쳐올 때라도 우리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유령처럼 다가 오신다 해도 그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닥을 칠 만큼 내려 갔을 때에도 우리는 거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물속에 빠지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께 온전히 매달렸기에 잡아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실로 내려가는 때가 바로 그분을 만나는 때요 새롭게 일어서는 때입니다. 엘리야가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새로운 질병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 상황으로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분의 음성을 듣고 힘을 냅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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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대건안드래아 신부님]

<나다. 안심하여라>

한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신앙생활을 접은 신자들에게 “왜 갑자기 냉담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예수님 믿어도 되는 일이 별로 없고, 너무 힘든 일들이 많이 생겨서…”라는 푸념 섞인 대답을 듣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을 믿어도 원하는 일이 즉각 이루어지지도 않고 힘든 일들이 생기다 보니 예수님이 정말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업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데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시련이 닥쳐오는 때가 많이 있다.

더욱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고 특히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자신들에게 왜 이런 고통이 닥쳐오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우성을 치다가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에 가시기 전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대상으로 저녁 늦게까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를 하셨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자 허기로 인해 힘들어하는 군중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셨다.(14.22)

당신의 사명은 군중이 바라는 ‘배부름의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밤이 늦었기에 배 타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방금 전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 재촉하시니 그분을 믿고 배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풍랑을 만나 죽을 만큼 큰 고생을 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매우 힘든 상황에 내버려두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삶 깊숙이 예수님을 만나고 직접 체험해서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워서 믿고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3인칭 믿음’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기에 오래가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믿음을 증거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허락하시되, 그들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멀리서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고난의 상황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들판에서도 그리고 풍랑이 이는 호수 한복판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을 어두운 밤에 떠나보내시고 그들이 풍랑으로 시련을 당함에도 당신 홀로 기도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서라도 직접 찾아오시어 “나다. 안심하여라”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이사야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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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배경민 베드로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세요>

20세기 말 새천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사람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Non avete paura!) 이 말씀은 2천 년 전이나 세기말이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복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현시점에 당면한 많은 복잡한 문제를 힘들어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움을 크든 작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에서부터 지역 사회를 비롯하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까지 염려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려움을 갖지 말라고 환기해 주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우선 첫째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분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오직 하느님만 계셨습니다.

둘째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사라져가며 지나가는 것으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허락하시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진정 깨닫고 인식해야 할 바를 제대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어리석음)를 범하게 됩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에 두려워하여 관심과 에너지를 낭비하면, 정작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은 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배제하는 가운데 결정하게 되는 모든 분별과 판단은 사실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선입견과 오류에 빠져 있으면, 그릇되게 판단하고 실수하게 되어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셈하고(참조, 마태오 10,30) 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먼저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필요시 당신이 어떻게든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개입하여 곤경을 벗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먼저 아시고,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뭍이 아니라 호수 한가운데서 풍랑에 시달리며 위험에 처해 있고, 때는 새벽녘이라 타고 갈 배도 없으며 부탁할 사람도 없으니 위급한 상황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 당신께서 몸소 물 위를 직접 걸어가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낙원을 잃어버리고 구원될 방법이 없으니, 결국 당신께서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에서는 당신이 직접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북돋우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니, 주어진 여건 안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여도 더욱 용기를 내어 주님을 굳게 믿으며 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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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회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현재 유명한 디지털카메라 회사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이를 발명한 회사는 카메라 필름으로 유명한 ‘코닥’입니다. 1회용 카메라를 처음 발표한 회사도 ‘코닥’으로, 카메라의 대중화에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디지털카메라까지 처음 발명했고, 미 우주항공국 나사에 납품해서 우주에서도 사진을 찍도록 할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보호 신청을 했습니다. 필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회사가 파산했던 이유는 끝까지 필름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기술이 필름 시장을 잠식할까 봐 기술을 서랍 깊숙이 처박아 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 각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따라갈 수 없어 뒤처진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미래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한순간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 계속해서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틀에 매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은 참으로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물 위에서도 땅 위처럼 걸으실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새롭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담대한 베드로조차 육신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치며 주님께서 구해주시기를 청하지요. 이 외침이 바로 ‘회개의 신음’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때,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될 때는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할 만큼 해봤다면서 포기하고 좌절 속에 빠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제1독서의 “주님 앞에 서라.”는 말씀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우리가 될 때,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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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멀리 바라봅시다>

