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열왕기 18,20-39 마태오 5,17-19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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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열왕기 18,20-39 마태오 5,17-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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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열왕기 18,20-39 마태오 5,17-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