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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

[교회사]교회개혁(1) 그레고리오 개혁시대(11-15세기)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4.12.03|조회수528 목록 댓글 0

교회개혁 (1) 그레고리오 개혁시대(11-15세기)


첨부파일 교회개혁(1) 그레고리오 개혁시대 (11-15세기).docx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26 -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선교와 개혁

 

고대의 위기 위에 미래 교회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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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적 : 로마의 멸망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나 로마를 멸망시킨 이민족들을 개종시킨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활약으로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중세사회를 만드는 토양을 만들었다.

 

 

[로마=김상재 기자] 주후 410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 부족인 서(西)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천도이래 제국의 정치적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로마는 아직도 제국의 상징적 도시였고 서방 교회의 중심이었다. 로마의 이러한 재난은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고 많은 이교도들은 로마의 재앙이 로마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주장을 거슬러 '하느님의 도시(신국론)'를 저술해 로마의 재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시키려 하기도 했다.


410
년 로마의 함락이래 서로마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39년 반달족에 의해 북아프리카가 점령당했고 452년 훈족의 침입, 455년 반달족의 로마약탈, 476년 고트족에 의한 서방의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 등 혼돈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은 꺼져가는 한 시대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암울한 시대의 삭풍을 맞으면서도 과거를 부정시키지 않고 다음시대의 영광을 여는 등대가 되어준 것은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침입자들과의 담판을 통해 파괴를 막았고 약탈과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구호금을 지급하는 한편 야만족들에 의해 파괴된 학교들을 대신해 교육도 담당했으며 거룩한 전례를 통해 황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교회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로마제국의 지원을 대신해 서방세계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유일한 기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서방사회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됐다. 특히 이 시기에 뛰어난 교황들의 활약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고 동시에 교황권의 강화라는 시대적 부산물을 낳았다.


그 활약의 와중에서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지대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서방교회의 4대교부중 한 명이기도한 그레고리오 교황을 대교황으로 부르고 있다.

 


수도자 출신 첫 교황


그레고리오는 540년 로마의 명문귀족이었으며 이미 펠릭스 3세와 아가삐또 1세 두 교황을 배출한 아니키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계층의 고등교육을 받은 그레고리오는 이미 33세가 되던 573년 최고위층인 로마 집정관에 선출됐다. 그러나 575년 부친의 사망후 그레고리오는 장래가 보장된 화려한 세속생활을 청산하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집을 베네딕도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시칠리아의 상속토지에도 6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578
년에는 베네딕도 1세로부터 부제로 서품되었고 이듬해에는 펠라지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586년에야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갔으나 590년 펠라지오 2세가 선종하자 자신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로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됐다.

 


선교와 개혁


당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과 5~6세기에 창궐한 전염병과 페스트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따라서 교황에 착좌한 그레고리오는 먼저 굶주리는 시민들을 위해 식량과 필수품을 장만하는데 주력했고 이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북아프리카 등지에 산재해있던 교황청의 재산을 정비했다. 그의 이러한 교황청의 부동산 재정비는 나중에 교황령의 기초가 되고 중세 시기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교황은 자선사업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의 지도자로서 농부들에 대한 대지주들의 착취를 막았고 랑고바르드족이 592년 로마를 포위했을 때 담판으로 그들을 물리치는 등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수호에도 나섰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동로마제국 황제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교황은 교회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야만족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랑크왕국과 우호관계를 설립하고 대대적인 선교정책을 실시해 안드레아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노를 영국으로 파견했다. 또한 아리우스교도들인 랑고바르드족들의 개종 등 게르만 민족들의 개종과 게르만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정책들은 앞으로 게르만 민족들이 지니게될 서구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으로 '그리스도교적 중세 서양'을 탄생시키는 토양이 됐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러한 혜안은 고대의 폐허 위에 미래의 교회를 건립한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리게 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의 공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회쇄신을 위해서도 열과 성을 다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사목지침서(Liber regular pastoralis)를 저술했다. 사목직무를 받는 동기, 사목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 교리교수법 등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중세기 동안 사제양성의 기초가 됐다.


이와함께 수덕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을 강조해 욥의 윤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욥기를 신학적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중세기의 윤리신학과 수덕신학의 기초를 놓은 보고가 됐다. 또한 수도생활을 촉진시켜 많은 수도원을 건축하는 한편 선교와 개혁에 수도사들을 첨병으로 삼았다.


또한 성직이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생각한 그레고리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세계교회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자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하느님 종들 중의 종'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이 표현은 로마주교들이 가장 즐겨사용하는 표현이 됐다.


그레고리오는 전례분야에서도 당시 미사를 개혁하고 미사전문을 오늘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각 지방에서 제각기 불려지던 성가들을 재정리해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허약한 건강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한 신심깊은 수도자요 탁월한 정치가였던 그레고리오 교황의 14년간의 재위는 역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 위대한 시간으로 세계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신문, 2001 8 5, 김상재 기자]

 

 

 

[새로 보는 교회사 14]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의 교회

구본식

북방민족들의 약탈로 말미암아 야기된 중세 초기의 혼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 혼란은 그야말로 교회 안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큰 문제를 초래했는데, 먼저 칼 대제 이후 권력에 공백이 생겨 이탈리아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교황직이 문란해진 것이다. 황제의 보호로 지켜져 온 교황직이 이탈리아 귀족들 마음대로 선출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 황제들이 야만인들을 평정하고 제국을 정비하고 나서 이탈리아로 내려와 이 문제에 대하여 간섭하면서 교황직은 안정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는 그레고리오 개혁시대(1059~1123)의 교회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레고리오 7(1073~1085)의 이름을 빌려오긴 했지만, 실제로는 1046년의 ‘수트리(Sutri) 공의회’ 때부터 독일인 교황들이 시작하여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이후까지 지속된 모든 개혁을 일컫는 말이다. 개혁은 크게 교회 밖(외부)의 문제와 교회 내부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 밖의 문제는, 서임권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고유권한인 성직임명에 관한 문제이며, 교회 안의 문제는, 바로 교회법과 교회의 행정부재로 생긴 성직매매와 사제 독신제 문제였다.