마트에 가면 ‘1+1’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괜히 관심이 갑니다. 예전에 안식년을 보낼 때도, 마트에 가면 늘 ‘1+1’ 상품을 구매했습니다. 하나 가격으로 또 하나를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이득입니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득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유를 말할 수 있지요.
1) 물건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2) 1+1 모두 사용할 정도로 쓰지 않습니다.
3)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약간 비싸더라도 조금씩 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유혹에 계속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싼 게 비지떡…. 세상의 유혹은 순간의 만족과 이득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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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고백의 기도-

삶은 여정입니다. 강론중 참 많이 언급하는 주제가 여정입니다. 누구나에게 한 번뿐이 없은 유일무이한 소중한 인생여정입니다. 삶의 여정에는 목표와 방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요즘은 날마다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처럼, 우리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사랑의 강처럼 삽니다. 이 방향을 잃어 버릴 때 방황과 표류요 ‘일상日常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천년만념 임향해 흐르는 강”

분도회 수도자들의 영성을 대변하는 산과 강의 비유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여정중에 결정적인 요소가 기도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바로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을 통해 주님과의 우정이 깊어갈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만남은 기도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날마다 평생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내적 허기虛氣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런 주님과 사랑의 만남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두 기도가 그 주제입니다. 말씀 배치대로 제1독서의 엘리야, 제2독서의 바오로, 복음의 예수님, 모두가 기도의 대가요 기도의 달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종, 기도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삶의 위기 중에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엘리야입니다. 어렵고 힘든 위기의 때, 찾아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은 혼란 중에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음의 고요가 필수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엘리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입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날 때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이어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지진이 지나간 뒤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마침내 불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가 들렸고 주님을 만난 엘리야입니다.

상징하는 바 깊습니다. 마음이 혼란하고 시끄러우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삶이 혼란하고 시끄러울수록 주님 앞에 머물러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시편 말씀처럼, 자주 멈추어 주님을 만나 자기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한 피정입니다. 그대로 삶의 위기 속에서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피정의 고요중에 주님을 만난 엘리야입니다.

예수님 역시 내외적 혼란에 직면했을 때 즉시 당신의 외딴곳 기도처를 찾습니다. 바로 오천명을 먹이신 직후라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했을 군중입니다. 참으로 군중의 열광에,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고 즉시 기도하기 위해 산을 찾는 예수님입니다.

삶의 중심지가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가시적으로도 주님을 찾아 만날 곳을 마련함이 필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하루하루의 여정이어야 합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과 만남의 기도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확인해야 할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이신 주님이십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

바로 오늘 복음 시편 환호송 역시 기도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 하느님 말씀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세상 유혹에, 일상의 늪에, 거짓 희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주님을 향한 간절한 호소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이런 화답송 시편을 끊임없는 기도로 바침이 기도의 수행에 참으로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를 사랑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고백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던 바오로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깊이에서 솟아나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라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그리스도와 깊은 일치의 경지에 이른 기도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마지막 기도문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요!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바로 우리가 찾는 분은, 끊임없이 찬미하는 분은 이런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만나는 이런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당신의 기도처 외딴곳에서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일치가 예수님의 힘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요즘 세상 바다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지요. 폭풍으로 혼란한 물 위를 걸어 곤경중에 처한 제자공동체를 찾아 오신 주님이십니다. 마치 인생항해 중인 교회공동체를 연상케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마음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위기 중에 바친 베드로의 기도 역시 우리가 배워야 할 화살기도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 또한 믿음 약한 우리 모두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삶의 기도의 여정이자 믿음의 여정이고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이런 믿음 약함의 체험을 통해 더욱 깊어졌을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살아갈수록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인지 묻습니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합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안팎의 안정과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대로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후 체험을 통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해야 영혼이 살고 튼튼해 집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 찬미의 고백,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이런 고백이 더욱 주님을 닮게 합니다. 샘솟는 열정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성부 하느님을 향해서 성령안에서 성자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간절하고 절실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 만남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사랑의 우정이 깊어지는 삶의 여정인지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와 사랑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다음 예닮기도문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주님, 영원히 영광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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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지쳐있는데 장마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방황, 안주, 순례의 삶입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삶, 이 삶을 방황이라고 표현합니다. 안주는 천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현실에 머물러서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려하는 모습입니다. 순례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 품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인은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관심을 두지만 우리 믿는 이들의 관심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순례의 길입니다. 높은 산과 언덕, 절벽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 순례의 길입니다. 평탄하고 곧고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기 걸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 끝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방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며 순례의 길을 끝까지 걷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의 삶의 여정을 보면, 아기 예수님의 잉태, 마굿간에서의 출생, 시므온의 예언, 이집트로 피난,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시신을 내려 품에 안으시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시는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봉헌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분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겨 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했듯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으로 우리의 모범이요, 표양이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께서는 맞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빠져 있자 거기에서 구해주시려 단숨에 달려가셨습니다. 위기에 빠진 자녀를 구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는 물 위를 걸어‘오너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습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지가 약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거늘 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과 거친 맞바람으로 여겨지는 위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정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이웃과의 소원한 관계, 알콜, 흡연, 도박 등등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두려워 집니다. 그러나 이때야 말로 내가 기댈 주님께서 다가오고 계시는 때입니다. 거센 바람을 뚫고 제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삶의 자리에도 오십니다. 아니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만을 보니까 옆에 게신 그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위기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두려움보다 먼저 와 계십니다. 그러니 평온할 때도,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우리는 늘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께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스님께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자 ‘아이구, 하느님!’하셨답니다. 누구든지 급할 때에는 ‘하느님 맙소사!,‘아이구 하느님’을 찾게 되고 봉변을 당 할 때에는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만은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심을 승화시켜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정하권) 우리는 본능을 넘어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심은 인간을 찾으시며 은총과 계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믿음)입니다.(차동엽)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디모1,9)

