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 [6월 성모 신심 미사]
마태오 2,13-15.19-23
유혹과 맞서는 자는 하느님을 품지 못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마태 2,14-15)
찬미 예수님!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6월의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편의 숨 막히는 추격 영화 같습니다.
잔혹한 권력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칼을 빼 들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급히 짐을 싸서 낯선 땅 이집트로 도망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가족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피해 비겁하게 쫓겨 다니는 피난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고도 중대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천사 군대를 동원해 헤로데를 쳐부수지 않으시고, 굳이 성가정을 한밤중에 '도망치게' 만드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 진짜 영적 생존법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품에 갓난아기를 소중히 안고 길을 가는 한 어머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사나운 들개가 침을 흘리며 덤벼듭니다.
이때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어머니가 무술을 연마한 유단자이고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가 저깟 개 한 마리 못 이길 줄 알아?" 하며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개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행여나 흙먼지가 튀어 아기의 눈에 들어가거나 짐승의 발톱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도망을 칩니다.
어머니가 도망치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힘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품에 안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결코 들개와 기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이것이 생명을 품은 자의 가장 위대한 본능입니다.
이 원리는 전 세계 국가 원수들을 보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의 '경호 프로토콜'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VIP가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암살자가 총을 꺼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경호원들은 절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따지거나, 맞서 싸우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느라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경호원들의 제1수칙은 단 하나입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그 즉시, VIP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고 몸을 둥글게 감싼 뒤, 어떤 질문이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안전 가옥(Bunker)을 향해 냅다 뛰어 도망치는 것입니다.
경호의 핵심은 적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살려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상황을 따지고 맞서 싸우려 들면 VIP는
목숨을 잃습니다. (출처: 댄 에머리, 『시크릿 서비스: 대통령 경호의 세계』)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이 '어머니의 본능'이자 완벽한 '영적 경호 프로토콜'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남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니,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요? 하느님이 벼락을 내려 헤로데를 죽이시면 되지,
왜 비겁하게 한밤중에 도망을 가야 합니까?"라며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 요셉의 이끌림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나 내 편안함이 아니라,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고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황의 비참함이나 도망치는 수치심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아기 예수님', 즉 세례를 통해 잉태된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헤로데와 들개들, 즉 내 안의 교만과 분노, 돈을 향한 탐욕, 음란한 쾌락이라는 마귀는 틈만 나면 내 영혼의 아기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의 들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술자리나 쾌락의 유혹이 넘치는 장소에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이 깊으니까 이 정도 유혹은 내 의지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거야.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자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만약 내 품에 갓난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그 위험한 유혹의 자리에 머물며 마귀와 주먹다짐을 하려 들겠습니까?
싸우는 동안 유혹의 흙먼지가 내 영혼의 아기에게 덮이고, 마귀의 발톱에 내 안의 은총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텐데 말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려 드는 자는, 아직 하느님을 온전히 품지 못한 가짜 신앙인일 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스스로는 걷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서 스스로 무력한 아기처럼 머물며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라며 뻗대는 얄팍한 '교만의 화분'에 갇혀 있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히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의 들개 앞에서 나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체면을 버리고 화장실로 숨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겸손'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내가 교만의 화분을 스스로 깨부수는 그 순간, 내 안의 아기 예수님은 비로소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모습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유혹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작아졌을 때, 내 안의 주님은 가장 커지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마귀와 유혹도 단숨에 짓밟을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내 삶에 마음껏 펼쳐 보이십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킨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장애물이 생깁니다. 잔혹한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려워합니다.
그때 천사가 다시 꿈에 나타나 방향을 틀어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깡촌으로 우회하도록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줍니다.
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멸시받던 나자렛 깡촌에 숨겨두셨을까요?
세상의 사나운 들개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술(Camouflage)'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가장 허름한 상자에 숨겨야 도둑이 훔쳐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것없는 마을의 청년으로 30년 동안 완벽하게 숨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도 유혹을 보면 도망쳐야 할까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9주간 토요일 강론>
(2026. 6. 6. 토)(마르 12,38-4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38-44)>
1) 여기서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위선자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의 큰 문제점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는, 거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이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자기를 존경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존경한다는 뜻으로 공손하게 인사했고, 회당 예배 때나 잔치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윗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존경은, 진심으로 하는 존경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것을 즐기는 쪽만 위선자였던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쪽도 위선자였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흉내 낸 것, 또는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탈출기에,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라는 율법이 있습니다(탈출 22,21).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3)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과부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이,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뜻이긴 하지만, 누구다 다 전 재산을 바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성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형편이 안 되어서 그 과부처럼 가진 것을 다 봉헌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진 것을 다 봉헌한다고 해도,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힘없는 과부들에게서 빼앗은 돈 가운데 일부를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도짓 같은 일로 빼앗은 돈을 봉헌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무슨 제물이든지 간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레위 22,17-25).
그 전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 자신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6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12,38-44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오늘 첫 번째인 독서 티모테오 2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스승 바오로 사도께서 제자이자 동료 사목자인 티모테오에게 착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사제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번째 의무요 과제인 복음 선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복음 선포는 일생에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사제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선포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복음 선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이 허락해도,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들어가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② 복음 선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은 선포 여정에 반대와 몰이해, 시련과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덕이 끈기와 인내의 덕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합니다.
낙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자극도 필요합니다.
③ 주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다시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높은 시련의 파도가 다가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당히 중심을 잡고,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단한 것이, 제자들이나 동료 사목자들에게 그럴듯한 훈시 말씀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선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사셨습니다.
말과 행동, 가르침과 구체적인 생활이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향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복음 선포 여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또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토록 당당하게. 이토록 자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마치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밀도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생애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