 

 

서임권 투쟁

 

11세기 유럽은 여러 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인구는 증가했으며 지리적으로도 확장이 되었고 도시가 형성되는 한편,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생산이 증대하는 등 전반적으로 사회가 향상되는 시기였다. 이 무렵 하느님의 왕국을 지상에 확립하고자 하는 이상을 지닌 교황이 나타났다.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확고한 신념으로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교회 안팎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가 품은 기본적인 질서구도는, 세상의 구원이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한테 주신 사명으로 교회가 이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황들은 왕이나 제후들이나 교회의 주인들이 성직을 서임하는 것에 반대하여 투쟁했다. 사유 교회 제도 개념에서 출발했던 이 평신도 성직 서임은, 바로 교회의 자유에 직결되는 문제였고 아울러 여러 가지 영적 폐단의 원인이 되는 본질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관계에서만 성직이 주어진다면 교회의 영적 임무는 등한시되는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맞상대가 된 사람이 하인리히 4(1056~1106)였다. 하인리히 4세는 아홉 살 때 황제위에 올라 한동안 어머니의 섭정 하에 있다가, 1065년 열다섯에 직접 통치에 나선 젊은 군주였다. 이 젊은 통치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였고 주변의 자문위원들이 제공하는 처사 역시 현명하지 못하여 교황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관계는 서임권 투쟁이라고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권(Sacerdotium)과 속권(Imperium)의 대립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세기 전반에 걸친 통치자와 교황 사이의 알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제나 세속의 통치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 안에서 모든 법적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고 생각하여 교회 내의 문제까지 간섭하려고 한 반면, 교황은 하느님께로부터 베드로한테 주어진 권한이 교황한테 있으므로 세속의 통치자도 교황한테 순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이러한 생각은 1075년경에 발표한 ‘교황훈령(Dictatus Papae)’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훈령은, 교황은 누구한테도 재판을 받지 않으며, 황제와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서약을 비롯 충성 서약을 해제할 수 있으며, 또한 황제까지도 폐위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천명했다.

 

이 같은 영적 권한과 세속권한의 대립은, 오토 1세 때부터 많이 생긴 고위 성직자들이 국가의 직책에 취임하면서 발단되었다. 특히 주교 영주는, 주교이면서 영주였기 때문에 그 임명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주교의 임명을 평신도한테 맡길 수 없었고, 황제는 자신의 권력기반인 영주 임명권을 다른 이한테 내어줄 수 없는 권한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대립이었다. 크게는 주교 영주에 관한 일이었지만, 작게는 모든 사유 교회제도에 넓게 퍼진 교회직의 자유로운 선출과 임명 문제였다. 이 투쟁은 길고도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의 조직과 자유를 재정비하는 커다란 개혁으로 교황의 권력이 모든 나라에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혁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개혁된 수도회 사람들이었다.

 

 

성직 매매(Simonia)

 

‘그레고리오 개혁’은 레오 9세 교황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레오 9세 교황은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혼란된 시대에 나타나 만연하고 있는 폐단들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공의회를 통해 교회법이 선포되었고, 여러 교황들은 이 교회법이 시행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여러 폐단 가운데서 특히 강조된 사항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것과 사제 독신제 의무 준수’였다.

 

일단 여기서 성직매매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분석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기록으로 대할 때 과연 얼마만한 숫자가 폐단에 젖어있었는가 하는 건데,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먼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이야기되는 것은 당시의 특수한 사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제없이 사는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지만, 세금을 훔친다든지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는 온 세상을 덮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것은 사과 백개 중에서 스무 개가 썩었다면 이때 스무 개는 아주 많은 숫자가 된다. 그런데 백 개의 사과가 다 썩고 스무 개만 남았다면, 이 스물이라는 숫자는 아주 적은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따라서 폐단을 이야기하면서, 사과가 많이 썩었다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단순하게 백 개가 다 썩은 것처럼 쉽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직매매(Simonia)라는 말의 정의는 성스런 것을 돈이나 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은 전체 역사를 통하여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있었지만, 10세기부터 11세기에 특히 많았다. 성직매매에는 성직자가 교회직무를 얻기 위해서 돈을 주는 ‘사는 시모니아’가 있고, 성직자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돈을 내게 하는 ‘파는 시모니아’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파는 시모니아’의 폐단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1) ‘사는 시모니아’

 

주된 원인은 바로 평신도의 성직 임명권에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관례로 세속의 주인이 성당을 소유하게 되면 그 성당에 속한 다른 재산이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토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당의 직무를 줄 때도 토지나 방앗간 책임자 자리에 자신의 신하를 임명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때 생산이 있는 곳의 책임을 받으면서 얼마간의 돈을 내기로 약속을 하게 된다. 성당의 직무를 받으면서도 똑같이 돈을 내기로 약속한다면 바로 이것이 ‘사는 시모니아’가 되는 것이다.

