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 베드로 오메드로 오 신부(29세로 1866년 3월 30일 순교)
오메트로의 원명은 삐에르 오메트르(Pierr Aumaitre)이고, 한국 성은 오(吳)씨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앙굴램(Angouleme)교구 내 애제크(Aizecq)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그만 땅을 경작하고 신을 만들어 팔아가며 집안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부인과 더불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해가던 훌륭한 신자였다. 오 베드로는 지성적이었으나 기억력이 나빠 학교에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공부하지 않으면 진급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가 본당신부를 찾아가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성품에 감탄하면서도 성적을 미루어 보아 적합치 않다고 즉석에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워낙 부지런하고 열심한 소년임을 점차 알게 된 본당신부는 훨씬 나중에서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새로 부임한 본당신부 역시 오 베드로를 보며 "너는 아무리 해도 공부에는 소질이 없으니 신부가 못 될 것 같다"고 하면서 공부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그는 이때부터 10여리나 떨어져 사는 평신도를 찾아가 계속 라틴어를 배웠다. 이와같은 사실을 후에 알게 된 본당신부는 주교에게 말씀드려 1852년 10월 리치몽 소신학교 5학년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꿈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베드로는 "나는 성직자가 꼭 되고 말 것입니다. 천주님의 부르심임을 마음속에 역력히 느끼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1857년 10월, 드디어 앙굴렘에 있는 대신학교에 들어가 살 때 모두들 경탄을 할 만큼 열심한 생활을 하였다. 한편 베드로는 철학과 1학년이 되었을 때 영적 지도신부에게 선교신부가 되고픈 자기 뜻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의 뜻이 이루어져 1859년 8월 18일, 파리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여 3년간 면학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토록 파리에까지 저를 인도해 주신 천주님의 섭리를 찬미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제가 이를 저버리지 않도록 저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1862년 6월에 서품을 받고 8월에 조선을 향해 떠나 1863년 6월에 조선땅을 밟게 된 오 신부는 우선 샘골에 자리를 정하여 조선말을 배우면서 선교를 시작하다가 그후 내포로 옮겼다. 오 신부의 선교활동은 신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신자들은 모두 그의 착하고도 친절한 성품에 감명을 받아 오 신부를 무척 좋아하였다. 장 주교도 이 젊은 사제를 칭찬하여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 "수련생 같은 키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한답니다." 신자들에 대한 박해 소문이 나돌고, 또 실제로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오 신부는 "여러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젠 우리 천주교 신앙을 외교인들 한테 공공연하게 전해 줄 때가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오랫 동안 자기와 생사를 같이하던 복사 이 빈첸시오와 함께 자수하였다. 오 신부를 체포한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여 다리를 묶어 주리를 트는 등 여러 가지 고문으로 괴롭혔다. 마침 사형선고를 받은 후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발걸음으로 250여리나 되는 사형장으로 갔다. 안 주교 다음에 참수된 오 베드로 신부는 죽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많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시체는 후에 신자들이 와서 정성껏 장례지냈는데 그 때까지 이들의 시체는 썩지도 않았고 세 분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교 훈>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브 10,36). 이 성경 말씀과 같이 성인은 주위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지만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에만 귀기울였기 때문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끝까지 따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