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아기 안나는 1783년(정조 7년)
한강 기슭의 작은 촌락에 있는
교우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가 차면서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봉교하였다.
천성이 우둔하여 요리문답과
경문을 배우기가 몹시 힘들었으나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천주를 사랑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열여덟살이 되어
태문행(太文行)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낳았으며
이들을 교리에 맞도록 교훈하여 양육하였다.
안나는 집이 가난한 편은 아니었으나
세상 사물을 탐내는 마음이 적었고
주님의 교리를 열심히 지켜나갔다.
특히 주 예수의 수난에 대하여
남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어
구세주의 오상(五傷)을 생각하고는
매양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빛났으며
순교하기를 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기해년 2월에 안나는 남편과
장남 태응천(太應天)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안나는 믿음이 견고하여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관원이 백방으로 달래고 유혹하였지만
그녀의 굳은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이 때 안나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살이 쇠눈만큼 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으면서도
신공바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한다.
배교한 그의 남편과 아들들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죽어가는 노모의 고통이며,
엄마를 찾는 어린 것들의 가련한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기막힌 유혹을
용감히 대적하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벗들의 나약함을 책하여
『며칠 더 살아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위험을 무릎쓴단 말이요.
나보고 배교하라고 권하기는 커녕
끝까지 함구하라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오.
당신들이야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回頭)하시오.
그리고 나의 행복을 부러워하시오』라고 말하였다.
결국 포청에서는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안나를
형조로 이송하기에 이르렀다.
형조에 이르러서도
주를 위한 그녀의 마음은 금석같았다.
그녀는 언제나『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5월 11일 형조는
마침내 박 안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당시의 판결문을 보면
,「마님이라고 불리는 박녀(朴女)는
사서(邪書)를 읽는 것으로 집안 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같이 공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가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라 하여,
천주교도로 확정지었다고 기록돼있다.
이리하여 그녀는 57세를 일기로
김 막달레나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치명하였던 것이다.
박아기 안나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의성인
천주교부산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