 

교구를 얻는 데 돈을 내는 관행이 생겨난 때가 대체로 10세기 말경에서 11세기 초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압보네 수도원장이 “평신도가 교구를 파는 듯한 저런 관행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고 탄식을 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자제가 많아지면서 영지가 있는 주교직을 억지로라도 얻어내고 싶어할 때라든지, 교구가 비었는데 후보자가 많을 때, 돈을 내고서라도 교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생긴 관행으로 보인다. 교구를 파는 현상은 문서상 나타나나 본당이나 경당의 직무에 관한 문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는 아주 사소한 일로 여겨서 문서를 남기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11세기, 모든 사람한테 주인이 있는 봉건제가 정착이 되고 나서는 하급 성직자들이 농지가 딸린 성당의 직무를 얻어야 할 때 돈을 내는 관행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상황이 지방마다 다르고 영주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였겠지만, 어떻든 이같은 일은 개혁이 되어야 했다.

 

(2) ‘파는 시모니아’

 

만일에 교회 직무를 얻기 위해서 돈을 내었다면, 일반적으로 그 돈을 그 직무에서 회수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게다가 바쳐야 하는 돈이 엄청나게 많아 성당에 딸린 농지에서 나오는 소출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경우라면 교회직을 수행하면서 돈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영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서 또 커다란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이런 성직임명에도 많은 돈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아주 컸다. 따라서 ‘사는 시모니아’로 직무를 얻는 경우에 대개는 ‘파는 시모니아’를 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주교가, 선발된 주교 후보자에게 주교서품을 거행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경우 돈을 주지 않으면 주교서품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돈을 주고 주교서품을 얻었다고 한다면, 돈을 요구한 사람이 나쁜지 돈을 제공한 사람이 더 나쁜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성스러운 주교서품에 돈이 오고 갔다는 사실 자체가 시모니아인 것이다.

 

주교들이 사제서품이나 부제서품 등을 하고 돈을 받았다는 사료는 몇 가지 발견되고 있으나, 일반 사제들이 본당에서 활동하면서 ‘파는 시모니아’를 하는 형태에 관해서는 기록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의회 등에서 계속 시모니아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쳐야할 큰 폐단으로 비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95년의 ‘트리부르 공의회’에서는 신자들이 스스로 내는 헌금이 아닌 것으로서, 유아세례 때나 장례예식을 거행하면서 신자들한테 일정금액을 내게 하는 일은 복음정신에 위배된다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3) 넓은 의미의 시모니아

 

11세기에 들어와서 교회법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시모니아의 정의를 더 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 같은 해석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집에서 유래하고 있다. 즉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어떤 선물이나 혜택을 생각해서 수행하게 되는 모든 행위를 시모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서 윗사람의 호의를 기대해서 한 행위이거나 심지어는 말로 찬사를 기대하고 하는 행위들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당시 평신도의 성직임명과 봉건제의 상황 속에서 시모니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뿌리뽑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성당의 주인이 평신도라면 그한테 직무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주인한테 충성서약을 해야 했고, 충성서약을 한 성직자는 더 이상 하느님만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신하도 되었기 때문에 그 주인한테 여러 가지 봉사를 해야만 하였다. 또한 이런저런 봉사를 주인한테 잘하는 사람은 더 크고 높은 직무를 받게 마련이므로, 근본적으로 교회가 성직임명에 대해 자유를 갖지 못하면 시모니아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개혁’이 교회의 자유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한다면, 시모니아 역시 교회 안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뿌리뽑아야 하는 폐단이었다. 이런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수도자들이 적격이었으니, 바로 개혁된 수도자들이 교회가 주는 특전을 가지고 시모니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 ‘사제 결혼’은 다음 호로 미룬다.

 

구본식/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신부

 

[경향잡지, 1995 2월호]

 

[새로 보는 교회사 15] 교회 개혁기에 나타난 은수생활

 

구본식

 

 

문란해진 독신제

 

긴 박해가 끝나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서 정결을 찬양하며 금욕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정결의 덕이 부각되면서 성직자들은 금욕에 대해서 찬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독신이 가장 좋다는 교부들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결혼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처음으로 사제 독신제를 의무화한 것은 306년 스페인의 엘비라 지방 시노드에서였다. 이 시노드에서 그 지방 성직자들은 독신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모든 성직자의 의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로마제국의 행정과 법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독신생활의 정신과 법이 대체로 잘 지켜졌다.

