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말씀의 샘

♣복음말씀의 향기♣ No3070 3월20일 [사순 제3주일]

작성자이경재 시지스 문도|작성시간22.03.20|조회수70 목록 댓글 0

♣복음말씀의 향기♣ No3070
3월20일 [사순 제3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To-nFEYDvI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3729086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4~5절)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psyt2rRrqg
++++++++++++++++++

<너무 빨리 꿈을 확정해버리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봉헌할 때 그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분명 회개하지 않은 이는 ‘제물에 봉헌하는 이의 피가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물에 피를 섞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파견되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파견한 자의 뜻이 아닌 다른 뜻입니다. 지금 그 뜻이 죽는 것입니다. 그 뜻이란 분명 돈에 대한 욕심, 육체에 대한 즐거움, 힘에 대한 욕망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파견되어 일을 수행할 때, 이 세 가지가 아니면 그 일을 완수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여덟을 ‘세속(6)+육신(6)+마귀(6)’의 합으로 봅니다. 

 그러며 말씀하시는 것이 포도밭에 자라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웬 무화과나무일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되어야 하는 나무를 말할 때 사용했던 상징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한 자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무화과나무의 삶을 버리고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포도나무의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을 버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느님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예배가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에는 내 피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그분의 뜻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위해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어쨌건 그것이 살아있다면 주님의 뜻을 내 안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이 맺기를 원하는 열매를 맺어줍니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포도밭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잘립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가 섞인 제물도 봉헌해야 하고 삼구도 죽여야 합니다. 

일본 애니매이션 ‘베르세르크 – 황금시대’의 내용입니다. 여기저기 전쟁터에서 돈을 받고 싸워주는 가츠란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가츠는 뛰어난 실력으로 적의 장수를 죽이고 두둑한 상금을 챙기고는 그를 붙잡아두려는 나라를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 ‘매의 단’이란 용병부대를 만나고 그 대장 ‘그리피스’와 한 판 붙습니다. 그런데 가츠도 그리피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합니다. 결투에서 지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했던 그리피스를 좋아하는 캐스커라는 여자 군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느닷없이 나타난 가츠가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리피스는 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천민 출신이지만 왕국을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매의 단의 인기는 점점 치솟고 그리피스는 한 왕국의 공주의 마음까지도 빼앗습니다. 이 와중에 가츠는 그리피스가 자신을 친구가 아닌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리피스를 떠나기로 합니다. 막아서는 그리피스와 대결을 하는데 이제 그리피스가 가츠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피스는 자기 오른팔이 자신을 떠난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공주를 찾았으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갇히고 고문당합니다. 그리고 매의 단도 쑥대밭이 됩니다. 

이 사실을 멀리 있는 가츠가 듣게 됩니다. 가츠는 그리피스와의 옛정을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리피스를 구출해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걸을 수도 없고 칼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의 단은 이제 가츠를 우두머리로 캐스커를 그의 오른팔로 삼고자 합니다. 가츠는 그 책임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캐스커도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그리피스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마왕들이 나타납니다. 그리피스를 마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리피스의 야망을 보았고 그게 바로 그리피스라고 합니다. 마왕이 되려면 야망을 위해 친구들을 바쳐야 하는데 그 친구들이 매의 단입니다. 그리피스는 마왕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가져보기 전에는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대로 매의 단을 악마들에게 바칩니다. 이 와중에 매의 단은 전멸했고 가츠만이 어떤 힘의 도움으로 왼팔만 잃고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소명은 마왕이 되기 위해 동료들을 제물로 바친 그리피스와 마왕들과 싸우는 것임을.

그리피스는 태어나서 그냥 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이뤄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욕망 속에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악의 힘까지 빌려 엄청난 힘을 지닌 마왕이 되었지만, 친구가 없습니다. 

반면 가츠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와주고 구해 주고 또 진정한 사랑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이용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또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꿈에 흐릿하게 보였던 미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피스가 마왕들이 원한 자신들의 후계자였다면 자신은 천사들이 뽑은 마왕과 대적하는 군사였음을. 

