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 23,1-12 |
|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어떤 특정한 시점이 지난 ‘그 후’, 또는 ‘그다음’, ‘그리고’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바리사이와 대화를 다룬 22 장과 연결되어서 그들과 대화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군중과 제자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하신다. 여기서 ‘군중’은 ‘민중, 백성, 평민’등의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군중’은 바리사이, 사두가이, 헤롯 당원들과 구분되는 일반 민중들의 무리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22 장에서 바리사이인들은 예수님과 대화에서 곤경에 처하여 더 이상 예수님께 질문을 하지 못했음을 생각해 볼 때, 바리사이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떠나 갔을 가능성이 많다. |
|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율법 학자’들은 구약 율법을 연구, 교육하는 일을 전담했던 사람들이었으며, 바리사이인들은 독선적일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바리사이인들 가운데 율법 학자들이 주로 배출되었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말은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 신학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인이라는 말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바리사이인으로서 율법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러 부류의 사람들 질책하신다고 보기보다 잘못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비판하고 계시는 것이며 그것을 신봉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바리사이인들은 특히 율법 학자들은 남다른 열정과 열심있는 연구를 통해 요한 히르카노스(B.C. 135- 105 년) 이후, 150 년간 백성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지만 그들은 위선과 형식주의적 신앙 형태로써 이스라엘 종교 전반을 황폐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모세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다. 유대교 회장의 집회 때에 신자들은 정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서 앉았고, 율법학자들은 성경 보관소를 등지고 신자들을 향해서 있던 단상, 돌로 만든 자리에 앉았는데 그곳을 ‘모세의 자리’라고 한다. 그곳에 앉아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쳤다. 그 당시 유대의 바리사이인들 또는 율법학자들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례를 따라 가르치신 적이 있다(루카 4:20-22). 그리고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다.’ 라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하다.’는 의미로 이해 되어졌다(열왕 상 1:35; 46; 시편 132:12). 그래서 율법을 해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공식적인 모세의 법적 계승자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권위 의식을 질책하시면서 언행이 불일치한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신다. |
|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가르침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교훈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것은 단지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그들이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였다. 그래서 ‘다 실행하고 지켜라.’ 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본래의 하느님 말씀과 계명들과 율법들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는 뜻이다. 사실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 그 자체는 그들의 실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된 진리요 신앙인의 실천 규범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가르침을 준수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행하다’의 원어인 ‘포이에사테’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며, ‘지키다’는 원어 ‘테레이테’는 거의 몸에 배이듯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율법의 폐기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며 율법은 분명히 지켜야 할 규범임을 말씀하셨다. 참된 진리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 시편 119 편 105 절에도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이 전하는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그들이 지키는 율법의 방식을 따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구절에 들어 있다. |
|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앞의 3 절에서 말한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모습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무겁고 힘겨운 짐’에서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막중한 의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리사이들의 자의적 율법 해석에 따른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규범들 및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된 규칙과 예법 등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의 생활 규범을 613 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즉 그들은 마치 운반하기 힘든 무거운 나뭇단이나 곡식단처럼 성가시고 귀찮고 감당키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백성의 어깨에 지움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율법의 보호자가 아닌 곡해된 율법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생각한 의로움에 도취된 바리사이인들과 율법 학자들의 잘못이었다.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하여 세부규정을 덧붙여서 일반인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무거움 짐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은 여러 가지 예외조항과 특권 등을 내세워서 자기들의 짐은 가볍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힘든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지키기를 거절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힘겨운 규칙들에 눌려 쓰러져가는 자들을 위해 그 의무 규정을 가볍게 해주거나 실천 가능하도록 그 짐들을 가볍게 해주는 등의 도움을 주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여기서 ‘손가락’이란 앞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의 어깨’와 대조되는 말로써, ‘손가락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은 아주 사소한 도움이나 눈에 뜨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배려를 뜻한다. 진정 그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믿음에 대한 관심은 멀리한 채 오히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의 십일조 같은 미세한 규범을 크게 부각시켜 백성들의 어깨에 종교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짐을 부과하였다(23 절, 사도행전 15:10; 갈라 5:1). 그들은 가르치기는 했으나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거나, 가볍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치셨고, 짐을 대신 지셨고, 나누어지셨다. 그분은 단호한 어조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셨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