 

성직자 독신의 근거는 교부들의 저서나 전례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대략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성체성사를 통한 자녀 생산의 영적 아버지상()과 고해성사를 통한 영적 중개자로서 그 역할에 적합하고, 둘째, 다른 사람에게 절제된 생활과 순결을 가르칠 때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구약의 사제직과 같이 성체성사의 사제직 역시 고귀하므로 정결하게 자신을 유지해야 하며, 넷째,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이이가 때문이며, 다섯째, 육적인 아버지가 된 사람은 복음선포에 알맞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 지켜지던 독산제가 10세기와 11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부분이 해이해졌다. 그 첫 번째 원인은 사회혼란에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사회문명이 변질되어 사회규율이나 현상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봉건제와 사유교회 제도로 인해 평신자들이 교회를 소유하고,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는 따위가 독신생활이 문란해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이 미비했다든가, 성소가 없는 이들을 교회직무에 임명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고, 결혼한 사제가 성무집행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나 가축을 치는 등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입고 먹고 살 방도가 없었던 상황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교회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 단순히 성직자가 여자를 거느렸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긴 자식들 또는 교회의 재산관리, 거기서 생기는 사목의 공백들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에도 교회규율을 어길 때 주어지는 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벌을 적용시킬 수 있는 권위와 힘이 부족하다는 게 또한 문제였다. 경건한 주교들이 시노드를 열어 사제직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근본적으로 성직임명의 권한이 평신자들에게 있어 법을 지키도록 할 권위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레고리오 개혁의 핵심요인은 바로 교회의 자유였다. 교회가 자신의 고유임무인 복음전파를 하려면, 우선 교회 지도자들인 성직자들 임명에 대한 자유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 교황들이 교회쇄신 시노드를 열어 교회 안의 문제로 사제들의 윤리생활을 바로잡으려는 데에도 바로 이런 뜻이 있었다. 개혁의 시발은 독일제국의 안정과 교회의 안정을 바라는 훌륭한 독일황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교황들의 개혁의지를 따라준 사람들은 바로 다름아닌 개혁 수도원들의 수사들이었다. 특히 그레고리오 개혁과 동시에 나타난 새로운 정신의 수도생활이 생성되어서 전통 수도원의 형태와 아울러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쇄신을 위해 열성을 다하여 노력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1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은수생활은 바로 그 개혁의 의지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은수생활의 부흥

 

은수생활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였다. 그들은 외딴 움막이나 동굴 또는 숲속이나 산중턱에서 살았다. 이들 은수자들은 완전히 고립된 지역에 외따로 떨어지거나 또는 어떤 움막에서 동료들과 모여 살면서 지속적인 기도와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예언도 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는데, 이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들의 기행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때로는 도시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회개를 권하고는 다시 산이나 숲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일정기간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동기도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수도원을 떠날 때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정신과 활동은 황제들의 교회개혁과 선교정책과 맞아떨어져 황제 오토 3세나 하인리히 2세의 보호를 받았다. 황제들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슬라브족의 선교에 나서기를 청하였는데, 이 은수자들이 바로 선교사가 되었고 선교지에서 순교하는 순교자들이 되었다. 은수자들의 정신은 바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정신과 일치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성인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두 분 성인을 소개해 본다.

 

 

성 로무알도

 

성 로무알도는 라벤나 공작가 출신으로, 라벤나 근처의 베네딕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은수자 생활을 하다가 카탈로니아의 한 수도원장을 만나 그의 수도원에서 몇 년을 지냈다. 거기서 은수자의 대부들의 생애를 공부하고 특히 카시아노의 저서를 읽고서 은수생활의 형태를 정리하면서 일종의 규칙을 만들게 되었다. 그에게 은수생활은 수도생활의 완성이었다. 수도원과 은둔처는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하고, 수도원에서 얼마간의 수련기를 끝낸 수도자들은 은둔처에서 더욱 엄격한 침묵과 고행, 기도생활을 하도록 했다. 은수자들은 서로 떨어진 자기만의 움막을 가지고 살면서도 식생활은 공동으로 하였는데, 그 음식도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먹었다.

 

이런 원칙 아래 로무알도는 라벤나 등지에 수도자와 은수자들이 섞인 조금은 무질서한 집단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합집단이 많아지면 그곳에 장상을 임명하고 다른 곳에 가서 같은 집단을 만들곤 하였다. 1027년경에는 주변의 주교들의 도움으로 카말돌리에 은둔처를 만들고 이곳에서 다른 은둔처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로무알도 성인은 클뤼니 수도원처럼 여러 나라에 같은 체계의 은수생활을 퍼뜨려 영향력이 지속하는 체제를 마련했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후계자 베드로 다마아노의 힘이 컸으니, 그는 로무알도 성인의 방식대로 은수생활을 하였고, 로무알도 성인이 죽은 뒤에는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이 성직자들의 쇄신과 교회쇄신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힘썼다.

 

 

성 요한 구알베르토

 

성 구알베르토의 생애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로 일관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 시대에 산 분으로 교회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도 성 로무알도처럼 처음 수도원 생활은 실패하였다. 피렌체 근처의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성직매매를 하는 사람이었다. 구알베르토는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그곳을 나와 진정한 수도원을 찾기 위한 순례생활을 하였다.

 

그 뒤 성 로무알도가 세운 카말돌리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공동생활과 은수생활이 혼합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온다. 그때 은둔처의 장상이 그한테 새로운 수도체계를 세워보기를 권하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1037년에 성직매매(Simonia)와 니콜라이즘(Nicolaism ; 아마도 요한묵시록의 17장의 탕녀에 대한 심판에서 유래하며 성직자들의 여러 가지 폐단 즉 과음, 화려한 의상, 노름과 여자 거느림 따위를 총체적으로 말한다.)을 추방하려는 은수자들이 모인 발롬브로사였다. 여기서 교회를 정화하고자 쇠퇴한 수도원을 뛰쳐나온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 1049년에 그들의 책임자가 된다. 발롬브로사의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부들과 성 바실리오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었다.