우리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도 짚단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이란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을 그 꿈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열여덟에 대항하는 욕망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보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꿈을 찾을 수 있었던 회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녀들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네 꿈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도록 종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바라시는 꿈이 무엇일까?”를 찾게 만들어야 회개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꿈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너무 명확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은 처음엔 명확히 깨닫기 어렵습니다. 다만 포도나무로 자라기 위해 그분의 뜻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찾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고 삼구를 이기는 노력을 한다면 분명 포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는지는 지금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흐릿하게 보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꿈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셉에게 먼저 명확한 꿈을 알려주었다면 그는 분명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약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으로 성장했다면 그만큼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게 좋습니다. 꿈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께 접 붙어 있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께 자신을 맡길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 나갈 때, 즉 회개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특별한 메시지며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항상 모세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구원해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다. 야훼라는 이름은 ‘내가 있다!’ 즉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구원하는 하느님이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일치할 때 그분의 구원적 능력이 나타난다.

복음 :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다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대목은(1-5절) 갈릴래아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 때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을 때 빌라도가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한 사실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그들 가운데 열여덟 명이 희생당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는가를 보고 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2-3절)

그들은 모든 불행을 다 정해진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을 더 깊이 깨닫기를 회피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거절하신다.(참조: 요한 9,3) 이러한 생각과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오로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수단이나, 정해진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만 설명할 때는 그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 신앙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3절) 이 ‘멸망한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영적인 ‘파멸’, 즉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지 않는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 이르게 되는 본질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회개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즉 회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우리 자신의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은 덮치면서 나를 스쳐 가는 이유가 특별히 있기 때문인가? 만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내게 아직 결정적으로 마음을 결정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 나 자신이 더 열심히 투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든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매일의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21,18-19)와 마르코(10,12-14)는 예수께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셨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주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루카는 심판과 처벌의 의미보다는 자비와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주인은 ‘삼 년’을 기다리면서 열매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도, 포도원 재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이다. 주인은 이런 아량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자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내로 기다려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의 표징이면서 또한 심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매 순간순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회개하고 그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크면 큰 만큼 책임과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게을리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불행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맞은 위험에 놀라서 이집트 노예 생활에 대해 향수를 갖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탈출 14,11-12)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도 안이한 일도 아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일의 사건들과 현실들을 통해 입증되는 마음의 회개로써 ‘자유’를 성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1-5)
 
이 말씀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일은 ‘살인 사건’이고, 실로암 탑이 무너진 일은 ‘불의의 사고’입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는 인간 세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죄인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고,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라는 말씀은, “그런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고,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가 천벌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천벌이 내리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1-23)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건들과 사고들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불행한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일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아니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닥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은, 죄는 아니고,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인데, 여기서는 방심한 상태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언젠가 종말과 심판이 오더라도 오늘은 아니겠지.”라는 생각, 또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오늘은 아니겠지.”라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면서 회개를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는 모습,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이 말씀도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삼년 째 와서 열매를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그런데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리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이 회개와 구원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올해’와 ‘내년’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오늘’과 ‘내일’일 수도 있고, ‘지금’과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여기서 ‘오늘 밤에’ 라는 말은 ‘몇 시간 뒤’로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몇 분’이 될 수도 있고, ‘며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날’은 ‘갑자기 닥치는’ 무서운 심판 날입니다. 그러나 늘 깨어 있는(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날’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구원의 기쁜 날’입니다. 나에게 ‘그날’이 어떤 날이 될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지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생명이 넘쳐나는 우리의 지구는 아름다운 별입니다. 극지방, 열대지방, 사막, 깊은 바다, 얕은 바다, 물이 있는 지구를 보여주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지구는 살아있는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몸이 아픈 것처럼 지구도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아마존의 밀림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면 그 영향이 아프리카의 사막에도 있다고 합니다. 지구 환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오염시킨 강에는 생물이 살기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남획한 동물은 멸종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특히 지나친 탄소배출은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이는 극심한 가뭄, 강력한 태풍, 커다란 산불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이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생명의 다양성이 지켜진다고 합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바위에 샘을 열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샘에서 물을 마셨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을 마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려라’라고 말씀하시니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었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였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니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나라자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게 되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기억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두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 교만했던 사람, 우상을 섬겼던 사람은 광야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

[춘천교구 김현신 요셉 신부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말씀을 통해 열심한 삶의 마땅한 결실에 대해 묵상한다. 스스로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결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질적인 의미의 성공이나 열매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재물은 물론 찬미나 흠숭도 하느님 편에서 본다면 그다지 필요한 것이라 하기 어렵다. 자식이 잘되면 부모는 그 자체로 기쁘듯이 우리의 올바른 결실은 그분께도 기쁨이 되기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더 큰 사랑과 은총의 결과를 낳게 된다. 흘러넘치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 사랑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누어 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무던히 거부하기도 한다. 바로 이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이 우리의 신앙을 이루게 된다.

