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준 루도비코 신부
사순 제5주일
에제키엘 37,12ㄹ-14 로마 8,8-11 요한 11,1-45
사순, 내 마음의 돌을 치우는 시간
“바빠요.”, “피곤해요.”, “힘들어요.”
누군가 안부를 물으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앙마저 ‘여유가 생기면 해야 할 숙제’처럼 여겨
자꾸만 뒤로 미룹니다. 자기 일상의 무게에 갇혀 신앙을 또 다른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우리와 참 닮아있습니다. 라자로를 잃은 그녀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슬픔이라는 무거운 돌에 갇힌 마르타의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마르타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무덤을 막고 있던 무거운 돌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의 ‘안된다’는 의심, ‘귀찮다’는 무관심, 그리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는 고집일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 우리가 이런 마음의 돌을 먼저 치우기를 바라십니다.
행복은 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힘들고 지친 순간,
주님께 내 마음의 자리를 조금 내어드릴 때 시작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나의 영을 너희 안에 넣어 주어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겠다”(에제 37,14 참조)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더 얹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다시 숨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우리가 억지로 해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가장 큰 ‘힘’이자 ‘선물’입니다.
존경하올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사순 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마음을 꽉 막고 있는 피로와 체념의 돌을 이제는
조금만 옆으로 밀어봅시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고단한 일상은 비로소 생명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 광주대교구 정일준 루도비코 신부
2026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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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요한 신부
사순 제5주일
에제키엘 37,12ㄹ-14 로마 8,8-11 요한 11,1-45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애처로움을 넘어선
모습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단순히 한 사람을 살리신 기적을 넘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드러내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두고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신 말씀이 아니라,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강한 결의(決意)를 드러냅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했던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시는 모습과,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는 토마스의 말에서 ‘죄 때문에 죽을 몸’(로마 8,10)인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시겠다는 결사 (決死)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사건은, 장차 당신께서 죽 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너희 무덤을 열겠 다.”(에제 37,12)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성됩니다.
무덤은 더 이상 끝 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는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말씀은 사순 시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죄와 절망의 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빛으로 걸어 나오라는 부르심인 겁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 생명 | 조에 (ζωή)
요한복음 11장의 중심에는 “생명”(ζωή)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생명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의 또 다른 말마디입니다.
마르타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마르타의 믿음은 당시 유다 사회가 공유하던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현재로 옮겨 놓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무덤에 나흘째 누워 있던 라자로였습니다. 당시 유다 전승에 따르면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생명에의 모든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나흘째 시간은 인간이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미래는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우리를 살리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주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부활과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의 믿음 안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대구대교구 이재현 요한 신부
2026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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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 보나벤투라 신부
사순 제5주일
에제키엘 37,12ㄹ-14 로마 8,8-11 요한 11,1-45
가난한 기적, 자유로운 선택
기적은 이해할 수 없기에 기적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힘든’ 사건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우리는 그 사태를 기적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기적을 또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친구 라자로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믿음에 확신을 줄 강력한 기적을 내 앞에서
보여주실 수는 없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근대 이후의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이러한 기적이 내 앞에서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할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근대 교육은 우리에게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적 사고를 강요합니다.
고대인이었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의심하였는데,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믿음을 얻기보다는 더한 의심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더욱 클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예수님의 기적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셨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확신을 일으키지는 못하셨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어떠 한 확신도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기적은 반만 포용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확신에 차
예수님을 따르는 이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 기적을 보고 율법(안식일)조차 지키지 않는
사이비 예언자라 낙인찍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의 기적조차,
늘 오해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겸손하고 가난한 봉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할 뿐,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주님의 거룩한 부활조차 의심하는 인간들의 믿음의 자유 속에
아무런 감흥 없이 던져질 수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사태라는 냉정한 현실의 예고입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인간들에게 가난한 사태가 기적이건 만,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그분 연민의 마음, 그러한 그분의 마음이 움직이셨을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요한 11,33) 지신 예수님의 마음이 이미 그분 마음에
예정되어 있던 가난하고 겸손한 봉사인 기적을 보다 더 빨리 재촉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기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발생 한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봉사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라자로를, 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감히 이 초대를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의 믿음을 기다립니다.
친구여, 이리 나오 십시오. 그대의 두 발로, 그대의 순수한 선택으로!”
/ 예수회 이재상 보나벤투라 신부
2026년 3월 22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