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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자료실

2020년8월23일 리마의 성녀 로사

작성자교육.홍보분과|작성시간20.08.23|조회수290 목록 댓글 0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주여 어서 오시어 나를 구해 주소서.(시편 69)” -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다간 리마의 성녀 로사(1586-1617)가 자주 읊었다는 성구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보면 매우 기이하게 생각되는 그녀의 삶이 온전히 하느님께 향한 신앙이 아니면 이해되기 어렵고, 우리와 전혀 다른 생활로 살았던 로사는, 약 300여년 전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다.

 


리마의 성녀 로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시성된 성인이며, 남미 대륙의 수호 성녀다. 모든 성인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주위로부터의 심한 반대와 고통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영광스러이 자신의 고통과 삶을 바쳤다. 그녀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은 그녀의 고통에 대한 것뿐이며, 그 고통과 고행은 철저히 그녀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삶을 어릴 때부터 동경하여, 실제로 그녀 자신의 삶이 가타리나와 비슷하게 이루어짐을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인간 이상의 심한 금욕과 고행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이웃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 삶을 온전히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타리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구체적인 학문을 배운 경험이 없었기에 어떤 신학적 사상이나, 유능한 학식을 겸비하거나, 제자나 저술활동을 하지 않아, 그녀의 삶 안에서 우리는 신학적 동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시대와 사람들에게 보여준 성녀의 신심은 그 무엇보다 위대한 업적이랄 수 있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귀족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신비한 땅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스페인 사람들은 황금의 땅으로 떠났다. 그래서 그들은 1531년 프란치스꼬 피사로 장군이 페루를 강제 점령했고, 1535년 1월 리마성을 구축, 그 곳에서 군인들은 원주민을 학살, 폭행, 재산 몰수, 탄광 강제노역, 학대 등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40여년 동안의 그 비행은 비그리스도적이었으며, 반인륜적이었다. 이 때문에 원주민들은 스페인과의 사이는 물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꼬 수도회와 도미니꼬 수도회의 선교사들은 군인들의 행위를 경고, 주의하였으나, 인디언들은 구원과 영원한 삶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선교에 아무런 효과를 거두질 못했다. 그리고 피사로 장군이 페루를 차지하려는 ‘반 스페인 혁명’으로 1541년 살해되고, 가부덴, 프란치스꼬 베르날데스 등의 혁명 가담자들이 1554년 12월에 처형되는 등 페루의 정세는 불안하였다. 이럴 즈음 그들을 대신해서 마치 보속을 하는 양, 로사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 당시 리마는 1535년 스페인 피사로 장군에 의해서 ‘제왕의 도읍’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많은 스페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던 상업의 중심지이자 면방적, 제분, 양조, 유리의 생산지로, 1551년 5월 도미니꼬 수도회 성 말지노의 토마스 신부에 의해 설립된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산마르코스대학과 신학교, 1547년 초대 대주교 헤론메 데 로아이사에 의해 성 안나 병원이 세워지고, 1563년에 세워진 극장 등이 있는 남미 스페인 식민지의 주도였다. 그래서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장려한 건물들과 박물관, 교회, 궁전, 미술관, 공원 등이 남아있는 유네스코지정 도시다.


리마의 성녀 로사는 1586년 남미의 페루 수도, 리마에서 부유한 스페인 가문의 멜라디나, 요한, 안드레아, 안또니오, 마태오, 페르디난도에 이어 11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각기 문헌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떤 책에서는 스페인과 인디언 사이의 장녀로 또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몹시 허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로사의 영세명은 처음엔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이라고 하였으나, 너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때문에 ‘장미꽃’이라는 뜻을 가진 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기록과, 당시 세례 집전(사실은 견진)을 하던 리마의 대주교 성 토리비오가 ‘로사’라고 불렀다는 기록, 어머니의 꿈에 분홍색 장미를 보았다고 해서 로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름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이가 오래도록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그녀의 가정은 스페인 군인들을 위한 조병창을 하던 아버지로 해서 넉넉하였으나, 점차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어 로사도 부모들을 도와 생계를 이어야 했다. 부모 또한 신앙이 깊었기에 가문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커져갔다.