 

교회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여러 개혁가들과 연대해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거였는데, 당시 성직을 매매하는 피렌체의 주교와 투쟁하여 그를 몰아내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성직자들이 교회법 안에서 살도록 독려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규율에 따라 살도록 성직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공동체로 살면 시모니아와 니콜라이즘에 빠진 사람들한테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을 주변의 주교들이 받아들여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발롬브로사의 새로운 체계는 교회 개혁운동의 일환이 되었고, 개혁 교황들이 따르고자 하는 본이 되었다. 구알베르토는 수도원 체계와 영성과 교회 안에서 수도원의 역할들을 바꾸었으나, 원칙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입각한 생활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침묵과 고행 생활을 하며 사목생활을 피했다. 그들은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가난과 혼인한 사람처럼 생활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아주 형편없는 집에서 살고, 옷은 지독하게 남루하고, 먹는 것은 너무나 부실하였으며 수입이라곤 전연 없이 육체 노동을 하며 살았다. 이런 엄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시험을 거쳐 이 시험기간이 지나야 수도자로 받아들여졌으며 수련자의 자리는 없었다. 발롬브로사의 수도자들이나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은 서원하지 않은 봉사수사의 도움없이는 자신들의 고행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들 봉사수사들이 필요한 물품구입이나 수도원의 물건을 파는 일 따위로 세상과 교류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성 로무알도는, 여러 은둔처가 독자적으로 지내면서 똑같은 위치에서 자율적으로 살면서 서로를 구속하는 것은 사랑에 따른 이유에서만 용납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성 구알베르토는 자신의 사후에는 오직 이 사랑의 구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발롬브로사를 모() 수도원으로 하여, 발롬브로사의 수도원장이 전체 예속 수도원의 목자나 판관 또는 장상이 되며, 해마다 전체 수도원의 장상이 모이게 하였다. 또한 일년에 몇 번씩 모()수도원이 예하 수도원을 방문하여 모든 수도자들이 관습을 잘 지키는지 사목하게 하는 법적 체계를 만들었다.

 

사회의 혼란으로 생긴 교회법의 문란과 사람들의 욕심으로 생긴 잘못된 체제는 개혁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 특히 개혁 교황들과 주교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들의 뒤에서, 밑바닥에서, 후원한 이들은 바로 수도생활의 개혁가들이었다. 이때 비로소 여러 가지 교회영성과 수도정신이 쇄신되고 새로운 제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구본식/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신부

 

[경향잡지, 1995 3월호]

 

[새로 보는 교회사 27] 수도생활의 쇠퇴와 개혁기 (1)

 

구본식

 

 

역사가 발전하면서 사회환경도 많이 달라져 긍정적인 변화도 있고 부정적인 쇠퇴도 있기 마련이다. 수도생활도 시대에 따라서 그 변화가 다양하다. 일방적인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14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는 교회의 시련기인 동시에 혼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련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 이른바 ‘종교개혁’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시련기는 바로 수도생활의 쇠퇴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쇠퇴하는 과정에는 당연히 쇄신을 위한 노력이 따르지만, 주위 여건과 이제까지 만들어진 제도와 법과 축적된 관행 따위가 쇄신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쇄신을 어렵게 하는 사회요인으로는 외적인 요소도 있고 내적인 원인도 있으며, 정치 사회 경제적인 변화도 요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정신의 변화와 수도원 내부의 요인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각 수도원의 특수한 사정이 원인인 경우도 있어 어떤 것이 결정적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동시에 수도원이 쇠퇴하는 데는 사회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쇠퇴의 원인이 되는 역사적인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우선 외적인 요인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흑사병

 

1348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상업의 교역로를 따라서 유럽 전체에 확산되었다. 이는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경제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흑사병의 창궐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감염되면 별다른 치료 없이 한적한 곳으로 요양을 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상황에서 수도원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부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는 140명의 수도자들 가운데 겨우 일곱 명만이 살아남았다.

 

흑사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나 수도원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렇게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나 밖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게 되었다. 따라서 흑사병이 지나가고 난 뒤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는 이전의 조직이나 규칙을 재건하기가 어려웠다. 흑사병의 재앙은 국가나 교회의 전반적인 체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사회변화를 가져왔다. 수도원에는 그 여파가 오래갔는데, 규칙과 조직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충된 지원자들의 자질저하로 인한 것이다. 동시에 흑사병으로 생성된 세속주의가 수도원에도 침투되어 수도정신의 재건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

 

14세기에는 기근이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1315년의 대홍수로 인해 극심한 흉작이 있은 뒤에도 여러 차례의 홍수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사람까지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기근이 심한 상황에서 유럽의 또 다른 재해는 바로 전쟁이었다.

 

14세기초부터, 봉건제도에서 절대 왕정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간의 전쟁을 비롯하여 독일의 제후국들간의 전쟁이 유럽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8~1453)과 영국의 두 가문간에 벌어진 장미전쟁(1455~1485) 따위가 잇따랐으며, 이런 와중에 오스만터어키가 1354년부터 발칸 반도에 상륙,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 봉건제후들이 몰락하고 왕권은 신장되었지만 수도원들은 바로 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쟁은 군인들만의 싸움이 아니고 보니, 농토는 황폐해지고 약탈로 가축은 도살되는 등 전장에 속하는 지역은 직접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약탈의 대상이 되는 곳이 바로 수도원인 동시에, 수도자들은 어느 한편에 가담하는 군인이 되어야 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우연하게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게 된 사건이 중세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교회일치를 해치는 한편, 교회와 수도원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대분열의 시대를 가져왔다.