그러나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의 모범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히브 11,17)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시편 37,3)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야고 1,6)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때와 방법이 아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3-24)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 2,2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확고히 믿고, 이미 받은 사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 하였습니다.(로마 4,20-21)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 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소위 ‘……한다면’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입니다.’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 마디로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했듯이 어떤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립4,11-12)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26절에 보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장 21절에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위기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 지시길 바랍니다. 어떤 불이익이나 비난이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로 밀려오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마음의 시험과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면 그가 은총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은 생각 않고 은총의 결과물에만 매달리게 되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은총을 주실 때 시련을 통해서 주십니다. 시련의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그러므로 더 많은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만한 은총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더 큰 제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25년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 속에 단련을 받았고, 야곱도 20여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요셉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으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3년 동안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적 믿음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속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웃을 통해서도 옵니다. 물론 직장을 통해서도 오고, 주변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도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이 옵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 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곤경의 맞바람을 보지 말고 그 한복판에 계신 구원자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인생 여정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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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알려 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 뒷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엘리야는 하느님 편에 서서 바알 숭배에 대항해 큰 승리를 거두지만 그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두려움에 하느님의 산 호렙까지 도망가 밤을 지낸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부르십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그런데 하느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산을 뒤흔드는 "지진", 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서지요.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마태 14,24)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뒤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남아 홀로 기도하고 계시고,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다가 맞바람과 파도를 만나 밤새 오도가도 못하고 시달립니다.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 14,24)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치는 맞바람과 파도는 외적 요인 때문일 수도 있고 내적 요인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는 건 탐욕과 이기주의가 마치 정의이고 선인 듯 자신을 휘몰아치기 때문입니다. 물신주의 세상에서는 이미 재물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한 탓에 더 가지려는 욕망과 집단 이기주의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가 존재하심을 모르지 않으나, 제 것이라 여기는 것에 털끝이라도 손해가 된다면 가난한 이들과 공존할 마음도, 피조물을 보호할 마음도 없습니다. 탐욕을 모든 것의 원리로 섬기기 시작한 이래 그 마음에 더 이상 평화는 없습니다. 진정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는 두려운 파도는 탐욕이란 보편적 악에 잠식당한 내면에서 출렁이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제자들이 호수 위를 걷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해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며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주님의 현존은 거센 바람이나 파도처럼 폭력적이고 격정적인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선 두려움으로 출렁이는 제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십니다.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32)

우리 삶의 원리, 영혼의 원천, 존재의 근원 자리에 주님을 모실 때 바람은 멎고 파도도 잠잠해집니다. 재물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평화가 찾아오지요. 재물과 탐욕과 이기심은 하느님 모상인 우리 인간의 절대 가치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아무것도 없이 살 수는 없으나, 재물은 그저 주님을 모신 우리의 배 바깥에서 찰랑이는 배경 요소 중 하나로 족하지요. 우리가 잘 운용하고 나누며, 잘 탈 수 있는 파도와 같습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화답송)

주님은 세상이 열광할 만한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무 선하고 미약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끝자리 가난뱅이의 모습을 택해 오셨지요. 그분은 착취와 차별을 양분 삼아 자라는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 모두가 두루 함께 누리는 공동선과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곧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일찌기 하느님께 선택된 유다 민족에 대해 동족으로서 안타까움과 염려를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 9,4)

이스라엘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분의 지고한 사랑과 특권을 누립니다만, 마침내 때가 차서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구원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고립된 섬으로 남기를 자처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에게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로마 9,2)이 되지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들은 가난하고 힘 없는 이웃과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평화는 그제서야 찾아옵니다. 받은 축복과 사랑이 원래 내 것인 양, 이웃을 경계하며 "자기들"만의 성을 쌓기 시작하면 바람과 파도와 불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자신의 삶과 관계와 이기심을 들썩이는 원리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그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지요.

