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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신앙여정

[성경 속 상징]재:슬픔과 재회/죽음: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문턱/ 나팔:죽은 이들의 부활 알리는 소리

작성자green숲|작성시간12.02.14|조회수63 목록 댓글 0




재 :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재회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것과 함께 거행되는 참회 전례는 많은 상징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재의 수요일에는 재에 성수를 뿌린 다음 그 재를 신자들 머리에 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된 밥에 재 뿌린다'는 속담처럼 재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교회의 공적 참회 제도가 10세기 말께 없어졌지만 재를 뿌리는 의식은 그대로 보존됐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1년 이 관습을 모든 교회에서 보존하기를 권고했다. 이 예식에서 성직자들이나 남자들에게는 머리 위에 재를 얹었고, 여자들에게는 재로 이마에 십자표를 그었다. 재는 덧없음과 무상, 슬픔과 참회의 상징이므로 사순절 회개의 전례에 안성맞춤이다. 재를 뿌리는 일은 구약성경이나 고대 이방인 문화권에서는 낯익은 의식으로, 슬픔과 속죄를 표현한다. 재를 축성하는 기도문은 12세기에, 그 전 해의 성지를 태워 재를 만들라는 지침으로 명문화된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사제는 전통적으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참조 창세 3,19) 혹은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등을 외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회개를 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머리에 쓰고 베옷을 입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옷을 찢고 크게 통곡하며, 머리에 재를 뿌리고 나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나팔 소리를 신호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1마카 4,39-40). 머리에 재를 쓴 사람은 슬픔에 빠진 비천한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를 특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행동을 했다. 또한 예수께서도 갈릴래아 호수 주변 도시인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향해 그들의 뉘우치지 않는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질책하실 때 참회의 표시인 이 상징을 인용하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이처럼 재는 정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재는 태울 것을 다 태우기에 무균의 상태를 뜻한다. 아울러 재는 먼지와 같이 미소한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창세 18,27). 재는 탈 수 있는 것은 다 태워서 제거하기에 순수와 정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황소의 나머지는 모두 진영 밖 깨끗한 곳에 있는, 재를 쌓아 두는 정결한 곳으로 내다가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태운다. 그것은 재를 쌓아 두는 곳에서 태워야 한다"(레위 4,12). 성경에서 재는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우리의 콧숨은 연기일 뿐이며 생각은 심장이 뛰면서 생기는 불꽃일 따름이다. 불꽃이 꺼지면 몸은 재로 돌아가고 영은 가벼운 공기처럼 흩어져 버린다"(지혜 2,2-3). 재는 불로 태운 것이다. 따라서 재를 받고 살아가는 사순시기는 불로 자신을 태우듯이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버리고 살아야 하는 기간이다. 재는 자연으로 돌아가 훌륭한 거름이 되고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장을 돕는다. 따라서 사순시기는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희망하는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다. 죽음 :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문턱 우리 가톨릭 교회 큰 어른 김수환 추기경께서 지상에서 삶을 마치시고 하느님 품에 드셨다. 추기경님 선종에 모든 매스컴은 '큰 별이 떨어졌다'며 위대한 종교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기사를 실었다. 추기경님 선종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인간의 죽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고 혈혈단신 유리관 속에 편안하게 누워계신 김 추기경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사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인양 '웰빙'만을 쫓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운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김 추기경님은 몸소 답 하셨다. 그분은 가진 것을 남김없이 베풀겠다며 일찌감치 장기기증을 서약했고,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셨다.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이고, 미리 죽음을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추기경님의 아름다운 죽음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묻고 있다. 죽음은 부나 권력, 나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최고의 고통이며 공포이다. 죽음은 냉혹하고 현실적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큰 적이며 모든 삶을 무력화시켜버린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나 도망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가나안 신화에서는 죽음을 인간 육신을 끊임없이 탐욕하는 신으로 의인화했다. 구약성경은 죽음의 영역이 지하 세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출입문을 깊은 구덩이로 묘사한다(시편 88,4-6). 하느님께서는 그의 계시된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궁극적 징벌로서 죽음을 선포하셨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역하였을 때 죄와 죽음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이래로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5,12-21). 성경에서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무섭고 잔인한 원수로 묘사한다.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아니 보겠습니까? 누가 저승의 손에서 자기 영혼을 빼내겠습니까?"(시편 89,49) 죽음에 대한 가장 충격적 이미지는 코헬렛에서 극치를 이룬다. 늙음과 죽음은 인간 삶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코헬 12,1). 그러나 죽음의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하느님이 죽음을 이길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한 희생적 죽음을 맞으셨을 때, 그분은 죄를 정복하셨다(로마 5,12-21). 그래서 예수님 부활은 미래에 있을 그의 백성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과연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또다시 구해 주시리라고 희망합니다"(2코린 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하는 믿음을 통해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이미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의 나라로 건너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의 부활 신앙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 죽음이란 희망의 문턱이요 시작이 된다. 나팔 : 죽은 이들의 부활 알리는 소리 나팔은 고대 사회 악기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그래서 무엇을 선포하거나 신호를 주는 목적으로 나팔을 자주 사용했다. 나팔은 음정을 낼 수 있는 공기관의 길이가 짧아 음정 수가 매우 제한돼 있다. 나팔은 산양이나 소의 활 모양으로 굽은 뿔로 만들었다. 성경에서도 나팔에 대한 언급은 많이 등장한다. 나팔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주로 전쟁 때였다. 전쟁을 소집하거나 공격의 개시나 마침을 알릴 때 사용했다. 혹은 적들의 공격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 "벤야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한가운데를 떠나 피난하여라. 트코아에서 나팔을 불고 벳 케렘 위에 봉화를 올려라. 북쪽에서 재앙이, 엄청난 파괴의 조짐이 보인다"(예레 6,1). 전쟁의 승리를 선포할 때도 사용했다. "요나탄이 게바에 있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를 치자, 필리스티아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사울은 '히브리인들은 들으시오!' 하면서 온 나라에 나팔을 불었다"(1사무 13,3). 나팔소리는 힘과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나팔은 예배 시작 시간을 알렸으며 회중의 찬양에 반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별한 절기들은 나팔이 울려퍼짐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나팔이 예배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경우는 속죄일이었다. 옛날에는 나팔에 속죄의 기능을 갖고 하느님을 달래는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나팔을 길게 불면 백성은 시나이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자는 아무도 손을 대지 말고, 돌이나 활에 맞아 죽게 해야 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숫양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거든, 백성을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라"(탈출 19,13). 어떤 사건들에 대한 공적 관심을 유도하는 목적으로도 나팔을 사용했다. 왕이 등극할 때 나팔을 불었다. "예후는 '그 사람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면서,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세운다"고 말하였소.' 그러자 그들은 재빨리 저마다 제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는 나팔을 불며, '예후께서 임금님이 되셨다!'하고 외쳤다"(2열왕 9,12-13), 혹은 공개적 거부(2사무 20,1)나 집단적 맹세 등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나팔을 사용했다. 나팔은 특별한 축제에서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2사무 6,15). 따라서 나팔은 공적 예식에 사용된 악기였다. 신약성경에서 나팔은 부활을 상징적으로 알린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은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된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2-53). 그래서 중세 미술에서 나팔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예언하는 상징이 된다. 특히 최후의 심판을 그린 작품에 나팔이 등장한다. -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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