|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장 1 절에 이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허세적인 바리사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행위 전체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된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하늘 높은 곳에서 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일종의 연극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과 찬사와 인정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다(요한 12:43). 결국 이런 비판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 심리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져 있는 잠재적인 욕망까지 모두 제거하는 근본적인 인간 변화를 암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구갑’은 헬라어로 ‘퀼랖테리온’이라고 하며, ‘보호물, 호신패, 부적’등의 뜻을 가지고 있고 ‘표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타포트’라는 말에서(신명기 6:8) 유래한 것으로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도의 끈’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테필로트’ 또는 ‘테필린’으로 불렸다. ‘성구갑’은 이 ‘테필로트’의 번역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기 이후부터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으나, 차차 자기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또는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이교도들의 부적 같은 것으로 믿고 착용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 ‘성구갑’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부분들(탈출 13:2-10; 11-16; 신명기 6:4-9; 11:13-21)을 써 넣은 한 조각의 고급 피지를 담은 사각형의 상자였는데 묶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가죽이나 양피지로 덮혀 있었다. 유대인들은 탈출기 13:9,16; 신명기 6:8;11:18 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왼쪽 팔 안쪽 부위나 앞 이마에 가죽끈으로 묶어 다녔다. 이 두 부분은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한편 처음 이것을 부착하기 시작했던 때는 아침 ‘쉐마’(신명기 6:4-5) 기도 때뿐이었으나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으로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구갑’ 의 크기는 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극단의 경건 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크고 눈에 잘 띄는 ‘성구갑’을 만들었으며 그와 더불어 묶은 끈을 푸는 법과 매는 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까지 만들었다.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에서 ‘옷자락 술’이란 민수기 15:38; 신명기 22:12; 등에서 명령한 것처럼 겉옷, 성경에서 겉옷은 ‘케쑤트’, ‘씸라’, ‘메일,’ ‘아데레트’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모두 몸의 가장 바깥에 걸치고, 덮는 옷이라는 뜻이 있다. 옷을 입는다고 표현하는데 겉옷의 경우는 덮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린다. 그래서 겉옷은 덮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겉옷이 옷과 이불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집 근처에서 일을 할 때에는 속옷만 입고 다녔지만, 멀리 여행을 할 때에는 겉을 걸쳤다. 겉옷은 낮에는 더위를 막아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아주었다. 이 겉옷은 대개 통으로 되어 있고, 그 앞 뒷면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네 개의 모서리가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 네 모서리(귀)에 ‘술’을 달도록 돼있었는데, 이처럼 겉옷 네 귀에 술을 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일종의 의식행위이다. 왜냐하면 겉옷에 다는 이 ‘술’은 한눈에 자신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임을 나타내 주며 또한 이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계명을 기억하도록 해주는 장식품이기 때문이다(민수 15:38-40). 한편 후대 유대인들은 8 가닥의 실을 5 개의 매듭으로 묶어 이 술을 만들었는데, 곧 13 이라는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각 문자마다 고유 숫자를 갖고 있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술’을 뜻하는 ‘치치트’는 그 합계 수치가 600 이다. 그러므로 ‘술’의 모양과 ‘술’이란 문자가 지닌 상징적 숫자를 합한 수는 모세 율법의 총 조항 수인 613 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분명 그 옷술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맞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훗날 바리사이인들은 이와 같은 ‘술 의식’의 근본 정신을 망각한 채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을 과시하기 휘하여 옷술을 크게 만들고 다님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면치 못했다(마태 23:5). 이 ‘술은 석류 모양으로 장식된 것이며, 주로 단청색실로 짰다고 한다. 여기 이 청색은 하느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청색의 ‘술’을 달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자기의 거룩성을 자랑하는데 힘썼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의복에 ‘술’을 다는 예법을 취하셨지만(9:20; 14:36) 바리사이인들처럼 위선의 탈로서 착용하신 것은 아니셨다. |
|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이 잔칫집에 오면 항상 정중하게 윗자리에 모셨습니다. 당시 식사 문화를 보면 ‘윗자리’는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유대 또는 헬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역이, 그리고 그 오른쪽 끝에는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다. 이 우측 상단 끝이 바로 ‘윗자리’이다. 이곳에서는 몸을 틀거나 고개를 좌우로 하지 않아도 식탁 전면을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 ‘윗자리’를 매우 원했기 때문에 연회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가 발생했다고 한다(루카 14:7). 이 같은 윗자리 차지는 결국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심취해 있는 바리사이인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이와 함께 ‘회당의 윗자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회당 관리자 옆, 곧 궤 앞의 우측 상단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교하곤 했다고 한다. 바리사이인들은 참다운 예배보다는 바로 윗자리 차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사실 그들은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허영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적 즐거움(잔치)과 신앙적 희열(회당)을 놓쳐버린 채 메마르고 배타적인 삶에 찌들어 있었다. 이들이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는 말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는 뜻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존경과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
|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장터는 공공장소이다. 공공장소에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이 된다. 장터의 원어는 ‘아고라’이다. ‘스승’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어는 ‘랍비’이다. 이 용어는 존경의 표시로 사용되었지만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랍비 학교에서는 흔히 이 용어를 반복하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님보다 한 시대 이전 시대인 힐렐(유대교 율법 주석가 중 한 사람, A.D 10 년경 사망) 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공식적 직책으로 사용된 시기는 A.D. 70 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말은 존경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도 사용되었다(26:25, 49; 요한 1:38; 3:26). 물론 이 용어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한편 탈무드 시대(A.D 3-5c)에는 랍비의 지위가 상당하여 랍비의 제자는 그의 명령에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복종만이 가능했으며, 그의 앞이나 옆에서 걸어갈 수도 없었고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랍비의 지위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렇게 인사 받는 것을 즐기고, 스승님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고 비판하신다. 사람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존경하는 것을 비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을 비판하시는 것이다.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바라는 것도 교만이다. |