열매를 맺도록 불리워진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떠한 처지에서건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마땅한 결실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회개"라는 이름의 실천적인 신앙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도 분명하게 들려준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아가 오늘의 복음 말씀 안에서도 두 번이나 들려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경직된 말씀 같지만 우릴 겁박하는 말씀이 아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결국 나 자신을 말한다. 복음에서는 삼 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나'라고 하는 무화과나무는 대부분 몇십 년을 족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주님께서 그렇게 오랜 기간 열매를 기대하심에도 우리가 벌받지 않는 이유, 뽑혀서 버려지지 않는 이유는 끊임없이 변호(?)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중재자 예수님 덕분이다. 하지만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며 날이 가고 해가 가다 보면 우리는 조만간 영원히 기회를 잃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약 처방이 시급한 사람일수록 절대로 변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사순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시는 시기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예수님께서 우 리의 중재자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자신도 그러한 중재자로 부름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때에 열매 맺지 못함에 대한 일종의 보속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망가져 가는 지구를 위해, 생명 존중과 인권을 위해, 올바른 정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노력할 일이다. 우리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재조정하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면 이 모든 것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환호송)


=====================

[인천교구 양정환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신자들이 변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아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선배 신부님이나 동창들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답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뉩니다. “원래 그래, 안 바뀌어!”하고 포기한 듯한 대답과, “이번엔 좀 그랬나 보다. 다시 시도해 봐!”라는 대답입니다. 물론 ‘안 바뀐다.’는 신부님이나 ‘다시 해 보라.’는 신부님도 사제의 삶을 계속해 나갑니다.

우리가 응답한 길이고 우리가 끝까지 수행해야 할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제가 도구가 되었다며 ‘변화된 삶을 살고 하느님을 만나는 행복을 느낀다.’는 신자의 말에 힘을 얻으며 다시 한번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다고 힘을 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기도 하고, 상처와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도 많이 받는 듯합니다.

“그저 안타까워서 위로하고 거저 베풀면서 오랜 시간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 이런 나에게 아무 보답도 하지 않아서 화가 난다.”

농부는 어떤 마음으로 씨를 뿌릴까요?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올해도 좋은 수확을 내어주렴!’하는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데, 땅에다 “충분한 수확을 내놓지 않으면 다 갈아엎어 버리겠다.”며 협박하는 농부는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땅은 풍성한 수확을 낼 수 있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땅이 좋은 수확을 냈든 그렇지 않았든, 농부는 다음 봄이 되면 다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릴 것입니다.

우리가 호의와 친절을 베풀 때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잘해온 일’이 그렇지 않은 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해줘봤자 소용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은총을 거저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20~30% 정도가 주일 미사에 참례합니다. 상대적로 훨씬 더 많은 수가 냉담 중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열심히 다니던 신자도 많고 이 중에는 ‘상처받아서’가 그 이유인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성당에 나오고, 관계 때문에 봉사 직무를 맡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 때문에’ 신자 생활을 그만둔다는 것은, 그가 친했던 신자든 사제나 수도자든, 결국 사람을 보고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기쁜 신자가 되기를, 행복한 신자 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주님께서 우리의 부당함을 참아주시고 늘 기다려 주시지만, 우리는 ‘그 날’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지금, 지체하지 말고 우리 모두 ‘참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부산교구 이영훈 알렉산델 신부님]

