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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자료실

2018년3월17일 성 파트리치오

작성자강정일 (바오로)|작성시간18.03.17|조회수109 목록 댓글 0



파트리치오는 

389년경 스코틀랜드의 서쪽지역에서 태어났다.

 당시 브리타니아 섬나라는 

200년 동안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식민지로 있었고,

 켈트족의 일부분은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아직 대부분은 이교도로 남아있었다. 

파트리치우스의 아버지는

 귀족으로 시의회의원이며 한때 부제로서 성직자였다. 

그의 조부는 사제였다. 

당시에는 북쪽지방에는 아직 사제의 독신제도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깊은 신앙심은 없는 편이었다. 

이런 잘 사는 가정에서 태어난 파트리치우스는

 경솔하게 지내며,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힘 싸움 내기에서는 항상 일등이었다. 

 

그가 16세 되던 때에 

아일랜드 해적들이 쳐들어와 그를 납치하여

 인근 섬에 노예로 팔았다. 

이렇게 그는 한순간에 노예가 되어 

한 이교도 원주민의 집에서

 6년 동안 양떼를 지는 목동으로 살았다. 


그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완전히 이교도들이었으며, 

돌로 된 제단에서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제사를 드리곤 하였다. 

이교도들의 제사장들은 큰 힘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동시에 예언을 하며 

지혜를 가진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그 제사장들에게는 한 가지 예언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언젠가는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

 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서 

이교도들에게 재앙을 선포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면서 

응답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바로 그 주인공이

 젊은 노예인 파트리치우스 성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성 파트리치우스는 

이 기간 동안 겪은 힘들었던 체험을 

라틴어로 써서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때부터 열정적인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꿈 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용기를 내어 탈출한다. 

그는 먼 길을 헤맨 끝에 킬랄라만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서 항해 준비를 마치고 있던 배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성 파트리치우스는 자신이 경험한 노예 생활을

 자신의 회개를 위한 기간이자 앞으로의 사도직을 위한

 하느님 섭리의 준비 기간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 경험을 통해

 아일랜드에 신앙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명에 따라 그는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지방으로 가서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7월 31일 축일성인) 

주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4년 동안 머물렀고, 그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게르마누스 주교는 

교황으로부터 브리타니아에 남아있던 이단인

 ‘펠라지우스주의’에 맞서 

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라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이 임무의 달성을 위한

 동료로 파트리치우스를 선택한 것이다. 

 

파트리치우스는 아일랜드를 회개시키려는

 열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차에

마침내 교황청으로부터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432년경에 

성 게르마누스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435년 3월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아일랜드인들을 위한 초대 주교였던 

성 팔라디우스(7월 7일 축일성인)를 계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은

 수많은 원주민 추장들과 과감하게 만났고, 

대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회개시킴으로써 

섬 전체에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깊이 내렸다. 

그는 442년과 444년에 로마를 방문하였고 

아마 대성당을 세워 

아일랜드 선교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아일랜드에서 보낸 40년간의 활동에서 그는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라틴어 공부를 비롯하여 아일랜드를 서방교회와 

아주 가깝게 만든 공로자가 되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기록한

 영적 자서전인 ‘고백록’을 썼는데 

그것은 일종의 호교서(護敎書)이기도 하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정과 

자기 사명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무엇보다도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사도직으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찬미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파트리치우스는 과연 그리스도교를 

초원지대인 아일랜드 섬으로 이끌어들인 

선교사가 된 것이다. 

이후 아일랜드에 뿌리가 내린 가톨릭교회는

 수백 년 동안 육지로 복음을 전파하는

 본거지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파트리치우스 성인은

 많은 반대도 겪어야 했다. 

열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기도로 힘을 얻기 위하여 

가능하면 언제나 고독과 극기를 실행하였다.

 자주 찾던 두 곳이 알려져 있는데, 

아일랜드 가장 서쪽에 있는 Croagh Patrick산과 

북쪽 끝에 위치한 Lough Derg라는 곳이다.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대축일까지 40일 동안

 완전 단식을 하면서 고행을 하였고,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엎드려 기도하였다.

 지금도 이 두 곳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죄의 보속을 하기 위해 고행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성파트리치우스는

 493년 3월 17일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아일랜드의 다운패트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상징은 뱀과 토끼풀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아일랜드에 있는 뱀들을 바다 속으로 몰아내어 

다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곳에는 정말 뱀이 없다

. 뱀을 여러 번 들여와 자리 잡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레지오 마리애’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뱀이 상징하는 마귀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군대가 바로

 그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1687년부터 3월 17일에 지낸다. 

그의 축일에는 

사람들이 토끼풀로 각자 집들을 꾸민다.

 아일랜드인들은 성 파트리치우스를 기념하는 날이면

 국화인 토끼풀을 옷깃에 달고 녹색 옷을 입는다. 

그 전통은 그가 하느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한 줄기에 잎사귀가 

3개 달린 토끼풀을 가지고

 설명하고 이해시켰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또 그는 광부들과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는다. 


파트리치오는 

신앙의 힘으로 한 민족을 

그리스도께로 이끈 성인이시다.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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