|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8 절-12 절의 말씀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8 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스승’ 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같은 권위주의와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이다. 초대 교회에는 유대교처럼 신자들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있었다. 마태오도 그런 랍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스승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스승 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겸손을 요구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는 한 분 주님을 모신 교회 구성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허영심이나 계급 의식을 버리고 오직 섬김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경고가 바리사이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시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당시 특권 의식을 지니고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철저히 분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금지 조치는 제한적이며 정신적인 교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나 교사들에 대한 존경마저 금지시키신 것은 아니었다(1 고린 11:1; 12:28, 에페 4:11-13; 1 디모테오 1:2).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 뿐이시고’ 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내세울 수 없다는 뜻이다.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은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에는 ‘스승님’ 대신에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의 흐름상 ‘지도자’라는 말은 10 절 이하에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절에서는 바티칸사본이 제시한 것처럼 ‘스승’ 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편 ‘너희의 스승님’에 대한 해석에 즉 누가 스승인가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있다. 1)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 2)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지칭 3) 각 개인의 내면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지칭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가 지지를 받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너희는 모두 형제다.’ 라는 말씀에 근거해 신자들은 모두 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 가설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 하느님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뒤이어지는 성부, 성자에 대한 각각의 권위에 대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탁월함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 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이고 형제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 개인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 교회에서 신자들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았다고 해도 그 자신도 예수님에게 배우는 학생일 뿐이다. 선생이라는 특권의식과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유대교에서 랍비의 권위와 명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권위와 명예는 인정될 수 없다. |
|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세상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가 대비되고 있다. 먼저 ‘아버지’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는 용어로서, 특히 ‘세상의 아버지’라 것은 율법 선생, 위대한 스승, 원로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었고 구약시대 때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사라, 레베카, 레아, 라헬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유명한 랍비들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도 교직자들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만이 아버지이시고, 인간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9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즉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하늘에 계신 그분’, 즉 하느님 만이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를 낳은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까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명예로운 존칭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8 절에서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고, 10 절에서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히브리어로 선생, 스승을 ‘랍비’로 그리스어로 ‘카테게떼스’라고 하는데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8 절의 말씀을 그리스어로 바꿔서 반복한 것으로 추측한다.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라는 말은 앞의 8 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만이 가르치시는 분이고 우리는 모두 학생일 뿐이라는 뜻이다. 스승,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며 그 각각의 제자들을 책임지는 전인적인 스승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당시 바리사이인들은 자신들에게 이 용어를 붙이곤 하였다(로마 2:19-20). 그들은 자신들을 높여 선생이요, 스승이라 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아 이끌어가는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스승의 자격이 전혀 없으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셨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질서상 인간 사회에는 관계성을 고려한 분류가 형성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높은’ 것이 한 개인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겸손과 신뢰와 헌신으로 아래 사람을 섬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성심껏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높은 사람’으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권위와 권력은 오직 섬김과 봉사와 헌신과 겸손을 통해서 드러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최후의 심판 때에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느님은 낮추시고, 스스로 낮추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높이실 것이다. 에스켈 21:26 절 참조. 그리고 이 구절이 전하는 것은 겸손과 봉사이지 겸손과 혼용된 노예적 봉사 행위나 바보스러움은 아니다. 필립보서 2:8-9 절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0:26- 28 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섬기러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여준 겸손이나 타인에게 행한 봉사는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봉사 행위가 아니었으며 그분이 가지신 권위와 권력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의 최고의 겸손과 최상의 희생을 완수하신 후, 그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셨다. 필립보서 2:8-11 절 참조. 그래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섬김의 자세이다. 다시 말해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 섬김과 겸손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2) 참된 스승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3) 이러한 진리는 명령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발적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발적 양심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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