<자비로운 기다림>

저는 식물 키우는 재능이 많이 부족합니다. 기본적인 관심에 더해서 각 식물의 특징 등을 습득하고 적용해 보았지만 그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는지 가끔 겨우겨우 생명력을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배운 작은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식물을 돌볼 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믿음과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려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믿고 기다리면서 애정을 줄 때 식물은 그동안 숨겨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시 잎이 마르고 꽃이 피지 않더라도 애정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겉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고 잘라버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겉’만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나 쉽게 누구와의 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나름 기다렸으니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좀 더 자비로운 사람(루카 6,36)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에는 ‘더디시지만’ 자애가 넘치시는 하느님(시편 103,8)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집 떠난 작은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버지(루카 15장)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품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다림으로 ‘인해’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성급한 판단과 단절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자비로운 기다림’을 우리도 누군가에게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도 재배인은 포도나무들보다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에 더 많은 애정을 줍니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1년을 다시 기다립니다. 우리도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평소에 무관심했고 거리를 두었던 그리고 용서하지 못했던 ‘가족과 이웃’인 ‘무화과나무들’에게 ‘자비로운 기다림’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혹시 아나요? 그 기다림 끝에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지 …


=====================

[의정부교구 배존희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하지 않으면...>

캄보디아에 선교를 온 이후, 2년에 두 달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옵니다. 올해에는 우리 교구 서품식 일정에 맞춰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는 캄보디아의 새 성전 건축기금을 마련하고자 모금을 하러 다녔습니다.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모금을 먼저 해야 해서 왠지 시작부터 ‘이번 휴가는 망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금하러 다니면서 놀라움을 체험했습니다. 목표로 한 모금액의 부족분을 헤아려주신 교구장님, 저를 도와준 동창 신부와 선후배 신부님들, 마치 당신의 일인 양 챙겨주신 수녀님들, 고생한다고 하면서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신 신자분들이 있었습니다.

떡볶이를 파는 자매님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며 성전건축 기금을 건네주신 덕에, 오히려 제가 더 송구하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사제라는 이유로 ‘아픈 딸을 위해’ ‘고생하는 아들이 어려움을 잘 견뎌내기를’ ‘수험생인 손자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시며 건축기금을 약정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휴가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많은 사연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보잘것 없는 저에게 보여주신 한 분 한 분의 사랑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다스리심이었습니다.

후원을 도와준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성전은 한두 사람에 의해 지어지는 것보다 많은 사람의 참여로 지어질 때 더 은혜로운 것 같다.” 어렵고 힘든 중에 약정해주신 분들의 애달픈 사연이 모여 이뤄지는 성전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 되리라 저 또한 믿습니다. 휴가가 휴가가 아니라며 내심 불평했던 저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 후에 이런 빎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신앙이란 이렇게 우리의 작은 일상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움을 만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여정, 곧 끊임없이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이기에, 제게 이번 휴가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회심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주어진 모든 시간, 모든 만남, 모든 사건, 이 모든 것이 전부 하느님의 섭리로 여겨집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이 지면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캄보디아에 뽀삿 성당이 봉헌되는 날, 여러분의 정성과 기도의 도움이 기적의 머릿돌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나는 지금 어떤 영적 열매를 맺고 있는가?>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식물을 자식처럼 여기는 농부의 마음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우리 마음에 사랑과 자비의 거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절의 중반에 접어든 즈음에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어떤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듯이 우리도 사랑과 용서, 자비와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을 예전에 들었던 홀로 아들을 키운 어느 자매님의 가슴 아픈 사연으로 강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매님에게는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하고 착할 뿐만 아니라 얼굴도 잘생긴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늘 반에서 일등을 도맡아 하고 어머니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는 착하고 성실한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 일류대학에 입학을 하였고, 최고의 직장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이 자매님은 이렇게 멋진 아들 때문에 늘 주변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35살이 된 아들이 어느 날, 심각한 마음의 병으로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회사에 입사 후 아들은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으며 회사 일을 너무도 힘겨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할 수 없고 대인 기피증을 보이자, 어머니는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와 상담 결과를 종합해 보면 아들이 얻은 마음의 병의 원인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을 감추고 그렇게 홀로 외로이 너무도 열심히 살았던 것입니다. 회사 생활에서 아들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이 없었습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다 보니 점점 홀로 지내며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이들이 줄어 들고, 비난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견디질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려서부터 아들은 늘 어머니의 인정과 지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인이 되어서는 상황이 달라졌고, 스스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 동안 억압했던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회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아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지난 35년 동안 저를 기쁘게 해 주었어요. 이제 제가 아들의 앞으로 35년을 행복하게 해 줄 차례이어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해요.”

