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넉넉한 마음, 편한 멍에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오라는 말씀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따듯하게 합니다. ‘오너라.’는 말씀은 지친 자녀를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겨 안으시는
어머니의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느껴집니다.
‘모두’라는 말씀은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느껴져 우리를 안심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없애 주겠다.’ ‘고생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도 벗겨주시고,
고생도 없애주시고 싶어 하실 것이고, 그럼에도 벗겨주시지 않고, 없애주지 않으시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짐을 벗겨주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지만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야말로 이를 악 무는 더 큰 사랑의 마음이겠지요.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식이란 주님이 짐을 지는 방식이지요.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방법이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편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편하면 짐이 가벼워집니다.
배낭이 몸에 딱 맞아 편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군에 있을 때 배낭이 불편하여 고생을 하다가 몸에 맞는 배낭을 메니
배낭에 많은 것을 집어넣고 구보를 하여도 훨씬 편하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편한 멍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거칠고 거세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마음은 작은 짐도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 목줄을 매는 개가 목줄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목이 옥죄는 것처럼.
그러나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더 큰 짐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견딤을 통해 더 큰 힘이 생깁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이고 힘이 들어와야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힘내고의 역학 관계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겠습니다.
온유한 마음 이상으로 짐을 져야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는 순간, ‘왜 이것이 나에게?!’라는 마음을 거두는 순간,
자기가 지는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반기는 것 또는 어여쁜 것이 되고
짐을 지는 행위는 노역이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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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라고 느낄 때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제안하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말들 중에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집착하고 결국 내 것을 찾으려하는 속성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일종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검증은 ‘희생’입니다.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면서 다른 이의 참다운 이익을 도모하는 사랑은 결코 거짓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옆구리에서 솟아나온 물과 피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셨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사랑을 받아 누립니다.
물로 상징되는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깨끗하여지고, 피로 상징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양식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살기로 다짐합니다.
‘희생’을 동반한 진정한 사랑,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성심입니다.
살레시오회 이준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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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배 요셉 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
언제인가 결혼을 앞둔 한 신랑이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던 게 생각납니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제 곧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매사가 즐겁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여유 있고 친절하게 대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조차 흥에 겨워 일하는 그에게 우리는 “뭐 좋은 일 있어?”라고 묻게 됩니다.
사랑이 가득한 그에게는 모든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또 내가 그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면,
생활이 즐겁고 생기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엔가 있고,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함께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 사랑 안에 머물며 행복합니다.
우린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온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함을 느낍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며,
“내 안에 주님 사랑이 가득한 것”입니다.
/ 예수회 손우배 요셉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