 

아비뇽에 교황청이 머물게 된 동기는, 보르도 대주교 출신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클레멘스 5(1305~1314)가 언젠가는 로마로 갈 생각이었지만 프랑스 왕과의 관계, 그리고 비엔느(Vienne) 공의회(1311~1312) 준비와 그 참가 문제로 교황청의 땅이었던 아비뇽에 머물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교황이 로마로 귀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게다가 프랑스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이탈리아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교황령 국가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로마에서는 프랑스인 교황에 대한 반대시위가 있어 교황청은 프랑스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비뇽에 계속 머물게 된다. 1377년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하기까지 70년 동안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게 되는데, 아비뇽에 교황이 있는 동안에 백년전쟁이 일어나고 흑사병이 창궐했으며 기근이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경제 사회 변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전세계 교회를 이끌어나갈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의 생활과 조직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동시에 독일지역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교회는 성직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들의 교회”라는 평신도주의가 나오게 되니 교황청의 권위 자체가 실추되기에 이른 것이다.

 

교황이 아비뇽에 머무르는 동안에 교황들은 행정적인 능력도 있고 개인적으로 신심도 있었으며 권위도 있어서 나름대로 나쁜 상황을 잘 헤쳐나갔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프랑스 왕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추기경단이나 교황청의 주요 자리를 거의 프랑스 사람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자 다른 나라 백성과 교회가 보기에는 교황청이 마치 프랑스 국가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대분열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의 지혜로운 노력과 기도로 드디어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1377년에 로마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교황도 로마에 온 지 14개월 만에 서거하여 분열의 조짐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잇는 교황선거에는 열여섯 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다. 이 추기경단은 이탈리아인 네 명과 스페인 추기경 한 명 그리고 나머지 열한 명이 프랑스인 추기경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로마인 교황을 원했고 적어도 이탈리아 사람이어야 한다고 시위하고 있었다. 이에 추기경단은 이탈리아인이면서 아비뇽에서 오랫동안 일한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holomeo Prignano)를 선출하였다. 이때 상황을 잘 모르는 로마인들이 바티칸을 습격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이 선출된 것을 알고는 추기경단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동의 아래 교황에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르바노(Urbano) 6세 교황은 화해와 타협보다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기경들의 특권을 없애는 등 추기경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이탈리아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다섯 달 전에 있었던 교황선출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닌 위협 속에서 선출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왕의 보호 아래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에 이른다. 클레멘스 7세라고 이름 지은 또 다른 교황이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을 거처로 삼았다. 따라서 양쪽 교황은 유럽 전체에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반대편은 모두 파문시켰다. 모든 나라들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면서 교회가 갈라졌고 정통 교황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두 갈래의 교황선출이 이어지면서 39(1415) 동안 지속되기에 이른다.

 

대분열의 시기에 교회가 받은 타격은 무척 컸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의회를 여러 차례 열었고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 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가 싹텄으며, 교회 안에서 국가의 이해를 먼저 생각하는 국가주의들이 형성되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조직이 두 파로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수도생활에도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몽세라(Montserrat) 수도원에서는 로마 편인 수도자들과 아비뇽 편인 아바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코르베이(Korvey)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이 갈라져서 각각 자신들의 아바스를 선출하여 두 아바스가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이렇게 각 수도원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여 다른 편의 권위는 무조건 무시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은 쇄신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편이든지 자신들은 정통 교황한테 인정을 받았고 다른 펀은 비정통 교황이기 때문에 장상이라도 권위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한 수도원에서도 원장과 부원장이 서로 다른 편이 될 정도로 그 혼란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대분열의 혼란 속에서도 적절한 쇄신을 지속시켜 나간 수도원도 있었지만, 수도생활 정신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구본식/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

 

[경향잡지, 1996 3월호]

 

[새로 보는 교회사 28] 수도원의 쇠퇴와 개혁기 (2)

 

구본식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교회는 외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었다. 흑사병과 전쟁 그리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와 교회의 대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에 알아본 이런 현상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역사를 분석해 간다면 사회혼란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사상과 사회풍조의 변화로 이에 따라 의식과 경제체제도 바뀐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의 변화는 13세기부터 발달한 대학들이 주도하고 이전까지 학문세계를 주도한 스콜라 학문과 상치되는 학문들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수도생활과는 먼 거리의 간접원인이므로 여기서는 사회풍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좀더 거론하기로 하겠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발을 했다. 고전 고대(그리스 · 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다시 살리는 활동에서 출발하여, 모든 학문과 사회구조 정치체제의 변화를 겪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모든 운동을 지칭한다. 이 운동의 사상을 인간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라고 하고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휴머니스트)라고 한다. 이들은 고전을 연구하고 비판정신을 가진 당시의 지성인들로서 부호들이나 왕가 특히 교황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르네상스기의 풍조는 이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현세의 삶을 추구하고 향락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에 돈과 권력을 탐하는 현실적인 삶을 선호했다. 동시에 중세의 공동체 정신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르네상스기의 교황들은 이런 풍조를 즐기고 문예를 후원함으로써 고전을 모으고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도 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 많은 돈을 허비했다. 유럽의 아름다운 관광지의 많은 분수와 대성당들이 바로 이때에 지어진 것이다.

