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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및 묵상

6월21일 [연중 제12주일]

작성자손막달레나|작성시간26.06.21|조회수16 목록 댓글 0

6월21일 [연중 제12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2주일 강론>

(2026. 6. 21.)(마태 10,26-33)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26-33).”

1) 26절의 말씀을 앞의 25절,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에 연결하면, 26절은, “누가 진짜로 하느님 편이고, 누가 사탄 편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탄과 그것의 추종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6절을 27절에 연결하면, 26절의 뜻은 “너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겨도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는 활동이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 편에 서 있는 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7절의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는 제자들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셨지만,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고 파견하셨습니다(마르 16,15).

2)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데,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희망,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참고 견뎠고, 그런 그를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28절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멸망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주신다.”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참새보다 더’ 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베드 1,7).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과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느님께서 전부 다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니까 힘든 일을 만나도 기죽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는, “그를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연상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6월21일 [연중 제12 주일]

마태오 10,26-33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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