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오(1195~1231)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페르난도이며 어린 시절 고향인
리스본의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수도회로 옮겨
8년간 수도회 생활을 하며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오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1220년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무슬림에 의해 순교 당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의 유해가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수도회 성당에 도착한 것이다.
그 순간 안토니오는
선교를 떠나 순교하고픈 마음이 불타올라
성 십자가 수도회를 탈퇴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그는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선교를 위해 마로코로 떠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열로 인해 돌아와야 했으니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성 안토니오와 성 프란치스코는 동시대를 살았다.
안토니오는 1221년
아시시 근교의 포르치운쿨라에서 개최된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의 총회에 참석했으며
그때 두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서로의 마음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을까?
1226년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안토니오에게는 어려운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녹여내는 탁월한 설교 능력이 있었다.
성 안토니오ㄱ가 설교하면
드넓은 광장이 군중으로 가득 메워졌다고 한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남자들은 가게 문을 일찍 닫았고,
여성들도 광장과 교회를 찾았다고 한다.
인기 드라마 상영 시간에 수도꼭지가 잠기는 현상이
그때 파도바에서도 벌어진 것 같다.
그의 설교를 들은 대중은 변해 갔다.
서로 싸우던 귀족들이 화해했고,
남의 물건을 훔친 이들은 성인 앞에서 사죄하며
물건을 돌려주었다.
안토니오 성인은
특별히 고리대금업자들의 부당함을 고발하였으며,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청산한 자는
감옥에 가지 않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법은 개인파산구제법의 초기 형태로써
이 법안의 사본은
현재 파도바의 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성 안토니오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전설 중 하나가 되었고,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 안토니오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했으며
,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는 어느 수련자가
허락 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의 아르첼라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에서 선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 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46년에는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되었다.
글...천주교부산교구 "오늘의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