 

이렇듯 사회풍조가 사람을 중시하고 사치를 즐기고 향락을 추구하게 될 때는 자연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경제혼란

 

사회풍조가 부를 추구하고 축적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교회 사람들도 이런 풍조에 깊게 물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지위는 더 많은 수업을 올릴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는 전체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차츰 화폐경제가 이탈리아에서부터 전유럽에 확산이 되면서 교회는 경제적인 혼란을 겪는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본당이나 수도원이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농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공산품의 가격은 상승하는 반면에 농산품의 가격은 제자리 걸음이거나 상대적으로 값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수도원들은 이러한 경제혼란의 와중에서 물방앗간이나 곡창이 파괴되고 수도원 소속 농기들마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영적이고 지적인 생활에 관심을 쏟기 이전에 재산관리와 수도원 유지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의 경제를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수도원이 봉건제와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동산이 많은 수도원 원장직에 귀족의 아들을 임명하도록 하였고, 성소가 있어서 원장이 된 것이 아닌 이들은 가난 서원을 지키지 않았다. 자연히 가난한 삶을 살지 않았고 봉쇄구역도 지키지 않았다. 수도원의 수입은 이들 원장들이 나누어가졌고 다른 직무자들도 수입을 챙기게 되니 자연히 영적 생활은 뒷전이고 물질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명의원장 제도

 

15세기에 수도원이 쇠퇴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명의원장 제도였다. 이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의 쇄신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명의원장 제도는 그레고리오 개혁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세속 제후의 간섭과 지방 주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유력한 교황청의 주교나 추기경을 명의원장으로 모신 제도였다. 다시 말해 수도원의 자유를 위한 방패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 제도가 이제는 경제적인 수입을 위한 제도로 바뀐 것이다. 특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기고 난 후에 아주 많이 확산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이 없어진 추기경들이나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일하는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서 명의원장 제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문제는 더 확산되어서 왕들도, 왕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영주들까지도 수도원의 수입을 다른 사람한테 보장받기 위해서 이 제도를 사용했다. 교회의 고위직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이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대분열 시기에는 교황들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서 수도원의 수입을 보장해 주는 이 제도를 많이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이 제도는 수도원에 살지 않는 사람한테 수도원장 직책을 주는 것으로, 주로 주교나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가 있었으나 차츰 평신자들한테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이들은 원장 직책을 가지고 평생 동안 수도원의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생활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 필요한 수입만 챙기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하다 보니 수도원이 피폐해지는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수도원은 이들 명의원장이 임명한 책임자가 관리를 하였지만 수도원을 영적으로 이끌 만한 권위가 부족했다. 명의원장이 원래의 직책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살게 되는 경우 가끔 수도자들을 혹사시키기도 하였다.

 

15세기 말경에 와서는 평신자 명의원장들이 수도원 한편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봉쇄구역이 무색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거주지에서 파티를 열고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그 수도원의 내적 생활이나 봉쇄생활은 자연히 느슨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베네딕토 12(1334-1342)는 칙서를 반포해서 수도원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시토회 수도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을 가난 정신으로 쇄신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그것은 귀족이나 명의원장들이나 이미 고기맛을 본 수도자들이 육식을 금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베네딕토 12세는 수도자들의 교육에 힘을 쓰면서 수도원의 재산관리를 위한 제도를 제안했다. 즉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수도원들을 지역으로 묶고 참사회를 통해서 중앙집권화하는 제도였다. 3년마다 지역 참사회를 열고 여기서 모든 수도원의 재정을 감사하고, 또한 참사회에서 선정한 사람에게 순회감사를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12세 교황의 이 제안이 바로 효과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개혁을 위한 노력의 한 방안으로 남아, 15세기 중엽에 이탈리아의 개혁 수도원들은 바로 수도원 연합체를 구성해서 명의주교를 없앨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파도바 지역의 수도원들이 연합을 구성하고 각 수도원의 장상들이 참석하는 참사회를 해마다 열고 원장들이 해마다 수도원을 돌아가면서 지휘할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도 수도원을 서로 바꾸어 살게 함으로써 명의주교의 한 수도원 지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 시기에 구체적으로 부패가 어느 정도였냐고 궁금해 한다. 윤리적으로는 어떠했으며 하는 따위로 말이다.

 

그러나 누가 수도원에 살면서 재산을 어떻게 모으고 여자 관계가 어떠했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첫째 자료가 부족하고 구체화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만 14세기 15세기의 경제적인 변화와 사회상황과 세상풍조가 바뀌면서 수도생활이 전반에 걸쳐 제자리에 있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수도원들이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면 동시에 또 다른 모든 상황과 함께 쇠퇴기를 겪고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명문 수도원

 

독일지역은 명의원장 제도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다른 현상이 수도정신을 희석시켰다. 즉 명문가의 자녀들만 받아들이는 수도원이 생긴 것이다. 당시에 명문가들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은 수도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따라서 성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가문 때문에, 아니면 부모의 명에 따라서 수도생활을 하는 경우가 생겼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진정한 성소를 바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수도생활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당시 여자 수도원은 숫적으로 남자 수도원보다 월등히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수녀들은 사회에서 가문으로나 재산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집 출신이었다. 성소가 있어 수도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가문을 빛내기 위한 수단으로 수도원에 들어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구본식/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경향잡지, 1996 4월호]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1 -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폐단에 맞서 엄격한 수덕생활

 

 

http://pds.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100&maingroup=1&filenm=%BC%BC%B0%E8%B1%B3%C8%B8%BB%E7100%B4%EB%BB%E7%B0%C7%5F41%2Ejpg<사진말>

파괴된 클뤼니 수도원 : 프랑스 동부에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위그노 및 프랑스 혁명 폭도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일부 벽과 기둥, 주춧돌만 남아있다.

