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로 모든 것을 얻어내는 방법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시면서 아주 뼈 있는 경고를 덧붙이시죠.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는 하느님 앞에 끊임없이 청구서만 들이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 애 대학 붙게 해주세요.
이번 사업 꼭 대박 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기도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주님의 기도를 주문 외우듯 수백 번 반복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내 편의와 목적을 위해 기도의 본질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전락시키는 무서운 교만이죠.
누군가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이솝 우화』 중에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해 놓고 자기가 먹기 편한 납작한 접시에 수프를 내옵니다.
두루미는 긴 부리 때문에 한 입도 먹지 못하죠.
여우는 속으로 '내가 이렇게 훌륭한 식사를 대접했는데 왜 안 먹지?' 하고 섭섭해합니다.
상대를 향한 묵상이 빠진 일방적인 베풂은 이토록 폭력적입니다.
이 우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텔레비전 프로그램 '개는 훌륭하다' (2019)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알래스칸 말라뮤트 샐리라는 덩치 큰 개의 이야기입니다.
이 샐리는 주인이 손만 대면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으려 하며, 밤낮없이 늑대처럼 하울링을 해대서 이웃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억울해 죽습니다.
자기는 샐리에게 사람이 살 만큼 훌륭한 집을 지어주고, 손수 고기를 입에 넣어주고, 매일 예쁘게 털을 빗겨주며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형욱 훈련사가 와서 내린 진단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보호자님이 문제입니다."
샐리는 어릴 적 파양된 상처와 의지하던 동료 개를 잃은 극심한 외로움과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샐리가 진짜 원했던 것은 주인이 그저 조용히 자기 곁에 머물러 주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기가 해주고 싶은 방식대로 털을 빗기고, 억지로 밥을 먹이려 들었습니다. 샐리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괴롭힘이었던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얻어내려면, 내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지 먼저 읽어야 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글 중에 눈만 오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며칠씩 내려오지 않는 판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숲속 동물들은 모두 판다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토끼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죠.
"판다의 새끼들이 사냥꾼에게 잡혀갔어. 눈밭에 찍힌 자기 발자국을 사냥꾼이 따라왔기 때문이지.
판다는 눈 위에 자기 발자국이 찍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거야."
토끼는 어떻게 판다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판다의 입장이 되어 그 아픔을 깊이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 소원을 뜯어내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지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하는 묵상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기 상권』 13장을 보면, 기도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었다가 파국을 맞은
사울 임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필리스티아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사울 임금은 사무엘 예언자가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쳐버립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뜻이나 그분이 정하신 율법의 질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당장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줄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결과물만 뜯어내고 싶었죠.
하느님의 뜻을 묻는 묵상은 생략한 채 자기 소원부터 들이민 결과가 어땠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에게 "임금님은 어리석은 짓을 하셨소.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제 임금님의
왕권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오."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읽지 않고 내 뜻만 강요하는 기도는 사울의 번제물처럼 결국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올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에 내 마음을 완전히 맞추었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요?
13세기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 대 제르트루다 성녀의 일화가 이를 잘 증명합니다.
어느 날 성녀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제가 청하지 않은 것조차 이토록 넘치게 다 들어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뜻을 버리고 온전히 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나 역시 내 뜻을 버리고 온전히 너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단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내 청구서를 찢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여쭙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한 구절 한 구절 입에 올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 호흡으로 숫자를 세며 그것만 묵상합니다.
두 시간 동안 주님의 기도를 한 번만 바칠 때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그분 마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기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십니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강론>
(2026. 6. 18. 목)(마태 6,7-15)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다른 민족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게 바치는 기도는 그 자체로 ‘빈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빈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믿음 없이’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만일에 기도를 하면서 “기도한다고 이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빈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당신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두 번째, ‘실천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가리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온갖 일을 시키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세 번째, ‘사랑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만일에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입니다.
네 번째,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고, 바라고 있다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만일에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심이 가득 차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2)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도
기도를 ‘빈말’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날마다 바치는 기도여서 특히 더 그렇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라는 말은,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다는 뜻인데, 기도에 간절함과 정성이 없으면, 그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주님과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들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연결됩니다(요한 17,20-21).
용서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회개’로 응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주님께서
다 해 주시는 일은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쪽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단순히 말의 공식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로서, 모든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기도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신자에게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아들 안에서 믿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De Trinitate, 8,5 재해석) 즉,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는 단순한 찬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살아가게 해 달라는 청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과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20,1 재해석) 즉, 기도는 삶으로 구현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라는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와 통치가 우리 삶과 세상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 시민인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순종과 선행을 통해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서는 주님의 기도를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그분의 통치를 따르는 삶으로 인도하는 기도”(2816-2827항 참조)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11-12절)라는 청원은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필요를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한 마음을 나타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구절을 해설하며, 양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죄의 용서 청원은 타인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하려는 의지를 전제한다.(마태 6,14-15 참조)
마지막 청원은 우리를 사탄과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이다. 성 베네딕토는 이를 영적 투쟁의 기도로 보며,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악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기도다. 우리가 오늘도 삶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참다운 제자가 되도록 힘쓰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