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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자료실

2018년10월10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작성자강정일 (바오로)|작성시간18.10.10|조회수26 목록 댓글 0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는

 1510년 10월 28일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 간디아에서

 간디아 공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황 알렉산더 6세(재임기간 1492-1503)는 

그의 증조부였으며, 

가톨릭 왕이던 페르난도는 그의 외증조부였다. 

그는 사촌형인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왕이었기에 

젊어서부터 왕궁을 드나들며 귀족교육을 받았다. 

1529년에 황후 이사벨라의 제1 시녀인

 레오노르 데 카스트로와 결혼해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9년 5월에 찾아온 황후 이사벨라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왕의 명령으로 장례식이 거행되는 그라나다까지

 황후의 시신을 운송하게 되었는데,

 매장 직전 황후의 썩어가는 시신을 보며 

‘생전에 그렇게 아름답던 부인이

 어떻게 이렇게 추해질 수 있단 말인가’라며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 중에 그는, ‘이제는 더 이상 현세의 왕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고 한다.

 

이후 보르자는 카탈로니아 지방의 총독을 지내고

 1543년부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간디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공작으로 재임하던 시절 

예수회의 초창기 회원이던 베드로 파브르와 

안토니오 아라오스를 알게 되고 

그들과 영적인 교류를 하였다. 

나중에 그는 간디아 지방에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는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 대학은 예수회원이 아닌 

일반 학생이 공부하는 첫 예수회 대학이 되었다.

 

1546년 부인과 사별한 후

 동 대학 공동체 원장이던 안드레아 오비에도 신부에게

 영신수련을 받았다.

 영신수련 중 세상의 모든 영예를 버리고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그리고 간디아로부터 로마로 가려던

 베드로 파브르 신부에게

 자신의 의사를 이냐시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였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위를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곧바로 수련과 신학 공부를 시작한 보르자는

 1548년 2월 1일 서원을 발하였고

 1551년 5월 23일 사제로 서품받았다. 

서품 후 잠시 바스크 지방의 본당에서 사목을 경험하고 

1554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관구를 감독하는

 총장대리로 임명되었다.

 

1565년에 예수회의 제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총장으로서 그의 주된 임무는 젊은 회원들의 양성이었다. 

예수회 정신의 철저한 계승, 

회원들의 기도 시간 확보, 

여러 보직에 대한 명확한 규정,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계된 학사규정의 초고를 작성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시아와 남미에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플로리다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교황 비오 5세는

 투르크 군과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보르자 총장을 보넬리 추기경과 함께 

유럽의 주요 도시에 파견하였다. 

이 여행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로마로 되돌아온 그는

 1572년 9월 30일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보르자 신부는 1624년 11월 23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4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 소속 교회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1931년 스페인 내란 도중 

교회와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이냐시오가 예수회를 설립한 창립자라면

 보르자는 예수회를 조직적으로 정비하여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다진 분이라 말할 수 있다.

 


이냐시오의 벗들,구정모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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