마음이 욕심과 두려움에 출렁이며 분노와 이기심으로 자신을 끌어갈 때는 잠시 멈추어 영혼의 배에 예수님을 모셔들이면 좋겠습니다. 사실 얼마를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더 못 가지느냐의 문제로 이웃을 멸시하고 구별하며 그 귀한 평화를 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양선하고 미약하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예수님 마음에 고요히 자신을 비춰보면 좋겠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신 이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주님이 모든 것, 전부이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어쩌지도 못 하는, 주님께 한 줌도 못 되는 파도에 괜히 마음을 빼앗겨 출렁이지 말고 고요히 평화를 견지하며 세상이라는 호수를 건너갑시다. 주님께 닿을 즈음이면 흥분하고 분노했던 자취가 머쓱하고 부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그때는 깨달을 것이니까요.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영성체송)

믿는 우리에게는, 이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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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19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으로 하느님을 신뢰했던 세 사람, 곧 엘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가 믿음의 위기에 닥쳤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믿음이 위험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재들을 쳐 죽인 후 자신을 죽이려는 이제벨 여왕을 피하여 호렙산의 동굴에 피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하시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당신을 찾아오시어 위로하심을 전해줍니다.

곧 믿음의 위기에서 엘리야를 건져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의 일생을 통하여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와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시지 않았지만,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을 지라도 그분을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신뢰와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로마 9,5)

<복음>은 베드로가 물에 빠진 후, 신앙의 위기에서 오히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이야기는 의심하는 습관을 지닌 한 회의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압도되어 혼란에 휩싸여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에 기꺼이 도전하고, 미지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려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둠과 위험과 만연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하늘나라라는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침몰하지 않으려면, 키를 제대로 잡고서 모든 위험요소를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의 물살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를 때는 믿음과 신뢰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물살이 암담하고 격렬하게 풍랑으로 밀어닥치면, 우리의 신앙은 베드로처럼 시험에 들게 되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도약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는 안전한 자기 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 와 달라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마태 14,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호수 위를 걸어가듯, 교회 바깥의 거리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를 촉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신앙의 도약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불투명한 미지에 던질 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물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물은 우리를 침몰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걸으면 우리를 떠받쳐주고 목적지로 인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만 믿음을 두는 순종을 통해서 가능해지나 봅니다. 진정, 순종할 때라야 비로소 신앙이 되나 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풍랑 속에서 혼란과 혼동에 빠졌을 때, 어둠과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바로 우리 곁에 다가와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 있을 때, 오히려 당신의 손을 내미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사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실에 대한 신뢰, 곧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좋은 것을 보는 일, 세상에서 좋은 것을 인식하는 일, 주어지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보는 일, 인간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 그것들 안에서 좋은 것의 근원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문제를 성장과 단련 그리고 배움과 도약의 기회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하여, 믿음은 우리를 물위를 건너게 하여, 마침내 예수님 품에 안기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마태 14,33) 말하였듯이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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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배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 14,24)

주님!
정박하고 머물러 있지만 않게 하소서.
파도에 시달릴 줄을 알게 하소서.
위험해도 풍랑을 헤쳐 나아가게 하소서.
키잡이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말씀에 복종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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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L9T8ef6pv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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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 28)

거센 바람의
다른 이름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풍랑의 거센
시간입니다.

풍랑과 믿음
의심과 고요는
함께 존재합니다.

거센 바람
속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거센 풍랑이
주님을 막을 순
없습니다.

제자신이
주님의
길을 막는
거센 바람임을
고백합니다.

거센 풍랑으로
제 믿음의
현주소를 아프게
직면하게 됩니다.

거센 풍랑을 통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주님을 향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거센 풍랑이
오히려
우리 믿음을
자라게하는
은총이 됩니다.

사람의 시간에는
거센 풍랑이 있고
거센 풍랑을
헤쳐나올 믿음의
무게가 있습니다.

거센 풍랑속에서
믿음의 길을
몸소 보여주시는
주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믿음은
물 위를 걸어가듯
불안과
시련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생명의 길이 됩니다.

믿음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제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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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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