아들은 어머니가 원하는 세상이 주는 기쁨의 열매를 맺었지만 진정 자신의 기쁨을 찾지 못했고,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영적 기쁨을 위한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병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아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짠하고 안타깝게 만듭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강조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무자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어지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당신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냥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거름을 주고 돌보며 회개의 결과인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이 원하시는 열매을 어떻게 맺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하며 이를 영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늘이 많은 경우 무화과 열매가 달리지 않습니다. 그늘은 우리 삶에 비유하자면 상처와 죄를 의미할 것입니다. 과거의 삶 속에 상처가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 속으로 움츠려 들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자기 방어 기제가 많은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가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아프게 하는 경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둘째, 너무 양분이 많으면 무화과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너무 사랑만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내면의 온실 안에서 보호만을 바라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고 깨지고 하면서 우리는 진정 성장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겸손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양분이 많은 경우 맨 위의 줄기 부분을 꺾어 주면 무화과는 열매를 더 많이 맺습니다. 이 대목은 마치 우리가 교만을 꺾고 겸손해지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맨 위의 것, 나의 자존심,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 내가 전부라고 여겼던 것을 꺾어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셋째,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많기 위해서는 "힘들게 해 주어야" 합니다. 시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너무 위로만 잘 자라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를 재배하는 농부는 물을 적다고 생각할만큼 아주 적당량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말로만 “주님, 주님”한다고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주님이 주시는 좋은 거름을 자신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고 뜨거운 여름날의 햇빛과 모진 비바람과 같은 시련을 견디어 낸 다음 맺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익은 열매를 탐내는 새와 들짐승과 같은 다양한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어야 그 열매를 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서 시련을 인내로이 견디어 내며, 주님의 말씀을 거름삼아 그 말씀과 하나되며,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을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고독과 침묵, 고행과 인내, 기도와 믿음, 비움과 은총을 통해 맺혀지는 사랑의 열매, 자비의 열매, 용서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으면, 겉으로 보이는 영적인 열매들도 자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 나무이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여 그분께 딱 붙어 그분의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가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그분의 열매가 우리에게 맺혀 질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십자 나무를 통해 흘리신 피의 거름으로  저희 모두에게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당신과 함께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영적 죽음이 메마른 세상의 생명의 거름이 되어 저희와 세상이 당신 부활의 열매를 선물로 받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의 <말씀전례>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마음을 정하신 다음, 그러니까 ‘출애굽’의 시간을 다 채우시기로 마음을 정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히브리 역사 가운데 일어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들을 상기시키면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사실, 탈출과 해방의 목적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 그분께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을 완수하시며, <제1독서>의 ‘출애굽’의 사건은 아버지께로 건너가시는 빠스카의 예표가 되며, <제2독서>의 그리스도란 바위에서 그 구원의 물을 마셨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이를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축복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에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소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임무를 부여받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우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 백성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는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맡겼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 향하여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는 뉘우쳤기에 용서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용서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요, 글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오,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참으로,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회개>

루카 13,1-5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6-9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회개>

회개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오롯이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탓 없이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살리고자 하는
으뜸 제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심보를 바꾸는 것>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 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 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루카 복음 12장에서 시작된 군중과 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와 연결되어 절정을 이룹니다. 특별히 깨어 기다리라는 종말론적 위기에 대한 경고(12,16-21.35-48 참조)는 화해(12,57-59 참조)와 회개에 대한 촉구(13,2-5 참조)로 이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13,6-9 참조)를 통하여 ‘회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행한 빌라도의 잔혹한 행위를 보고합니다. 그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심판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 갈릴래아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지어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 아래 깔려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러 갑작스럽게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비극적 사건을 통하여 아직 살아 있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12,20 참조) 누구든지 죽음에 갑작스럽게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 자신의 생명도 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회개로써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왜???>

왜, 사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왜,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비폭력주의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간디는 왜,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까?"

도대체 사순 시기는 무엇을 하는 시기이며,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

정치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정치인데. 그래서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신자들은 자꾸만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정치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가?

하느님 계시의 중요한 원천인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생명의 길로의 초대이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인데, 나는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고 있고, 또 회개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적당히 안주하거나 즐기며 사는 우리들, 적당히 믿는 체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아닌지? 

