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사도행전 4,1-12 요한 21,1-14
내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누가 묻는다면 오늘 복음을 들려주세요.
“주님이십니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중학교 사춘기 시절, 철없던 저는 유독 어머니에게
저의 혼란과 두려움을 분출하곤 했습니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고 급기야는 정상적인 대화보다
고성과 분노가 오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어머니는 제가 깊이 잠이 들었을 때 제 침대로 조용히 오셔서
안수를 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선잠이 든 채 어머니의 손길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잠을 깨고 싶지 않아 모른 척하고 계속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 날들이 지나면서 저는 조금씩 어머니에 대한 화가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혼란스러웠던 사춘기 시절, 어쩌면 제가 가장 목말라 했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나? 회상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사랑한다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상대방에게 가 닿아
그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지에는 무관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굳이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투닥투닥 터지는 장작 소리와 밝아오는 여명에 비쳐진 주님의 얼굴에서,
제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온 영혼을 통해 느끼고 있었습니다.
/ 서울대교구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사도행전 4,1-12 요한 21,1-14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눈앞에서 본 제자들은 깊이 좌절하고 절망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
듯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제자들 삶의 자리, 그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 오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모습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과
매우 닮았다는 점입니다. 빈 그물, 허탈한 마음, 밤새 수고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여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며, 그들에게 기쁨에 찬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복음 환호송의 시편이 노래하듯이,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하루하루의 날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예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과거를 따져 물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두려움에 떠나 버린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는
질책보다 희망을 먼저 건네십니다.
처음 부르실 때 그들의 신분도 능력도 물으시지 않았던 것처럼,
새롭게 부르실 때도 과거의 실패는 결정적 조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현재이며,
그 현재에 우리가 다시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이 고백이 우리의 삶 전체에서 드러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자비가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
김찬선 신부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사도행전 4,1-12 요한 21,1-14
'내' 자가 들어간 것은 다 빼야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이 질문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 지도자들이, 곧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주님을 죽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힘으로 불구자를 살린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은 제게 하는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에게 질문한 이들이 오늘은 내게 한 질문으로.
그래서 질문을 받고 자문합니다.
나는 무슨 힘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일할까?
저의 경우 요즘 확실히 주님의 힘으로 일합니다.
이것이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고 편한 점입니다.
요즘은 확실히 저의 힘을 뺐습니다.
뭣을 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일도 술술 잘되고, 일하며 그렇게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받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체험을 소소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식당에서 비지찌개를 메뉴로 추가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저 마음만 먹었는데도 그날 누가 묵은지를 한 열통 보내주시는 겁니다.
이런 식의 작은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가 힘을 뺀 것은 오늘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밤새 고기잡이했지만,
허탕을 친 것처럼 저도 과거 제힘으로 했을 때 실패했던 많은 경험 때문에
제가 힘을 뺀 것이기도 하고 나이 먹어 힘이 빠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내 힘이 빠지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니 성과도 좋고 힘도 안 들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얘기를 제가 한다는 겁니다.
그제도 회의를 위해 형제들과 함께 산청을 다녀오는 길에 제가 자연스럽게
나는 요즘 하느님을 만나는 작은 체험을 자주 한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사심 없이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놓고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대놓고 자랑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됩니까?
하느님의 힘으로 해놓고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힘도 빼고 이름도 빼야 합니다.
‘내’자가 들어가는 것은 다 빼야 합니다.
내 힘도 빼고 내 이름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주님의 힘으로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