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수묵화
창밖을 내다보니 흐린 하늘 아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나가려던 마음도 접고 주저앉았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꼭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다음으로 미루었다.
바깥 풍경은 흐릿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신곡산 자락에 내려앉은 송정마을은 송정천과 바다에 둘러싸여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흐린 날씨 속에서 신곡산 너머로 높이 솟은 빌딩들은 마치 안개에 가려진 마천루처럼 아련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속 화폭을 펼쳐 들고 상상의 붓을 잡아본다. 산과 강, 바다와 빌딩을 적절히 배치하며 구도를 그리고 붓을 휘저어 본다. 화려한 색채는 없지만 묵직한 무채색의 그림 한 점이 완성된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려진 수묵화를 고이 저장해 두니 마음도 한결 담담해지고 가벼워지는 듯하다.
오늘은 주간의 첫날 휴무일이라 타운의 시설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커피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누린다. 비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기도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듯, 물 또한 넘치면 재앙이 되기도 한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그래서 흘러야 한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이롭게 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며, 둥근 그릇에서는 둥글게, 모난 그릇에서는 모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물의 덕목이다.
경기도 양평에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두 갈래의 물길은 그곳에서 하나가 되어 한강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의 젖줄이 된다.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물속 생명체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생명줄이 된다. 인류 문명의 역사가 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남쪽의 사해를 찾은 적이 있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라는 뜻이다. 염분 농도가 너무 높아 대부분의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지만 빠져나갈 곳이 없어 갇혀 있다. 그래서 생명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 보았다. 헤엄을 치려 해도 몸이 자꾸 수면 위로 떠올라 제대로 수영할 수 없었다.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물이 흐르지 못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사색의 늪에서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비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덮고 있다. 찻잔 속 차는 어느새 식어 씁쓸한 맛만 남았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의 수묵화는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 오늘의 수묵화는 또 다른 밝고 화려한 수채화로 변할 것이다. 그 기대를 품으며 조용히 오전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