 

 

영주제로 재편되는 중세 사회의 복잡한 발전과정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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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걸쳐 왕이나 세력가들은 자신의 세력유지 수단으로 성직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봉토를 사여 했다. 또한 당시 교육과 학문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으며 귀족 출신들이 성직에 대거 참여했다. 이처럼 높은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 막대한 부를 지닌 고위 성직자들은 일찍부터 국가로부터 정치적 특권을 얻었다. 세금이 면제됐고, 치외법권이 허용됐으며 재판권까지 행사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시장, 화폐 제조권, 관세의 권리 같은 경제권마저 갖게 돼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완전히 제후화 됐다.


이렇게 교회가 봉건화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중세의 종교생활은 그 질이 떨어졌다. 주교나 수도원장이 제후를 겸직하는 상황이 교회의 종교적, 선교적, 문화적 사업을 쉽게 이행하게 하는 잇점도 있었지만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는 어두운 면이 더 많았다.


과도한 궁정과 국가직무로 인해서 사목적 직무를 멀리하게 되고 제후로서 싸움터에도 나가야 했다. 교회 직위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클수록 왕과 영주들은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했으며 교회법적 선출 대신 사사로운 임명을 공공연히 했다. 몇몇 영주들은 평신도를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했고 무자격자, 심지어 소년을 임명하기도 했다.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평신도가 처자식을 거느리고 수도원 안으로 들어 올 정도였으니 그 폐해는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었다. 봉건제도 아래에서 성직자의 규율과 도덕은 해이해지고 신앙생활 수준은 크게 떨어졌으며 사회에는 미신이 팽배해졌다. 이런 가운데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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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는 내부적으로 자기쇄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유능하고 개혁적인 교황들이 나와 교회의 위신과 권위를 높였다. 이와 같은 쇄신운동은 교회의 자주성 회복으로 이어졌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교황은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 황제와 분쟁을 겪어야 했고 이단과 이교와의 싸움을 해야 했다. 2세기 동안의 십자군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0세기 말과 11세기 초의 교회쇄신운동은 산만하고 비조직적이었으나 11세기 초부터는 교회 개혁이 틀을 갖추고 13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교황권은 우위를 확보하게 됐고 교회는 스콜라 신학, 고딕 건축 등 중세문화의 중심이 됐다.


교회의 개혁에 가장 앞장 선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세상과 격리된 채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던 수도사들의 공동체였으므로 정치적 세력 관계에 연루돼 있던 주교나 교구 성직자들과 달리 비교적 교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수도자와 수도원의 자각에서 기인한 이 교회쇄신운동은 종교적 윤리적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파급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의 성공비결은 수도원이 세속군주나 제후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이 910년 부르군드 클뤼니에 세운 것이다. 9세기 교회의 쇠퇴가 수도원이 유력인사들에 예속된 탓이라는 자각을 가진 빌헬름은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세속이나 성직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설립 승인장에는 첫째,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신자들의 자유로운 희사로 하고 봉건적 의무를 지지않을 것이며 둘째, 수도원장의 선거권은 수도사가 가지며 셋째, 교황에 직속하고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며 넷째,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할 것 등이 명시돼있어 강렬한 개혁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클뤼니 수도원의 책임자는 회원들이 선출했으며 교황 이외의 어떤 세력자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았다. 비록 왕이라해도 수도원을 해산시킬 수 없었으며 수도원의 토지는 봉토가 아니었으므로 몰수 할 수 없었다.


바깥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 클뤼니의 수도사들은 베네딕도 규칙서를 엄수하며 침묵 가운데 엄격한 수덕생활을 영위했다. 기도를 통한 다른 수도원들과의 형제적 단결, 전례를 통한 그리스도교회와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는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생활의 심화를 이끌어 냈다.


교회의 본질적인 힘인 영적 생명력을 통해 교회의 쇄신을 내부로부터 촉진시킨 클뤼니 수도원은 훌륭한 수도원장들로 인해 더욱 강력한 개혁의 힘을 발휘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성 베르노, 성 오도, 성 아이마르, 성 마졸로, 성 오딜로, 가경자 베드로 등 탁월한 성인 원장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 결과 성 오딜로 원장 시절(994~1048)에는 클뤼니 수도원에 속한 수도원이 2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클뤼니 수도원의 경건함은 프랑스, 부르고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으로 보급됐고 교회생활뿐 아니라 중세사회 전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클뤼니 수도원은 당시 서구의 종교적 심장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중요성은 이후 교황직과 결합하여 성직매매와 사제의 결혼 등 교회의 폐단과 투쟁하는데 있어 촉매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뛰어난 기도생활과 수행생활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클뤼니 수도회가 쇄신을 염두에 두면서 교회의 본질적인 것을 성찰한 후 그것에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클뤼니의 개혁이 짧은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제도 속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교회로부터 진정으로 원하는 것, 기도와 경건한 삶에 대한 목마름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대의 생활이 복잡해진 만큼 교회가 해야할 일도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신자들이 목말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옛날의 지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2 3 3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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