사순 제3주일에 들려오는 회개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먼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고, 이 질문들에 함께 머물러 보자고 제안해 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13,8-9)

제가 매일 소박한 복음묵상글을 준비하고 나누는 것은, 저 자신의 회개와 너의 회개를 위한 노력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땀입니다.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입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1코린10,6.10)

회개합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의인은 사람의 잘못을 비난할 때 고통을 느끼지만, 악한 사람은 그것을 즐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인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뒷담화는 주로 사람의 잘못이 그 내용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간다는 말이 있듯이, 뒷담화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즉, 뒷담화를 즐기는 악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판단하고, 때로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뒷담화는 어제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뒷담화로 죄를 더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해서 제단이 피로 물든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실로암 탑을 공사하는데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위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안 되었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생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어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전해주십니다.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의사를 표명했지만, 포도 재배원은 일 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이처럼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회개의 시간 여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시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통해 회개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회개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나라! 회개하라! 시작하라!” 
 
온통 우울하고 어둔 소식들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시詩가 참 좋은 힘이,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현재성을 지닙니다. 아주 예전 자작시가 오랜 후 이렇게 강론에 인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늘길’과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두편의 시를 소개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 사랑
침묵의 소나무야!”-2001.4.21
 
그때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수도원 성전 앞 정원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중에도 제자리에 믿음의 뿌리 깊이 내리고 하늘빛 희망을 찾아 하늘 사랑 가슴에 가득 품고 꾿꾿이 살아가는 신망애信望愛 영적 도반道伴들이 곳곳에 있음은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봄
 
16년전 써놓은 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내 사랑, 내 도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정주의 삶을 늘 새롭게 했던 불암산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흔히 나오는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30년전 1992년 1월15일,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왜관 수도원 종신서원식 미사때 제 강론 제목이자 제 두 번째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는 물음이자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첫째, “만나라!”입니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자 만남의 여정입니다. 만남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됩니다. 참 좋은 만남이 참 좋은 삶을 만듭니다. 이런 만남 역시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참 나를 찾아 참 나를 살기 위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주님을 만났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 시피 광야의 외로움과 고독중에 장인 이트로의 양떼를 치던 모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끝내 참나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모세를 찾아 오기전 모세는 분명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간절하고 항구한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눈만 열리면 내 삶의 자리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자리입니다. 이어 모세는 주님께 소명을 받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예전 모세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찾았으니 결정적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모세와 주님의 관계처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야 합니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필수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노쇠해 가도 주님을 찾는 영적 갈망은 날로 커져야 하고 주님과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져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라!”입니다.주님과의 만남에 즉시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이요, 참나의 발견입니다. 마음의 고질적 병인 무지의 치유에 답은 회개뿐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참 자기를 발견하여 참 나를 살게 하는 회개입니다.
 
주변에서 보게 되는 많은 불행을 겪는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불행입니다. 바로 이런 무수한 불행한 사건들 지체없이 회개하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악행과 실로암 탑의 사고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아 자초했던 불행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그들은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리는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광야 인생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참 적절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말씀입니다. 무지의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불행이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길은 회개 뿐이요 무지의 병과 악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셋째. “시작하라!”입니다.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지 죽으면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최선을 다하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내자는 포도원 주인에 대한 포도 재배인의 간청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을,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은총에만 맡겨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 친히 늘 새롭게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늘 내 삶의 나무를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회개하고 사랑하며 잘 살라 주어지는 선물의 날들입니다. 1787년 4월 11일 모차르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음악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는 나를 끝없이 행복하게 만든다
 
숭고한 지성도 환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둘이 합쳐져서 천재를 만들지도 않는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이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겸손과 사랑의 참나를 만들어 줍니다. 회개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qqwQp6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3)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회개를 선물로
주셨다.

회개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정신을 
차려야 할
회개의 
때이다.

참된 회개가
신앙이라는
행동의
나침반이다.

삶의 
나침반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 참된
신앙이다.

회개는
멸망을
치유하듯
우리 삶을
치유한다.

삶의 신비는
회개의 
신비이다.

회개가
가장 놀라운
하느님의 
기적이다.

회개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회개로 
연결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회개로
세상과
접촉하고
회개로
우리 내면과
새롭게
만난다.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워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삶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새로워지는
삶의 
우선순위는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하느님께서는
멸망의 혼돈이
아니라 회개의
축제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회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사랑이다.

삶의 열매는
우리의 회개로
맺어지는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십자가와
함께하고

열매는
십자가에서
익어간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을
담는 것이
회개이다.

가장 좋은
회개의
주일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