 

로사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친구들의 반대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성녀였던 시에나의 가타리나를 닮으려고 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너무 지나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미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한번 마음먹은 신념을 행동으로 또 직접 생활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철이 들 무렵 하느님의 기이한 섭리로 보속과 희생, 박애 등의 숭고한 정신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자주 어머니의 방에서 십자가를 보고 관상에 빠지는가 하면, 3살 무렵에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생인손 수술을 받게되었을 때도 예수의 고통과 비교하면서, 그 고통을 보속으로 생각하고 아픔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 매주 3일간은 소량의 물과 빵으로서 단식(사순 때는 빵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극기하였고, 그녀가 좋아했던 과일과 고기도 그때부터 먹지 않았다. 그리고, 편안한 침대보다 판자에 돌가루와 유리조각을 깔고 잠을 자며 고행을 하였다. 그러나 로사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고행 방법(물을 먹지 않는다던가, 몸에 줄을 감아 졸랐으며, 밤에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걷기, 장작 지기 등)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보다 못한 그의 부모들은 4살 된 그녀에게 글을 가르쳤으나 허사였으며, 예쁜 옷을 입혀도 마다하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타리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매우 미녀였다 . 그래서 그녀는 그 아름다움을 지우기 위해 얼굴에 후추를 문질러 반점이나 상처가 생기도록 했으며, 머리를 잘라 보다 사람들에게 추하게 보이려고 했고, 석회 가루로 손을 태워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마당에 통나무로 된 작은 방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죄인들을 위한 간구를 멈추지 않았다. 또 생계를 돕기 위해 자수와 편물에 시간을 보내며 2-3시간만 잠을 자는, 엄격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고통과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녀는 못으로 된 가시관을 쓰고 다녔다. 이보다 더한 고통을 하였으나, 결국 그의 지도 신부 알퐁소의 만류로 그녀의 희생과 극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아마도 그녀는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것을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마태 18, 8-9)라는 성서의 말대로 살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그녀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그녀는 10시간씩 바느질로 생계를 도왔으며 정원에서 꽃을 길러 파는 고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신앙이 깊은 그녀의 부모였지만 로사의 고행과 지나친 기도, 묵상에는 가끔 질타를 했다. 이렇게 육신의 고행에 힘쓰던 그는 영신적인 고독과 고민, 시련을 겪어야 했고, 그것을 이해 못한 부모들은 책망과 매질을 하며, 강제로 12세의 나이에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그녀는 거의 8년이라는 세월을 기도로 투쟁하며 결국 그녀가 20세가 되던 해에 도미니꼬 수도회 제 3회원으로 집에서 동정을 지키며 세인들의 구령을 위해 수행할 수 있게되었다.

 

로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열렬히 본받고자 하였으므로 대부분 고행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그 욕망은 어떤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과 많은 성인들이 현현하여 그녀를 위로하고, 환시와 천상의 것을 맛보게 하는 황홀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죽기 몇 해 전부터 그녀는 집에 방 하나를 마련하여 고아들과 노인, 병자, 집 없는 아이들을 함께 데려다 생활하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 방에는 항상 장미꽃이 만발하였고 낙원같이 안락하였다. 이것이 페루에서 시작한 처음의 사회 봉사생활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게 되었는데, 이단성의 의심을 받은 그녀는 이단 심문자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운 행실에 모두 감복했고, 결국은 하느님의 은총을 그녀가 받고 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 그녀가 모든 상식을 넘어선 생활로 관심을 얻게 된 것은 그녀 내부로부터 시작되고 움직이는 성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사는 선교사의 열망을 가지고 순교를 희망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특히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으며, 대신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그녀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녀가 감내하며 받아왔던 고행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3년에 가까운 긴 투병의 세월을 감수했고, 많은 유혹과, 주위로부터의 조소를 견디어 내야하는 아픔도 있었다. 이같은 그녀의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았으며 특히, 탈혼과 영신계의 진리를 느끼는 환희열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직 지도 신부에게만 말하였는데, 이는 그녀의 또 다른 겸손을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그녀는 준엄한 고행의 결과로 병을 얻게 되어,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사는 이런 고통을 다행으로 생각하였으며, 오히려 세상 죄인에 대한 십자가의 예수를 떠올리며 보속으로 받아들였다. 3년동안 병상에 있으면서 골고타의 예수를 생각한 로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한 끝에 1617년 8월 24일, 예수의 이름을 3번 부르며 31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로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리마시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였으며, 많은 유명 인사들과 흑인, 인디언들이 그녀의 관을 교대로 운구하며 애도하였다. 이는 모두가 신분과 귀천을 떠나서 로사를 같은 성녀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결국 그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많은 기적을 베풀어 그녀를 미대륙의 첫번째 성녀로, 라틴의 꽃으로 찬양받는 천상의 상급을 하늘로부터 받게 해주어,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8월 23일이며, 남미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글...천주교부산교구 "오늘의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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